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연쇄살인범이 일기를 쓴다? 의아한 일이었다. 완전범죄를 꿈꿨을 킬러가 발목잡힐지도 모를 빌미를 남겨두다니. 흡사 족적이나 DNA를 현장에 남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설프기 짝이 없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주인공은 얼치키 초짜인가? 아니다! 십대때 폭력가장이었던 아버지를 죽이면서 시작된 살인은 그의 나이 마흔 여섯에 멈추었지만 그동안 그는 잡히지 않았다. 노련했고 냉철한 남자였다. 그런 그가 일기를 쓴다. 솔직하게. 빠짐없이.

WHY?

그의 병명은 알츠하이머. 마지막 살인을 저지를 당시 사고가 있었고 그로 인해 뇌에 문제가 생겼다. 가까운 과거부터 지워지는 병이기에 그는 잠시 전에 무엇을 했는지, 어디로 가려고 했던 것인지,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온갖 기억이 뒤죽박죽되어 있지만 자신이 '연쇄살인범'이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강렬해서 잊혀지지 않았나보다. 그래서 최근 마을에서 다시 연쇄살인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혹시 내가 한 일일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때로는 이토록 잔인하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영화로 먼저 보고 뒤이어 원작소설을 읽은 케이스다. 물론 순수문학도인 친구에게 매력적인 이야기라고 소개를 받은 적 있지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이후 김영하 작가의 책에서 멀어진 상태였다. 당시 절친이었던 또 다른 친구가 홀딱 빠져 지낸 작가였는데도 불구하고 함께 읽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작가의 책을 읽고난 후 많은 것들이 혼란스러웠으므로. 최근 한 예능 방송을 통해 보여진 작가는 생각보다 밝고 위트있는 사람이었다. 급호감이 발동해서 읽을 소설을 고르던 중 <살인자의 기억법>이 떠올려졌다. 그런데 영화가 한 발 빨랐다. 책읽기를 결심한 남 저녁, 충동적으로 영화부터 보고왔다. 더 좋았다. 결말이 다른 두 이야기는 서로에게 윈윈이 됐다. 만약 원작이 묘사가 상세하고 그로인해 문장이 긴 소설이었다면 혹여 상상에 제한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의 문체는 토끼꼬리처럼 짧았다. 문단도 길지 않았다. 한 줄 혹은 서너 줄 일때도 있어서 이 길이로 어떻게 영화  한 편의 이야기 분량이 나왔을까? 책 한 권이 쓰여졌을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작가는 노련했고 또한 영리했다. 과거 연쇄 살인범이었던 주인공의 머릿 속을 옮겨놓은 즉 1인칭의 내레이션이 팔할인 작품이기에 문장은 짧막짧막할 수 밖에 없다. 문장이 곧 그였으므로. 왕년의 연쇄살인범은 냉철하면서도 치밀하며 감정이 배제된 인물이므로. 그의 생각 속 문장이 늘어지거나 길어진다면 그답지 않았을 것이다. 문장의 길이조차 주인공을 대변할 수 있다니....왜 진작 김영하 작가의 책들을 섭렵하지 않았던 것일까.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일관성 있는 독자는 못되는 모양이다. 갈대처럼 흔들리는 독자로 살아온 내게 <살인자의 기억법>은 재미와 반성을 함께 가져다 주었다.

 

>>> story

표면적으로는 전직 수의사였던 일흔의 남자가 실은 연쇄살인범이었던 내면의 비밀을 간직한 채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미 살인은 마흔 여섯에 멈추어졌고 이대로라면 그의 죽음과 함께 미제의 살인사건들은 조용히 묻힐 판이었다. 그런데 천형처럼 그에게 '알츠하이머'가 찾아왔다. 마지막 살인을 저질렀던 마흔 여섯 때 겪은 사고로 조금씩 진행되던 병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죽박죽 섞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지금 혼란스럽다.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부족한 표현력을 보강하기 위해 시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기록이 더 풍성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어차피 등단할 것도 아닌 그가 기록에 더 집착하게 된 것은 또 한 명의 연쇄 살인범과 마딱드리면서부터였다. 자신과 똑같은 죽음의 향기가 나는 사내. 자신의 어린 딸이 표적이 되어 사내의 그물에 걸려 있었다. 지킬 자식이 있는 아비는 용감했다. 하루의 모든 포커스가 놈에게 맞추어졌다. 그 사이사이 병은 빠르게 진행되어 갔고 종종 그를 잊었다. 마주할 때마다 그는 낯선 사람이었다. 그래서 일기를 들춰보며 '그 놈이었다' 각성하곤 했다. 그리고 결말에서 우리는 이 모든 상황의 진실을 함께 목도하고 만다.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일어난 형벌의 끝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