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1


영화 <인사이드 르윈>를 본 뒤 해외 리뷰를 쭈욱 읽었다. <애틀랜틱>의 팀 웨인라이트가 쓴 글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웨인라이트는 '르윈이 곧 고양이다'라는 이론을 내세우면서, 르윈과 고양이의 병렬적인 위치를 영화 장면을 통해 설명해나간다. '정체성'과 '진정성'을 되묻는 영화임을 강조하면서 그가 꺼낸 단어 중 인상 깊었던 건 '고양이성cat-ness'이었다. 

이 말은 정식 용어라기보다는 하나의 조어라고 할 수 있겠다. 


#2

구글을 통해 검색해보니 윅셔너리에서 고양이성이 무엇인지 정의한 인용문이 나와 있었다. 시인이자 교육자 정치인이었던 레베카 맥클러너헌의 에세이에는 '고양이성'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녀가 보기에 고양이성이란 주의 깊고, 내면적이며, 나름의 질서가 있되 그것을 잘 드러내지 않는 자기만의 영역이 있는 것을 강조하는 성향을 뜻한다. 그녀는 사람에게 고양이성이란 것이 다분히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그녀는 참고로 '개성dog-ness'이란 것도 정의했는데 개성은 충동적이며 보다 육체적인 것에 민감하며 사회적인 성향이라 말한다. 이 구분이 반드시 정확하다곤 볼 수 없다. 사실 이는 이론이기보다는 하나의 비유로서 우리는 이미 문학 작품 등이나 잡지 속 칼럼을 통해 이 고양이성에 대한 언급을 봐왔다.


#3

한때 트위터에 왜 이렇게 고양이가 사진으로 많이 올라올까? 궁금한 적이 있었다. 고양이와 인간, 이를 엮어주는 미디어 마지막으로 이 3항을 통해 조성되는 '감정 환경'. 다시 <애틀랜틱>에 실린 팀 웨인라이트의 영화 리뷰를 읽으면서 이 감정 환경과 영화 <인사이드 르윈>의 몇몇 장면을 복기해봤다. 화장실에 들어간 르윈 데이비스가 화장실 낙서에서 본 "What are you doing?"


영화는 우리네 삶에서 가장 멀리하고 싶으면서도 때론 가장 가까이 있으면 하는 두 말을 르윈 데이비스의 여정을 통해 꺼내고 있다. '이게 사는 건가' 그리고 '여기까지인가 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설레임, 서문 2화 -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 38호 편집장 칼럼을 읽고

(1화에 이어서) 

 

 

  

 

 

 

 

패션과 예술의 결합. (과장을 좀 보태서) 이러한 패션잡지의 매 페이지는 시각문화의 첨단을 뽐내려는 전시자의 공간이다. 이 공간 하나하나가 모여  '이 달의 박람회'를 개최한다. 패션은 전시장을 벗어났고, 예술은 스스로 늘 정의내리고, 누군가에게 정의내림 당하는 그 예술적이라는 표현 안에서 일상을 꾸민다. 여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저 극에 달한 주관의 벽도 있지만, 사회에 관심 많은 사람들에게 참여를 도모하는 보편적인 메시지도 등장한다. 고로 패션 잡지는 패션 세계 외부의 풍경도 신경 써야 한다. 오늘날 패션 잡지는 진보적인 언어들이 소위 섹시하게진열되는 곳이기도 하다. 패션 잡지가 개인의 자아도취만이 넘실대는 나르시시즘의 목욕탕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구린 좌파이자, ‘핫하지 않은진보주의자이다. 물론 이러한 틀은 패션 잡지 에디터, 광고주, 디자이너, 그리고 사물의 관계를 통해 구성된다. 이를 통해 촛불집회와 관련한 기사를 읽을 때면 늘 등장했던 의식 있는 여자라는 말처럼, ‘의식 있는패션 잡지는 이제 전혀 신기하지 않은 아이템이 되었다.

그러나 의식 있는패션 잡지가 되려면 아이러니하게도 의식이 없는상황을 연출해야 할 때가 많다. 사람들은 정치적 자극에 민감하며, 되도록 자신이 편안한 상태로 정치를 받아들이길 바란다. 그래서 패션 잡지가 만들어가는 시각 문화는 정치를 최대한 정치스럽지않게 표현해야 한다는 강박을 느끼게 한다. 아니면 매우 정치스럽게나아가서 그것에서 나타나는 부담감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내가 손에 쥐고 있는 이 잡지가 보통이 아니란 걸 강변하는 수밖에.

그래서일까. ‘멋지다’, ‘쿨하다라는 표현을 자아내게 하는 패션 잡지는 나름의 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포장용언어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노골적이지 않기 때문에 더 노골적인 이 패션 잡지 속 사물의 세계는 어차피 자신이 소비자임을 아는 독자들의 빠른 눈치와 공모 관계에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 않은가. 소비자이자 독자인 는 넉살좋게 오늘도 많은 패션 잡지를 유영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유영은 경험의 바다안에서 이루어진다. 패션은 미학적이지만 쓸모 있는미학이다. ‘실용’, ‘기능이런 말을 패션은 외면할 수 없다. 그래서 패션의 언어는 사람의 경험과 맞닿아 있다. 이제 등산을 할 때도  땀 문제를 해결해 줄 기능과 함께, ‘쿨하고 섹시한아마추어 등산가임을 보여주는 외관이 중요해지는 시대이다. 패션의 경험은 기능과 외관을 통해 연출된 이미지를 '착용'하는 것이다. 패션 잡지는 옷을 팔고 가방을 파고 구두를 팔지만, 무엇보다 옷을 통해 할 수 있는 경험, 가방을 통해 할 수 있는 경험, 구두를 통해 할 수 있는 경험을 판다. 내가 미처 해보지 못한 저 수많은 경험은 패션 잡지 속 광고를 봄으로써 어느 정도 해결 된다. 나는 핫한이브닝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상상하며 명사(celebrity)와 어느 기부 파티에 동석하고, 바다의 알몸이 보이는 푸르른 외딴 섬에서 나를 더 도드라지게 하는 최신 선글라스와 수영복을 입은 채로 일광욕을 한다. 시각을 통해 경험을 상상하고 소비하는 곳. 패션 잡지는 경험이 샘솟는 곳이다.

 

경험의 한계가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줄 때가 있습니다. 다양한 것들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통해 진리를 얻어 결국 인생을 달관하게 되는 사람이 물론 더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한계 지점 이상의 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 한계 밖에 있는 가능성에 대한 걱정과 우려를 하지 않아도 되는 행운을 얻습니다(16p).

 

이제 <데이즈드> 38호의 서문 격인 편집장 칼럼을 통해 다른 읽기를 시도해 볼 차례다. 이 시도는 <데이즈드>가 던진 언어에서 내 스스로 생각하는 문제를 언급하는 차원 하나, 그리고 이 차원 대신 <데이즈드>가 자신을 세상에 내보이게끔 도와주는 자들과의 협연을 위해 시도한 귀여운 전략을 언급하는 또 다른 차원이다.

경험의 한계도전하다라는 말이 쉽게 떠오를 정도로 오늘날 경험은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다. 오죽하면 경험 경제’, ‘체험 경제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사람들은 돈을 주고서라도 경험을 사고 싶어 한다. 거칠긴 하지만 현대인의 삶을 노동과 여가로 구분한다면, 이제 여가도 노동처럼 하라는 말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라이프스타일 맞춤형 모토가 되었다. 여행은 경험의 대표 상품이다. 무엇보다 여행은 의미 있는소비다. 아니, 더 나아가 의미를 요구하는소비 행위가 되었다. 무념무상, 무색무취의 여행이란 있을 수 없다. 사회는 그런 여행이 당신의 스펙이 될 수 있음을 제안한다. 젊은이에게 여행이란 을 할 자격을 얻는 자소서용 도구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면접관은 내가 다녀온 여행지에 주목한다. 그리고 피면접자의 여행 이야기를 통해 개인의 능력 여부를 평가한다. 꼭 여행만이라고 꼬집을 수 없지만, 요즘 주변인을 둘러보면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이 많음에 대해  불안해 한다. 그래서 경험한 자,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자는 쉽게 인기를 얻을 수 있다. 경험하지 않아도 경험한 것처럼 술술 이야기를 풀어내는 '중년 아저씨'의 말솜씨는 이제 모두가 갖춰야 할 미덕이다. 사람들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교회를 다니지는 않지만 중견 집사는 된 것처럼 교회 내 일상을 다 훑고 설명하는 것을 즐긴다.  

경험의 '스토리텔링'. 이것은 내가 노동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실력이자 노동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권리로 칭송받고 있다. 물론 나는 경험을 중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체험 강박 사회'에 즐겁게 동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좀 학술적인 표현을 쓰자면, '여가의 식민화'가 우려되기 때문이다. 휴식은 휴식으로 즐기자는 것, 여행은 여행으로 즐기자는 것, 여가는 여가로 즐기자는 것이 내 입장이다. 그래서 그 공간만은 백지 상태로 내버려두는 것. 메모지와 볼펜을 꺼내어 기어이 나중의 노동에 쓰일 아이디어로 여가를 쓸모 있게 만드는 것은 최대한 지양하려고 한다. 오히려 내가 쉬고 있기 때문에 다가오는 의외의 자극들은 마음 속에 메모할 필요를 느낀다. 그러나 그 메모는 쉬는 기간 동안만 활용하고 싶다. 다시 돌아온다면 그 메모지는 찢어버릴 것이다. 경험하지 않음의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은 결국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이 하고 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경청의 열의이다. 그리고 그것을 나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일 자체를 바라봐 주는 것. 누군가가 하고 있는 그 경험 자체를 그대로 놓아두는 일을 수긍한다면 각각이 갖는 경험의 차이는 존중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냉정하게 그리고 속시원하게 인정하고, 내가 이미 하고 있는 경험의 공간을 더 멋지게 꾸밀 수 있을지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안나윤 편집장이 말한 "경험의 한계가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줄 때가 있습니다"(16)란 표현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그러나, 이 칼럼은 '한계'와 '한정'을 쉽게 뒤섞는 오류를 범한다. 이것이 내가 <데이즈드>의 서문을 통해 하고 싶은 두번째 차원의 견해다. 패션은 사물의 세계이다. 그렇기때문에 '소유'와 '수집'이라는 인간의 행위는 패션과 가까이 한다. 패션 잡지는 소유와 수집을 자극해야 하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 '한정'은 수집가들의 '로망'이다. 그러나 이 로망을 가진 사람들은 '불안의 공동체'이다. 불안하지 않다면 한정은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 내가 살 수 없을 것 같은 긴장감은 '한정판'이라고 하는 사물의 가치를 드러내는 상징이다. 이러한 긴장감은 누군가가 그 한정된 사물을 소유함으로써 갖는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 구축을 질투하는 '나'에 의해 만들어지는 감정의 풍경이다.'경제적 인간'의 규범은 '한정'에서 무너진다. 더 많은 돈이 들어가더라도 살 수 있는 제약. 한정판은 결국 '제약'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다분히 주류 경제학자들이 강변한 학설의 울타리에서만 효력이 있는 것인지 모른다. 어쩌면 패션 세계의 수집가들은 더 많은 돈이 들더라도 제약이 주는 긴장감을 사고 소비하는 것 자체가 나름의 희소가치가 있음을, 그리고 이것이 '최대 효용'을 발휘하고 있음을 설파하는 전도사일 것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복음서를 만들어 '제약을 소비하라'는 핵심 구절을 실천할지도. 고로 '한정천국, 풍요지옥'이란 말을 만들어 백화점 앞에서 전단지를 뿌릴지도. 그러나 이런 전단지를 뿌리는 일도 삼가야 할 것이다. 이 제약은, 이 한정은 '나만' 알아야 한다. 그래서 '한정'을 구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중요하며, 정보 획득의 순차에 따라 예약은 소비자의 센스이자 지위를 드러내는 권력의 기술이다. 

하지만, <데이즈드>38호에서 경험의 '한계'를 고찰하는 철학적 사색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소비라는 경험의 '한정'을 도와 많은 물품 대신 지금 당신이 우월해 보일 수 있는 사물 하나를 소비하라는 '한정의 미덕'을 안내하는 페이지만 있을 뿐이다. 경험의 한계가 '한정'상태의 사물을 만난다는 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패션 잡지는 경험의 찬미자이다.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줘야 하는 입장에서 그 라이프스타일의 풍요를 배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데이즈드>는 '한계'와 '한정'을 뒤섞어 또 하나의 경험을 계발해 내는 전략을 펼친다. '한정판'을 산다는 것은 경험의 한계가 아니라, 또 다른 경험으로의 인도이다. 한정판은 사물의 사연을 덧입혀 수집가들의 욕망을 부추긴다. 누군가의 죽음, 누군가의 실수는 사물의 결함이 아니라 그 사물을 소유해야만 하는 필요성을 자극하는 광고의 기술이 되었다.  (누군가의 경험, 그 경험에 녹아든 사연은 한정판이 갖춰야 할 필수 덕목이다. )

<데이즈드> 38호 편집장 칼럼은 패션 잡지의 명암을 다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암'을 혼줄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 바닥에서 '뻥'은 애교이자, 미덕이다. 어치피 패션이란 포장이 생명이다. '진정성'이라는 말이 인기지만, 이 바닥이 말하는 진정성은 '뻥'을 잘 칠 수 있는 것도 포함된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언급하는 '허세'라는 말이 패션 잡지를 수놓더라도, 패션 잡지의 진정성은 그런 '허세'에 얇은 귀를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다만 패션 잡지의 애독자로서 '뻥'을 칠거라면 조금 더 '엣지있게' 쳐줬으면 하는 바람은 갖고 있다. 한계와 한정을 깊이 탐색해보는 작업, 그 둘의 차이가 소비 사회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 드러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작업은 그동안 <데이즈드>가 보여준 사회에 대한 열의를 감안해 보건대, 충분히 가능한 듯 싶다. 그러면 나처럼 경험하지 않음의 불안을 안고 사는 사람들은 의외의 철학적 사색도 하고 페이지에 담긴 물건 하나라도 살 수 있지 않겠는가. '사색의 비용'으로서 말이다. - 끝 -   

 

 

 

 

 

 

 

 

 

덧붙임)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를 그냥 읽는 게 아니라, '엣지 있게' 읽고 싶다고? 그렇다면 서동진 선생의 《디자인 멜랑콜리아》중 '메타현실의 세계로 가는 마법의 거울 :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의 필독을 권한다.  다음 이야기가 서동진 선생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서문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설레임, 서문 1화 -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 38호 편집장 칼럼을 읽고.   

    

 

 

 

 

 

 



잡지에 서문은 있는가? 나에게 잡지 편집장의 칼럼은 서문의 기능을 한다. 이번 호가 기획한 컨셉을 아우르는 글이든, 편집장이 쓰는 공간을 통해 맥락 없는 주저리주저리 모드의 글로 편집장 스스로의 권력을 행사하든. 가령 씨네21의 전 편집장이었던 고경태는 편집장 부임 초기, ‘<한겨레 21>스러운분위기의 편집장 칼럼을 많이 썼다가 독자들에게 뭇매를 맞은 적이 있다. 이유는 왜 영화 잡지 편집장이 영화 이야기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참고로 그는 <한겨레 21>을 담당하던 사람 아니었던가). 그러나, 나는 그런 고경태 편집장의 고집이 좋았다. 물론 그 고집이 그가 편집장을 그만 둘 때까지 지속된 것은 아니었지만.

한편, 편집장의 공간은 이런 직업을 꿈으로 삼는 이들의 로망이기도 하다. 길지 않은 글, 간명하면서도 사회의 시류를 놓치지 않으려는 포인트있는 열정, 그리고 지나치게 진지하지 않으면서도 진지함을 동반한 유머를 보여주기. 특히 패션잡지의 편집장 칼럼은 이 세 요소가 더 엣지있게드러나야 한다. ‘구리지 않는패션 스타일을 창조한다는 자부심만큼이나 편집장 칼럼은 이 시대의 구림과 결별해야 하는 것이다.

 

패션 잡지는 독자에게 차이를 선언하는 것을 즐긴다. (여기서 차이를 잠시 의인화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인기 있었던 것과의 작별’, 대부분의 사람들이 뒤덮은 것으로부터의 탈출. 차이를 선언한다는 것은 정적일 수 없다. 누군가 차이를 따라온다면, 차이는 도망가야 한다. 그래야 또 다른 차이가 나올 수 있는 여유가 있다. 도망가려면 앞만 보고 갈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차이는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타자의 앞모습을 힐끔 쳐다보면서, 내 모습이 달라져야 함을 의식한다. 그래야 차이가 생기는 법이다.

 


열정과 도전 정신으로 뭉쳐 있는 <데이즈드>에서 이번 달 한계라는 주제로 사서 고생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점점 더 풍족하고 풍요로워지는 패션 매거진에서 오히려 한계 상황을 만드는 기획을 하고 진행해보면 어떨까 하는 역발상에서 시작됐죠. <데이즈드>의 여섯 에디터는 공간의 제약, 감정의 제약, 패션의 한계 등 스스로 무덤을 파고 들어 이를 기획하고, 힘겹게 진행했습니다.(16쪽)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20116월호 편집장 칼럼을 보자. EIC(Editor In Chief) 안나윤은 칼럼을 통해, 풍요와 한계를 대립항으로 놓았다. 이런 구도는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한 번 상상해보자. 그녀와 이 책을 만든 여섯 에디터들은 그동안 패션 매거진 업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를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난 상황을 축약할 키워드를 끄집어낼 것이다. 그래서 풍족풍요가 나왔다. 그렇다면 매일 새로이 론칭되고 있는 패션 브랜드만큼이나 풍부해지는 패션 세계의 글자와 이미지를 채우고 있는 패션잡지를 읽는 독자들은 어떻게 이 상황을 받아들일까. 그들은 식상함에 물린 독자들을 위해 한계’, ‘제약이라는 레시피를 만들기로 했던 것 같다. ‘차이가 빈혈 상태가 올까봐, 차이의 신봉자들은 충격’, ‘파격혹은 전복과 가까운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예술 또한 이런 언어와 가깝고, 그래서 패션과 예술은 오늘날 가장 끈끈한 교우지간이다.

   

 

   

 

 

 

 

 

 

  

패션잡지에서 패션과 예술의 조합은 아직 유효한 트렌드인 것 같다. 마이크 페더스톤이라는 사회학자가 쓰면서 유행이 된 말(그 이전에 페더스톤에게 조상급인 선배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이 쓴 사회학적 미학이라는 개념도 세트로 챙겨두자), ‘일상생활의 미학화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오늘날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을 예술적으로 보이도록 힘쓰고 있다는 설명은 이 사회의 요즘을 분석하는 인기 있는 시선이 되었다. 굳이 말장난을 하자면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을 갖춰야 하는 시대이다. ‘라이프스타일’(lifestyle)(시기를 타는) ‘유행어의 위치에서 우리 시대의 영원한 표준어로 올라섰다. 전후 시기 후, 패션이 전시장의 굴레에서 벗어나면서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주목했다는 것은 패션의 역사에 관심 있는 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사실이다. 이 사실을 안고 가는 패션사가들의 시선에 따르면, 더 이상 상류층은 패션의 주도자가 될 수 없었다.(이러한 내용에 관심이 많다면 제니퍼 크레이그의 《패션의 얼굴》을 권한다) 

 

 

 

 

 

 

 

 

오히려 하위문화라는 개념이 대두되고, 그것과 관련한 패션이 도발적으로 탄생하면서 패션은 누구나 살아가고 있는 이 /시간대를 자극하는 사회적 언어가 되었다. 이후 패션은 늘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진단하는 청진기 역할을 도맡고 있다. 병명은 지루함, 식상함이며, 패션 잡지는 이것을 치료하기 위한 그리고 이것을 치료하라고 명령하는 조언자가 되었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생활한다. 그러나 나는 함께한다고 해서 같은사람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함께같은의 거리를 벌리기. 그것이 곧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패션 잡지가 건네는 차이 유지법이었다.여기서 패션 잡지는 예술을 빌려 기품을 유지해야 했고, 예술은 패션 잡지를 통해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기회를 만들어야 했다. - 다음 회 계속 -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06-01 0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01 1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01 1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1-06-02 11:56   좋아요 0 | URL
고경태 씨가 다시 한겨레21로 갔는지 궁금하네요. 좋은 분이셨는데.

2011-06-01 1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02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4. 진열만 되는 근심거리, 구경하는 고백, 안전한 성찰




이제 고백의 계보학을 통해 다다르려는 고지를 밝히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성찰은 성찰 자체로 추앙받아야 하는가?'이다. 이는 즉, 성찰을 성찰하는 메타적 성찰의 문제로 귀결된다. 고백과 해방을 등가화시키려는 진리를 해체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고백을 통해 자기 수행적인 요구를 자가 생산하는 성찰이라는 것 또한 비판의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성찰의 무효화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성찰도 현실 권력의 테크놀로지의 영역 안에서 충분히 생산될 수 있는 것임을 입증함과 동시에, 현실 권력의 테크놀로지로서 성찰이 이용된다면, 우리는 과연 그것에 대항할 성찰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되짚어보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성찰적 근대화와 생활 정치라는 개념으로, '성찰'을 현실 사회의 개입을 위한 사회학적 대안으로 사유했던 앤서니 기든스의 논의에 숨겨진 문제점을 비판하고, 그러한 비판을 통해 우리 시대의 성찰 문화를 점검해볼 것이다. 

 과연 성찰이란 무엇인가. 김홍중은, "성찰한다는 것은 단순한 내성이나 반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초월적 의식이 정립되어 그 의식을 통하여 스스로를 다시 바라보는 체험의 구조화를 가리킨다"(김홍중,2007,186쪽)라고 정의한다. 이성이 단순히 대상에 투여되는 지향임을 넘어서 자신의 지향성마저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성찰성의 개가라고 할 수 있다(김홍중,2007,195쪽). 성찰성의 근대적 성격을 강조하는 기든스에 의하면 소위 후기 / 재귀적 / 성찰적 모더니티의 전기 속에서 행위의 전통적인 준거를 상실한 개인들은 스스로의 정치적, 성적, 일상적 삶의 제도화와 의미를 구성해야 하는 존재로 변모하는데(김홍중,2007,191쪽), 기든스는 바로 이러한 존재들을 '반성적 개인'으로 주목하고, 그들의 잠재성과 (사회학자라는) 전문가의 개입이 결합되는 것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 결합의 대안이 '생활정치'다.

 그러나, 바우만이 언급한 것처럼,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생활 정치'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취하는 모든 행동을 면밀히 관찰하는 '반성적 존재'이며, 행동의 결과에 만족하는 법 없이 열심히 수정을 가한다"(Bauman,2000/2009,p.40)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어찌된 일인지 그러한 반성이 우리 행동의 인과관계를 설정하고 그 결과를 규명하는 복잡한 절차를 포괄해낼만큼 심화되지는 못한다"(Bauman,2000/2009,p.40)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것은 생활정치의 사적인 이상향들을 상기해내어 다시 한 번 좋은 사회와 정의로운 사회의 전망을 얻어내려는 일들이 어려워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 즉, 공공 정치가 자신의 기능을 벗어던지고 이를 생활정치가 떠맡게 되며, 법률상 개인이 실제상 개인이 되려는 노력 속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은 도무지 서로 더해질 수도 쌓일 수도 없게 되고, 그리하여 공적 영역에는 그저 사적 근심거리들이 토로되고 대중이 열람할 수 있도록 진열되는 현장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없게 될 것이다(Bauman,2000/2009,p.82-83). 바우만은 특히 고백의 과학화와 접목된 오늘날 자기계발의 범람과 개인성에 대하여 푸코와 유사한 시선을 던진다. 그는 그 예로 상담 과정을 비유로 들어, 진열만 되는 사적 근심거리들을 추동하는 생활정치의 한계를 지적한다.



질병은 개인적이고 그 치료 역시 그러하다. 근심은 사적이며 그 근심을 싸워 물리치는 수단 역시 그러하다. 상담자들이 제공하는 상담은 대문자로 시작하는 정치가 아니라, 생활정치를 거론한다. 그들은 상담 받는 사람들이 그들 혼자서 혹은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거론하며, 그들 혹은 그녀들 각각에게 이야기한다. 그들 모두가 힘을 합치기만 하면 서로를 위해 함께 이루어낼 수 있는 것들은 거론하지 않는다. (중략). 상담이 끝나고 나면 상담 받은 사람들은 그 상담이 시작될 때나 매한가지로 혼자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혼자임이 일층 배가된다는 점이다. 자기가 만든 덫에 걸려 버림받을 것이라는 본능적 직감은 자꾸만 강해지다가 나중에는 거의 확산에 가까워진다. 어떠한 충고를 들었든지 간에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상담 받은 사람은 혼자의 몫이다. 즉, 그 충고를 알맞게 실천해야 할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하며, 안 좋은 결과가 나온다 해도 이는 오직 자신의 잘못과 태만 때문이므로 남을 탓해서는 안 된다(cf.Bauman,2000/2009,p.105-106).




  

 

 

 

 

 

 

 

익히 알다시피, 기든스는 상담이라는 심리학적 의례 속에서 고백을 하는 입과 고백을 들어주는 입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요법의 정치', '본보기의 정치'들을 옹호했다. 그는 요법이 "의존성과 수동성을 조장할 수 있지만, 참여와 재전유를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Giddens,1991/1997,p.291)라는 주장과 함께, 의존성과 수동성이 조장된다는 것의 의미를 축소하기 위해서, 고백을 들어주는 입의 위치에 있는 "요법사는 기껏해야 마땅히 해야 할 자기 요법 과정을 촉진할 수 있는 촉매에 불과하다"(Giddens,1991/1997,p.137)고 말한다. 그러나, 기든스는 요법사의 위상을 너무 낮게 본 것 같다. 이것은 단순히 '요법사'라는 직업적 위치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요법사'의 기능을 수행하는 권력의 입들, 즉, 개인에게 고백을 추동하도록 하는 입들의 존재를 더 광의의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든스는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에서, 고백이 과학화 되는 과정 속에서 "신체가 행정 권력의 초점이 되었다"(Giddens,1993/1996,p.67)는 푸코의 견해를 수긍하면서도, 푸코가 '캘리포니아적 자아 종교'(Giddens,1993/1996,p.56)라고 불렀던 고해의 의례들에서 "신체가 자기 정체성의 가시적인 매개체가 되어가고 따라서 라이프 스타일이나 개인들이 선택한 결정으로 점차 통합된다는 사실이 보다 중요하다"(Giddens,1993/1996,p.67)라는 주장을 펼친다.1) 이는 사실상 기든스가 개인의 성찰을 촉진하는 의례, 그 의례들을 추동하는 생활 정치의 개념 확립을 위해, 고백이 과학화됨으로써 현실 권력의 통치 양식에 포섭되었음을 냉소적으로 바라본 푸코의 견해를 반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기든스는 요법사의 위상과 현실 권력의 통치 양식에 대한 접점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분석을 수행했어야 했다. 그는 『현대성과 자아 정체성』,『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을 통해 자신이 내세운 구조화이론의 외적 정합성을 강조하기 위해, 생활세계의 모순을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행위자에 대한 신뢰를 강조하는 데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신뢰가 무한적인 것이 아니냐는 반박을 피하기 위해, '이중해석학', 즉 생활세계를 살아가는 행위자들의 해석을 보완하기 위한 전문가들- 즉 사회학자들-의 해석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가 결국 기든스 스스로를 푸코가 의혹에 눈길을 보내는 '요법사'의 위치에 올려놓은 것은 자명해 보인다. 김경만이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기든스는 외부에서 행위자들에게 자신이 이론적 잣대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설득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사실상 기든스가 말하는 설득 과정이라는 것은 합리적 실천에 대한 새로운 기준이 서로 동등한 인식능력을 가졌다고 가정된 이론가와 행위자가 서로의 입장에 대한 상호비판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대화과정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김경만,2005,167쪽). 곧, 기든스는 자신의 이론을 통해 현실 권력의 테크놀로지로서 고백을 추동했던 고해 신부의 역할을 시인한 꼴이 된 셈이다. 이것은 도리어 생활세계를 살아가는 행위자의 성찰을 동등한 입장에서 존중한다는 기든스의 애초 목표가, 결국 자신이 푸코가 말했던 '권력 /지식'의 영역 안에 속해 있지 않은 '순수한 지식'을 설파하는 지식인이었음을 강조한, 전도된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닐까. 이는 부르디외의 재귀 사회학이 파헤치는 학구적 이성의 오류가 부르디외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을 부르디외 스스로 간과했듯이, 기든스도 이러한 재귀 사회학의 틀 안에서 스스로를 무오류성의 지식인으로 상정하여, 일상 세계의 행위자들의 성찰과 자신의 성찰을 차별적으로 바라본 게 된 셈은 아니었을까.

  오히려 기든스의 이중해석학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생활정치 내 행위자의 성찰은, 그가 초점을 둔 행위자의 자기 자율성과 선택의 자유라는 측면보다는, "본보기와 조언, 안내를 구하는 것은 하나의 중독이다"(Bauman,2000/2009,p.116)라는 바우만의 명제로 전도된 듯하다.   대표적으로 '본보기의 정치', '조언의 정치'가 발견되고 있는 토크쇼와 같은 장르는, 전술하였다시피 그동안 고백과 치료의 윤리 차원에서 푸코의 논의를 토대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펙은 이러한 흐름에 더하여, 고백을 현실 권력의 기술로 여겼던 푸코의 '원-사유'에 근접한 저작 『오프라 윈프리의 시대』를 내놓는다. 이 책은 단순히 오프라 윈프리의 쇼에 출연하는 개인들의 사사로운 대화와 그 대화를 듣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윈프리를 비롯한 전문가들의 관계를 묻는 관점에서 벗어나, 오프라 윈프리라는 문화 엘리트가 표방한 고백을 통한 자기 치유의 전략이 미국의 정치권력과 조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우리는 기든스의 생활 정치에 근거가 되는 이야기들과 펙의 저서에서 분석된 오프라 윈프리라는 문화 엘리트의 전략이 서로 상관되어 있음을 발견해야 할 지점에 도달했다. 그럼으로써 현실 권력으로서의 테크놀로지로서 성찰이 이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했던 기든스의 논의를 반박함과 동시에, 이 반박이 성찰에 대한 냉소주의로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메타적 성찰의 거점을 찾아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토크쇼라는 장르를 어떻게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더 구체적으로 나아가 그 장르를 채우고 있는 고백의 의례들을 어떻게 현실 정치와 관련지어 바라볼 수 있을까. 우선, 토크쇼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사회학자 바우만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토크쇼에 관하여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수고로운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바우만의 주장처럼 토크쇼가 ‘사적 문제들에 대한 공적 담화를 합법화’(Bauman,2000/2009,p.111)시키는 공간임을 알 수 있다. 바우만이 계속해서 일갈하는 것처럼,

 

 이 장르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있는 것으로, 수치스러운 것들을 점잖은 것으로 만들어주며, 추한 비밀을 자긍심의 문제로 변모시킨다. 꽤 중요한 정도로 이 쇼들은 악령을 물리치는 의식과도 같다. 그것도 대단히 효과적인 의식이다. 토크쇼 덕분에  내가 지금까지 수치스럽고 창피하다고 생각해 비밀로 묻어둔 채 말 못하고 끙끙 앓던 것들을 이제는 마음을 열고 말할 수 있다. 내 고백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니기에 나는 고통에서 면제되는 것 이상의 위안을 얻게 된다. 이제 더 이상 창피해지거나 남들이 눈살을 찌푸리진 않을까. 뻔뻔하다고 손가락질 받거나 배척당하는 것은 아닐까 근심하고 경계할 필요가 없다. 이 모든 게 결국, 사람들이 수백만 시청자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는 그런 문제일 뿐이다. 그들의 사적 문제들, 그와 비슷한 내 자신의 문제들은 공적으로 토론을 하기에 적합하다. 그렇다고 그 문제들이 공적 이슈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문제들은 정확히 사적 이슈라는 테두리 안에서 토론된다. 아무리 길게 토론을 해도 그것들은 표범의 얼룩반점처럼, 결코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그 문제들은 사적인 것으로 재확인되며, 그 사적인 특성이 강화된 양상으로 공개석상에 오르게 된다. 결국 모든 화자는 개인적으로 삶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한, 이러한 문제들은 반드시 개인적으로 맞서고 해결해야 한다는 점에 의견일치를 보인다."(Bauman,2000/2009,p.111)




  

 

 

 

 

 

 

 

 

'명백하게 정치경제적 이슈인 빈곤이나 노숙자 문제, 사회복지, 실업 같은 문제들은 다루는 윈프리 쇼의 태도'(Peck,2008/2009,p.27)에도 토크쇼에 대한 바우만의 비판이 적용된다. 펙은, "정치적 문제를 심리적 문제로 환원시키는 윈프리의 프로그램은, 레이건의 반동적 정책과 모든 것은 피해를 입은 당사자 책임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흉내내며 이를 정당화하는데 일조하였다"(Peck,2008/2009,p.27)는 견해를 펼친다.  80년대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주도했던 레이건식 개혁은 그녀의 분석에 따르면, '반동적 정책, 문제적 자아, 회복 치료'(Peck,2008/2009,p.27)와 관련이 있다. 당시에 레이건식 개혁이란 부의 불공정한 재분배에 매진하는 경제 프로젝트이자 계급동맹을 조직하고 여성과 사회적 소수자, 가난한 자들을 겨냥한 반동적 정책을 강행하는 것으로 사회적 재분배를 정당화하려는 정치, 이데올로기 프로젝트를 의미한다. 이러한 반동적 정치는 가족의 위기라는 유령을 통해 연출되었고, 이에 따라 모든 사회 문제는 가족의 가치를 타락시키는 주범으로 비난받았다. 즉 집 없는 노숙자, 빈곤, 편모, 가정, 범죄, 배우자 및 아동학대가 늘어나는 것은 흔들리는 개인의 가치관 탓으로 인식되었고, 이는 바로 전통적 가족의 위기에서 비롯된 불평으로 평가되었다. 이러한 진단은 회복운동과 연계되어 병리학과 건강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렸다. 회복운동 역시 큰 틀에서 보면 개인의 불행을 '문제 가정'의 틀 안에서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Peck,2008/2009,p.27). 이러한 틀은 비단 레이건 시대에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오프라 윈프리의 쇼에 출연한 적이 있는 빌 클린턴은 가치, 치료, 기회, 책임, 공동체, 권한 등의 단어를 자신의 정치연설문에 단골로 등장시켰다. 가치 정치학 혹은 의미 정치학이라고 불리는 그의 연설은 개인의 변화는 사회적 변화로 연결된다는 테라피 사조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Peck,2008/2009,p.213).2)  펙은 윈프리가 현재와 같이 남다른 문화권력자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그녀가 생각하는 자아의 정체성, 질병에 대한 생각 및 그 치유기술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Peck,2008/2009,p.79) . "생활정치와 능동적 신뢰라는 자아 테크닉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현재의 위기에 대해서 참여적이고 주도적인 방식으로 대응할 것을 제안한"(김종엽,1997,82쪽), 기든스의 이론은 윈프리 쇼가 표방하는 가치와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기든스는 '요법의 정치'와 '본보기의 정치'를 표방하는 심리학적 수양을 고취시키는 "자기계발 도서가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자기실현의 가능성과 잠재력에 대한 지침을 알려준다는 점 때문"(전상진,2008,112쪽)에, 자기계발 도서를 해방적이라고 봤지만, 오히려 이러한 성찰적 주체들은 "자유의 윤리, 자기주도성의 윤리를 받아들이며, 통치 가능한 주체로 주체화"(전상진,2008,119쪽)하는 과정 속에서, "괜찮은 인생을 사는 비결과 그에 사용될 장치들은 유효기간이 붙어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기한이 되기도 전에 잘 쓰이지 않게 되고, 위축되며 가치가 떨어져서 더 나은 신상품과 경쟁할 때는 완전히 그 매력이 사라지게 된다"(Bauman,2000/2009,p.117)는 바우만의 지적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에서 언급한 것처럼, "제도들의 명백한 외부는 개인적 생애의 내부"(Beck,1986/1997,p.215)가 되어가고,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반성적 개인'은, "자아를 중심에 놓고, 자아에 대해 행동기회를 할당하고 열어주며, 이런 식으로 자아는 자신만의 생애와 관련하여 결정하고 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 깊게 운용할 수 있게 된다"(Beck,1986/1997,p.222)지만, 오히려 이것은 ‘자기 주도성의 윤리, 혹은 기업가적 자아의 이미지를 따라 스스로를 재창조’(전상진,2008,119쪽)하는 것에 귀속된다3). 기업가적 자아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 그리고 그 개인을 양성하려는 것이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훈련가들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비애를 관통하는 진솔한 '반성문'을 쓰기보다는, '진솔한 반성문으로 보이는 것 같은 반성문을 쓰게 하는 방법'을 고안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결국 우리는 오늘날 중대한 사건 앞에서, 진열만 된 근심거리를 보는 것에 만족하고, 그 근심거리를 구경하면서, 안전한 성찰을 추구한다.4) 오늘날 기든스가 성찰성 안에 강조했던 자기 자율성의 타자를 위한 배려는, "각자의 잠재성 계발이 결코 서로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Giddens,1993/1996,p.279)는 차원에 그치고 만다. 안전한 성찰 속에서 우리는 오늘도 분노를 포섭하고, 그 분노 이상으로 나아가려는 사유를 검열한 채, 오늘도 광장에 다녀왔다는 '출석의 정치'로서 모든 것을 다 했다고 자위한다.



[결론을 대신하는 보론] 관객의 윤리, 깔끔한 입, 소멸하는 열정의 시대




애도가 두려운 것이 될 때 우리의 두려움은 애도를 재빨리 해소할 욕구를 불러 일으켜 상실을 회복하고 애도를 추방하려 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종전의 세계 질서로 돌아가거나 이 세계가 옛날에는 정돈되어 있었다는 판타지를 소생시키려는 권력을 투여한 행동을 취할 것이다(Butler,2004/2008,p.59).




  

 

관객의 윤리가 자연스러운 현대인에게, 사건이 주는 파장은 빨리 소모되고, 그러한 파장을 짚는 말과 글들은 파장 자체가 망각되는 속도보다 더 빨리 사라진다. 세넷이 이미 이십 년 전에 갈파했듯이 사람들은 그들에게 행동이 아닌 의도와 감정만을 소비할 것을 권하는 정치적 배우를 바라보는 수동적 관객이 된 것이다(Bauman,2000/2009,p.175). 이런 환경에서 나오는 성찰은 오래 전 엘리아스가 유럽의 궁정사회에서 발견한 ‘재귀 관찰’의 형태를 띄고 있다. ‘사회적, 사교적 교류를 수련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한 시대 속에서, 엘리아스가 바라보던 궁정인들의 재귀 관찰이란, 결국 궁정사회의 규율과 예법을 내면화하기 위한, ‘자기 통제’로서의 재귀 관찰이 컸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교류’로서의 자기 관찰이, 공공성의 가치를 지향하는 성찰과는 다르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반복되는 일상과 단기적인 반성만 있는 사무적 세계'(Bauman,2000/2009,p.38)라는 레떼르가 잘 어울리는 오늘날. 소비되는 성찰은 그 레떼르에서 풍기는 찝찝함을 잠시나마 감출 수 있는 상품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소비되는 성찰의 존재는, 물건을 사용하면서 체감되는 열정의 퇴색처럼, ‘소멸하는 열정’(Sennett,2006/2009,p.164) 안으로 포섭되어버리는 나약한 운명과 가까이 있다. 앨버트 허쉬먼이 『열정과 이해관계』에서 추적한 결과처럼, 종교 권력에 복속된 시대의 사람들은 열정을 부정한 것으로 인식했지만, 근대로 넘어가는 시간의 진행 속에서 그 열정을 (경제적) ‘이해관계interest’라는 개념으로 대항, 변형시키면서 충족의 세계를 만들어놓았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우리의 열정은 이미 ‘이해관계’라는 테두리 안에서, ‘감정의 이윤’을 촉발시키기고, 그러한 촉발을 위해 ‘나와 너’의 관계를 비대칭적으로 만드는 것에 일찌감치 동의했는지 모른다. 결국 사건을 대하는 우리의 열정이란,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유념하는 변덕스러운 생체 리듬을 점검하는 것과 매우 유사한 형태가 되어 버렸다. 그 속에서 피어나는 ‘내밀성의 독재’는 “공공적이고 시민사회적 관점이 개인적 심리적 차원의 관심과 관점에 주권을 내준 것 같은 상황”(천선영,2008,52)을 제공한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봤듯이, 고백이 종교에서 종교적인 것으로 산포되는 과정 속에서, 개인의 죄는 언어가 되고, 그 언어를 치유할 언어를 만들어내는 권력자들은 고해라는 영역 안에서 죄의 언어를 제거한 것처럼 속임수를 쓴다.  그러나, 정작 죄의 언어는 사라지기는커녕 전시됨으로써 권력자는 그 전시 효과를 통해 고해자가 다시 자신을 찾아오도록 길을 터놓는다.  그 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 그리고 그 길에 가지 않기 위해 죄의 언어로부터 도망가려는 사람들의 혼란이 가중되고, 결국 그 혼란은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로 귀결된다. 언제일지 모르는 밝은 미래, 하지만 신이 가져다주리라고 믿는 희망 속에서, 자신의 악전고투가 감내하는 상처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개인에게 남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던 식의 정치, 대문자로 시작되는 정치, 사적 문제들을 공적 현안으로 해석하는 소임을 짊어진 행위의 죽음일 것이다.  

 

  

 

 

 

 

 

 

 

오늘날 그러한 해석의 노력은 서서히 멈추게 되었다"(Bauman,2000/2009,p.113). 지식인들이 사회의 폐부를 찌르기 위해 사용하던 칼의 언어는. 정작 지식인 스스로의 얼굴로 향하고, 그들은 더욱 더 예쁘고 착한 얼굴을 보여주기 위해 '취향의 관대함'이라는 용어로 대중에게 투항한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비판했던 '신속한 두뇌들'(Bourdieu,1994/1998,p.47)에서 뿜어져 나오는 언어들의 임포텐츠는, '일상적인 경험을 지배하는 경계들에 맞서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을 추구하는 경험'(이승철,2004,36쪽)인 푸코의 '한계 경험'이 들어설 자리가 없게 만든다. 한계 경험의 추구 대신 이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너와 나가 함께 대면해야 할 현실의 고통을, '단조로움, 반복성, 예측 가능성'(Bauman,2000/2009,p.90)으로 구성된 질서의 존재로 바꾸는 것이다. - 소비되는 성찰의 단조로움, 반복성, 예측 가능성으로의 귀속과 아울러!- 그 과정은 위에서 인용한 버틀러의 주장처럼, 이 세계가 옛날에는 정돈되어 있다는 판타지를 소생시키려는 권력을 투여한 행동을 취하도록 한다. 이 행동의 정체는 무엇인가? 필자는 그것을 망각의 입으로 보고 있다. 이 순간 역사는 현재를 소거시키기 위한 깨끗한 과거로 규정되거나, 깨끗한 현재를 유지하기 위해 더러운 과거를 소거시키는 것으로 정의된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차원을 뛰어 넘어,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가야 함은 마땅하다. 우리가 '누구'를 묻는 노력에 소홀한다면, '반성적 개인'이 써내려간 성찰적 서사는, "고충의 체험에 합류하는 것이 가져다주는 이득이라곤, 홀로 고난에 맞서 싸우는 것이 다른 사람들도 매일 하는 일임을 서로 확인하게 된다는 것뿐이다"(Bauman,2000/2009,p.58)라는 내용만이 남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권력자들이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은, 사실 사람들이 자신을 지지해줄 수 있는 공약과 그것을 지킬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행사하는 기간 동안, 스스로를 메저키스트로 단련시키는 방법일지 모른다. 필자는 권력자들을 메저키스트로 만드는 것은 조루의 운명을 지닌 분노로의 환원과 안전한 성찰이라고 생각한다. 딱 그만큼의 고백, 딱 그만큼의 성찰이 권력자의 규율기술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는, "나는 언제나 대중과 함께 있었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자격-게임'이 소일거리이자 유일한 위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세넷이 '르상티망'Ressentiment5)이라고 이름 붙인 사회적 감정을 부인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르상티망은 겉으로만 베푸는 지배층에 대한 원망을 낳고, 유대인이나 자격도 없으면서 온갖 혜택을 훔치고 있는 것으로 비치는 사회 내부의 또 다른 적들에 대한 분노를 유발한다(Sennett,2006/2009,p.159). 세넷은 이러한 르상티망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르상티망을 통해 경제학과 정치학을 연관지는 것은 편협한 시각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계속된 이유를 덧붙여보면, "끊임없이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들을 악마로 몰아간다고 해서 시급한 당장의 물질적 불안정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Sennett,2006/2009,p.159) 고로 우리에게는 보다 준비된 '준엄한 분노'가 필요하다. 이것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분노는 수직 화살표의 운명을 수긍한 채, (권력자에 대한)상승된 분노의 무기력증을, (노동자에 대한) 하강된 분노의 무관심을 의례의 영역으로 치부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무엇보다 하강된 분노가 초래하는 무관심에 우려를 표한다. '하강된 분노'라는 말은 사실 모순적이다. 노동자가 노동자를 외면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지속되는 외면의 모순에 남모를 안도감을 느끼는지 모른다.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가치가 서열로 매겨진다는 것에 우리는 여전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수 있지만, 이것은 너무나 분명하게 일어나고 있는 '불편한 진실'이다. 역사는 이미 그 불편한 진실이 아주 예전부터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에드워드 톰슨이『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갈파한 것처럼, 예전 유럽사회에서 "그리스도의 빈민과 타락한 속중은 물론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빈민들의 난폭성은 그들이 은총의 테두리 바깥에서 살고 있다는 징조인 셈이었다. 곧, 선택받은 깔뱅주의자들은 일종의 편협한 친족동아리로 되어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Thompson,1980/2000,p.41). 깔뱅주의의 소명의식에 귀착한 대부분의 유산계급 남녀들은 빈민들의 질서를 잡을 필요성을 느꼈고, 결혼하지 않은 채 함께 동거하는 하층계급민  여성을 매춘부로 분류해놓기도 했다.   



  

 

 

 

 

 

 

 

 

 에드워드 톰슨이 '인상에 의한 계산'(Thompson,1980/2000,p.80)이라고 명명했던 분류의 진실은, "무산자들의 실제 범죄적 행동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근거가 없는 얘기도 아니겠지만, 지속적인 일자리가 없고 재산이 없는 사람은 누구나 불법적인 수단으로 먹고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유산계급인들의 의식구조를 드러낸다"(Thompson,1980/2000,p.80). 오늘날 자신을 신성 가족으로 여기는 깔뱅주의의 언어는 도처에 깔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신앙적 게토 속으로 들어가 '탈세적 절대성'이라는 신앙적 의미를 소비함으로써 '억압'을 수동적으로 감내하는 이상한 '용기'를 가진 자가 된다"(김진호,1999,147쪽).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억압은, "권력기관들은 더 이상 명령하지 않는다. 선택자의 비위를 맞추며 유혹하고 살살 꼬드길 뿐이다"(Bauman,2000/2009,p.104)라는 바우만의 푸코적 시각에 포획될만한 (적당한 분노가 가미된) 소모되는 성찰과 섞여, 권력이 유도하는 언어의 생산과 결부된다. 이것은, 당시 무산자들의 수많은 전통적 오락 및 기분전환거리들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유산계급이 인상의 수치로 간주한 죄인들이, 끝없는 행렬을 만들어내면서 인쇄소에서 신앙고백식 전기를 쉴 새 없이 펴내고 있던 감리교도들의 압력 자체(Thompson,1980/2000,p.83)와 유사하다. 정작 이 속에서 우리에게 남은 고백은, 우리가 들어야 하는 언어가 아닌, 듣고 싶어 하는 언어로 채워진다. 애도의 서열과 가치를 매기는 무시무시한 세상, 죽음을 통해 스스로를 상실하면서까지 하나의 고백을 남기고 싶었던 이들의 언어를 외면하거나 구경하는 다른 입들은, 깔끔한 입이 되기 위해 애를 쓴다.6) 그러나, 그 입 속에서 나오는 고백의 언어들에는 깔끔한 것을 강조하는 것만큼이나 심한 구취가 난다.  




 

 

 

 

 

 

 

 

 

 ‘아홉 켤레의 구두를 가진 권 씨’는 들어올 수 없는 예배당이 되어버린 광장,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을 기쁘게 하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착한 사람'(cf.Rusell,1996/2004,p.139)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문화연구는 여전히 예배당 안에 있는 사람들을 '일반'으로 치부하는 '착한' 언어를 생산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그리고 그 '일반'이 주도하는 쾌락을, 저항으로 치부한 채, 오히려 '저항의 연골'을 닳게 하지는 않았는가. 문화연구자들 간의 '성찰 게임'이 주는 쾌락은, "문화연구의 초기 정신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를 당위적 강령으로 받아들인 채, 도리어 지식의 '순혈주의'를 조장하고 있지 않은가. 정말 유감스럽게도 그토록 인간과 광장을 중시하고, 인간과 광장의 열기를 두껍게 기술하는 것을 자부하던 문화연구자들이 내놓은 발견이란, 과장된 감탄으로 장식된 '정체성 확인의 놀이', '다학제적이라는 꼬리표 아래 숨어든 후발주자들의 진부한 자책적 제언'이 아니었던가. 문화연구가 그토록 좋아하는 일상이라는 이름 아래 가로새겨진, 평범한 것들에 대한 진부한 특화, 그 특화의 환영이 만들어놓은 대상화, 고착화된 편린들의 목을 벨 용기가 우리에게 있는가. 우리는 과연 성공적인 삶을 사는 방법을 강조했던 심리학 박사 탬킨을 떠난 토미가, 전혀 알지 못하던 자들의 장례식에서 흘린 눈물의 의미7)를 포착할 수 있는 ‘미문’을 쓸 수 있을까. 끊임없이 다가오는 사건들 속에서, '깔끔한 입‘의 위안이라곤 결국, ‘죽어가는 자의 고독’을 외면, 부인하는 것뿐이다. “그들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을 상기시킨다는 이유로 죽어가는 이들을 멀리하는 것이다”(Elias,1982/1996,p.18). 어쩐지 아직 필자의 입에서 심한 구취가 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 이야기되는 사건, 배제되는 고백, 망각의 입  

 

 




"그 사이 그녀는, 심문이 왜 '삶의 세세한 구석까지 파고드는지'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런 심문이 전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쯤은 아주 잘 알게 되었노라고 했다. 하지만 심문할 때 거론한 세세한 사항들을 어떻게 『차이퉁』이 알게 되었는지 그녀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

-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바디우는,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방식을 결정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Badiou,1993/2001,p.54)라고 정의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건이 그동안 유지되어 왔던 자신의 일상에 어떤 균열을 일으키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사람들은 감정의 균열을 미디어를 통해,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공유하면서, 다가온 사건의 정보를 습득하는 것을 즐긴다. 혹은 다가오는 사건이 가져다 준 균열이 삶의 변화로 느껴질 때도 있으며, 개인은 그 변화에 자성의 기운을 싣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이야기되는 사건의 운명은, 그 사건이 어떤 큰 가치와 의의를 지닌다고 하더라도, 망각의 입 안에 빨려 들어가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사건을 침묵함으로써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대해 이런 저런 말들을 쏟아 부으면서, 그것을 쏟아 부은 말 만큼 비례하는 빠른 시간 속도로 잊어버린다. 혹은 잊어버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야기되는 사건의 운명을 우리가 고스란히 삶의 질서로 받아들일 때, 정작 그 사건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담론들이 어떤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지, 무엇보다 우리의 격앙된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사건 속 인물의 비정상성이, 사실은 비정상성을 분류하고, 판단하는 담론들의 곡해로 만들어진 것은 아닌지를 망각하게 만든다. 결국 그것은 용의자 / 살인자 / 피고인 / 인간쓰레기 등으로 명명된 인물이 사건을 통해 말하고 싶은 고백들이 사회와 공유되는 길을 차단한다. 진즈부르크의 시도처럼, 단순한 일화나 하나의 악명 높은 사건사로 전락할 위험은 존재하지만, 한 평범한 개인의 삶을 어떤 소우주 속에서 추적하는 사건사(cf.Ginzburg,1976/2001,p.41-42)는, 단순한 개인의 전기 연구 차원이 아닌, 그 개인의 고백을 둘러싼 다양한 담론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그 담론이 가려 놓은 개인의 고백을 차분하게 바라보는 효과를 가져온다. 연구자는 이러한 효과를 공유하기 위해 사건의 재활용, 기억의 재활용을 도모하는 '사건사'의 시선으로 두 살인자의 삶을 추적할 것이다.1) 무엇보다 여기에 푸코적 시선을 가미한다면, 우리는 푸코의 '사건화'가 가져다주는 담론 간의 전쟁 속에서 개인의 고백은 어떻게 해석되며, 분류되고, 이용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2) 그랬을 때 우리는 "과거의 진실을 가시화 시킨 것이 아니라, 이 진실을 가능케 한 조건들을 가시화 했고, 이러한 진실의 생산이 그것을 발화하는 현재의 글 쓰는 주체에게 작용하는 방식을 밝히려 시도"(심세광,2003,254쪽)하는 푸코의 시선을 체감할 수 있다.

   


  3-1. 19세기 프랑스의 한 청년, 피에르 리비에르의 수기

 

 나는 내 성격과, 그 행위 전과 후에 품은 생각을 설명하기로 약속한 바, 여기서 나 자신의 생활과, 오늘까지 마음을 점하고 있던 생각을 짧게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Rivière,1835; 1973/2008,p.177-178에서 인용)


  

 

 

 

1971년 푸코의 제안으로 시작되어 1973년까지 약 2년여에 걸쳐 진행된 콜레주 드 프랑스의 비공개 세미나에 참여한, 상이한 지평에서 활동하는 연구자들의 공동 연구의 결실이, 『내 어머니와 누이와 동생ㆍㆍㆍ을 죽인 나, 피에르 리비에르』(1973) 라는 책으로 출간된다. 1971년 푸코는 세미나에 참석한 10명의 연구자들에게, 자신이 파리 국립도서관 서고에서 우연히 발견한 피에르 리비에르의 『수기』로 공동 연구를 제안했는데, 푸코는 이 존속 살해범의 수기에서 남다른 구석을 발견한다. 그것은 리비에르가 '살인범'의 처지라서가 아니라, 그를 범죄자로, 광인으로 규정하고자 했던 당시 법 담론, 정신 의학 담론의 경쟁 관계 속에서 형성된 진리라는 것은, 견고한 것이 아니라 더 파헤쳐 봄으로써 해체될 수 있는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피에르 리비에르, 그는 1835년 6월 3일 자신이 살고 있는 오네 읍 '라 폭트리'라는 마을에서 자신의 어머니 빅투아르 브리옹, 남동생 쥘 리비에르 브리옹, 여동생 빅투아르 리비에르를 살해한다. 체포 이후, 그는 곧 법 담론과 정신의학 담론의 '분류의 놀이'에 속하게 되는 데, 그런 '분류의 놀이' 속에서 '광인'과 '야만인'으로 규정되어버린 리비에르는 자신의 수기에서 “내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적어도 들어주기라도 하는 것, 그것이 내가 원하는 전부입니다”(PeterㆍFavret,1973/2008,p.365)라고 밝힌다. 이 말을 리비에르에 대한 동정으로 가기 위한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더욱이 살인자를 향한 면죄부를 줄 것이냐, 말 것이냐의 직접적인 여부로 가는 것도 조금은 소란스럽고 즉각적인 문제 제기다. 이것은 한 어린 농부의 살인을 우리가 어떻게 사회적인 것으로 볼 것이냐의 기로에 서 있는 것과 더 연관성이 있다. 푸코와 함께 리비에르에 관한 연구를 수행했던 장 피에르 페테르와 잔 파브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행한 침묵의 세계였던 농촌 사람들은 그 상태를 받아들이는 것을 그만두고, 의미 깊은 증상과 같이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며 바깥쪽에서 무시무시한 범죄를 일으킨다. 증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그것에 대해서 즉시 주목할 만한 논문이나 기록을 많이 쓴 이들이 의사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농촌의 말 없는 사람들이 드디어 증언하는 법을 안 것이라고 생각한다.(중략)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은, 마치 지식이나 이성은 흔들리는 것을, 그리고 토착민이 발언하고 그것을 남이 들을 수 있게 하려면 먼저 죽이고, 그 때문에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자기 생명을 희생하는 기회를 발견한다. 그들의 행위는 언어였다(강조 : 필자). 그들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왜 범죄라는 이 무시무시한 언어를 이야기하는 것일까?"(PeterㆍFavret,1973/2008,p.351-352)

 

 "누군가에게 들려지려면 살인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PeterㆍFavret,1973/2008,p.360)는 견해 속에, 리비에르의 수기는 상호 배타적인 두 언어, 다시 말해서 사법 용어와 정신병 환자의 용어가 서로를 부정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던 당시의 담론 체계 내에서, 부차적인 지위로 밀려난다. 이에 대해 진즈부르크는, 리비에르의 증언을 왜곡이나 비상한 추론 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의 증언을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유일하게 남은 적법한 반응은 망연자실과 침묵뿐이라고 평한다(cf.Ginzburg,1976/2001,p.35-36).3)  리비에르의 수기는 '사법과 의학의 수다스러운 기계'(PeterㆍFavret,1973/2008,p.365) 속에서만 존재했다. 당시 이제 막 탄생 중에 있는 정신의학이 그에게서 얻어내려고 한 것은 죽음이었다4). 그에게 특사를 내림으로써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을 거부한 것이고, 결국 토착민의 언어도 어떠한 무게도 없고 괴기스러운 효과도 없음을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범죄자들은 언어를 농락하는 것처럼 죽음을 농락하는, 정신이 혼란한 어린이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고 다니는 원한은 존재 이유가 없고, 공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PeterㆍFavret,1973/2008,p.376). 리비에르의 수기에는 그의 인생사가 다 담겨 있었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갈등을 낱낱이 공개했으며, 그가 읽었던 종교 관련 서적들, 어렸을 때부터 했던 습관들과 놀이들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스스로를 "육욕에 사로잡혀 고민하고 있었"(Rivière,1835 ; 1973/2008,p.180에서 인용)던, "일행 중에 여자가 있을 때에는, 그들에게 말을 걸 수가 없었"(Rivière,1835 ; 1973/2008,p.181에서 인용)던 남자로 밝혔으며, "자주 개구리나 새를 묶어놓고 찔러 죽이며, 세 개의 못을 동물의 배에 박아 넣어서 나무에 고정시키는 것"(Rivière,1835 ; 1973/2008,p.185에서 인용)을 했던 이로 기술했다. 이 수기는 결국 '이야기 되는 사건'의 굴레에 빠지게 된다. 여기에는 당시 신문의 논조도 한 몫 한다. 푸코는 「이야기되는 살인」이란 책 속 글에서, 리비에르의 이야기를 기사로 실은 19세기 통속 신문의 보도 행태를 분석한다. 푸코의 분석에 따르면,

 

"리비에르의 이 이야기는 적어도 그 형식면에서 보자면 삼류 신문의 살인 기사로서, 당시 민중의 범죄에 관한 기억을 형성하던 일련의 서술과 유사하다. (중략) 통속 신문에 아주 빈번하게 나타나는 상보, 정황, 설명이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런 표현들은 같은 사실에 대해서 신문이나 서적에 부여하는 중요성과 관련해 이런 종류의 어법이 수행하는 기능을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변형을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평소라면 품위나 사회적 중요성이 결여되어 있어 어차피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요소인 인물, 이름, 행위, 대화, 물체 등을 서술 속에 도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상기한 것과 같은 모든 자질구레한 사건들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대단히 특이하고, 진기하며 이상하고 독특한 사건이라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강조 : 필자). 이렇게 해서 통속 신문적인 서술은 습관화된 것과 경이로운 것, 일상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을 교환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교환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중요한 조작이 일어난다. 즉 사람들이 실제로 목격한 것,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처럼 마을이나 읍내에 퍼지는 이야기가 모두 기상천외라는 모양을 취하며(강조 : 필자) 누구에게나 회자되어 일반적으로 기록되게 된다. 이렇게 해서 그 이야기는 결국 인쇄되기에 적합한 것이 된다. 곧 문학으로의 이행인 것이다"(Foucault,1973/2008,p.381).



 19세기 초 무렵의 삼류 신문은 일반적으로 2부로 나눠져 있었다. 제1부는 사건의 객관적인 이야기로 익명의 목소리로 이야기되었다. 제2부는 범인의 애가이다.

이 기묘한 가사에서 범죄자는 자신의 행위를 상기하고, 자신의 경험에서 교훈을 끌어내며 양심의 가책을 표명하며,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는 자신에 대해 공포와 연민을 나타낸다(Foucault,1973/2008,p.394).  당시의 신문은 신중하게 병사의 영광스러운 후문과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살인범의 행위를 나누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신문은 법규를 예증하고, 그 바닥에 있는 정치 도덕을 전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범죄 이야기는 그 존재 자체를 통해 살인이 지니는 양면을 찬미하고 있었다. 범죄 이야기의 폭 넓은 성공은 인간이 어떻게 해서 권력에 반항하고 일어나 법을 범하고, 죽음을 통해 죽음의 위험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 가능한지를 알고 싶어 하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욕구의 존재를 명시하는 것이다(Foucault,1973/2008,p.393).5) 우리는 이러한 명시 속에서 리비에르의 고백이 다뤄진 행태가, 하인리히 뵐의 소설『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에서 주인공 블룸이 처한 것과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다.6) 그들의 살인은 입이었다. 그리고 그 입은 다른 사람과의 귀에 도착하길 원했다. 그러나, 현실 권력은 그 입을 통해, 정작 그 입에서 나오는 진실을 막고자 했다. 입을 열게 함으로써 입을 막아버리는 아이러니. 막혀진 입에서 새롭게 개입되는 입들. 그리고 그 새로운 입들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대중의 입들. 법 권력의 심문 과정 속에서 나온 고백들, 그리고 그 고백들을 전달하는 언론 권력은 두 사람의 고백을 각자의 담론 체계에 부합하는 데 신경을 쓴다. 살인이라는 ‘보이는 폭력’ 앞에, 우리는 그 살인이 던지는 사회성, 공공성을 체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개인의 것으로 누락시키는 현실 권력의 담론을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사유할 수 있다. 이야기되는 살인의 운명 속에서 사람들은 법을 어긴 사람과 법을 어기지 않은 사람,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분류 체계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언론은 그러한 진리를 더욱 부각시키기 위한 수사들을 고안한다. 공동 연구자 필리프 리오는 리비에르를 둘러싼 의학제도와 사법제도 내 담론이 서로 대응하는 가운데, 두 담론의 전쟁은 어떤 공모를 발휘한다고 분석한다. 즉, 리비에르의 생애를 재구성하는 것에서 그의 수기를 제외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수사와 검진을 위한 생의 재구성 과정에서 수기의 제외를 요구하는 것은 수기가 몇 가지 분명한 시점에서 의사나 사법관의 주장과 엇갈리기 때문이 아니라 수기 전체가 의사나 사법관의 해석과 합치하지 않기 때문이다(Riot,1973/2008,p.456).7)

 리비에르의 이야기는 살인이란 극단의 언어로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싶었던 인간'이 현실 권력의 담론적 쟁투 속에서 그 고백이 어떻게 이용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우리는 그 고백의 운명을 사회학자 엘리아스가 소문에 대해 했던 말로 대신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즉, "예배가 끝난 후 클럽이나 주점, 또는 연극공연이나 연주회에서 입방아가 작동되는 광경"(Elias,1965/2004,p.166), "집단 안의 위상을 두고 벌어지는 경쟁의 압력 속에서 다른 수다쟁이보다 더 좋은 뉴스거리를 가졌을 때, 더 많은 관심과 더 큰 박수를 받을 수 있다는 관심 경쟁"(Elias,1965/2004,p.171), "단결력을 유지하고 강화하지만, 그것을 산출하지는 않는 수다"(Elias,1965/2004,p.175)로의 귀결. 리비에르의 고백은 널리 이야기되지만, 그 이야기를 향하는 시선에서 진리는 개입하려는 이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그 문을 열어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구경꾼인 '나'인 것이다. 이야기되는 살인의 운명은 비단 19세기 프랑스의 한 청년에게만 나타난 것인가. 2007년 미국의 버지니아 공대에서 자신의 동료들과 스승을 살해한 재미교포 청년 조승희의 이야기는 리비에르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다.

    

 

 

 

   3-2. 21세기 미국의 한 청년, 조승희의 흔적



"너흰 나를 코너로 몰아넣고 선택의 여지가 없게 만들었다 ㆍㆍㆍㆍㆍㆍㆍ너흰 너를 십자가에 못 받아 죽이고 싶어 한다. 너희들은 내 머릿속에 암 덩어리를 집어넣었고 내 심장을 테러했으며 내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어 한다"

- 2007년, 조승희가 NBC에 보낸 선언문 중에서 -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후안 고메스 후라도의 『매드 무비』는 '조승희 사건'으로 명명된 2007년 4월 16일에 있었던 미국 버지니아 공대 총격 사건을 재구성한 논픽션이다. 만약 푸코가 살아 있었다면, 후라도의 이 책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수행했을 것이다. 그것은 후라도와 푸코가 'Psy(정신의학, 심리학, 정신분석학) 담론'을 대하는 시선의 차이 때문일 듯하다. 후라도는 「일그러진 정신의 해부학」이라는 책 속 테마를 통해, 조승희의 살인이 일어났던 이유를 분석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살인 사건에서 익숙하게 보던 조사 과정에서 목격하는 것처럼, 후라도는 조승희의 심리를 분석하고 있는 법의학자, 심리학자의 이야기들을 기본적으로 신뢰하는 차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범인을 대하는 장면을 흥미롭게 처리하는 조사 과정의 수사로 동원되는 듯한 'Psy 담론'은, 결국 조승희의 불행을 조승희 만의 것으로 남겨 놓는 데 일조한다. 프로파일 속에서 조승희는 "내게 한 마디만 말해줘 내게 신호를 줘 내가 어디를 바라봐야 할지 가르쳐 줘 내가 뭘 찾을 수 있을지 말해 줘"(Jurado,2007/2009,p.135)라는 가사가 실린 얼터너티브 락 그룹 컬렉티브 소울의 「Shine」을 반복적으로 즐겨 듣던 우울한 청년, "결코 입을 여는 법이 없었고, 사교성이 부족했으며,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Jurado,2007/2009,p.140)던 청년, "「텍사스 전기톱 살인 사건」처럼 극히 폭력적인 영화를 분석하면서 현대의 잔혹행위에 관해 다루는 과목을 신청"(Jurado,2007/2009,p.154)했던 대학생으로 규정된다.

 'Psy 담론'은 조승희가 남겨 놓은 삶의 흔적들을 정리하고 재구성하면서, 그가 '반환 증상'8)의 수행자로서 자신만의 음모 이론에 빠져서 이성과 감정을 혼돈하려고 했다고 분석한다. 책의 내용에 따르면, 조승희가 고등학교 때 자신의 증오를 전하는 체계를 스스로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글쓰기였다. 그 글쓰기에서 나타나는 타인에 대한 증오의 끄적임은 'Psy 담론'의 권위를 내세울 수 있는 중요한 먹잇감이 된다. 그 글쓰기 속에서 조승희가 세상을 향해 내뱉는 증오의 언술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더라도, 'Psy 담론'의 수행자들은 조승희가 NBC에 보낸 선언문에서 발견된 '피', '십자가' 등의 단어에  '예수 그리스도와 희생양'의 모델을 심어 넣고, 그것이 바로 전형적인 편집증 환자가 보여주는 극단의 언어라고 주장한다.  또한, 조승희가 학창 시절에 직접 쓴 희곡 「리처드 맥비프」는 조승희를 광인으로 규정하는 단서로써, 이는 'Psy 담론' 체계 내에서 상징 부여와 해석의 틀에 합치될 듯한 거리를 제공한다.9) 여기서 우리는 'Psy 담론'의 학문적 실효성을 논하려는 쪽으로 몰아가는 함정의 우물을 파는 대신, "말하게 하기의 임상적 체계화에 의해, 고해를 자기 성찰과 배합하고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해독 가능한 징후 및 증후 전체의 전개와 결합하기, 심문, 자세한 질문서, 기억의 환기를 노리는 최면, 자유로운 관념 연합, 즉 고백 절차를 과학적으로 수용 가능한 관찰의 영역으로 재편입시키기 위한 그만큼 많은 수단"(Foucault,1976/2004,p.87)들이, 우리가 '사건'속에 놓인 개인의 고백- 그 사건 속에 개인이 행하는 언어를 고백으로 인정한다면 -에서 구조적인 것, 정치적인 것, 공공적인 것을 논의할 수 있는 영역을 마련하는가라는 문제화의 우물을 파야 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심세광이 지적하는 다음의 내용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조승희, 유영철 등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엽기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언론을 통해 신속히 확산되는 범인에 대한 정신감정의 담론은 대체적으로 '정신분열증적 착란'과 '편집증'의 범위를 왔다 갔다 한다. 그래서 유효성의 범위는 리비에르 사건 당시 의사들이 거의 만능적이었던 '편집증'을 가지고 정신 감정을 했던 것과 별반 차이 없이 한없이 넓기만 하다. Psy 담론의 절대적인 지배와 거기로부터 결과 되는 범죄 행위에 대한 해석과 지각 방식은, 폭력 행위가 수반하는 정치적 차원을 거부하고 숨겨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기 십상이다. 달리 말하면 정치인들은 그 폭력 행위가 고립되고 소외된 개인 특유의 비정상적 광기의 소산이라는 점을 힘주어 강조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살인자의 '미친' 행동은 정치나 정치인들, 사회 ㆍ경제와 무관하지 않으며, 미친 방식으로든 난폭한 방식으로든 정치 ㆍ경제ㆍ사회의 현실태에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Psy의 담론과 권력은 사후 진단과 판결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완전히 편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승희와 그와 유사한 범행을 저지른 자들은 종종 오래전부터 정신의학과 그 권력이 관리했지만 결국 범죄 행위를 막는 데 실패하고, '사이코패스'와 같은 엉성한 용어로 해석하는 무기력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정신의학, Psy 제도는 '광기'를 관리해왔다.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정작 그 실천이 계속해서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지식이 이상스럽게 우리의 공적인 공간을 엄습해 지배하고 있다. 개인의 잔혹 행위를 사회라는 공동의 신체로부터 분리하여 그것을 과학이라는 라벨이 붙은 공간에서 기성의 범주에 따라 명명하고 분류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위반적이고 파괴적인 행위가 설사 광적인 구축 내에서일지라도 현시하려고 하는 문제와 대면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심세광,2008,527-528쪽).

 

 사법 제도와 의학 제도는 법 집행의 대상자이자 증후와 진단을 도모하는 대상자로서의 입과 조우하여, 그 조우의 결과를 언론의 입을 매개로 세상에 내놓는다. 하지만 우리가 두 사례에서 보듯이, 입과 입의 관계는 차별적이다. 이러한 차별은 하나의 진리로서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입에 나타나고, 우리의 입은 그 진리를 여과 없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오는 사건에서 우리는 그러한 진리를 다시 가져다 줄 진리 생산자로서의 입에 신뢰를 보낸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에 대한 신뢰를 진리를 생산하는 실천에 대한 자기 검열의 측면으로 치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자기 검열이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회와 그 사회에 함께 속한 타인의 시선에 부응하는 차원의 '깔끔한 입'의 생산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입들의 생산 속에 나타나는 고백의 진리들은 비판의 지점에 빗겨져 나간 채, 사건에 대한 고백 속 성찰을 일원화하는 차원으로만 가고 있지 않은가. 그 성찰 속에서 정작 타자는 존재하는가. '깔끔한 입'으로 무장한 우리의 성찰은 결국 나 스스로의 존재를 확고히 하기 위해 타자를 이용하는 고백의 단계에 머문 것은 아닌가. '깔끔한 입'의 존재는 정작 우리에게 사건의 의미를 더 소모시키고 있지 않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