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이 왕이다 :

 

며칠 전, 오랜만에 얼굴 마사지를 받는 곳을 들렀다. ‘할인 이벤트’를 할 때 딸이 등록해 준 곳인데 쿠폰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마사지가 끝날 무렵 원장이 내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다. 어머니가 몇 번 입원한 적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물었을 것이다. 나는 이제 괜찮으시다고 답했다. 원장은 그동안 왜 그렇게 안 왔냐고 물었다. 내가 대답했다. 일이 많았다고.

 

 

이어서 말했다. 내 소원이 무엇인지 아냐고, 내 소원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내 일상의 평화가 깨지지 않는 거라고. 원장이 재밌다는 듯 하하 웃었다. 웃고 나더니 내 말에 공감을 표했다. 만약 원장이 이삼십 대였다면 내 말에 공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원장은 갱년기를 앓고 있는, 인생을 조금은 알 나이가 되었기 때문에 내 말 뜻을 잘 알아들었다. 원장은 자신이 병이 생겨 병원에서 큰 수술을 했고 그로 인해 조기 폐경이 된 일과 그 일로 우울증을 겪은 일에 대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내가 “평범이 왕이에요.”라고 하자 원장은 웃으며 맞는 말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평범하게 살기도 쉽지 않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렸다.

 

 

평범이 왕이라는 말은 그날 처음으로 내 입에서 나온 말이다. 내 속생각이 그랬던 모양이다. 내가 내 속생각을 읽은 날이다, 그날은.

 

 

내가 글을 쓰고 책에 열광하는 걸 보는 사람들 중 일부는 아마 이런 생각을 할 것 같다. 페크는 팔자 늘어졌네, 라고.

 

 

내가 팔자 늘어져서 친정어머니 집에 가서 쓰레기 버려 주고, 냉장고 살펴서 관리해 주고, 반찬은 얼마 남았는지 마음 쓰고, 당뇨병을 비롯해 몇 가지 병이 있으신 어머니 모시고 병원 가서 진찰을 받고 약을 타 오고, 입원하라는 의사의 명령 한마디에 마음을 졸이며 어머니를 입원시키고 뒷바라지를 한 게 몇 번. 이렇게 산다. 기억력이 갑자기 떨어진 어머니가 치매 증상은 아닐까 싶어 병원에서 검사 받게 하고 이렇게 산다. 이번엔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어머니의 간 수치가 높아졌으니 검사를 받기 위한 예약을 해 놓고 가란다. 내가 팔자 늘어져서.

 

 

내가 팔자 늘어져서 ‘평범이 왕이다.’라는 말을 하고 산다.

 

 

(반어법을 써서 웃자고 한 얘기이지만 다 사실입니당~~)

 

 

 

 

 

 

 

 

팔자가 늘어져서 내가 요즘 열독하는 책들

 


1.

 

 

 

 

 

 

 

 

 

 

 

 

 

강준만, <글쓰기가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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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스페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말이다.(47쪽)

 

“글쓰기의 최상은 잘 베끼는 것이다”라는 주장은 남정욱의 것인데, 나 역시 이 주장에 전폭적으로 동의한다.(48쪽)

 

남정욱은 오로지 자신의 통찰만으로 세상을 표현하고 싶다는 욕심은 ‘무식한 생각’이라고 단언한다. 나는 동시에 ‘유치한 생각’이거나 ‘위선적인 생각’이라고 말하고 싶다.(48쪽)

 

- 강준만, <글쓰기가 뭐라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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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글을 써야 좋은지에 대해 설득당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좋은 책이다.

 

 

 

 

 

 


2.

 

 

 

 

 

 

 

 

 

 

 

 

 

서민, <서민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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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을 베스트셀러만 읽는 건 좋은 습관은 아니다. 식당에 갈 때마다 “여기서 뭐가 제일 많이 팔려요?”라고 물어 봤자 도움이 된 적은 드물지 않은가?(372쪽)

 

베스트셀러 위주로 책을 고르고, 다른 이에게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는 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실패를 통해 성장한다. 짬뽕을 먹고 눈물을 흘려 봐야 자신이 매운 것을 못 먹는다는 걸 깨달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실패가 쌓이고 쌓여 자신만의 미각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많은 책을 읽다 보면 책에 관한 자신만의 심미안이 생긴다. 그래서 말씀드린다. 무조건 읽으시라고. (...) 처음에는 괜히 읽었다고 후회하는 책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중에는 실패율이 점점 떨어지게 마련이다.(373쪽)

 

- 서민, <서민 독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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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필요성에 대해 설득당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좋은 책이다.

 

 

 

 

 

 


3.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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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의 윤리학. 설거지는 밥을 하지 않은 사람이 하는 게 대체로 합리적입니다. 취식은 공동의 프로젝트입니다. 배우자가 요리를 만들었는데, 설거지는 하지 않고 엎드려서 팔만대장경을 필사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귀여운 미남도 그런 일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혹자의 삶이 지나치게 고생스럽다면, 누군가 설거지를 안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의 현대사는 19세기 유한계급 양반들이 게걸스럽게 먹고 남긴 설거지를 하느라 이토록 분주한 것이 아닐까요? 후대의 사람들이 자칫 설거지만 하며 인생을 보내지 않으려면, 각 세대는 자신의 설거지를 제대로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세대 간의 정의justice입니다.(40쪽)

 

-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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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잘 쓴 글의 본보기를 읽고 싶은 독자들에게 좋은 책이다.

 

 

 

 

 

 

 

4.

 

 

 

 

 

 

 

 

 

 

 

 

 

 

 

블레즈 파스칼, <팡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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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진실을 찾는 데 유용하지 않다면 적어도 자신의 삶을 규제하는 데는 유용하다. 이보다 더 옳은 일은 없다.(80쪽)

 

- 블레즈 파스칼, <팡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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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사유가 담겨 있는 글을 읽고 싶은 독자들에게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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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9-01-19 17: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크 님의 이 글을 읽으니 쇼펜하우어가 말했던 ‘초인종 소리‘ 생각이 다시 나네요.^^
* * *
˝나도 젊었을 때는 대문에서 초인종이 울리면 ˝야, 무슨 일이 있으려나 보다˝하고 기대했지만, 나이가 들어 인생의 참모습을 알게 된 뒤로는 똑같은 초인종 소리가 두려움을 느끼게 하여 ˝아, 무슨 골칫거리라도 생겼나?˝하고 혼잣말을 하게 되었다.˝ - 쇼펜하우어

페크pek0501 2019-01-19 21:21   좋아요 0 | URL
아, 오렌 님의 좋은 구절 뽑기는 거의 천재에 가깝네요. 글을 보면 탁 하고 스치는 책 구절이 있으시나 봅니다. 얼마나 독서를 많이 하시면 그럴까 헤아려 봅니다.
한때 쇼펜하우어 책을 정독한 저로서도 공감 가는 구절이 많았는데 여기 소개해 주신 글도 참 좋네요.
어릴 때 초인종 소리가 나면 반가운 손님이 오는 줄 알고 뛰어나갔던 생각이 납니다. 지금은 초인종 소리가 나면 귀찮다는 생각을 먼저 합니다. 그래서 책 구입을 할 때도 늦더라도 한꺼번에 받기를 선택한답니다. ㅋㅋ

좋은 댓글, 고맙습니다.

서니데이 2019-01-19 2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진짜 아무일도 없는 날, 평범하고 좋은 날 같아요.
그렇지만 가끔은 조금 더 행운이 가득한 날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어요.
여러 가지 일로 요즘 많이 바쁘시군요. 어머님이 오래 건강하셨으면 좋겠네요.
페크님, 오늘은 따뜻한 토요일이예요.
기분 좋은 일들 가득한 주말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19-01-19 21:26   좋아요 1 | URL
어머! 서니데이 님이 그런 걸 벌써 아시면 아니 되옵니다. ㅋ
저는 행운까지 바라지 않고 정말 평화로움을 바랍니다. 식구 중 누가 병원에 입원해 있지 않는 것, 식구 중 누가 아프지 않는 것, 무슨 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 이런 걸 바라고 살고 있네요. 사건이 없는 평범한 일상을 원해요.
예전에, 제가 너무 평범해서요, 이런 말을 하곤 했는데 얼마나 오만했던가를 깨닫고 있습니다. 평범이야말로 행복임을 알게 되었거든요.

내일 낮 3시 이후로 미세먼지가 다 날아간다고 합니다. 내일 친정에도 가고 많이 걸어야겠어요.
님도 기분 좋은 일들 가득한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stella.K 2019-01-21 14: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 장영희 교수도 비슷한 말을 했지요.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서.
암에 걸려 고생하다 고비를 한 번 넘기고 나자
기적을 체험하는 것도 좋지만 평범하게 아무 일 없이 사는 게
더 좋은 일이라는 뜻으로 쓴 글을 읽으면서
매일 그날이 그날 같다는 말은 할 말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

페크pek0501 2019-01-22 13:13   좋아요 1 | URL
정말 그렇네요. 예전, 어떻게 지내냐고 친구가 물으면, 그냥 그날이 그날이지 뭐, 라고 시들한 대답을 했는데, 그땐 그게 감사할 일인 걸 몰랐던 거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입원을 하고 또 갑자기 넘어지는 사고가 나서 긴장하고 응급실로 달려가고... 등등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게 되었죠.
인생은 길게 살아 봐야 뭔가를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죽을 때까지도 모를 무엇이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댓글, 고맙습니다. 굿 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