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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5년 2월 13일(금) 오후 2시-오후 6시

장소: 연세대학교 위당관 301호 

주최: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 

 

뒤늦게 후기를 남긴다. 시간이 지나서 쓰기 때문에 어떤 흐릿함이 있을 듯하다. 세 발표자(권명아, 정정훈, 쇼지 마키코)의 연구 중 권명아, 정정훈 선생의 연구는 진행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자 스스로 무슨 논박들이 가능할지 감안하고 있는 듯했다. 질문을 하면 그것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보다는 감안을 통한 추후 전개가 필요한 발표였던 것 같아서 두 연구자의 발표 내용에 대해서는 일부러 질문하지 않았다.

 

나는 이 자리에서 도시사대 쇼지 마키코 선생의 '평범한 재특회에서 보는 앎의 문제: 계속 질문을 만든다는 것'에 주목해보았다. 그리고 조금 다른 생각도 품어보았다. 일단 이러한 주목이 한국과 일본이라는 실제 거리에서 오는 언어상의 유리함을 상정하고 쇼지 선생의 연구물에 다른 생각을 표하는 것은 아님을 밝힌다. 그녀의 연구는 세 연구물 중에서 일단 가장 완성도가 있어 보였고, 시선이 예리했다. 물론 이렇게 느끼는 데에는 후지이 다케시 선생의 충실한 한국어 번역도 한몫했다고 본다. 

 

 

우리는 이미 '인류학적 글쓰기'가 갖는 몇 가지 장점을 알고 있다. 허나 그 장점이 관성에 빠지면, 단점보다 더 독한 단점이 되기 마련이다. 다른 연구자들이 차용하는 '인류학적 글쓰기'의 사고 형태상 하나의 정치/사회문제에서 나타나는 상징이 있다고 치자.

 

그리고 그러한 상징을 표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이 있다. 표층과 심층이 나눠지고, 인류학적 글쓰기는 현장성을 통해 표층에 나타난 정서가 과연 우리가 예상하는 일원화된 목적에 따라 나타나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래서 인류학적 글쓰기는 명랑을 내세운 집단에서 진지함을 찾아내고, 혐오를 내세운 집단에서 혐오와 상관없음을 찾아낸다. 인류학적 글쓰기의 사고 구조에는 이처럼 '유관'할 것 같은 구도를 '무관'으로 전환시키는 습성이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인기를 끈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이 테마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다카하라 모토아키의 『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를 미워하는 진짜 이유』그리고 쇼지 마키코 선생의 발표에는 '유관'할 것 같은 구도를 '무관'으로 전환시키는 습성을 따르고 있었다.

 

과연 혐오의 대상을 두고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이 그 일상 속에서 혐오의 대상과 아주 밀착된 관계를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세 저자들은 그 관계를 해체시키는 데 집중하고 있다. 관계의 끈을 널럴하게 만들어버림으로써, 그 널럴한 관계가 하나의 앎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지향하는 하나의 집단이 실은 그 이데올로기의 신도들은 아니며, 외려 자신 고유의 일상 속 신도들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차원에서 멈춰 있는 연구 경향에서 좀 더 나아갔으면 싶다.

 

고작해야 이것은 하나의 정치적 의지가 담긴 퍼포먼스 속에서 그 집단 속 구성원의 얼굴(사정)을 파악하는 스케치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인류학적 글쓰기 더 나아가 질적 연구에서 에쓰노그라피가 기대고 있는 문학적 글쓰기의 정서적 기운을 담아내는 참여관찰이라는 방법이 "참여묘사"(클리퍼드 기어츠)로 전환되는 지점에서 고민하게 만든다.

 

물론 "참여묘사"라는 용어를 통해 문학가/연구자라는 촌스러운 대립항을 만들고 싶진 않다. 나는 이런 두 정체성의 혼융을 바란다. 허나 어설픈 혼융은 연구자 본인이 갖고 있는 글쓰기적 재치와 재주로 주어진 현실을 탁월하게 조망하고 있는 듯한 착시를 일으킬 수도 있다.  글의 힘으로 인류학적 현실의 멱살을 끌어와 연구 대상을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그 현실 분석에 굉장한 의미 부여가 된 듯한 지점에서 나는 일시정지를 권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글이 연구자의 사고와 유/무관한가라는 지점은 따로 논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허나 적어도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책은 저자가 주목하는 사토리세대의 정서적 둥지에 기대어 그 정서에 안주해 자신의 너스레떠는 문체를 무기로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그 문체가 행사하는 힘이란 고작 하나의 둔중하고 진지한 집회 속 얼굴을 뒤져보면 명랑한 얼굴들이 있다는 유/무관의 관계 포착에 지나지 않는다(여담이지만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명랑'에 대한 강박이 있는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이날 쇼지 선생에게 "심정적 미안함"이라는 정서의 힘을 잘 씀(아마 이것은 질적 연구에서 가장 중요시여기는 '성찰'이란 점잖은 용어로 둔갑되어 있을 것이다)으로 자신의 연구물에 대한 논지의 결핍을 보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이날 나도 충분히 내 의사 표시를 못했기 때문에 질문과 답변은 어긋나고야 말았다. 이는 전적으로 질문자인 '나'가 의견을 다듬지 못해 발생한 어긋남이었기 때문에 쇼지 선생의 책임은 없다. 허나 기록으로 남겨둠으로써 이런 형태의 연구에 대한 지속적 문제제기는 하고 싶었다. 

 

정치 집단을 연구하는 차원에서 그 구성원의 일상성에 지나치게 주목할 경우, 이것은 우리가 뻔히 아는 정치 행동 자체의 연성화를 가져오는 것을 넘어 "너네 이거 몰랐지?"라고 하는 차원으로 심층적 형태를 제한시키는 누를 범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에 대한 연구자들 본인의 반박이 정치적 단죄라는 것은 이 연구에서 중요하다/아니다라는 이분법에 갇혀 있는 꼴이 되고 만다.

 

연구자 본인은 이미 연구문 초기에 이 연구는 단순히 하나의 정치 사건에 대한 윤리적, 도덕적 단죄가 아니며,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며 시선의 입체화를 천명하나, 그 입체화가 구성원의 '속사정'을 수집함으로써 나타나는 상대화에 머물고 있다는 점 또한 지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

마지막으로 이런 '현장성'이라는 감각을 글로 뛰어나게 푸는 연구자들의 연구물이 기존 출판계의 '르포르타주' 형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어떤 지점들이 깎아지고 다듬어지는지에 대한 고찰도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물론 연구물과 상업 단행본의 우열을 매기고자 함은 아니다.

 

허나 하나의 에쓰노그라피가 소위 '괴짜사회학'류에 포획될 경우, 우리는 에쓰노그라피의 '탁월한 글쓰기'라는 감각과 그 감각과 상관된 연구자의 관찰력, 그 관찰력이 조망하는 연구대상자에 대한 인상적인 면면만 얻을 수 있을 뿐, 정작 에쓰노그라피가 보려는 '추상의 힘' '이론적 토대물의 힘'은 놓치고 만다. 에쓰노그라피가 연구자 본인을 '저자'로 만들어주는 데 유리한 측면이 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그 유리함은 불리함으로 언제든 바뀔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