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사람이란 늘 싸워야하는 거요. 싸울 줄 모르는 인간은 송장이오. 그러나 반드시 저보다 강대한 적과 싸우는 싸움만이 신성합니다. 약자끼리의 싸움이란 언제나 강자를 위한 자멸입니다.
ㅡ손창섭 '인간동물원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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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구절을 만나면 확실히 옛날 작가들의 인식이 굉장히 강렬하고 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래전 어떤 여성 작가의 문학 강연에 간 적이 있었다. 굉장히 명랑해 보이던, 명랑한 작품을 즐겨 쓰던 작가는 객석의 사람들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문단 선배님 들에게 이런 말하면 혼날 테지만 그래도 저는 저희 세대가 윗세대들보다 글을 더 잘 쓴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집으로 들어와 책꽂이에 딱 한 권 꽂혀 있던 그 작가의 단편집을 읽었다.빠르게 몇 편을 읽고 나니 가소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그녀는 문학상 네다섯 개는 휩쓴 문단의 중견이었다.
각설하고, 손창섭의 단편을 새벽에 읽으며 착잡한 느낌에 젖어든다. 이 작가는 인간의 똥창자를 한번 훑어보겠다는 각오로 글을 쓴다. 평론가 유종호의 평에 따르면, 손창섭 소설 속 인물들은 누가 더 불행하고, 얼마나 각자가 더 처절해질 수 있는지 내기를 벌인다. 이것은 얼핏 유희에 가까워 보이지만, 유희라는 이름을 붙이기 민망할 정도로 작중의 상황은 처참하다.
어쩌면 손창섭은 '관념소설'을 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관념소설이란 단순히 현학이나 이념을 늘어놓는 소설을 뜻하지 않는다(이런 건 박상륭의 표현대로 그냥 잡설이다).엄밀한 의미에서 관념소설이란 저자의 확고한 관념에 의해 세상과, 사회와, 인물을 재단하는 소설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손창섭은 그야말로 비극적 인식으로 덧칠된, 모종의 벽화를 쓰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손창섭은 비극적 상황의 나열에만 열중했던 작가는 아니었다(만일 그랬다면 그는 사디스적 변태일 것이다). 그는 타인 모멸을, 그보다 더 심한 자기 부정을 하면서,그럼에도 약자들이 결연한 태도로 강자의 세상과 맞서야한다는 것을 진술한다. 물론 이 진술은 현실이란 격랑 에 휩쓸려 무의미해질 때가 많다. 하지만 그는 침울해진 목소리로, 이러한 진술을 작품의 곳곳에 드물게 포진한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다수의 작가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손창섭의 미덕이다. 그는 자기 부정과 세계 부정을 누구보다 가열하게 시도하면서도 그래도 세상이 사람의 노력으로 바뀌기를 바라는 본인의 신념을, 알게 모르게 표현한다. 재기만 넘쳐서 감각을 탐하는 작가들, 키치나 다름없는 것을 시도하면서 그것을 전위라 외치는 작가들, 자기 명랑에 주저앉은 작가들과는 손창섭은 격부터가 다르다. 적어도 손창섭은, 자기 부정의 극한까지 가서, 인간 세계의 한 '이면'을 발견해려했던 귀한 작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