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의 묘
전민식 지음 / 예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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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무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사람의 인생이라 하지만 1970년대를 산 그들의 인생은 발밑 개미 한마리의 그것보다 못했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나 '모래시계'를 시청했을때처럼 가슴이 무거워졌고 머릿속은 더 청명하게 만드는 소설 [9일의 묘]는 그렇게 읽혀졌다.

 

p16  시간이 지날수록 미움이나 증오는 단단해지면 단단해졌지 결코 물렁물렁해지지 않았다.

 

서른의 중범은 '지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비가 봐준 묫자리가 시대의 리더를 만든 후 어딜가나 '황창오'라는 이름이 그의 이름 앞에 꼬리표처럼 붙어 "황창오의 아들"로 불리게 되었지만 운명이 대체적으로 그러하듯 아비와 아들은 소통하며 살지 못했다. 옆구리에 뜨신 밥처럼 아비가 끼고 살던 동생이 아비탓에 치료조차 받지 못하여 죽어버렸고 어미는 집을 나갔고 자신마저 찬밥처럼 키워지자 아들의 마음 속엔 원망과 미움이라는 큰 생채기가 돋아나 버렸다. 자신이 아비가 되어서도 이해할 수 없었던 지난 날의 아비의 모습과 행동.

 

그랬던 그가 홀연히 자취를 감춰 버린 어느 날. 그 아들 중범이 서른이 되던 그 해 결국 사단이 나버렸다.

 

동생 효범과 똑닮아 아비가 양자삼은 도학,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이인 '해명'과 함께 작업들어간 무덤 속에서 그들이 건진 건 금으로 만든 머리가 아니라 '죽음의 그림자'였다. 아비를 그토록 부정하면서도 아비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중범은 무덤을 도굴하며 생을 연명하고 있었는데 처자식이 굶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위험을 감수하며 위험한 일에 뛰어들었던 것. 도학이 물고 온 일거리는 그 아비가 터를 봐준 대통령이 시해당한 그 시점에 파헤쳐졌고 이 일은 두 개의 다른 권력층이 서로 좋은 혈을 차지하고자 하는 이기심에서 비롯되어 이들은 쓰여지고 버려졌다. 소리소문 없이. 빨갱이로 매도된 채.

 

p24 땅은 자존심이 강했다

p83 지금은 악지라해도 훗날 대명당이 될 수 있다는 걸.

 

9일간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누군가는 목숨을 잃어야 했고 또 누군가는 사라져야만 했다. 소설을 읽으며 떠올려지던 영화는 바로 <변호인>. 시절이 수상하던 시기에 정말 잘못걸려서 억울한 일을 당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힘있는 자들에 의해 군화에 의해 짓밟히는 모습들이 똑닮아 있었다. 게다가 두 이야기속 고문관의 모습은 사이코패스적인 악질 그 자체여서 눈으로 읽는 소설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내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을 정도였다.

 

자식의 죽음을 지키지 못한 죄와

죽어가는 동생을 두고도 방의 어둠 속에 앉아

그저 지켜보기만 했던 죄책감의 무게가 같을까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이 신선한 충격이었다면 전민식 작가의 [9일의 묘]는 가슴 한 켠에 뭉근한 멍하나를 남겨놓았다. 이때보다 우리는 한결 더 '야만의 세월'에서 벗어나 살고 있을까. 긍정의 대답을 할 여력이 없다.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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