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임레 케르테스 지음, 정진석 옮김 / 다른우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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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레 케르테스의 3부작 가운데 마지막 작품. <운명>과 <좌절>은 전에 독후감을 올렸다. <운명>에선 열네 살 소년 죄르지가 노동봉사대 일원으로 작업을 나갔다가 버스에서 단체 검문에 걸려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가 10개월 만에 부다페스트로 귀환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열다섯 살 죄르지의 일인칭 시점의 눈을 빈 마흔다섯 살 케르테스. 근 삼십년의 세월이 지나, 당시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와 부헨발트에서의 존재를 사색해보는 작품이라, 유대인 수용소를 다룬 소설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던 나치에 의한 잔혹한 장면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독자들은 <운명>을 읽으면서 아우슈비츠에서도 역시 사람은 다만 존재의 문제였다는 것을 조금 밋밋하게 읽었을 수 있다. 삶과 죽음이 머리털 한 가닥 차이로 결정되는 와중에 삶을 이어가기 위한 의지를 잃지 않는 것을 행운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곳에서의 생멸이 운명이라면, 운명이 삶을 지배할 때 그곳에선 자유가 없으며, 자유(즉 선택의 가능성)가 있는 곳엔 운명이란 없는 것임을 자각한다. 그러하여, <운명>은 독자가 책 속의 이런 메시지를 포착하지 못하더라도 열네 살의 죄르지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다시 생환하는 스토리가 있어 색다른 체험기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2부인 <좌절>을 읽으면 좀 복잡해진다. <좌절> 역시 일인칭 시점의 작품이다. 주인공 ‘노인’은 아우슈비츠 생환 후 30년이 지나, 당시의 체험을 책으로 쓰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를 하지만 출판사는 그의 작품을 출간하기를 꾸준히 거절하고 있는 상태. 자신의 경험을 타인에게 설득시킬 수 없는 불통의 상태를 견디다 못해 노인은 결국 현실과 타협해서 현대의 독자들이 읽을 수 있을 만한 소설을 쓰기에 이르고, 그렇게 나온 소설이 작품의 뒷부분이 된다. <좌절>은 앞의 작품 <운명>을 읽지 않으면 노인의 고민, 유대인에 대한 정의, 유대인 수용소에서의 생과 사를 가르는 운명, 운명의 당사자가 받을 수밖에 없는 스트레스 등을 이해하는데 조금 곤란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앞의 작품보다 읽기가 수월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이번에 읽은 3부작의 마지막 작품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는, 읽으면서 이것이 소설인지 아니면 거대한 에세이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사변적이라 전혀 쉽게 읽히지 않는다. 노년의 작가이자 번역자로 활동하고 있는 ‘나’는 유년시절 가부장적 절대 권위를 누리는 아버지로부터의 애정결핍, 부모의 이혼, 기숙학교의 권위주의적인 규율, 아우슈비츠 수용소 체험, 결혼과 이혼을 겪었다. 헝가리의 한 휴양소에서 험악하게 생긴 철학자 오블라트 교수를 만나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질문인 “혹시 당신의 아이가 있나요?”란 질문을 받고 즉각, 본능적인 반발력으로 “아니오.”라고 대답하면서 이 읽기 힘든 소설은 시작한다.
 신에 의하여 특별한 선택을 받은 이 민족에 내려진 축복 가운데 하나가 “생육하고 번성하라”인데 유대인으로, 유대인이기 때문에 경험해야 했던, 유대인 아버지의 가부장적 훈육, 나중에 아우슈비츠의 굴뚝으로 연기가 되어 날아가고 만 유대인 교장에 의한 엄격한 교육과정,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운명에 대한 복종 등은 자신의 복제품 생산에 강한 거부감을 갖게 한 건 아닐까. 한 모임에서 자신이 아우슈비츠 체험에 관해 색다른 이야기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아름다운 유대인 아가씨와 많은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맺어진 후에도, ‘나’를 압박하여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집착하고 있던 것. 제목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주인공 ‘나’가 스스로 만들기를 거절한, 그래서 아이를 낳고자 하는 젊은 아내와 결국 이혼할 수밖에 없었던 인공불임 또는 자의적 불임 때문에 태어날 수 없었던 미지의 자기 아이를 뜻한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해 기도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는 여기서 밝히지 않겠다. 내가 읽은 책은 출판사 ‘다른우리’에서 나왔지만 지금 절판. 그러나 올해 하반기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출간 예정이라니, 미리 결론을 가르쳐드리는 실례를 범하지는 않겠다.
 책은 참 읽히지 않는다. 200 페이지를 살짝 넘기는 얇은 장편소설임에도 한 문단을 여러 번 읽어도 이해가 될 듯, 말 듯 한 철학적, 수사적 표현들은 힘들었다. 예를 들어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이렇게 묘사하기도 한다.
 “나의 존재를 너의 존재의 가능성으로 간주한다면, 간주한다면, 너의 없음을 나의 현존재의 필연적이면서 근본적인 자기청산으로 간주한다면, 간주한다면.” (119쪽)
 즉 아이를 태어나지 않게 하는 일이 지금 나의 근본적인 자기청산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 이런 생각을 가진 주인공 ‘나’는, 이미 늙은 ‘나’는 피부과 의사인 전처를 정기적으로 만나 처방전을 건네받으며 의식의 변화를 받았을까, 안 받았을까. 책이 그렇게 친절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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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귀의 행복을 위하여 말로센 시리즈 1
다니엘 페낙 지음, 김운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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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이이가 쓴 <산문팔이 소녀>를 재미있게 읽었다. 소설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이야기 하나로 시간가는 줄 모르게 만든다는 것. 괜찮은 이야기꾼이 있어 자기 머리에서 마구 쏟아지는 거짓말을 주체하지 못하고 줄줄 흘려내는데, 그 이야기를 읽는(또는 듣는) 재미가 밤을 꼴딱 새우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 이런 소설책들을 두고 소위 ‘문학성’ 운운하는 건 염병을 하다가 갑자기 땀이 뚝 그칠 말이다(숨이 꼴딱 넘어갔다는 말씀). 현존하는 가장 오랜 소설책이 로마의 네로 시대에 페트로니우스가 썼단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소설책이 독자에게 줄 수 있었던 가장 큰 효용이 과연 ‘문학성’일까 아니면 ‘재미’일까. 나는 ‘재미’라는 쪽에 만원 건다.
 내가 전에 읽은 페낙의 <산문팔이 소녀>를 보면 앞부분에 거구의 우락부락한 남자가 출판사 사무실에 난입해 사무집기와 비품을 때려 부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면 자보 여왕이라 불리는 문학팀 팀장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지고, 우리의 뱅자맹 말로센 씨가 등장해, 출판사에 원고를 몇 편이나 보냈지만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해 꼭대기까지 열이 뻗은 남자보다 더 난리굿을 쳐, 책꽂이의 책들을 쏟아내고 책상 위 서류, 집기들을 몽땅 훑어내다가 난데없이 자기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자신의 불운을 호소하는 방법으로 그를 가라앉게 만든다. 이것이, 이번에 <식인귀의 행복을 위하여>를 읽어보니까, 무대는 출판사가 아니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대형 백화점이지만, 거의 비슷한 직업을 아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이런 방법으로 화난 사람의 (물론 100%는 아니지만) 성질을 가라앉히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인물이다. 백화점 내 맡은 직무는 품질관리 담당. 백화점에서 팔리는 모든 제품에 관한 품질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자리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제품의 불량으로 피해를 입어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솟구쳐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고객 앞에서 객장 책임자가 (과하게)사납게 말로센 씨에게 불이익을 가함으로써 고객으로 하여금 말로센 씨를 불쌍하게 여겨 보상 규모를 대폭 축소시켜주게 만드는, 일종의 희생양 노릇이다.
 아무리 더러워도 직업을 그만둘 수 없는 건 바로 철없는 엄마 때문. 엄마의 취미는 아이 낳기. 열다섯 살도 되지 않아 첫사랑의 아이를 배에 집어넣은 것이 바로 우리의 뱅자맹 말로센. 뱅자맹은 겨우 걸음마를 시작하자마자 이웃에 있는 아랍인 음식점 주인 내외에게 맡겨지고 버릇처럼 엄마는 가출을 되풀이 한다. 가출이 끝나고 귀가할 즈음이면 어김없이 산만하게 배를 부풀리고 있어서, 이 책에선 다섯 명과 반half의 씨 다른 동생을 두었는데(엄마는 초장부터 가출 중이고 책이 끝날 때에야 역시 산만한 배를 부여잡고 귀가한다), 동생들을 끔찍하게 사랑해 자신이 기꺼이 다 부양하고, 보호하고, 가능한 한 최대의 복지상태를 누리게 해야 한다는 관념을 가진, 천사다, 천사. 심지어 여동생 클라라를 낳을 때, 산파는 술에 잔뜩 취해 떡이 되어 엄마 옆에서 자빠져 자기만 했고, 의사는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어, 뱅자맹이 직접 받아야 했을 정도다. 당신 같으면 이렇게 하겠어? 할 수 있겠어? 뱅자맹이 천사인 거 맞지?
 책에서는 모두 여섯 명이 사제 폭탄에 의하여 터져 죽는데, 기존의 추리소설에 익숙한 독자가 읽는다면 어째 좀 수상하게 죽는다, ‘가능하지 않는 살해법인걸?’ 비슷하게 불만을 표출할 수 있겠다. 이 책이 나중에 6편까지 나올 소위 ‘말로센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작가도 6편까지 쓸 수 있을 줄 몰랐을 테니까. 한 번 써봤더니 이게 대박을 쳤는데, 얼마만큼 대박이냐 하면 프랑스에서만 백만 권이 팔렸고, 미국 등 영어권을 합해, 다니엘 페낙을 돈방석, 수준을 넓혀, 돈 침대 위에 누워 1893년 남 프랑스 산 상파뉴를 홀짝거릴 수 있게 해주었다는 거 아닌가. 그러니 후속 작품을 쓰지 않을 수 있었겠어? 그래 시리즈가 시작되는 것이니, 이게 첫 번째 작품이라 아무래도 구성, 살인하는 방법 등등에서 좀 미숙했겠지. 그래 추리소설 전문독자께서는, 추리소설 전문독자 특유의 날카로운 분석과 결과예측 같은 걸 조금쯤 양해해주시는 편이 좋겠다. 엽기살해와 범죄의 구성 및 해결이 아니더라도, 이 책은 한 페이지에 적어도 한 번 씩 등장하는 유머가 사실 진짜배기니까.
 ‘식인귀’ 하면 딱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프란시스 고야가 그린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 (그림은 검색해 찾아보시라. 너무 괴기해 업로드 포기했다.) 뱅자맹의 막내아우 프티가 학교에서 크리스마스에 관한 그림을 그리라니까, 새빨간 옷을 입은 채 산 사람을 뜯어먹는 괴물을 그렸단다. 뱅자맹은 밤잠이 없는 아우들을 위해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 모두 모아놓고 자기 머릿속에서 넘쳐흐르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 해주었던 터라 무수한 이야기 속에 고야의 그림처럼 엽기적인 내용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고, 그걸 기억한 무구한 프티가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새빨간 입을 가진 식인귀를 그렸을 수 있을 것. 근데 막내가 그린 그림 가지고 책의 제목을 정할 수 있지는 않겠지. 때는 194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유대인으로부터 거의 강제로 몰수하다시피 넘겨받은 백화점의 내부를 찍은 사진 한 장을 발견한다. 한 명의 독일인을 포함해 모두 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집단은 정말로 식인의 의식을 집전하는 종파를 결성했으니 “여섯 식인귀의 오붓한 동아리인 111 사제단.” (366쪽) 이 무식하기 짝이 없는 여섯 명은 모두 111명의 아이를 죽여 식인 의식을 행함으로써 유사 기독교에서 악마의 숫자로 불리는 666을 구현하게 된다. 이제 세월이 훌쩍 지나 낼 모레 염라대왕을 배알할 입장에 놓인 노인이 된 이들은 누군가에 의하여 한 명, 한 명이 차례로, 그들이 몇 십 년 전 식인의 의식을 행했던 백화점에서 펑, 펑, 폭탄에 의해 산산이 몸이 찢어진 채 죽는데, 누가 그랬게? 왜 하필이면 자본주의 최대의 전시장인 일류 백화점의 희생양인 뱅자맹 말로센 앞에서 폭발이 일어났게?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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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창비시선 371
유병록 지음 / 창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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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이 서른세 살 때 낸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는 책에 실린 시의 제목이 아니라 시 <흰 이야기>의 두 번째 연, 첫 행이다. 언젠가부터 시의 제목이 아니라 시어 가운데 하나를 따서 시집 문패로 붙이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인지는 모르겠다. 오랜 시간 동안 시집을 읽지 않아서. 제목이 조금 살 떨리지? 목숨이 두근거린단다. 염통이 두근거리는 건 알겠지만 어떻게 해야 목숨이 두근거릴까. 이 표현이 들어 있는 시 <흰 이야기>는 토끼가 자신이 낳은 새끼들을 죽이는 걸 보고 지은 시. 전에 수리부엉이가 토끼를 사냥하는 장면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놀랍게도, 토끼도 비명을 지른다. 정말이다. 유병록도 토끼가 고함을 지르는 걸 본 모양이다. “고함이 이렇게 크다니 / 눈도 뜨지 않은 것들, 흰 털 속에 무수한 힘줄을 숨긴 것들 / 무럭무럭 자라 내 목을 조이겠지 나를 몰아내겠지 / 가만히 앉아 당할 순 없어 희생 따위는 / 한무더기 푸성귀만 못하지 / 토끼의 귀가 팽팽하게 일어선다 뭉뚝한 기억을 딛고 / 이빨이 뾰족해진다 / 차례차례 잠든 새끼들의 숨통을 끊는다” 고함을 지르는 것이 어미인지 새끼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실제로는 고함을 지르지 않았다는 데 만원 건다. 토끼를 비롯한 설치류들은 자신이 출산한 새끼들의 숫자가 적다고 생각할 때, 생각을 정말 했겠어, 그냥 유전인자에 쓰여 있는 느낌대로 적다는 기분이 들면, 가차 없이 자신이 낳은 새끼들을 오도독오도독 씹어 먹는다. 수유기간을 줄여 얼른 다시 임신을 하고, 자신이 잡아먹은 새끼들은 새로 임신할 새끼들을 위한 영양분으로 만들기 위해. 자연에는 낭비란 없으니까. 이런 장면을 본 시인은 그리하여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 흰 토끼가 숨통을 물어 벽에 던진다 / 천둥의 밤이 고요해질 때까지 / 털 속의 불안이 다 지나갈 때까지”라고 흰 털의 죽은 토끼에게 자신을 이입한다.
 이것처럼 이 시집은 유난하게 죽음에 관심을 쏟는다. 예쁘장하게 생긴(남자다, 남자) 시인이, 그것도 삼십 초반에 왜 이렇게 죽음에 경도되었을까. 하긴 뭐. 시인 마음대로다. 따져보면 10대 중후반에 죽음을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인간들이 몇이나 있을까. 인류의 극소수인 야훼의 장자들을 제외하면 말이지. 근데 유난히 섬뜩한 시가 있어 전문을 소개한다.



 사자(死者)의 서(書)



 거기에서는
 죽은 자의 피부를 벗겨 가까운 사람들이 나눠 가진다더군 아끼는 책을 장정하고 이름을 새긴다더군


 죽은 자는 책이 된다더군


 아이가 태어나 글을 익히면
 최근에 죽은 자의 피부로 감싼 책을 선물한다더군
 그를 대부로 삼는다더군


 거기에서는
 몇권의 책을 정정하며 성인이 된다더군
 결혼을 서약할 때는 책에 손을 얹고
 여기 장엄한 생을 두고 맹세합니다, 말한다더군


 때가 되면
 가까운 사람들의 이름을 유언으로 남겨야 한다더군


 거기에서
 죽은 자는 몇권의 책이 된다더군
 문자의 외투가 된다더군


 늙어서 죽은 자는 지혜의 책이, 젊어서 죽은 자는
 혁명의 책이 된다더군
 아이가 죽으면 예언서가 된다더군


 삶에 관한 의문이 드는 저녁에 쓰다듬는
 한권의 생이 된다더군


 시집의 해설을 쓴 평론가 양경언은 이 시에 대하여, “문자와 종이의 관계를 뼈와 몸으로 여기는 시인에게 한 권의 책은 곧 생의 축약이다. 해서 독서 행위를 생의 구제로 다가오게 하는 계기도 몸의 ‘만지는’ 행위를 통해서”라고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놓았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가장 큰 섬뜩함은 정말 사람의 가죽을 벗겨 무두질을 해 장정한 책의 사진을 “보았다”는 점이다. 인간의 피부로 장정한 책이 정말 있냐고? 있다. 서울대학 도서관에도 있고, 하버드대학 도서관에도 있고, 노트르담대학 도서관에도 있다. 그림 첨부한다. 다만 서울대학 도서관의 인피 서적은 도서관 사서의 얼굴이 노출된 관계로 올리지 않겠다. 사람 껍데기 책이 아름다운 광경은 아니잖은가. 

 

 

 왼편은 하버드 대학 도서관 소장 <On the Destiny of the Soul>, 오른편은 노트르담 대학 도서관 소장 인피 서적으로 무어족 족장의 가죽으로 만들었단다.


 이런 걸 봐서 알고 있는 상태에서 <사자의 서>를 읽어보시라. 위 책들이 평론가 양경언이 얘기했듯 “한 권의 책은 곧 생의 축약”이라고, “독서 행위를 생의 구제로 다가오게 하는 계기도 몸을 만지는 행위를 통해서”라고 이해가 되겠는지. 나는 그딴 거 다 모르겠고, 등줄기와 팔뚝에 오소소 소름만 돋았다. 게다가 몇 번 얘기했듯 일제 코흐가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유대인의 가죽을 벗겨 무두질을 해 전기스탠드 갓을 만들거나, 서진, 기타 예술품을 흉내 냈던 것도 본 적이 있어 시를 읽고 느낀 끔찍함이 더 했을 것이다.
 이 시 말고도 죽음과 시신에 대한 집착은 계속된다. “죽은 자의 폐에서 발견되는 다량의 흙은 / 산 채로 매장된 흔적 // 산 자의 기억과 죽은 자의 꿈이 뒤섞이는 자정의 세계에서 / 눈 감으면 / 검은 구덩이에 파묻히는 느낌 //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 검은 공기가 밀려들며 목구멍을 가로막는다”(<검은 꽃> 부분)는데, 시의 제목 ‘검은 꽃’은 “점점 폐활량이 줄고 / 기침의 순간을 지나 침묵에 다다를 때” 즉 죽음의 순간에 내가 직접 판 검은 구덩이, 혹은 죽은 내 폐에서 발견된 다량의 검은 흙을 말한다.
 좋다. 시인이 시를 쓴다는 데 뭐가 문제냐. 근데 나는 왜 시인이 자신이 직접 검은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묻혔는지, 그걸 모르겠다. 검은 구덩이를 내가 팠다고 분명하게 얘기하긴 했는데, 구덩이 속에 누워 있으면서 흙을 스스로 덮지는 못했을 것. 그럼 누군가가 시인을 묻었을 터, 왜 묻혔을까? 이웃의 여자를 탐했을까? 과부 땡빚을 얻어 갚지 못했을까? 그것에 대한 힌트가 들어있지 않으니 안타까울 수밖에. 좋다, 좋아. 시인이 왜 괴로운지, 검은 땅 속에 어떤 이유로 묻히게 되었는지 알려주지 않겠다니 뭐 독자가 알아서 그런가보다, 해야지.
 결론.
 내겐 맞지 않는 시집. 다른 독자들은 모르겠다. 굳이 권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비추하는 것도 아니다. 나름대로 요즘 잘 나가는 시인인 모양이니 제위께선 읽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시라. (이렇게 얘기하니 다른 건 몰라도 내 속 하나는 편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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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아버지 펭귄클래식 114
도널드 바셀미 지음, 김선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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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 나온 것이 1975년. 바셀미는 벌써 누천년 이어오는 오이디푸스 적 친부살해의 신화를 부여잡고 이를 포스트모더니즘에 입각해 소설을 썼으니 바로 <죽은 아버지>. 우리나라에서도 작가 한승원이 살부계에 관한 작품 <아버지와 아들>을 쓴 적 있으나 바셀미처럼 순수하게 친부살해의 모티브를 주제로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 작품에서 친부살해는 과거와의 단절, 그리하여 진정한 새 시대를 여는 장치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쓰는 건 사실 뻔한 이야기를 하면서 잘난 척도 하는 거뿐이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아들은(시대가 바뀌어 딸도 마찬가지로, 그래서 자식들은) 아버지를(역시 시대가 바뀌어 어머니를 포함한 부모를) 타도하고 진정한 자아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나는 아들만 둘 키웠다. 아이들이 머리통이 굵어져 이제 말을 알아들을 즈음해서 이렇게 얘기했다.
 “내가 제일 듣기 싫은 말은, 너희들이 나를 존경한다는 거다. 세상에서 가장 찌질한 아이들이나 부모를 존경한다. 아버지는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 혹은 타도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내 아이들은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지나가는 말로도 하지 않는다. 생각해보시라. 우리나라에서도 존경할만한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 난 신채호 선생을 존경한다. 정치가 가운데는 전봉준. 작가 중에선 황순원. 군인은 안중근. 등등. 이런 이들을 놔두고 예를 들어 학교 교사가 아이에게 ‘너는 누구를 제일 존경하니?’라고 물을 때, 우리 주위에서 자주 보듯 ‘아버지요’, ‘어머니요’ 이러고 있는 꼴을 나는 도무지 못 봐 주겠더라는 말씀. 근데 아이들이 정작 누구를 존경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혹시 존경할만한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 아냐?
 <죽은 아버지>를 열면 처음 세 페이지에 걸쳐 이미 죽어 누워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한글 고딕체로 적어놓았다. 아버지는 키가 3,200 큐빗. 1큐빗이 45.72cm이니까, 미터법에 의하면 죽은 아버지의 키가 무려 1,463 미터에 이른다. 놀랍지? 대단히 크다. 이런 거인인줄 모르고 첫 페이지에 나오는 문장 “곱게 빚어진 섬세한 콧구멍이 달린 코끝에서 땅까지, 5미터 반이, 삼각측량법으로 얻은 숫자”라는 걸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니 바셀미가 이야기하고 있는 아버지, 그 중에서도 ‘죽은 아버지’가 무엇을 대신하는지 짐작이 가실 터. 더구나 이미 죽었지만 자신이 죽었음을 거부하고 시시때때로 벌떡 일어나 허리춤에 찬 긴 칼을 번쩍 빼들고 무수한 생명들을 도륙하는 걸 취미로 삼으니, 더더욱 이 ‘죽은 아버지’의 의미를 눈치 채실 수 있을 터. 의미가 상실된 옛 규범일 수도 있고, 종교이기도 하고, 용도 폐기되었지만 권력층의 골방에서 아주 가끔 전가의 보도로 광휘를 휘날렸던 “전통”이란 이름의 똥 덩어리일 수도 있다.
 책은 몇 명의 남녀가 수많은 인원으로 편성된 연대를 이끌고 죽은 아버지를 땅에 묻기 위해 행진하는 장면으로 만들어졌다. 유일한 구성이 죽은 아버지를 무덤까지 끌고 가서 가는 도중에 몇 명을 만나고, 통행을 거부당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모종의 난관을 거쳐 기어이 땅을 파고, 그 속에 죽은 아버지, 그러나 자신이 죽었음을 거부한 채 여전히 날뛰고 싶어 하는 아버지를 뉘인 다음, 그 위에 흙을 덮기 위해 불도저가 죽은 아버지의 눈에 보이는 것뿐이다. 이런 단순 구성과, 포스트모던 특유의 앞뒤를 종잡을 수 없는 문장들로 이루어진 대화나 묘사 등으로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독자는 독자의 권한으로, 작가가 의도적으로 해독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위에서 내가 적어놓은 것들이라고 한정해서 읽는다면 결코 오리무중의 혼란은 벌어지지 않을 듯싶다.
 이런 단순구성 속에 바셀미는 절묘하게 한 편의 에세이를 삽입했다. <아들들을 위한 사용 설명서>. 이게 무엇인가 하면, 아직 죽지 않은 아버지, 옛 권위, 타도해버려야 할 대상을 어떻게 써먹어야 하는지를 설명해놓은, 지극히 이해하기 쉬운 일상의 (재미있는)발견이다.
 아버지는 죽여야 한다. 다만 직접 죽이지는 말라. 조금 기다리면 세월이 저절로 죽여줄 테니까. 그러고 나면 다음은 당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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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토텀
찰스 부코우스키 지음, 석기용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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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제목을 영어로 썼을까? <잡역부>라고 쓰면 촌스러워서? ‘잡역부雜役夫’도 외래어인데 왜 수선이냐고 한다면, <막일꾼>은 어때? 더구나 부코우스키의 소설에 영어 제목을 붙인다고, 아니, 슬로바키아어 또는 라틴어를 붙인다고 해도 하나도 우아해 보이지 않을 걸? 당신이 부코(우)스키의 소설책을 선택한 순간 일단 고상한 건 포기한 전제였을 테니. 내가 읽은 이 사람의 책은 공통적으로 술과 일시적 밥벌이, 싸움, 섹스의 난장판이었다. 게다가 20세기 중반의 미국남자답게 마초적이다. 이를테면,


 “잔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고개를 쳐든 그녀는 술집의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보아도 꽤 핼쑥해 보였다. 나는 그녀의 등 바로 뒤로 걸어가서 그녀가 앉아 있는 의자에 가까이 섰다. ‘난 널 여자답게 만들어보려고 노력했지만 넌 그저 싸구려 창녀일 뿐이야.’ 나는 그녀를 손등으로 후려쳤고 얻어맞은 그녀는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비명을 질러댔다. 나는 그녀의 술잔을 집어들고 단숨에 비웠다. 그런 다음 천천히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출구에서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섰다. ‘좋아, 형씨들 중에…… 내가 지금 막 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있으면…… 어디 한번 그렇다고 말해보시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짐작건대 모두들 지금 내가 한 행동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나는 알바라도 가로 다시 걸어나왔다.” (164~165쪽)


 여성 ‘잔’은 나, 행크 치나스키보다 열 살 연상의 애인. 치나스키는 1920년생임에도 사회부적응 증이 있어 군 입대를 거절당해 2차 세계대전 참전 와중의 미국에서 희소가치가 있는 멀쩡한 젊은 남자의 자격을 취득한다. 말 그대로 사회부적응 적 성격으로 (내가 읽은 순서로 쳐서)전작에 보면 로스앤젤레스 시립대학에서 2년 동안 저널리즘을 공부하다 때려치우고 전국을 유랑하며 여러 잡일로 하루하루를 먹고 살았는데, 이 방랑벽과 닥치는 대로 잡일을 하고 순식간에 그만두고 하는 행위가 <팩토텀>에 와서 극을 달한다. 이이가 마흔아홉 살 때, 어느 출판사로부터 한 달에 100달러 씩 줄 테니까 책을 써보라고 했다는데, 정말 다행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찰스 부코(우)스키 씨는 어느 찌는 듯한 여름 밤 마이애미의 개천 옆에서 신문지 한 장 깔고 술에 잔뜩 취해 자고 있다가 졸지에 악어 밥이 됐든지, 한 겨울 시카고 골목길에서 꽝꽝 얼어 죽은 채 발견되지는 않았을까. 뭐 그렇다고 내가 부코스키의 책을 여러 권 읽은 건 아니다. 근데 뭐랄까, 위에 인용한 문단에서 볼 수 있듯, 이미 몇 세대 이상이 지나가버린 존 웨인 시절의 향수를 갖고 있지 않다면 이해하거나 용납하기 힘든 행동들을 스스럼도 죄의식도 없이 저질러버리는 전형적인 부랑자, 깡패, 양아치 기타 등등의 모습이, 희한하게도 그냥 넘어가지더라는 것.
 왜일까?
 새벽 다섯 시에 뉴올리언스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팩토텀>은, 이후 부모가 살고 있는 고향 로스앤젤레스, 뉴욕, 다시 로스앤젤레스, 세인트루이스, 또다시 로스앤젤레스(이때 책에서 가장 오래 관계를 갖지만 결국 그녀로부터 사면발니에 감염이 되는 잔을 만난다), 플로리다, 마지막으로 다시 로스앤젤레스를 다니며 이러저러하게 참으로 다양한 잡역부의 삶과, 거대한 양의 위스키와 와인과 맥주 통 속으로 다이빙한다. 미국의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숱한 직업을 가졌다가 때려치우고, 그동안 번 돈으로 끝장을 볼 때까지 술에 취해 아무 여자하고나 섹스를 하는 거. 그러면서도 자잘한 싸움과 노숙 등. 행크 치나스키에게 여성이란 그냥 섹스의 상대자일 뿐. 어디서 본 거 같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 뭐 대강 그럴 듯하네. 그럼 찰스 부코스키를 잭 케루악과 같이 비트 제너레이션으로 묶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듯하지만 뭐 하러 그런 짓을 해? 부코스키를 케루악하고 함께 묶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케루악이 50년대에 그의 특허품인 비트 제너레이션 작품들을 쏟아낸 반면, 진정한 비트 세대인 부코스키는 70년대에야 와서 자신의 젊었던 시절에 관해 쓰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한다. 때문일, 한 번 쉬고, 것이다. 짐작이라는 뜻. 다른 데서 인용하지 마시란 완곡한 표현이다.
 일반적인 뜻에서 ‘뭔가를 기대하고’ 책을 선택해 읽는 분들은 킥킥대고 책을 다 읽은 다음에 가볍게 휴지통으로 던져버릴지도 모른다. 별다른 스토리도, 플롯도 없고, 구성도 그저 시간이 흐르는 대로 행크 치나스키가 벌이는 좌충우돌의 나열에 그치는 책. 사용하는 단어조차 신사 숙녀들이 즐기기에는 은어, 비어, 속어, 그리고 정상적인 단어이기는 하지만 의례상 입에 올리기 꺼려하는 것들이 그냥 일상다반사처럼 나열된다. 스스로 숙녀, 신사로 자칭하시는 분, 말로는 안 하지만 그런 계급에 속한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사시는 분들은 이 책을 읽을 엄두도 내지 마시라. 인간은 뭔가를 하루에 세 번씩 입을 통해 소화기관으로 집어넣어야 하고, 섭취한 양과, 근육과 뼈의 운동량과 연관관계를 갖고 적어도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을 몸 속에서 다시 끄집어내야 하는 포유류임을 아는 인종들만이 즐길 수 있는 책. 행크는 일자리를 얻거나, 해고를 당하든지 스스로 그만 두든지 하거나, 섹스를 하거나, 말러의 교향곡이 흐르는 가운데 거구의 창녀로부터 억지로 섹스를 당하거나, 궤양이 생길 때까지 알코올을 섭취할 때, 구접스럽게 이것저것 재고 가리고 계산하지 않는다.
 전형적인 사회부적응 형 인간. 그러나 이 인간을 바라보는 초점을 약간 달리하면, 불행하게도 20세기를 살아야 했던 천의무봉한 기인이랄 수 있을 것. 그러니 <팩토텀>을 읽는 일이 문명세계에 불시착한 싯다르타를 구경하는 것이란 주장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이해 받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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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4-18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 제가 부코스키 작품 중 처음 읽은 책이 바로 이 책인데요, 으악 ㅋㅋㅋ 읽고나선 으악! 찰스 부코스키 책 다시는 안 읽어! 했더랍죠. 근데 신기하게도 그 뒤로 나오는 족족 다 사봤어요;;; 나참 ㅋㅋㅋㅋㅋ 이젠 왜 부코스키 추종자들이 있는지 이해할 정도랄까요.

Falstaff 2019-04-18 11:03   좋아요 0 | URL
ㅋㅋㅋ 이 사람은 극적으로 호오가 갈리는 거 같더라고요. 제 주변에도 딱 절반은 열광, 절반은 극혐이고요. ^^ 하여튼 뭔가가 극적인 인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