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테레비'를 틀어놓고 자면 나름 알람 효과가 있다. 꼭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있는 스포츠 채널을 틀어놓고 다음 날 아침을 기다린다. 사실 새벽기도 주기라는 것이 몸에 스며들어 있어서 04:30분 가까이에 몸에 반응이 오지만. (그렇다고 드림 워커니 뭐니 하는 신조에 휩쓸린 시간 지키기엔 동참하고 싶지 않다) 


2. 칫솔을 찾는다. 아니, 그 전에 몸을 한 번 긁는다. 너무 '드라마스러운가'.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어느 정도 '미디어화'된 인간 아니던가. 여기에 큰일까지 보면 더 드라마스럽겠지만, 내 뱃속이 차마 그것까진..


3. 클래식을 틀어놓는다. 요즘은 쥴리아 피셔의 연주를 듣는다.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이란 바흐의 음악에 조금 몸을 느끼하게 만들어놓는다. 그래야 회사에 가서 온갖 들이대는 자극에 맞설 수 있다.


4. 세수를 한다. 클렌징폼이 다 떨어져간다. 그래서 통을 거꾸로 세워놓았다. 기분탓일 텐데 거품이 제법 많이 남았다는 안도감이 부쩍 늘었다. 거품을 '강박적'으로 낸다. 면도를 자주 했더니 턱 주위가 거칠다. 이제 나도 아빠의 턱을 갖게 되었다. 


5. 향기가 너무 세지 않은 바디로션을 찾는다. 몸 구석구석을 만져준다. 


6. 팬티를 찾는다. CK에서 이젠 리바이스 드로즈가 좋다. 


7. 옷을 뒤적거린다. 대학교 4학년 때 산 옷들을 아직도 입는다. 

오래되어 '비냄새'가 나는 옷들은 신호가 온 건데, 차마 미련을 버리지 못해 집에서라도 입자고 혼잣말을 건넨다.


8. 밤에 켜두었던 컴퓨터 본체를 만져본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랑 함께 살 때 집에 불이 날까 걱정되어 구식 테레비의 뒤를

손으로 만져보던 버릇이 이렇게 넘어왔다. 시스템이 뭔가 이상한지 윈도우 업데이트가 제대로 안 되어 늘 짜증난다. 아침

짜증지수 조금 올라간다. 잘 하지도 않으면서.


9. 마을버스에 가득찰 사람들 모습에 인상을 미리 찌푸려본다. (어차피 앉아갈 거면서)


10. 신호등 안 지킬 저 무시무시한 차들을 미리 째려본다. (나도 안 지킬 거면서)


11. 탄다. 


12. 내린다.


13. 들어간다.


14. 청소하시는 아주머니 힐링해드린다. (아 진짜 왜 이리 쓰레기가 많아!)


15. 컵 씻는다. 


16. 포트에 물 담는다.


17. 앉아서 회사 메신저를 켜둔다.


18. 오늘의 한마디를 바꾼다.


19. 달력을 본다. 


20. 조금 눈을 붙인다 


+ 9시다. 오늘도 지옥이거나 혹은 좀 더 괜찮은 지옥이거나. 둘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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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어떤 '부드러운' 충고를 들었다. 단단하고 날선 충고보다 그 효력이 오래가는 듯싶었다. 오랜만에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냥 불을 끄고 멍하니 들었던 말들을 곱씹고, 다른 일을 시작하면 되는데. 쉽게 그리되진 않았다. 이불에 묻어 있는 섬유유연제향만이 날 위로해줄 뿐이었지만, 그리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하는 그 반복의 소소한 의지만이 위로가 될 뿐이었지만. 언젠가부터 '밤행사'가 되어버린 불을 끄고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는 행위의 리듬 속에서 내게 '이불을 뒤집어쓰고 고민을 한다는 것'은 진한 향수(노스탤지어)이자, 진한 향수이기도 했다.


2

'나잇값'인지 그래도 충격의 완화 효과가 저절로 만들어진다는 느낌은 받는다. 얼마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가슴을 쳤던지 다음 날 일어났을 때 먹먹해진 가슴에 '그냥 오늘 학교는 띵굴까?' 같은 유혹에 쉽게 마음을 열었던 때에 비해선 참 변했다는. 그런 변화의 뿌듯함이 밤을 휘감으면 잠시나마 따가운 소리는 내 귀에 들어오다 그 유입의 과정을 멈춘다.


3

사람이 간사해서 어쩌다 보면 그러한 따가운 소리를 상상해서 내게 들어오게 만들려고도 한다. 그런 소리를 벌 짓을 늘 하는 것이 우리네 일상이지만, 파주는 요상한 동네다. 이 정적이 나를 그런 따가운 소리의 풀장으로 들어오라는 유혹의 목소리로 들린다. 그래서 이 파주의 침묵이 때론 무섭다. 여긴 너무 조용하다. 말이 없으니 외려 언어의 두려움을 둘러싼 지나친 발설에 대한 경계보다는 지나친 침묵이 주는 이상한 경계심이 나의 감각을 휘감는 듯하다. 그리하여 난 오랜만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지난주 들었던 그 따가운 소리를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확산/확성시킨다. 이래야 이 심심한 동네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오랜만에 몽정이라도 해볼까. 하긴 몽정은 의지가 아니지. 본능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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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나온 계간지 기획 중 가장 주목할 기획을 개인적으로 꼽는다면 『F』5호(2012)일 것이다. 부르디외 타계 10주년을 기념해 기획한 '부르디외를 읽자' 는 작은 몸집에서 우리가 고민할 수 있는 큰 이야깃거리를 잘 생산해냈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 기획의 각 꼭지 가운데 부르디외의 제자이자 우리에겐 『가난을 엄벌하다』로 잘 알려진 사회학자 로익 바캉의 회상 「부르디외를 기억하며」도 좋지만 재미있는 꼭지는 부르디외가 『문화재화의 경제』(가제)라는 제목으로 출간하려 했던 한 장의 초고인 「아노미의 제도화: 19세기 프랑스 미술계에서의 상징혁명」이었다고 본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면, 일단 이 짧은 초고에서 우리는 '예술사회학'이라는 학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술사회학도가 무엇을 연구하는지를 알려줄 수 있는 꽤 다양한 범주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1-주

한국에는 아직 예술사회학이 많이 확산되진 않았다. 국내에는 부르디외 일급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이상길 교수가 가장 '예술사회학다운' 연구와 학술적 실천을 하는 가운데, 한준과 최샛별 교수 등등이 부르디외의 문화자본, 경제자본, 사회자본이라는 주요 개념을 통한 한국 사회의 문화적 취향도를 그리는 데 매진하고 있다. 이상길 교수가 보다 이론적 토대를 닦으려는 데 집중하고 있다면, 두 학자는 실증 연구에 주력하는 편이다. 





2

그간 내가 예술사회학에서 받은 인상을 쉽게 풀어보면 '뒷담화의 전환술'이라고 이름붙여볼 수 있을 듯하다. 다들 알다시피 미학은 작품-텍스트의 가치 판별/판단에 주목한다. 그 작품이 왜 뛰어나며,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철학적 사유를 동원한다. 그리고 그 사유와 연관된 역사 또한 검토한다. 이 역사에는 우리가 감탄해마지않는 작가에 대한 천재성도 꼭 들어가곤 한다. '천재성'이라는 키워드를 연결고리로 삼아 예술사회학으로 돌아오자면, 예술사회학은 그 천재성이란 것에 대한 '사회학적 의혹'을 제기하는 학문이다. 작가의 천재성을 둘러싼 사회학적 요인, 더 쉽게 말해서 관련성과 관계성을 꼼꼼히 파헤쳐보려는 학문이다.가령 이 작가가 '명성'을 얻는 데 드는 경제적 비용은 어떻게 따져볼 수 있을까? 경제적 후원을 해주는 스폰서의 위치와 역할은? 이 작가가 지금의 위치에 있는데 유지되는 인간 관계적 특성은 무엇일까? 그를 둘러싼 예술가들의 커뮤니티 유형과 그 성격은? 이 작가의 천재성 혹은 그 작품 세계에 스며든 인문적 메시지를 휘감는 맥락은 무엇일까? 그의 전공은? 학교는? 지도교수는? 그리고 아카데미가 부과하는 예술적 규범이란 것도 있겠지?


예술사회학은 당신이 갤러리에 가서 "야야 이 작가 이야기 들었어?"로 시작하는 뒷담화를 어쩌면 조금 더 체계적인 학술적 체계에 담은 연구일지 모른다. 그래서 이 학문의 운명은 '정말 신선한 학문'이거나 때론 '좀더 괜찮은 뒷담화' 수준일 수도 있는 가녀림을 지녔다.


3

암튼, 다시 본문 이야기로 돌아와서 「아노미의 제도화」는 당신이 예술사회학이 무엇을 공부하는 학문인지 감을 잡는 데 도움을 주는 아티클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 부르디외가 다루는 것은 결국 대중이 '무형의 그 틀 없는 상태'라고 여기는 예술이 결국 '무형의 틀' 속에 있다는 주장의 경험적, 역사적 진술이다. 

3-주

나는 부르디외의 이론을 '무형의 틀'이라고 부르기 좋아한다. 그가 늘 강조하는 하비투스, 장 이론에 스며든 비구조적 속성 가운데 나타나는 구조성. 즉 자율적인 무엇으로 보이는 무엇을 통제하는 하나의 구조적 작동, 하지만 그 구조 또한 자율적인 무엇에 의존해야 유지될 수 있는 관계를 설명하기엔 '무형의 틀'이라는 모순적인 표현이 어울릴 것 같았다. 


예술가, 더 나아가 작가는 자신의 예술적 자율성을 만들어가는가. 결국 이 예술가들이 줄다리기하는 경제자본(돈)과의 관계, 무엇보다 작가 자신의 예술적 세계관을 보이는 데 큰 작용을 한다고 볼 수 있는(적어도 부르디외에겐) 아카데미, 학문 사회와 예술가들의 존재를 직간접적으로 책임지는 국가 소유의 예술기관들이 부과하는 일종의 학문적 양식과 규범들(문화자본)에 대한 수용과 저항 등은 결국 우리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예술 작품의 액자 속 틀이 말해주는 것과는 다른 틀에서 논의해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어쩌면 더 나아가 작품의 액자 속 틀과 지금껏 말해온 부르디외의 논의 틀은 섞여 있다고 볼 수 있다.


4

다만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늘 그렇듯이 한 개인의 행위에 대한 사회학 특유의 의혹은 '전략과 의도'라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작품을 '순수하게' 즐기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이 학문이 그리 맞진 않을 것이다. 이 학문은 제법 우아한 '뒷담화'이지만, 한편으론 '뒷담화' 특유의 차가움도 가지고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왜 작가들의 가치관을 그런 식으로 의심해야 하지?라는 질문에 대해 예술사회학자들은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변론으로 그 어떤 학술적 주장과 수사들이 동원될 수 있겠지만 다만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진부한 결론은 지금 이 세계를 더 깊고 색다르며 유의미하게 바라볼 수 있는 도구를 준다는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오늘날 자본에 잠식되어버린 예술 혹은 예술가들의 세계를 우리가 더 구조적으로 접근하면서 '학술적 실천'이 가져다주는 앎으로서 대상의 비극에 더 다가가려는 제스쳐가 될 수 있겠다.


5

다만 예술사회학의 운명이 더 기대되는 대목은 바로 이 아티클에서 강조하는 '상징혁명'이다. 국가와 아카데미에 예속되어 있던 예술가들의 양식과 그 가치관들에 저항하며 나타난 신진세력들의 행위와 그것을 떠받드는 사회학적 요인들의 매혹은 예술사회학에서 느낄 수 있는 어떤 오르가슴이다. 무엇보다 이런 오르가슴을 느끼게 하는 매개자의 역할로 예술사회학은 비평가를 주목하며, 예술사회학은 또한 '비평가의 사회학'을 만드는 데 앞장서고 있다는 데서 흥미로운 학문이기도 하다. 예술계의 구세력과 신진세력의 충돌 속에서 비평가들은 구세력의 옹호자이기도 하며, 신진세력은 자신들의 메시지를 이해시키기 위해 자신 스스로가 비평가가 되며, 혹은 '친구'로서의 비평가와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우리는  부르디외가 다른 글에서 꺼낸 미켈란젤로의 한 일화를 확인한 채 이런 상징혁명의 쾌감을 유지해보려는 연습을 시도하면 될 것이다. 그것이 이어진다면 우리는 새 시선도 다음과 같이 더불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자주 그렇게 하듯이, (상업권력, 경제권력 쪽에 놓이거나 혹은 진보와 혁신 쪽에 놓이는) '전지구화'와 문화주권의 보존이라는 고루한 형식과 결부된 민족주의를 대립시킨다면 문제를 잘못 제기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실상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들은 전 세계에 '비즈니스'의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확장하고자 하는 상업권력과 그것들을 통치하는 사람들 간의 투쟁이기 때문이다. 관건은 창작자들의 국적 없는 인터내셔널이 생산한 문화작품의 보편성 옹호에 바탕을 둔 문화의 저항이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대단한 후원자였던 교황 율리우스 2세와의 관계에서 의전상의 형식을 거의 지키지 않았다. 그래서 교황은 미켈란젤로를 앞서 가기 위해서 언제나 최대한 서둘러야만 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미켈란젤로가 제시한 이 전통을 지속시켜야만 한다. - 피에르 부르디외, 「문화의 생존 가능성」중 (이상길 옮김) 


덧붙임) 그리고 예술사회학이 숨겨놓은 또다른 반전은 그 신진세력이 저항하는 새로운 가치관 또한 언제든 예술사회학이 쳐놓은 '무형의 틀'에 예속될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모순적인 내 해석과 표현이지만, 그들은 새로워지자마자 그들은 곧 옛사람이 될 각오를 해야 한다. 예술사회학은 그 지점 또한 놓치지 않고 해석할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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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월드에 한참 빠져 있을 때, 가장 재미있던 놀이는 방명록 닫기/열기였다. 사실 누군가에게 상처받은 것도 아닌데, 미리 내가 누군가로부터 뾰족한 화살표의 대상이라 지목당했다는 공상을 억지로 덧씌운 채 내 기분 좋지 않음을 만들어보려 한 것. 이것이 '싸이'의 재미구나라고 느꼈던 것 같다. 


2

상처에 대한 공상. 마치 일요일 밤 '개콘'을 보고 ' 난 이제 아파야 해..아파야 해' 주문을 걸어 그 악마 같은 월요일을 더 괴물같이 만들려는 시간. 뜬금없이 위안을 얻는 건  내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의미부여도 의미정리도 사실은 그리 잘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 '마음날씨' 체크.


3

마음을 그냥 마음으로 두지 않고, 마음날씨라고 했을 때 그 예상은 "오빠 나 아무거나"라는 음식 메뉴 고를 때의 난처함을 피해보고 싶다는 의도와 조금은 비슷한 건데. X들은 이리저리 잘 피해다니며, 자신만의 날씨 표현을 모호한 수준을 넘어 그 마음의 끝을 뭉툭하게 포장해 나에게 꺼내놓는다.


4

이런 상상과 공상의 사이에 있는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지금 내게 남아 있는 건 차라리 조종당하고 싶다는 것. 그리고 더욱 모순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것. 며칠 전 누군가에게 괴리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난 오히려 그 괴리마저도 내 순수한 의지의 발현이기보다는 차라리 또 누군가가 날 조종해서 그렇게 나온 심리적 상태였음에 더 기뻐할 것 같다. 그러곤 또 웃는다. 헤헤. 병신아. 헤헤 병신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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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3-02-15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날씨는 우중충인가요? 제 마음이 그렇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3-02-16 22:30   좋아요 0 | URL
얼른 탈출하시라는 위로도 좋지만, 때론 우중충 모드도 다른 것을 위한 충전이 된다는 느낌도 받네요^^; 내일은 오늘보단 더 나아지길 바라면서. 화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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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알랭 드 보통의 『일의 기쁨과 슬픔』을 재미있게 읽고 있다. 이 책은 자본주의사회에서의 '투명성'과 '불투명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최근 몇 년간 꽤 인기를 끌었던 '윤리적 소비'를 내세우던 기업과 기업가들은 자본주의사회의 대안으로 투명성을 잡았다. 이들은 은막에 가려진 생산자 문화의 비윤리성을 고발하면서 이 사회 내 경쟁의 공정함을 화두로 삼는 아이러니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은 투명하게, 더욱 투명하게 같은 슬로건을 외치고 다녔다. 


2

그런 점에서 일찍이 내가 두려워했던 점은 신자유주의가 결국 얻은 가장 큰 수확이 투명성의 전시를 통한 성찰성의 도구화라는 점이다. 신자유주의사회에서 기업들의 확장 전략 가운데 하나는 바로 성찰성이었다. 그들이 전진해나가는 길에 걸림돌이 되는 윤리적 문제에 관해 소비자가 딴지를 되도록 걸지 않도록 그들은 "우리는 더 떳떳해질 겁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반성'의 단계를 넘은 사회적 성찰의 목소리를 힘껏 표출한다. 

그러면서 기업과 기업가들은 장소성과 현장성의 투명화를 통해 소비자를 안심시키고 있다. 주방은 더욱 깨끗해지고 내가 먹고 있는 음식의 재료는 신선한 상태에서 관람할 수 있는 대상이다. 기업 홈페이지에 한 코너를 장식하는 윤리, 공정, 연대의 목소리들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3

보통은 '상품에 잊힌 오디세이'를 관찰하자고 제안하지만, 사실 보통의 이 견해는 순진하다. 오늘날 기업과 기업가들은 소비자들이 적당히 침범할 만큼 '상품의 오디세이'를 이미 만들어놓고 소비자들을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오디세이는 더욱 교묘해질 것이며, 우리를 향해 더욱 다가오고 있다, 기업과 기업가의 속살을 거의 다 본 듯한 느낌이다라는 도취에 빠질 때쯤 오히려 이들의 불투명성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이젠 성찰, 성찰성이라는 말 자체는 우리 시대가 갖고 있는 가장 선한 대안이자 무기가 아니라, 우리 시대가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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