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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구원
자크 르 고프 지음 / 이학사 / 1998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종교라는 이데올로기가 하나의 직종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직종은 바로 '고리대금업'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종교가 종교 스스로를 사유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대상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 대상은 사람이며, 고리대금업은 사람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의 관계가 존재하고, 그 관계성의 정도가 종교 내에선 하나의 '일거리'로 떠오른다. 그 일거리란, 곧, 신의 섭리 안에 사는 '당신'을 영원히 신의 축복 속에 놓아둘 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축복을 주실 신의 넓은 아량과 은총에도 불구하고, 계속 세속적인 삶의 길들을 따르려는 '당신'에게 일정한 훈계를 할 것인가다.  

역사학자 루이 고척 같은 사람의 말처럼, 고대, 중세, 근대 같은 역사적 구분은 참 편의적이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많이 쓰는 시대적 구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역사적 구분이 가져다 주는 편의성에 기대지 말고, 더 심도있는 관찰과 추적을 통해, 세밀한 역사적 시간을 발견하라고 촉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찍이 단순한 '사건사'를 넘어 그 시대의 장기지속을 추동하는 요인들을 발견하고, 엄밀한 고증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시대상을 던져주려 했던 유럽의 '아날학파'의 작업은 그 일원이었던 자크 르 고프의 본 책에도 드러난다. 

우리가 이른바, 히스토리오그라피, 즉 '역사서술'의 측면에서 먼저 이 책이 갖고 있는 좋은 점을 본받는다면, 자신이 주목하려는 그 대상에 대한 분명한 집요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역사서술에 있어 '방만한 욕심'이 얼마나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학은 그 무엇보다 겸손함을 요구하는 학문이다. 자신이 아무리 유능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보려는 그 시대의 상 전체를 다 볼 수는 없다. 고로, 역사학은 '겸손함의 한정성'을 통해 보다 구체적인 문제의식으로 글쓰기를 하기를 요구한다. 자크 르 고프의 이 책이 가진 미덕은 '고리 대금업자'라는 그 하나의 포인트를 가지고, 일관되게 그 대상을 추적했다는 것이다. 르 고프는 이러한 추적을 통해, 일정한 중심을 잡고, 그 시대상의 확장을 꾀함으로써, 자신이 중세 전체를 다 이야기하려는 듯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또한, 히스토리오그라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 글쓰기 일반에서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역사서술'의 논리'다. 고리대금업자가 왜 중세 시대에 그렇게 성직자들의 미움을 받아야 했던 것일까? 그 미움을 추동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표는 역사서술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역사서술의 기초를 논할 때, 자신이 궁금한 역사적 문제의식을 하나의 주제어가 아닌 일정한 문장, 그리고 그 문장 속에서도 의문문 형태의 가설로 표현해보길 권유한다.  고로 르 고프의 본 책의 키워드인 고리대금업자가 당시 중세 시대의 종교 장 안에서 어떻게 초기에 인식되었고, 왜 고리대금업자가 점점 더 종교적 질타에서 벗어나, 보다 완화된 부정적 인식의 틀 안에속할 수 있었는가? 그것이 바로 역사서술의 논리로 풀 수 있는 문제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뒤르켐'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종교라는 이데올로기는 성과 속으로 세상을 구분한다. (이는 지금도 종교가 쓰고 있는 구분법이다.) 이러한 성과 속의 딜레마는, 결국 종교와 인간의 문제인데, 인간이 접촉하고 있는 사회라는 곳이 과연 성과 속의 온전한 구분법을 그대로 용인하는 가의 측면이다. 종교는 바로, 사회 속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가 그러한 사회의 움직임을 거리를 두는 것은 일종의 '인식론적 이상'일 뿐이다. 종교는 스스로를 믿는 인간의 '물질성'으로 인해 끊임없는 혼돈과 싸워야 하고, 그러한 혼돈을 일정한 질서 안에서 잠재우려면, 교화가 필요하고, 회개의 동원이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르 고프가 연구한 중세 시대의 직종 중, '고리대금업'을 하는 사람들의 행태는 종교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본보기였다. 무엇으로? 그것을 혼냄으로써 말이다.  

하지만, 갈수록 발전되는 사회의 형태 속에서, 그 형태가 계속해서 인간의 물질성을 강조하고, 그 물질성이 결국 인간과 인간의 교환적 체제라는 자본주의의 길을 걸어가야 할 때, 그러한 속성을 간과할 수 없는 종교는 고리대금업자에 대한 인식을 어느 정도 열어두게 된다. 그래서 발생한 하나의 종교적 아이디어는 바로 '연옥'이다. 일을 하지 않는 당신이여! 그냥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다가, 당신이 빌려준 돈의 이자를 챙겨먹는 그 불쾌한 직업을 당장 때려치울지라!하는 준엄한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지고, 그래..요즘 세상에..그런 일들도 일어날 수 있지 뭐..걱정하지말거라...너 예전에는 바로 지옥의 뜨거운 불구덩이를 맛봐야 했지만,,,이제는 천국을 갈 수 있는 중간 방 정도는 사후에 예약받을 수 있어..연옥이라는 곳 말이야. 르 고프는 고리대금업의 자본주의적 속성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자본주의적 속성을 지연시켰는가에 주목한다. 그리고 고리대금업이라는 직종이 추후 유럽의 자본주의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그 의의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맑스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신의 탄생에 대한 그의 말. 정말 인간이 소망하려는 그 형상이 바로 신을 탄생시킨 것은 또 아닐까. 오늘날 '돈'이 신이 된 세상에, 종교는 정말 자신이 신봉하려는 그 가치를 신으로 내세우고 있는가. 그 가치에 개입된 물질적 가치는 단순히 신의 강건한 모습을 보완하려는 도구일 뿐인가. 오히려 그 물질적 가치가 더욱 강조된 종교를 우리가 더 자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지나친 지적일까? 돈과 구원. 이 분명한 책 제목 만큼이나, 분명한 메시지가 책 안에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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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 워리어 전투일지 2000-2009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3
한윤형 지음 / 텍스트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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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카메론 크로우 감독의 <올모스트 페이머스>란 작품이 있다.  (잠깐 논외로 빠지지만, 카메론 크로우 감독의 최고 작품은 내가 보기에는 <제리 맥과이어>보다는 바로 이 작품이다. 이 작품의 지적 감수성이라고 할까. 감독이 사회에 던지려고 하는 메시지의  경로들이 차분하고 아름답다.)아마 한국에서 영화 좋아한다는 사람들은 다 봤을 작품일 것이다. 감독의 자전적 고백이 강한 이 작품은, 미국에서 유명한 대중문화잡지인 <롤링스톤즈>에 글을 기고하게 된 주인공 소년이 자신이 취재하게 된 스틸워터라는 밴드와 동행하면서, 갈등을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갈등의 내용은 간단하다. "이 밴드 열라 좋은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구려? 왜 이리 속들이 지저분해? 이렇게 글쓰면 안되는데..좀 구라를 쳐? 아니면 본 것 그대로 쓸까? 아, 그렇지만 그대로 쓰기엔 너무 친해졌는데.." 소년은 글을 쓰려고 타자기 앞에 앉았지만, 글의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소년은 스승으로 모시는 한 대중음악평론가에게 전화로 고민을 털어놓는다. 당시 이 역할을 <카포티>와 <다우트>의 주연이었던 필립 셰이무어 호프만이 맡았는데, 인상적인 대사를 뱉는다. " 정직하고, 잔인해라.." (영어 대사 그대로 직역하자면,,자비롭지 말라고 했던 것 같다..)  

한윤형. 내가 그를 알게된 것은 한국 지성계의 '명문가'로 칭송받던 고종석이 <씨네21>에서 질투가 날 정도의 글솜씨를 가진 젊은이가 있다고,, 그리고 그 젊은이 중 한 명이 한윤형이라고 (지금은 사라진 코너)' 유토디토'에 고백한 글 때문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유토디토'의 마지막을 한윤형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크래프트에 비유하여 '유토디토'의 사라짐을 아쉬워했던 것은 고맙고, 또 고마웠다. 또 돌이켜보면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기록'과 '보존'을 못하는 한국 사회에 대해 늘 불만을 가지고 있던 나였기 때문에) 

나도 한윤형과 같은 '20대'다. 한윤형을 비롯하여, 노정태, 김현진 등과 같은 사람들의 글쓰기를 볼 때마다, 대학'교'에서 '원'으로 갈아타고, 뭔가 사회에 의미있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나 엄청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니 엄마, 아빠, 친구들아 나 함부로 건들지 말그래이. 안 그러면 느그들 손해다!"하고 으르렁거리는 내 모습이 챙피하고, 나약하기 그지없다. 이 공간을 빌어, 한국 사회를 비판하자면,,그 가운데서 가장 썩은 곳 중에 하나가..당연 '대학 사회'이고, '대학원 사회'임은 나는 감히 '진실'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은 공부 좀 한다는 사람들가운데,,(이른바 '식자층'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가운데), 나름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사회에 대해 목소리를 내려는 친구들에게 "어이,,자네 참 글이 좋은데말이야..이런 이론이 아쉬워. 이런 학문적 구조를 보강하면. 자네 대성할 것 같다고" 결국 '남 도와주는 척'하다가, '자기 잘난 척'으로 끝나는 모습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한윤형의 이 책에도 '먹물'을 뿌리지 않기를 당부하는 바다.  

이런 생각을 언급하는 것이 내가 소위 한윤형의 사주를 받은 '서평청부업자'라서가 아니다. 난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이론이란 분명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지금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문제는(아마 많은 사람들이..)..이론을 '영향'이 아닌 '기능'으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이론이란 알면 끝!인 세상 속에서, 자신만의 이론과 개념, 시선을 만들어보려고, 그것을 그 나름대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부딪혀본 한윤형의 분투기는 인상적이다. 나의 주요 공간은 연구실이지만, 나는 현장의 복잡다단함을 '이론'으로 다 해결해버리려는 사람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솔직해지겠다. 경험은 분명 우리 삶의 스승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어떤 '현장 환원주의' , '광장 환원주의'는 아니다. 나에게 '경험'이란, '생각할 수 있는' 경험을 포함한다. 눈치 빠른 사람은 "아, 이 사람 자기가 속한 20대들을 향해 꼰대들이 늘 말하는 20대들 왜 이리 생각이 없어? 하는 그 주장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거야? 그런거야?라고  하겠지만, 그게 아니다. 생각은 누구나 하는 것 같았다. 다만 한윤형이 본 책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말을 하는' 능력에 대해 우리는 보다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맥락에서 한윤형의 글쓰기는 '논리'라는 것이 가로새겨진다.  말을 하는 논리, 글을 쓰는 논리. 그 엄청난 '방법서'가 나왔음에도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그것은 내가 보기에는 시도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못 타는 사람이 가장 자전거를 빨리 탈 수 있는 것은 결국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지는 게 좋다는 이야기를 다 알 것 같다. (나도 어릴 적 자전거를 사서 타고 다녔지만, '자전거 탈 때 넘어지지 않는 법'이란 설명서를 같이 준 가게는 없었던 것 같다) 자전거를 잘 탈려고, (그것도 한 번에!) 이리저리 재는 사람에게 돌아오는 것은 "차라리 대일밴드 붙이는 한이 있더라도,,생각보다 넘어지는 것이 아프지 않다는 것을 알고..그냥 한 번 넘어질 때까지..자전거 타 볼 걸"일 것이다. 한윤형은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물론 많이 들어보긴 했지만) 삶의 상처를 강조하는 것 같다. 그 상처를 누구의 탓으로 돌리는가에 앞서, 아니 그것을 뛰어 넘어, 나의 상처와 연관된 모든 현상들을  글로, 말로 풀어보기. 그 시도를 통해 우리는 삶을 더 진솔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엄중하고 탁월한 논리는 결국 자신의 성실성에 기반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일종의 '야망'도 있어야하리라.

문학평론가 권명아 선생님이나,,김우창 선생님이 우리 시대 '젊음'에 대해 이야기 할 때..자주 썼던 표현..'시행착오를 겪을 권리', '방황할 권리'가 없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사실 한윤형이 경계하는 386식 발언일 수도 있지만),,그러한 권리들의 복원 혹은 추구를 보다 '자기식'대로 지향하는 것은 필요한 자세라고 본다. (비단 이러한 제안이 나를 어설픈 낭만주의자로 몰지 않기를! 나는 이 서평을 보는 당신들의 내면과 지성을 존중한다. 고로 내 지적이 마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과 같은 아방가르드를 한국 사회에 들어오려는 게냐!라고 묻는 것이라면..그건 아닌 것 같다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이 책을 너무 '자기계발서 ver.'로 몰고 갔나? 아니다. 이 책의 진가는 자기 세대에 대한 통찰과 더불어, 한 사회를 살아가는 젊은이가, 어떤 경로를 통해 글을 쓰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것이 사회와 이어질 때 어떤 정기능과 역기능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자기해부학적' 기술에 있다. 그리고 그런 기술 속에서 저자는 요즘 세대들에게 빈곤과 부재의 대상이라는 '정치'를 가져온다. 아까 앞에서 영화 속 대사를 통해 언급한 부분이지만, 이 책의 미덕은 '정직하고 잔인하다'는 점이다.  

좀 깊이 생각해보자면, 나는 우리 세대의 지적인 영토와 그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옛날에 대학교에서 전공수업을 듣다가 흥미로운 멘트가 교수님에게 나왔다. "요즘 세대들은 본받을 지적인 스승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죠..우리 때는 백낙청..리영희...신영복...김우창..이 있었는데 요즘은 누굴 따르죠?" 내가 당시 손에 든 책이 흥미롭게도 한윤형의 글에 자주 언급되는 강준만 교수의 것이었다. 리영희 선생님이 강연을 하러 왔을 때가 기억난다. 리영희를 추억하는 많은 할머니, 아저씨들이 강연을 보러 왔지만, 정작 그 자리를 내어준 대학교 내 학생들은 "리영희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야?"라는 식으로 멀뚱멀뚱 쳐다본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책 조금 본다는 친구들, 수업 조금 열심히 듣는다는 친구들은) '강준만'하면, '진중권'하면..알았다. 그렇다. 1980년대 이후에 태어난 우리 세대에게 강준만은, 진중권은 그리고 여전히 '어떤 존재'로 남아있는 것 같다. 저자는 그런 지적인 영향력을 자신의 삶 속에서 언급해주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언급은 지루한 지적 계보의 형성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글쓰기 인생 속에서 '야릇하게' 담겨있어 그리 부담이 없을듯하다. 

행여 이러한 리뷰가 일부 지식인들에게 '반지성주의'를 외치는 것이냐! 혹시 한윤형의 책이 그런 것이냐라고 간주될 수 있을 위험, 혹은 위협이 우려되는데, 나는 '지성'을 좋아하며, 이 책은 거칠고 잔인하지만,,온갖 포장과 미화에 매몰되어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글을 썼는지도 모르는 이들의 글쓰기 행위를 반성하게 하는 에너지가 있음을 아울러 밝힌다.  

책 속 사진만 보면, 그는 말년 병장의 포스와 일부러 가난뱅이 행세를 하며, 조선의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는 어진 암행어사 같은 기운도 보인다.(너무 과잉 해석인가^^?)  

이 책을 덮고 나면,그에게 풍기는 '독설'의 기운도,,혹은 누군가를 닮고 싶어하는 그 '애정'의 기운도..결국 '사람을 챙기고 가려는 의지'가 뒷받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은 흐뭇함이 남는다.

사람을 챙기고 가려는 의지. 내가 요즘 대학원생이라는 그 가냘픈 '지적 호칭'아래,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혹시 (사람이 말살된) '학문-폭력'을 저지르고 있지 않는가라는 고민하는 가운데, 사람을 챙기려는 의지를 나와 같은 세대의 모습 속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반갑고 또 반가운 일이다. 결국 배움은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가가야 하는 게 아닐까. 이 책의 인연도 그렇고, 우리의 삶도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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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잡아라
마크 카츠 지음, 허진 옮김 / 마티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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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이란 때론 우리가 전혀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았던 존재들에게 감사 인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마크 커츠의 『소리를 잡아라』또한, 앎의 이러한 속성을 체감할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앎의 대상은 소리의 존재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저자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음성 매체들의 존재에 대한 경험적 기술과 그것을 바탕으로 이뤄진 이론적 도해의 풍경을 선보인다. ‘녹음의 사회문화사’라고 요약할 수 있는 본 책에서 저자는 기술의 사회적 구성(social construction of technology: SCOT)이라는 관점을 지지하며, 기술과 이용자 간의 상호성에 주목한다. 저자는 녹음이 단순히 소리를 담는 것이라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녹음은 소리를 담는 것을 뛰어 넘어, 소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하나의 예술적 산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포노그래프 효과’라고 소개된 저자의 독창적인 개념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축음기의 출현, 디스크와 예술가들의 생산 양식 변화, DJ 배틀이 가져다준 문화적 변혁, 디지털 샘플링 예술이 갖고 있는 정치와 윤리 , 사이버 공간에서의 음악 감상이 몰고 온 감각과 자본, 윤리의 문제를 관통하고 있다.

녹음을 통해 음악가들은 소리를 담을 수 있게 되었고, 우린 ‘담긴 소리’를 자유롭게 들으면서 거리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저자의 견해를 따르자면, 녹음을 통해 소리는 진정 ‘사물’이 된 것이다. 소리가 사물이 되는 순간, 소리에 반응하는 우리의 감각은 오늘날 우리의 감각과 윤리의 만남을 도모한다. 그것은 자본의 매개적 기능 때문이다. 물론 공연에서 직접 뮤지션들의 공연을 보는 것은 감각 - 자본 - 윤리의 관계가 비교적 투명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입증하지만, 녹음을 통해 소리를 저장할 수 있게 된 현대 사회에서, mp3는 공개되어 있는 ‘어둠 시장’의 교환물로서 이는 곧 청각의 권리가 양심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이 문제를 보다 심층적으로 논의한 것이 본 책의 8장 : 사이버 공간에서 음악 감상하기다.) 그러나, 자칫 이러한 갈등 구도를 진부하게 느낄 수 있는 현대 문화인들에게 이 책이 줄 수 있는 귀한 소리는, 축음기가 출현하면서 나타난 가정 내 생활 방식의 변화, 스트라빈스키를 비롯한 유명 음악가들이 레코드 길이에 맞춰 자신의 곡 분량을 정하고 작곡했던 이야기, 오늘날 대중음악 생산자들이 샘플링을 통해 이미 존재했던 과거의 ‘음- 조각’들을 변용, 접합하는 데서 부딪히는 윤리적 논란들일 것이다. 

 
녹음이 가능해진 것이 신기한 시대를 지나, 우리는 이러한 신기함이 아무렇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이 던져 준 앎의 코스를 뚜벅뚜벅 걸어가다 보면, 지금 내가 글을 쓰며 듣고 있는 권순헌 연주의 <슈만 : 어린이의 정경 중 트로이메라이>와 팻보이 슬림(Fatboy slim)의 <Praise you>를 어떻게 ‘연달아’ 들을 수 있었을까라는 ‘천진난만한(?) 감탄’을 할 수 있을 것 같다.1) (물론 책을 읽는다고 해서 이 감탄의 세기가 기립박수를 칠 정도는 아니다.^^ 암튼, 이 책이 던진 ‘녹음’이란 개념은 예술을 통해 묶인 우리들의 지식과 감성에 어떤 일깨움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책 제목 그대로 소리가 인간의 그물망 안에 들어옴으로써, 소리가 직조해내는 그물망의 색과 형태는 보다 다채로워 진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다채로움 속에서, 소리의 사물화가 건네는 변혁의 기운은 우리에게 또 다른 감성의 분할을 요청한다. 우린 이 요청에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이미 반응하고 있으며, 그 반응의 민감함을 보다 잘 인식하는 세계의 예술가들은 삶의 희로애락을 창조적으로 그리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이 책을 덮고 나니, 문득 영화 <봄날은 간다>의 상우가 생각난다. 상우가 담고 있던 그 소리의 의미는 무엇일까.


1) 녹음을 통해 이뤄진  ‘연달아 듣기’의 의미는 슈만과 팻보이 슬림의 노먼 쿡 사이에 생성된 생과 사의 경계를 포함한다. 즉, 슈만은 죽었고, 노먼 쿡은 살아 있다. 이는 국적의 경계도 포함한다. 슈만은 독일 사람이고, 노먼 쿡은 영국 사람이다. 녹음이 없었다고 가정할 때, 우리가 이러한 조건 아래, 음악을 연달아 듣기 위해 쏟을 원시적 노력은 그야말로 끔찍하다. 
 

 이 글은 미디어아트 웹진 앨리스온(http://www.aliceon.net/)에 기고한 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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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짜한 스타와 예술가는 왜 서로를 탐하는가
존 A. 워커 지음, 홍옥숙 옮김 / 현실문화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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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키워드인 '명성'은 문화 ㆍ예술사회학이 추구하는 학문적 성격에 상응한다. 좀 잔인하긴 하지만(?) 명성은 분명 그것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주체들에 의해 매겨진 하나의 가격이라고 할 수 있다. 명성은 '관계지향적'이다. 이러한 관계지향성은 문화 ㆍ예술사회학에서 찾아내려는 예술세계 내 '의미의 망'을 불러낼 수 있는 요인이자 결과이기도 하다. '의미의 망'은 피에르 부르디외의 '문화자본론'으로 설명될 수 있고, 때론 하워드 베커의 '예술세계론'으로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부르디외나 베커가 설명하는 두 이론은 차이가 있지만, 예술세계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이 지니는 특성을 지향한다. 이것에 충실하자면, 예술가는 독존적일 수 없다. 예술가가 바라보는 풍경, 혹은 예술가를 둘러싼 풍경에 문화 ㆍ예술사회학은 귀를 기울인다. '예술'이 '예술세계'로 명명되었을 때, 그 효과는 세계 내 존재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소환한다. 예술세계의 각 요소에 대한 소환은 문화를 매개하는 사람들, 예술세계의 고유성을 지켜내는 제도, 대중과의 소통 방식을 도모하는 매체 및 (예술을 하는 데 중요한) 현대 기술의 특성 들을 문제화한다. 그렇다고 이 문제화의 과정이 예술가를 둘러싼 맥락 찾기에 매몰된 나머지, 예술가의 자율성에 기인한 예술적 창작의 영역을 훼손해선 안 될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우리가 바라보는 한 예술가의 작품 속 특성을 파악하고, 그 특성이 표출하는 주제의식 등을 유념하면서, 그 주제의식을 둘러싼 물질적, 비-물질적 조건 등을 배치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워커가 그려내는 스타와 예술가의 상관성은 오늘날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상관성이 빚어내는 접점을 밝힌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넘어선 일정한 '전략'이 동반된 커뮤니케이션 행위와 그 행위로 이어진 '관계의 고리'를 그릴 수 있게 된다. 본 책은 스타와 예술가들의 내면에 숨겨진 일정한 '야심'이 드러나는 스타일리쉬한 예술 행위에 주목하면서, '의미의 망'이 직조해내는 관계성들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재구성의 효과는 우리가 “연기 혹은 노래 이외 할 줄 아는 게 있어?”라고 무시해 왔던 스타들의 모습에 대한 일정한 놀라움을 표시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대중 앞에서 보이고 싶어하는 모습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이뤄지는지 알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또한 예술가의 입장에선 그들이 갖고 있는 '사회자본', 그것이 형성하는 관계의 경계가 아우르는 폐쇄성 및 유연성이 자신의 이름을 견고히 하는 데, 또 널리 알리는 데 어떤 작용을 하는지, 인식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사회자본은 일정한 '그룹'을 형성하여, 서로의 미적 스타일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고, 그 스타일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매개가 된다. 이는 예술을 소비하는 일정한 계급층들의 담화적 공간을 만들기도 했다(대표적으로 '살롱'문화가 있다). 이처럼 문화자본과 사회자본이 주축이 되어 형성된 예술세계는 예술을 생산하는 예술 생산자, 이들의 작품을 알리고 평가하는 문화 매개자, 그리고 이를 소비하는 예술 소비자들의 관계를 되짚어보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의 이음새와 강도를 관통하는 것은 본 책이 강조하는 대중문화의 상관성에 따르자면, 대중문화를 형성하는 방식, 매체의 힘과 그것을 반영하는 예술 생산 방식의 특이점들과 결부된다.


'사회과학자'의 감수성을 체득하길 좋아하는 나에게 '풍경'이라는 개념이 선사하는 효과는 '내가 무엇을 바라보는가'를 넘어, '내 주위를 둘러싼 풍경의 이채로움은 과연 무엇인가'에 주목하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주목은 다양한 '의미의 망'들을 만들고, 풍경의 개념을 다채롭게 한다. 풍경을 문화에 비유해 보았을 때, 우리는 문화가 표층과 심층이 겹친 '중층 구조'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그림을 통해 풍경의 표면을 보며 감탄하지만, 연구자로서 가지는 혹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로서 가지는 특유의 지적 감수성은 풍경의 그 표면을 넘어선 심층의 의혹과 신비함을 매만지게 한다. 중요한 것은 표층과 심층의 관계 인식과 조절이다. 그리고 배치다. 연구자들은 또 다른 풍경을 디자인할 준비를 해야 한다. 예술의 자율성과 그 자율성을 형성하는 사회적 조건들을 어떻게 매만질 것인가. 그 이상적 감촉을 위한 학문적 실천에 대한 고민이 더욱 필요한 때다. 

 
- 이 글은 미디어아트 웹진 앨리스온(http://www.aliceon.net/)에 올려진 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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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정치의 겉과 속 - 한국 정치는 왜 늘 복마전인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를 살까, 아니면 강준만의 신간을 살까 하다가, 결국 후자를 선택했다. 강준만의 다작에 스며든 글쓰기-메커니즘이 이제는 좀 눈에 보이는 듯한데, 그의 글을 꾸준하게 접한 지도 햇수로 9년 정도는 된 듯하다. 이 책은 내 눈치로 보자면, 그가 근래에 냈던 [지방은 식민지다]의 기운이 잔존해있다. (참고로 아직 나는 그 책을 사 보진 못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비판하는 서울 일극체제에 대한 이야기는 제법 익숙한 테마다) 강준만은 언제나 그렇듯이 이론의 식민화에 매몰된 학계를 비판하고, 현상마저 외국의 것을 좆아,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지적 경도를 준엄하게 꾸짖는다. 그리고 그 범주 안에 정치와 미디어가 결속되어, 미디어가 정치를 너무 안일하게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라며, 그가 속해있는 커뮤니케이션학 본령의 사명에 대해 숙고할 것을 제안하는 어조로 글은 정리가 되어 있다.

강준만은 특히 정치판에 대한 한국사회의 엄청난 냉소에 대하여, 무조건 정치인만 힐난하고, 비난하며 살아가는 대중들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정치인이 작동하는 정치 장의 메커니즘을 알아야하며, 외국 이론의 수입과 무비판적 적용으로, 늘 ‘신선한 현상’만을 좇는 한국 학문의 현실을 바로 깨닫고, 지성인들이 그 어떤 편견과 오인을 초월하여, 우리나라 상황을 직시할 수 있는 지적 토대가 만들어져야 함을 역설한다.

이론의 식민성과 탈식민성에 대한 논의는 사실 학계 내에서 그동안 엄청난 말과 글들이 쏟아졌고, 강준만은 그것을 주장한 대표적 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마 그가 지향하는 논조의 대상을 볼 때, 그러한 학계의 솔직한 풍경을 대중들에게 따가운 장면 그대로 전달하려고 노력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특히 이번 책의 중심 테마인 ‘정치’와 관련되어, 그가 나의 편견을 뒤집은 것은 한국이야말로, ‘정치 과잉 사회’라는 것이다. 투표 참여율 저조와 젊은 세대들의 정치에 대한 혐오 및 정치인들의 변함없는 무능함 같은 것으로 대변되는 우리나라 정치판에서, 그것으로 말미암은 부정적 이미지들은 괜히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 ‘최소 국가’가 아닌가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강준만의 논리에 입각하자면, 정말 ‘이미지’일 뿐인 것이다. 강준만은 현미경을 들고 우리나라를 대상으로 올려, 한국 사회의 현실을 해부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다보면, 한국 사회는 정치에 있어 정말 뜨거운 나라이며, 지금 우리가 정치를 어둡게 바라보는 것도, 어쩌면 민주화 이후의 또 다른 소산이자 효과 중 하나로 봐야함을 주장한다.

나는 요즘 ‘정치사회학’이라는 과목을 수강하면서, 과연 우리 시대에 정치라는 것은 무엇이며, 옛날부터 정치라는 것은 어떻게 이야기되어 왔는가라는 역사적 관점에 관심이 많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강준만이 늘 지향하는 ‘역사적 요인과의 접촉과 이로 인한 현재와의 지점 만들기’가 여전히 드러난 저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준만의 매력은 역시 ‘지적 안전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다. 그는 지식의 교전과 충돌을 좋아하는 학자 같다. (나는 막스 베버와 게오르그 짐멜의 견해를 우리나라에 적극적으로 소개해 준 김덕영 교수의 <논쟁으로 보는 사회학>을 읽고, 강준만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는 정말 논쟁을 싫어하는 게 아닐까. 논쟁으로 인해 서로가 주고 받는 지적 자극의 효능에 대해 너무 무심한 것은 아닐까.) 강준만은 꼭 좌와 우로 보려는 시각, 한국 사회의 이념과 파벌(이 역시 그가 짚는 영원한 한국인 코드이자, 그가 늘 강조하는 주제다)의 형성이 빚어내는 ‘중간파’들의 억울한 희생을 꼬집는다. 꼭 좌와 우, 보수와 진보 어느 한 쪽에 치우쳐야, 논객도 논객 대접을 받고, 현실 정치인도 현실 정치인다운 우리나라의 정치 장 가운데, 과연 대중들은 어떤 사고를 가지고 그들과 우리를 경계짓는가도 이 책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포인트다.

강준만이 결국 결론으로 내세우는 것은 ‘정치교육’의 일상화다. 나 역시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 어떻게 하면, 나를 포함한 우리 20대들이 정치를 너무 잔인하게 혹은 그릇되게 보지 않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책의 결론에서 느껴진 기운을 예전에 읽었던 어느 논문 속 기억나는 한 구절로 마무리하며 글을 맺고 싶다.

“민주주의가 대화를 만들어간다는 생각은 중요하지만..대화가 민주주의를 만들어간다는 생각은 더욱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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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4-05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 전에 나온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에서도 우리나라 보통사람들이 정치인들을 욕하는 태도를 비판한 내용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논쟁으로 보는 사회학>에서는 평소 관심이 있던 칼 람프레히트와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자들이 매우 자세히 소개되어서 좋았습니다.방법론 논쟁은 경제학에서도 취급합니다만 요즘 경제학에서는 아무래도 100년 전의 독일,오스트리아 쪽의 지적 풍토는 소홀히 다루는 것 같지요? 방법론 논쟁은 나중에 다른 학자들의 저서로 한 번 더 공부해 볼 생각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09-04-06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경제학쪽은 전혀 모릅니다만...노이님께서 말씀해주신 경제사상사 논쟁 부분은 어렴풋이 기억나는군요..저는 요즘 막스 베버의 <경제와 사회>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도 역시..제게 논쟁형 인간은 위르겐 하버마스로 남는 군요. 제가 과학사회학쪽도 관심있는 편이라, 칼 포퍼를 둘러싼 논쟁도 흥미로웠던 것 같습니다.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4-06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제와 사회> 번역본이 나왔습니까?

얼그레이효과 2009-04-06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이에자이트님 반갑습니다. 제가 알기론 나남 출판에서 번역본을 출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있는 동네 서점에도 꽂혀 있더군요. 알라딘에 찾아보니 번역본이 있네요.

노이에자이트 2009-04-07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그렇군요.열심히 공부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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