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 사이의 식사 실천시선(실천문학의 시집) 256
강봉덕 지음 / 실천문학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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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문학사에서 나온 시집의 제일 마지막 페이지는 ‘시인의 말’을 싣는다.



 시를 쓴다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더 낮아진다는 것이다

 더 낮아진다는 것은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은
 세상을 맑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맑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인의 말’을 길게 써놓은 시인 강봉덕. 그러나 시인이여, 세상은 시가 없어도 기가 막히게 잘 굴러갈 것이며, 특별히, 시를 빙자해 교묘한 주장을 펼치지 않는다면 심지어 아름다운 세상이 될 가능성도 있을 것이며, 더욱 특별하게, 껍데기들이 가 주기만 한다면 대한민국의 인구증가율까지 높아질 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다 사랑하며 살게 될 거 같으니까.
 공개된 장소에 독후감을 쓰면서 난감한 일은 아직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우리 작가, 시인들의 작품에 대하여 ‘솔직하게’ 독후감을 쓰는 일이다. 몇 번 인용을 했지만 누군가가 유명 시인 김x정에게 “이게 시냐?”라고 문자를 보내자 적어도 오줌발 하나에 관해서는 지고 싶은 마음이 없는 시인이 “이게 시다, 씨발놈아!”라고 답글을 쓰려다 말았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듯이, 일개 독자의 독후감일망정 혹평을 하면 “xxx입니다.” 자신이 글을 직접 쓴 작가임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해, 쉬운 얘기로 하자면, 쥐똥도 모르면서 함부로 짖지 말라는 취지의 댓글이 달리는 일이 제법 있다. 나? 당연히 나도 몇 번 경험했다. 처음에는 대응하다가 이제 그런 댓글 올라오면 안면 덮고 그냥 지워버리고 말지만 절대 개운한 기분을 유지할 수 없다. 당연하지. 작품을 쓴 시인, 작가들은 나름대로 전력을 다 해 자기가 뽑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씨줄과 날줄을 엮었을 터이니. 근데 문제는 독자인 내가 읽기에 마음에 하나도 들지 않을 뿐이란 점. 내가 무식한 것도 알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 유사 이래 독자의 수준이 낮은 걸 통탄해마지않았던 쥐뿔도 없는 시인, 작가는 언제나 어디서나 무궁무진하게 많았지 않은가. 독자의 낮은 수준은 시인, 작가들이 깔고 앉아야 하는 형틀이다. 그걸 핑계로 독자의 혹독하고, 이해할 수 없고, 무식하기까지 한 비평을 비난하지 말지어다. 너희들은 똑똑한 족속이니까.
 시집의 경우엔 한 권 읽으면서 두 편의 마음에 드는 시를 발견하면 횡재, 한 편의 시는 본전, 아예 없으면, 꽝이지 뭐. 이런 의미에서 강봉덕의 시집 《화분 사이의 식사》는 나한테는 꽝이다. 오죽했으면 독후감에서 첫 번째로 소개하는 것이 책의 뒤 끝에 달린 ‘시인의 말’이었겠는가.
 내 취향에 이 시집은 맞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 시들에 관해 독후감을 쓰는 일이 쉽지 않아, 이 다음에 줄줄이 써내려간 나머지는 싹 지워버렸다. 그러나 시인이여, 나는 그저 일개 아마추어 무식한 독자일 뿐이니 당신은 계속해서 시를 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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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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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이 다 저물어갈 무렵의 한 밤, 스위스의 베른에 있는 최고급 호텔 메트로폴리탄의 스위트룸에 기거하고 있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자신의 스위트룸에서 뉴욕의 일간지 “브루클린 프레스”의 문화부 칼 페이트 부장과 인터뷰를 진행한 사실과 내용을 뉴욕 프레스 홈페이지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브루클린 프레스는 1971년에 사명을 뉴욕 프레스로 바꾸고 사옥도 6번가 619번지로 이전했다고 홈페이지에 적혀 있다.
 영어로 이루어진 이 날의 인터뷰 내용이 그해 나보코프가 출간한 <창백한 불꽃>에 집중된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 책을 직접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머리말, 네 편으로 된 시 <창백한 불꽃>, 무려 280쪽에 달하는 주석, 그리고 색인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나보코프와 페이트 부장 간의 대화의 상당한 부분이 영어를 포함해 불어, 독어, 러시아어 등의 운율을 다루고 있어, 그 부분은 해석해 낼 도리가 없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언어 또는 문자나 단어를 가지고 노는 희문작업 월드컵에서 금메달을 놓쳐본 적이 없는 나보코프는 <창백한 불꽃>을 설명하는 도중은 물론이고 일상적인 자신의 생활을 이야기하는 도중에도 숱하게 유사한 언어유희를 펼쳐 영어에 그리 밝지 못한 나를 단어의 늪에 빠뜨려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 인터뷰를 짧게 정리해 옮기는 것으로 독후감을 대신하려고 하는 바이지만,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은 그냥 어떤 의미인지만 파악하셔야 하지, 대 문호와 뉴욕 프레스의 문화부장 간에 나눈 고차원적 문학이야기를 내가 올바로 전한다고는 기대하지 말아주시라. 나보코프는 매체와의 인터뷰를 호환 마마보다 더 싫어했다고 하는데 정말 우연히 그리고 다행스럽게 이런 기사를 구해 읽게 됐다.
 나보코프는 19세기의 끝인 1899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귀족이자 부르주아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발발한 후 아버지 블라디미르 디미트리비치는 당연히 백군에 참여했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점령당하는 바람에 크림으로 이주했고 와중에 나보코프는 1919년부터 동생과 함께 케임브리지에서 공부를 한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해에 가족이 베를린으로 이주를 하면서 아버지가 현지에서 러시아어 신문을 발간하는 등의 활약을 하다가 1922년 극우 테러리스트에게 암살을 당하고 만다. 나보코프는 아버지의 죽음에 극심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면서 극우 집단뿐만 아니라 현재 자신의 조국인 소비에트에서 또 다른 암살자를 보내 자신의 심장에도 총알을 박아 넣을지 아닐지, 일종의 습관성 피해망상 비슷한, 결코 병적이지는 않지만 그런 종류의 두려움에 휩싸인 채 63세가 된 지금(1962년)까지 평생을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자신이 비교적 안전한 유럽에 살 때와 마찬가지로 거의 완전하게 (테러로부터)안전한 미국시절까지 저 의식 깊숙한 곳에서 “가끔 솟아나와 찔러대는 공포”에는 대책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 자신이 올해(1962년)에 출간한 <창백한 불꽃>의 기본적 발화점은 러시아 귀족집안 출신이면서 소비에트에 적대행위를 한 부친을 둔 자신이 생을 마감하기 전에 반드시 이야기해야 하는 의무의 집행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부분에서 나보코프와 칼 페이트 문화부장 사이의 대담에 무수한 언어유희가 난무해 이해하는데 애로사항이 많았다. 관심 있는 분들은 직접 검색해 원어로 읽어보시기 바란다. 인터뷰 가운데에서 유독 희문戱文이 많았던 이유는 자신이 쓴 4부로 구성된 시 <창백한 불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나보코프 본인은 이런 구성을 호프만슈탈의 희곡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를 염두에 두었으며, 원래는 호프만슈탈처럼 “극중극劇中劇”의 형태를 구상했으나 아예 처음부터 독자를 희롱(적절한 단어가 아니다. 하지만 내 영어수준으로 고른 최선의 단어임을 이해해주시라.)하는 것으로, 책을 쓰는 도중에 스토리 라인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을 영문학자 킨보트라고 명명하고 존 셰이드가 쓴 표제 시 <창백한 불꽃>을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통해 손에 넣어 책을 출간할 권리를 얻은 다음, 무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기준으로) 280쪽에 달하는 주석을 달고, 주석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했는데, 자신도 그렇게 플롯을 바꾼 다음에 읽어보니 훨씬 더 흐뭇하더라고 고백하며 폭소를 터뜨린다.
 그러나 작가에게도 문제가 있었으니 자기 숙제, 쿠데타가 일어나 결국 소비에트의 위성국가로 추락하고 마는 젬블라 왕국의 망명 폐왕廢王 ‘카를 크사베리 프세슬라프’ 이야기를 어떻게 작중 미국의 위대한 현대시인 존 셰이드와 그의 가정사家庭事에 엮어 넣을 것인가 이었다면서, 그 해결을 위해 부득이하게 머리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지금 내가 요약하는 인터뷰 내용을 이 책을 읽지 않으신 분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반면에 이미 읽어보신 분은 단박에 이 독특하고 해괴망측한 소설 <창백한 불꽃>의 탄생설화를 납득할 수 있을 듯하다. 하여간 책 한 권을 읽고 작가와의 인터뷰를 두 시간에 걸쳐 검색을 해 찾아보고 그걸 하루 종일 해석을 해 독후감을 대신하기는 내가 가나다라 익힌 이후에 처음이다. 그만큼 <창백한 불꽃>은 좋은 의미에서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작품이고, 놀라자빠질 구성으로 만들었으며, 마지막 두어 페이지의 반전으로 최후의 어퍼컷을 먹인다는 것쯤은 미리 아시고 읽어보시면 좋겠다. 근데 최후의 카운터 블로우는 출간 당시 기준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벌써 근 60년이 흘러 독서력이 좀 있는 독자들은 책의 70% 정도가 되면 마지막 반전을 눈치 챌 수 있을 듯도 하다. 그럼에도 당신이 진짜로 이 책을 읽는다면 여러 가지로 놀라고, 힘겹고, 심지어 짜증나다가 점점 책 속에 푹 빠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실 수 있을 걸? 아무튼 블라디미르 나부코프, 대단하기는 대단하다.

 

 

 

 

 

 

 

 

* 위 본문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브루클린 프레스란 언론사는 있어본 적도 없고,
  뉴욕 프레스는 1988년 창간해서 2011년 폐간한 주간지이며,
  뉴욕 6번가 619번지 바로 길 건너 620번지에는 뉴욕 타임즈 건물이 들어서 있으며,
  나보코프가 묵었다는 호텔은 에이모 토울스가 쓴 <모스크바의 신사>의 주인공 로스토프 백작이 살던 "메트로폴"리탄 호텔 스위트룸 이었으며,
  신문사 문화부장 칼 페이트 역시 미치너의 <소설>에서 나오는 평론가의 이름 '칼'과 볼라뇨의 <2666>에 출연한 뉴욕 할렘가 신문 <검은 새벽>의 문화부 기자의 성姓의 합성이며,

  호프만슈탈의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는 희곡이 아니라 오페라 대본이며,
  당연히 기사 내용 전부 다, 싹, 구랍니다.
  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이 정말 화딱지 날 정도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져서 저도 한 순간 심술이 도져 마음 먹고 구라 한 번 풀어봤답니다.
  진지하게 읽으셨다면 죄송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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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1-15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하하.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이런 킨보트 같으니라구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0-01-15 11:42   좋아요 0 | URL
ㅋㅎㅎㅎ 고맙습니다.
이 작품에 관해서는 이래도 될 거라고 생각합니닷!!! ^^
 
유도라 웰티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34
유도라 웰티 지음, 정소영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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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유도라 웰티라는 이름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현대문학사社의 “세계문학단편선” 시리즈가 나옴으로 해서 주로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작가들을 새롭게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독자의 한 사람으로 즐거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물론 이이가 <낙천주의자의 딸>로 퓰리처상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우리말 번역본은 절판 상태라 읽기가 힘들겠으나, 뜻이 있으면 다 방법이 있는 법, 올해 안에 내가 독후감 쓰고 만다. 그만큼 유도라 웰티의 작품들이 나하고 맞았다는 말이다.
 연표를 보면 웰티가 그리 많은 작품을 쓰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1909년생인데 1943년에 첫 번째 단편집 《초록 장막》을 냈으니 당시가 34세. 43년에 두 번째 작품집 《커다란 그물》, 49년 나이 마흔에 세 번째이자 연표 상에서는 마지막 작품집 《황금 사과》를 출간한다. 이 책 《유도라 웰티 - 내가 우체국에서 사는 이유 외 31편》은 연표에 소개한 세 권의 단편집 전부를 한 권으로 묶어 번역해놓았다.
 책의 앞날개에 작가를 소개하는 짧은 글에 보면, 웰티는 “미국 남부 문학에서 포크너에 버금가는 위치를 차지”한다고 한다. 여기서 말한 “미국 남부 문학”을 대도시에 기반을 둔 작가의 반대편에 위치한 사람들, 예로 든 포크너를 위시해서 스타인벡, 캐더, 셔우드 앤더슨, 매컬러스 등을 다 망라한다 해도 이 유도라 웰티는 조금 특이한 구석이 있다. 개인으로도 그렇고 작품으로는 더 그렇다. 웰티는 위 작가들과 비교하면 삐딱하지 않다. 적어도 ‘훨씬 덜’ 삐딱하다. 큰 부자는 아니지만 안정된 집안에서 곱게, 거기다가 ‘착하게’ 자라 지역 여자대학과 위스콘신을 거쳐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김에 뉴욕에 자리를 잡지도 않고, 어머니가 부르자마자 예스 맘, 하면서 곧바로 다시 귀향해 결혼은커녕 연애도 한 번 변변하게 해보지 못한 채 여전히 ‘곱게’ 나이 먹어가면서 열심히 촌구석 사교계 활동에 전념하며 틈틈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당연히 결혼은 선택이지만 이건 지금 논리고, 당시 쁘띠 부르주아, 특히 남부의 족보 있는 가문의 아가씨한테는 필수였음을 상기하자. 이렇게 마흔 살이 넘게 살다가 당시 미국 문학계의 큰 별이며 현대문학사의 세계문학단편선 30번으로 책도 낸 적이 있는 선배 캐서린 앤 포터가 웰티를 방문하고자 했을 때도 늙은 딸이 더 늙은 엄마한테 허락을 받고 방문을 승낙했을 정도였다니 정말 ‘착하지?’ 그러니까 캐서린 앤 포터가 방문을 했을 때가 1950년대다. 아무리 남부 시골지역이라 해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여권신장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펼쳐질 때임에도 웰티에게는 예외였던 모양이다. 그러니 이이의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을 듯.
 웰티의 작품은 실제 지명인지 아니면 가상지역인지는 모르겠지만 ‘내치즈’라고 하는, 배산임수의 명당자리에서 벌어지는 작은 일들을 주요 소재로 하고 있다. 말이 배산임수지, 북아메리카 대륙의 남부에서 배산임수라는 건 만일 강이 범람했다하면 5마일, 그러니까 6km 떨어져있는 강에서 쳐들어 온 강물이 이층, 삼층집 지붕만 남겨두고 몽땅 잠수시켜버리는 벌판을 뜻한다. 물에 근접해 있다는 말이 이런 뜻이다. 땅이 워낙 크니까. 시골 사교계의 유력인사로 각지를 돌아다니며 결혼생활을 하는 대신 사진 찍기에 취미를 들려 다양한 계급, 피부색의 미국인들을 필름에 담았다고 하는데 이런 취미활동이 이이의 단편소설들에서 특징적인 인물들을 많이 만들어냈음직하다. 특징적 인물? 그렇다. 첫 번째 수록작 <릴리 도와 세 부인>의 주인공 릴리 도는 정신지체아로 세 명의 부인이 릴리를 시설로 보내려하지만 릴리 도는 서커스의 실로폰 연주자와 결혼을 약속한 설정을 했고, <화석인>에선 기형인畸形人을 보여주는 공연에서 하반신이 경화되어 점점 돌로 변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네 명의 여자를 강간하고 지명수배중인 페트리라는 인물을 등장시키며, <열쇠>에선 귀머거리에다가 벙어리 부부, <쫓겨난 인디언 처녀 킬라>는 닭을 산 채로 잡아먹는 모습을 공연하는 내반족內反足(극심한 안짱다리) 흑인 리틀 리 로이, <클라이티>에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노처녀 주인공과 뇌졸중인 아버지에다가 알코올 중독기미가 있으며 총으로 위협하는 바람에 아내가 도망친 오빠 제럴드, <늙은 마불홀씨>는 이중생활을 하면서 저쪽에도 아들을 하나 둔 중혼자, <자선방문>에선 노인 요양소의 문제 있는 두 할머니, <어떤 외판원의 죽음>에선 심장병 있는 세일즈맨 보먼 씨에다가 <첫사랑>의 주인공 조엘 메이스는 귀머거리고, <황금소나기>의 주인공 스노디 매클레인 여사는 정상인 두 아들을 낳은 백색증, 즉 알비노, <6월 발표회>에선 로크 모리슨이란 소년은 말라리아 투병 중에다가 주인공 에크하르트 피아노 선생은 와병중인 노모를 봉양하느라 맛이 조금 간 상태여서 다음 작에선 방화범으로 현장 체포되며, <달 호수 Moon Lake> 주인공 이스터는 목에 때가 끼어 검은 줄이 생긴 고아소녀, <방랑자>에서 케이티는 뇌졸중이었다가 급기야 숟가락 놓고 만다. 내가 잠깐씩 메모 했던 것만 그렇다는 거다.
 이 많은 결손들. 이게 어디서 왔을까? 웰티가 수집해놓은 1930년대부터 약 20년간 사진을 보고 등장인물을 만든 것일까, 아니면 자신 스스로가 연애 못해본 마흔이 넘은 노처녀로 뭔가 결핍을 느껴 이런 사람들을 작품에 캐스팅하게 된 걸까. 그건 모르겠다. 물론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에서도 정신지체아가 등장하고 그의 시각에서 본 세상을 묘사하기는 하나 이렇듯 골고루, 다양한 결핍까지는 아니다. 반면에 이들의 일탈은 소설적 시각으로 봐서, 싱겁다. 가장 귀여운 일탈은 재미있게 읽은 <내가 우체국에서 사는 이유>에서 주인공 아가씨가 집을 나와 우체국, 전국에서 두 번째로 작은 규모의 우체국에 커튼을 치고 거주지를 옮기는 일이었고, 제일 심각한 건 <클라이티>에서 주인공의 작은 오빠 헨리가 자기 얼굴에다 총을 쏴 총알이 얼굴을 관통해 사망에 이른 것인데 소설은 작은 오빠가 죽은 한참 후부터 시작하니 엽기적 장면은 아예 등장도 하지 않고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 넘어간다.
 내가 이렇게 쉽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책읽기에 관해서 소양이 많이 떨어지는 아마추어임에도 조금 건방지게 말하는 것을 허락해준다면, 지루함을 참는 힘이 부족한 독자들이 ‘읽어내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싶다. 단편소설답게 한 작품에서 시간적 배열이 왔다 갔다 하는 경우도 있고, 이 사람의 관점에서 저 사람의 관점으로 시각의 주인이 바뀌는 경우도 있어서 그때그때 상황판단이 팍팍 되어야 하지만 이게 무려 본문만 830쪽에 육박해 하루에 여덟 시간을 읽는다고 가정하면, 여덟 시간 내내 집중하고 있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 변변한 유머 코드도 없다. 여차하면 지루함의 늪에 빠질 수도 있다는 뜻.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한 작품씩 시간을 두고 여유롭게 읽는 것이라는 건 알고는 있으나, 불행하게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이 ‘여유’를 부릴 여유가 있겠는가 말이지.
 내가 읽기로는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단편집 《황금 사과》, 이 책의 3부였다. 모두 일곱 개의 중단편이 들어 있고 총 356쪽이다. 무대가 미시시피주의 모개나 마을과 매클레인 카운티이며, 시간적 배경은 1900년경부터 현대(1940년대 후반)까지다. 가장 중요한 가족은 역시 매클레인 가문. 킹 매클래인이 알비노인 스노디와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는데, 카운티 이름이 매클레인인 것처럼 킹의 아버지가 처음 이 동네로 들어와 마을을 만들었단다. 그런데 킹은 스노디와의 사이에서 정상인 아들 쌍둥이를 낳고는 집을 나가 일 년이면 일 년, 삼년이면 삼년, 소식을 뚝 끊고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 채 소식 하나 없이 어느 날 불쑥 나타나 이박삼일 간 실컷 잠을 자고나서는 또다시 사라져버리는 사이클을 단행해 동네에서 참으로 싹수없는 인간으로 호가 나버린다. 동시에 일종의 신비함이랄까 경외심이랄까 하는 것도. 이 가족을 중심으로 해서 독일출신 여자 피아노 선생 에크하르트와 이웃들, 킹 매클래인의 쌍둥이 아들이 소위 연작 형태의 중단편을 만든다. 우리나라 같으면 이런 형태의 작품은 이문구의 <우리동네>나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처럼 그냥 ‘연작장편’이라 부를 듯. 글쎄, 나는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것이 이 연작 가운데 <6월 발표회>이었지만 읽는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충분히 갈릴 수 있겠다. 그것 말고도 <파워하우스>도 좋았으며 <커다란 그물> 역시 인상 깊게 읽었다. 굳이 단편소설의 내용을 독후감에 써서 나중에 이 책을 읽어보실 분의 김을 뺄 수는 없다.
 내가 읽기로는 현대문학사의 세계문학단편선 가운데 (그래봤자 완독은 이제 아홉 권뿐이지만) 가장 흥미롭게 읽은 책.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하기는 하나 절대 책임지지 않겠다고 미리 다짐을 해야 할 책. 어떠셔? 관심 돋으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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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와 형리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23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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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렌마트는 두 권의 책을 통해 희곡만 세 편 읽었다. <노부인의 방문>, <과학자들>, <천사, 바빌론에 오다>. 그러다 <판사와 형리>가 재미있다는 얘기를 듣고 찜해두었고, 이번에 읽었다. 이 책은 단편소설 두 편이 실렸다. 내가 읽은 뒤렌마트 때문에 생긴 선입견으로는 상상도 못하게, 무려 추리소설이었던 거다. 표제작 <판사와 형리>는 유명매체에 의하여 죽기 전에 읽어봐야 할 책으로 선정되었다고 하는 뒤렌마트 최초의 추리소설이고, <혐의>는 시리즈를 염두에 두고 쓴(것 같은) 전작의 바로 후속 작품이다.
 먼저 이야기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나는 책을 사도 책 뒤편에 있는 간략한 소개 같은 건 절대 읽어보지 않고 무조건 본문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판사와 형리>를 중간까지 읽었음에도, 설마 뒤렌마트가 추리소설을 썼겠는가 싶어, 틀림없이 살인사건의 범인이 누구라고 확정하지 않고 독자들이 마음대로 생각하게 내버려둔 상태로 끝날 것이라고 단정했었다. 그렇다. 짐작이 아니라 단정斷定, 딱 잘라 판단해서 결정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시나? 추리소설 읽을 때보다 훨씬 더 집중해야 하고 작품 속에 조금이라도 빈틈을 파고들기 위해 작은 단서라고 보이는 묘사를 전부 기억해야 되는데 그게 마음대로 될까? 그리하여 아예 처음으로 돌아가 노트 꺼내고 볼펜 꺼내서 수시로 메모해가며 읽는 상태, 이른바 주화입마에 빠지게 된다. 진짜다. 그러니 이 독후감을 읽어보시고 진짜로 유명한 작품 <판사와 형리>를 읽어보실 분은 나처럼 이상한 짓 하지마시고 애초부터 추리소설인 것을 아는 상태에서 편하게 읽으시면 되겠다.
 1908년 경 콘스탄티노플. 보스포루스 해협 근처의 지저분한 유대 술집에 마주앉은 스위스 사람 한스 베르라하와 국적불명의 코즈모폴리턴1 가스트만이 마주 앉아 심각하게 인간 본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인간존재와 완전범죄에 대하여. 철학적 논의 끝에 결국 의견의 합치를 보지 못한 두 사람. 이들이 헤어지기 전에 가스트만은 하늘을 걸고 내기를 하기에 이른다.
 “나는 자네 코앞에서 범죄를 저지를 것이며, 그리고 내 범죄를 자네가 입증하지 못하게 하리라!”
 ‘하늘을 건 내기’를 다른 말로 하면 ‘맹세oath’가 된다. 그가 맹세한 시점부터 가스트만에게는 악이 무슨 철학이나 이익을 취하기 위한 충동의 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를 표현하는 수단이 되어버리고 만다. <판사와 형리>의 후속작인 <혐의>에서도 범죄는 허무를 행사하는 자유의지로 규정하는 바, 악의적 자유의지는 뒤렌마트의 추리소설에 대단히 중요한 요소로 기능하는 것 같다.
 이후 세월은 흘러흘러, 한스 베르라하는 콘스탄티노플과 프랑크푸르트에서 명수사관으로 성가를 높이다가 이제 고향인 스위스 베른에서 은퇴를 앞둔 경감으로 근무하고 있는 1948년 11월 3일. 트란바하 계곡 도로에 세워둔 푸른 메르세데스 안에서 정수리에 총을 맞은 베른 시경의 가장 능력 있는 형사 울리히 슈미트 경위의 시신을 순찰중인 산골 동네 경찰 알폰스 클레닌이 발견하고나서 기껏 한 짓이라고는 시체를 옆자리로 옮기고 직접 메르세데스를 운전해 베른 시경으로 가서 사망자의 상관 베르라하 경감에게 사건을 인계한 것뿐이다. 경감은 자기 보스 루치우스 루츠 박사에게 그저 마음에 둔 용의자가 있다는 말만 하고 현재 휴가 중인 찬츠 경위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지목해주기 바란다는 요청을 해 이제 베르라하 경감과 찬츠, 이렇게 두 명이 사건을 해결해나가기 시작한다. 여기서 40년 만에 나타나는 등장인물, 가스트만. 피해자가 죽임을 당한 이름 없는 산악지역 아래 넓게 퍼진 평원에 자리잡은 저택의 주인이자 슈미트 경위가 죽은 당일 밤에 호화 파티를 연 인물. 나중에 밝혀지지만 슈미트 경위는 무보수로 뮌헨대학의 교수를 하고 있는 프란틀 박사라고 자기 신분을 속이고 가스트만의 파티에 참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망 당시 외투 속에 연미복도 입고 있어서 그리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기도 하고. 그러나 경찰의 신분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사적인 목적으로 가스트만의 저택에 잠입해 결국 죽음을 맞았다고, 모든 독자들은 생각할 수 있는데, 문제는 상당히 진도가 나갈 때까지 우리의 주인공 베르라하 경감과 가스트만 사이의 악연에 대하여 모르고 있다는 점. 자, 이 독후감을 읽으신 분들은 이제 누가 슈미트 경위의 정수리에 권총을 발사했는지 감이 잡히시겠지?
 하지만 작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프리드리히 뒤렌마트다. 이이가 그렇게 쉽게, 마치 20세기 초 영국의 탐정소설 작가들과 비슷하게 결론을 내릴까? 가스트만이 40년 전에 맹세한 것, 경감의 코앞에서 저지를 범죄를 결코 베르라하가 입증하지 못하리라는 건 실현이 됐을까? 만일 그렇다면, 베르라하는 어떤 방식으로 가스트만의 맹세를 뒤집을 수 있을까. 그리고 뒤집었다고 해도 그게 반드시 베르라하의 승리로 볼 수 있을까? 그러나 이건 일반적으로 잘 쓴 범죄소설, 추리소설의 경우의 결론일 것이고, 뒤렌마트의 <판사와 형리>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공산주의자, 집시를 가둔 수용소 안에서 마취 없는 수술을 집행했던 고문torture광 넬레 박사를 다룬 <혐의>에서 작가는 특정 범죄행위보다는 사람 혹은 미치광이가 어떤 의식으로 범죄를 저지르는지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혐의>에서 뒤렌마트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 알베르 코엔을 읽는 것처럼 화려체와 강건체를 혼합해 범죄의 당연성을 웅변하는 미치광이 집단들의 성명을 발표하는데, 아, 그만 껌벅 넘어갔지 뭐야. 뒤렌마트의 희곡만큼 좋더라, 라고 말하기는 힘들어도 매우 색다르고, 색다른 만큼 재미있는 추리소설이다. 요새 말로 "짱"이다. 이이는 어쩌자고 쓰는 작품마다 이리 매력이 있는 걸까. 나는 얼른 뒤렌마트의 다른 책 한 권을 골라놓았다.


 

  1. cosmopolitan의 표준말이 ‘코즈모폴리턴’이란다. 여태 ‘코스모폴리탄’이라 썼다. 우리말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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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삼 시집 범우문고 53
박재삼 지음 / 범우사 / 198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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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시절에는 시인들이 이런 시를 썼다.


 이렇게 한 줄을 써 놓으니 더 말을 붙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하루를 그냥 보냈다. 슬픔. 아련한 슬픔.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에 유독 슬픔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건 어머니의 고향에서 시작한 유년시절부터 해변의 가난한 소년시절, 고독하고 궁상스러워 틀림없이 실연을 경험했을 청년시절, 서른이 넘어 시작했으나 3년 만에 작파한 대학시절, 1960년대 말만 해도 변두리 산동네였던 정릉에서 중년에 이르며 이후 노년에 이르기까지 고혈압, 위하수, 신경통 등에 시달리던 한 세상살이, 이 모든 것에서 비롯했으리라. 그러나 그의 시집에서 발견하는 슬픔은 피를 토하지도 않고, 취하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고통도 아니고, 자신을 산산이 쪼개는 자해의 모습은커녕, 무채 또는 유채의 아름다움으로 독자의 심상을 조각하고 만다. 시집을 열고 맨 앞에 나오는 시 <울음이 타는 가을 江>. 말을 보탤 필요 없는 박재삼의 대표시를 읽어보자.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江을 보겠네.


 저것 봐, 저것 봐,
 너보다도 나보다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江을 처음 보겠네.   (전문)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즉 한가을의 강이 이제 먼 길을 마치고 노을에 젖어 바다에 이르는 광경을 노래한 시다. 산골 물소리로 시작한 기쁜 첫사랑이 한 생을 다 마치고 이제는 독자에게 수수께끼로 ‘미칠 일’ 하나를 남겨두고 바다에 거진 와 가는, 소리 없이 흐르는 가을 강. 그것을 시인은 독자에게, 저것 봐, 저것 봐, 영탄하며 바라보기를 재촉하고 있는 시. 깊은 병도 아니며, 독한 고통도 아니고, 철철 흐르는 피도 아닌, 슬픔으로의 아스라한 아름다움이 시 속에서 보이지 않는가. 한 시절, 시인들은 이런 시를 썼다. 젊었다는 이유 하나로 가질 수 있는 슬픔이라는 특권. 아, 누군들 이런 것 하나쯤 가지고 살지 않았을까. ‘소리 죽은 가을江을 처음 보겠네.’ 마지막을 읽고 저절로 저려오는 가슴 속 아련한 그리움이여, 아름다움이여, 그리고 이미 저만치 지나간 나의 젊음이여. 썅. 하마터면 눈물 하나 떨어뜨릴 뻔했다.
 시인의 심미안은 봄바다 저쪽에 떠있는 섬 하나를 보고도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화안한 꽃밭 같네 참.
  눈이 부시어, 저것은 꽃핀 것가 꽃진 것가 여겼더니, 피는 것 지는 것을 같이한 그러한 꽃밭의 저것은 저승살이가 아닌 것가 참. 실로 언짢달 것가, 기쁘달 것가. (<봄바다에서>. 부분)



 라고 노래하며 만물이 움트는 봄의 바다, 그 위에 떠있는 섬을 보면서조차 저승살이를 떠올리는데 세상에, 그것이 반드시 언짢은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러더니 어려서 자신들을 아껴주던 한 여인, 남평문씨부인의 자살사건을 떠올리며 봄바다를 그 여인의 치맛자락으로 은유하고 있다.


  우리가 少時적에, 우리까지를 사랑한 南平文氏夫人은, 그러나 사랑하는 아무도 없어 한낮의 꽃밭 속에 치마를 쓰고 찬란한 목숨을 풀어 헤쳤더란다.
  確實히 그때로부터였던가, 그 둘러썼던 비단치마를 새로 풀며 우리에게까지도 설레는 물결이라면
  우리는 치마 안자락으로 코 훔쳐 주던 때의 머언 향내 속으로 살 달아 마음 달아 젖는단 것가. (같은 시. 부분)



 시인은 연애를 해도 애인한테 부끄러워 슬프다. 근데 슬픔의 근원인 부끄러움이 예상외의 장소인 <과일가게 앞에서> 촉발한다.


 사랑하는 사람아,
 네 맑은 눈
 고운 볼을
 나는 오래 볼 수가 없다.
 한정없이 말을 자꾸 걸어오는
 그 수다를 나는 당할 수 없다.
 나이 들면 부끄러운 것,
 네 살냄새에 홀려
 살戀愛나 생각하는
 그 죄를 그대로 지고 갈 수가 없다.


 저 수박덩이처럼 그냥은
 둥글 도리가 없고
 저 참외처럼 그냥은
 달콤할 도리가 없는,
 이 복잡하고도 아픈 짐을


 사랑하는 사람아
 나는 여기 부려놓고 갈까 한다.  (전문)



 재미있다. 시인이 과일가게 앞에서 수박이며 참외를 내려 보고 있는데 수박의 둥근 모습과 참외의 단 맛을 애인의 몸에 은유하고 있다. 애인의 맑은 눈과 고운 볼, 재잘거리는 귀여운 모습 대신 둥근 몸과 달콤한 맛이라는 살(로 하는) 연애를 연상함으로써 시인은 스스로 복잡하고 아픈 짐을 지었는데, 그게 부끄러워 이제쯤 내려놓을까 한단다. 이쯤 되면 시인에겐 세상살이 모든 것이 다 아픔이고 부끄러움이고 슬픔이어서 아름다움이려니.


 한 시절에는 시인들이 이런 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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