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제 - Mara, 2018
감독 - 클라이브 톤지
출연 - 올가 쿠릴렌코, 하비에르 보텟, 랜스 E. 니콜스, 로지 펠너
어느 날, 한 남자가 잠을 자다가 죽어버린다. 부인과 어린 딸은 ‘마라’가 나타나 그를 잡아갔다는 말을 하지만, 아무도 그걸 믿지 않는다. 경찰은 단순히 그들이 충격을 받아서 그런가 보다 생각한다. 범죄 심리학자인 ‘케이트’는 사망자가 수면 장애 모임에 참여했음을 알아내고, 직접 가보기로 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마라’라는 악령이 잠자는 자신을 죽이러 올 거라 말하며 공포에 떠는 남자를 발견하는데…….
수면마비, 다른 말로 하면 가위눌림에 대한 공포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 모양이다. 전에도 적었지만, 가위에 눌린 상태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괴이한 형체가 보이기도 한다니 당연히 무서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것을 과학적으로 밝혀내려고 노력하고, 또 누군가는 그것을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수면마비를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다룬 것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은 아마 ‘나이트메어 A Nightmare On Elm Street, 1984’ 시리즈일 것이다. 단순한 가위눌림이라 여겼던 일들이 악령의 소행이었다는 건, 이후 많은 영화에서 차용된 설정이다. 물론 그 누구도 ‘프레디 크루거’처럼 인상적이진 못했다. 그 능글거림과 뻔뻔스러움, 그리고 가학적인 변태성은 이후 등장한 비슷한 설정을 가진 영화 속의 다른 캐릭터들에게 큰 영향은 줬다.
이 작품에서 등장한 ‘마라’도, 어떻게 보면 프레디의 여자 버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레디보다는 기원이 오래되었고, 지역을 막론하고 나타난다는 점에서는 달랐다. 그리고 과묵하고 희생자를 앞에 두고 장난을 치지도 않았다. 좋게 말하면 짧고 굵게 한 번에 죽여준다고 해야 할까?
마라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이유는 죄책감 때문이라고 나온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그에 대해 후회를 하거나 자책을 하고 미안함을 느끼면, 그 부정적인 감정에 마라가 반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라에게 낙인이 찍힌 사람이 있으면, 그 주위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설정이라면, 이런 의문이 든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범죄자라면? 그런 사람에게는 마라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이 한 행동이 상대에게 안 좋은 영향을 주거나 결과가 좋지 않으면, 미안함을 느낀다.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자책하기도 하고,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한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라의 저주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
마라의 저주를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자책할 일을 만들지 않거나, 자책하지 않으면 된다. 즉, 타인에게 무감각한 철저한 이기주의자가 되거나, 서로를 배려하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 심사숙고하고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떤 삶을 살아가면 좋을지는 개개인의 선택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보면, 전자로 살아가는 게 더 편할 것 같기도 하다. 마라가 나타나는 죄책감의 기준이 너무 주관적이어서, 착하게 살면 살수록 희생양이 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