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울리friuli. 일산에 있는 이태리 레스토랑을 소개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 유명한 역사학자와 예술가 그리고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인류학자를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1 역사학자 카를로 진즈부르그가 바라본 프리울리




카를로 진즈부르그를 알린 두 권의 책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 『치즈와 구더기』는 익히 알 것이다(두 권 다 국내에 출간되어 있다).  두 권 모두 이태리 북동쪽에 위치한 프리울리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을 다루었다.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는 1570년대부터 1640년대까지 프리울리 지방에 살고 있는 수백 명의 주민이 마법을 행한 혐의로 피소된 이단 재판 기록에 근거한 미시사 연구다. '베난단티Ben-andanti ' 는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농촌 지역인 프리울리에서만 통용되던 방언이었다. 베난단티로 여겨지던 이를 심문하던 펠리체 신부의 이야기를 통해 이들이 어떤 마법적 제의를 겪게 되는지 알 수 있다.



내용인즉슨, 

베난단티는 한 해 네 번, 목요일 밤마다 실신 상태가 되고 이 순간 영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걸 경험한다. 그리고 이때 들고양이나 들토끼와 같은 모습으로 변신하여 그들의 회합 장소로 날아가 마녀들과 전투를 치른다. 베난단티는 마녀에 대적하고자 회향풀이나 가막살나무 줄기를 무기로, 마녀는 사탕수수 줄기 혹은 화덕을 청소하는 나무막대기를 무기로 삼았다. 전투의 결과 베난단티가 이기면 풍년을, 마녀가 이기면 흉년을 맞이해야 한다. 



진즈부르그가 파고든 것은 베난단테의 이 신비스러운 행위라기보다는, 행위를 둘러싼 주변의 '시선'이었다. 그리고 역사 안에서 그들이 어떤 위치로 해석될 수 있는가였다.  합리와 이성을 내세운다고 하는 엘리트 계층의 '의 눈에서는 이 행위가 도통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들에게 베난단티는 곧 악마적인 행위를 하는 무리였을 뿐이다. 악마라는 규정은 곧 종교 질서 안에서 '이단의 확정'으로 이어진다. 설득하거나, (혹은 처형하거나)


베난단티와 이단 심문관 간의 '밀당'이 시작된다. 그리고 심문관의 압력 속에 베난단티의 진술은 심문관이 원하는 바와 일치되어간다. 진즈부르그는 베난단티가 기독교의 도래 이전 존재해온 고대의 다산 신앙 혹은 풍농제의 흔적이라 보았다. 역사학자 곽차섭의 주장에 따르면,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는 마녀 신앙의 민중적 기원을 새롭게 보여준 연구서이자, 이단 심문관과 분명 주장하는 바가 달랐던 피의자 신분의 베난단티가 낸 목소리를 처음으로 규명한 책이다. 물론 이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확실한 보물은 '민중 문화'다.



『치즈와 구더기』는 익히 알다시피 긴 설명이 필요없는 미시사의 고전이다. 우리는 이 책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메노키오'가 겪은 황당무게한 일을 어디선가 들어봤다. 16세기 프리울리 지방, 한 방앗간 주인인 메노키오는 그 마을에서 보기 드물게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문명인이었다. 메노키오가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이 담대한 세계관은 놀랍기 그지없다. 세계관의 때깔이 좋다고 할까. 16세기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는 맹신에 대한 저항 속에서 '다른 종교' '다른 세계'에 대한 고백을 시도한 그는 소위 구리지 않은 역사적 인물이다. 메노키오를 '시대를 깨운 인간'으로 보이게 한 요소에는 진즈부르그의 해석에 따르면 책도 무시할 수 없다. 종교개혁을 주도한 루터파와 접촉을 했던 적은 있으나 메노키오는 이 모든 세계관은 자신의 머릿속에 나온 것이라 외친다. 물론 책 읽기가 모두 메노키오를 변화시킨 것은 아니다. 이 지점에서 바로 진즈부르그가 주창한 '창조적 오독'이란 개념이 나온다. '구어'로 된 이탈리아의 민중 문화가 종교개혁과 인쇄술의 영향을 받은 문헌 문화와 섞이면서 메노키오는 어쨌든 '제대로 된 해석'은 아닐지라도, 그 해석을 시도한 결과 자체가 자신을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2 예술가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가 바라본 프리울리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우리에겐 소설보다도 〈살롬, 소돔의 120일〉이란 영화 연출로 더 유명한 인물. 하지만 이 영화가 가진 잔혹성과 선정성이 그를 다 보여주는 건 아니다. 1950년대 이탈리아 지식인을 각성시킨 문학 잡지 《오피치나officina》의 편집자였던 그는, 이 잡지를 통해 세계를 도식화하려는 모든 움직임을 거부했다. 





늘 이탈리아의 주변부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파졸리니에게 '소수의 언어'였던 프리울리 방언은 눈에 띄었다. 그는 1942년 프리울리 지방 농민들에 대한 애정을 담은 첫 시집 『카사르사의 노래』를 발표해 젊은 나이에 이탈리아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당시 이 시는 프리울리 방언이 구사되었다. 이는 놀라운 일이었다. 민중의 언어 사용에도 횡포를 가하던 파시즘 정권하에서 프리울리 방언은 '야만어'의 범주에 속했다. 파졸리니는 해독 불가능한 프리울리 방언의 감성적이면서도 열성적인 순간을 표현하기 용이한 형태를 좋아했다. 물론 프리울리 방언을 선택한 것엔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 파졸리니에게 프리울리 방언은 정부가 획일화시킨 언어 정책에 맞설 수 있는 정치적 언어이자 예술적 언어였다. 


3 프리울리를 다시 찾은 인류학자 더글러스 홈즈






뉴욕주립대 빙햄턴 인류학과 교수인 더글러스 홈즈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을 유명하게 만든 저서 중 

『Cultural Disenchantments: Worker Peasantries in Northeast Italy』(1989)란 책이 있다. 이 책의 학술적 의의를 정리하자면, 진즈부르그의 연구 이후 인류학 연구로는 처음으로 프리울리 지방을 다루었다. 홈즈는 프리울리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숙지한 채, 마을로 들어가 이태리 시민과 농민이라는 정체성이 교차된 '역사적 순간'을 목도한다. 

베버의 '세계의 탈주술화Disenchantments of world'라는 이론에 착안한 홈즈는 프리울리 지방이 역사적으로 지켜온 관습과 체계적인 변화의 바람 속에서 이 지방민들이 자기 나름의 생활방식과 정치 의식, 경제적 가치를 긴장 상태에 두고 있음에 주목한다.


1980년대 초반에 연구를 수행했던 홈즈는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프리울리 지방민의 감정을 살핀다. 이들은 희망을 노래하며, 자신들의 낙천성을 표출한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제2차 대전 이후 나타난 정립된 '이태리 시민' 자본주의체제의 발현 속에서 혜택으로 다가온 듯한 현대적인 삶의 모델들. 프리울리 지방민들도 이를 모르던 것은 아니었다.


프리울리 지방의 인류학 연구를 통해 홈즈가 보고 싶었던 것은  소작농 노동자Worker Peasantries가  맞이한 변화와 이런 변화를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그들 고유의 문화와 감정 또 변화를 받아들이는 그들 나름대로의 문화와 감정이었다. peasantry가 소작농을 뜻한다면, peasanty는 그 어떤 제도의 압박을 받지 않고 단순하게 전통적 삶을 고수하는 사람을 뜻한다.  두 단어의 의미가 언뜻 겹쳐 보인다. 


이러한 내용을 알았다는 기분을 들고 프리울리 레스토랑에 가보는 게 좀 더 나은 시도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앎 자체'를

더 알고 싶을 뿐이다..


* 각 책들, 곽차섭 교수의 「까를로 진즈부르그와 미시사의 도전」, 한성철 교수의 「파솔리니의 빈민-지방문학 연구」

위키피디아, 아마존, 프린스턴대출판부 홈페이지, 뉴욕주립대 빙힘턴 더글러스 홈즈 교수 소개란 등을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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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송호근 교수의 『그들은 소리내 울지 않는다』를 흥미롭게 읽었다. 송호근 교수의 이 책은 젠틀하다. 하지만 그 속에 저자의 야심이 가득 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책이기도 했다. 쉽게 정리하자면 송 교수는 '50대의 김난도'가 되고 싶어하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하지만 어떤 조언 위주의 글보다는 자신을 포함시킨 경험을 바탕으로 한, 타인과의 땀냄새/침냄새가 섞인 젠틀한 필드워크를 선보인다는 점에서, 저자가 나름 요즘 텍스트들을 챙겨보고는 있구나라는 점도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50대의 엄기호'가 되고 싶어하는 듯도 보였다.

 

2

 

그러나 나 스스로 착각하고 싶지 않은 것은 '필드워크적 글쓰기'란 것이 비단 젊은 연구자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땅과 사람 그리고 접촉의 순간을 만끽하고 싶어했던 많은 연구자가 있어왔다는 점에서 그의 필드워크적 글쓰기에 기반한 50대 베이비부머를 향한 그만의 인류학은 사실 그리 신선한 접근 방식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외려 필드워크가 지향하는 경험의 지향성은 소위 "~해봐서 아는데"라는 한국 중년 특유의 커뮤니케이션 스타일과 매우 가깝다는 점에서, 이 책의 필드워크적 글쓰기에 담긴 어떤 태도는 한국 중년 남성들이 흔히 갖는 약간 불쾌한 커뮤니케이션 스타일과 교묘하게 만나는 지점이 있다.

다만 태도의 젠틀함에 섞여 그 교묘함이 약간 순하게 보여진다는 느낌일 뿐이다.

 

3

 

이 책은 참 순진한(?) 것이 왜 세대론을 통한 아픔의 위치와 그 중요성이 비단 베이비부머에겐 가면 안 되냐고 아우성치는 것을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내가 교묘하다고 쓴 이 표현이 미안할 정도로 저자는 우직하게 베이비부머의 가치 좀 한국 사회가 알아야 한다고 점잖게 그리고 자신이 '사회과학자'라는 그 전문성을 지긋이 내세우면서 책의 결말을 보여줄 때까지 그 태도를 멈추지 않는다.

 

4

 

이 책은 대학원생들이 자리잡은 교수들 가운데 술자리를 같이하거나 대화를 하면서 느끼는 어떤 학자형 대화의 연구 대상으로도 삼을 만하다. 저자는 호구조사를 싫어한다고 했지만, 조상이 누구이냐면서부터 시작되어 그 조상과 관련된 역사적 정보를 꺼내어 공유해주고, 나름 젊은 친구들과도 그 호흡이 끊기지 않을 만큼의 유연함을 선보이면서, 묘한 온기를 내비친다. 그러면서 자신 또한 연약한 아버지이자 평범한 아버지이지만, 지적으로 화려하되 경제적으로는 (이 책에서 많이 쓰이는 '운좋다' 등으로 살짝 자신이 이루어놓은 어떤 태도가 자만으로 보일까봐, 그 수위를 낮추고자 겸양된 표현의 전략을 쓰는) 못 미친 과거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위로 대상과 수평적이지만, 그 나름의 차별성도 있음을 은근히 드러낸다. 나는 바로 이 지점이 이 책에서 정말 못마땅하다. 수평과 수직의 위치를 교묘하게 겹쳐놓으면서, 내가 이들을 위로하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뭔가 관찰자/연구자적 위치에서, 라는 그 객관성으로  그 의중을 숨기면서, 자신이 한국 사회에서 얻은 성과들을 인정해달라고 하는 듯한 묘한 뉘앙스가 이 책에 대한 기분 나쁜 내 감정을 숨길 수 없는 이유다.

 

5

 

그래서인지 그가 계속 '사회학자'라는 학문적 전문성을 시종일관 강조하는 것도 매우 불편하다. 가교세대부터 시작해서 나름의 개념 설정/선정을 통해 사회를 보는 눈을 공유하는 것은 좋지만, 그런 전문성에 대한 강조가 자신이 위무하려는 세대적 비극-베이비부머의 비극을 온전히 잘 전달하기보단 저자의 나르시시즘 그 이상으론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필드워크적 글쓰기를 통해 최대한 타인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그리고 그것을 젠틀하게 담으려 했지만, 문제는 그 태도의 기본적 설정이다. 구리다/구리지 않다를 떠나서 왜 저자는 '피해의식'과  '알아주지 못함'이라는 정서를 통해 베이비부머를 위로하려는 시도를 시작했을까. 그러한 정서가 지배적이라서 이 젠틀한 필드워크가 내세우는 베이비부머의 특성 '그들의 소리내지 못함'과 '울지 않음'의 결합 '그들은 소리내 울지 않는다'라는 세대적 고통의 특수성에 온전히 공감할 수 없는 여지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젠틀한 필드워크는 구리다 이상의 느낌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6

 

베이비부머가 사회 속에서 정녕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느냐/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이 책에서 저자가 내세우는 메시지를 잘 읽지 못하는 것이리라. 문제는 다시 돌아와서 더 이상 그런 고통의 감수를 보여주면서 사회를 위한 헌신과 희생으로 소리내지 못함이란 상태를 연관시키는 건, 필드워크적 글쓰기가 지향하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세계와의 접촉이라는 가치와 전혀 만나지 못함이라는 것. 고로 송호근 교수의 필드워크적 글쓰기는 이미 자신이 내려놓은 사회적 법칙과 개념 틀 그리고 마음의 습관 속에서 자신의 말을 누군가의 입을 대신 빌려 전하는 수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는 이미 정해진 풍경과 그 언어 속에서 그만의 세계관이 정해진 사람인 것 같다. 그 안에서 자신이 만난 사람은 그를 깨우쳐주기보단 그의 꼭두각시라는 느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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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우유 2013-04-15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리뷰 잘봤습니다. 저도 사실 이 분의 포지션을 잘 모르겠어요.
이념상 보수이고 자의식도 무척 풍부하신 분 같은데...객관과 관조라는 가면은 쓰셨지만 (원래 그게 학자들의 특성이고, 사회학이란 학문의 특성이긴 하지만 ㅋ) 결국은 본인이 겪고 경험하고 생각하는 틀 안에서 노실 수 밖에 없는 한계를 보여주시는 모습이 역력.
학교때 존경하던 K교수님께서 과연 학자들이 본인의 사회 경제 문화적 기반에서 벗어난 사고를 하는게 과연 가능할까에 대해 얘기해주셔서 한참 토론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게 참 어렵겠다 싶긴 해요. ^^;;
차라리 걍 솔직하게 까놓고 나 이런 사람이야! 하는게 더 진솔해보일것 같은데, 우리나라 대부분의 학자들이 본인의 당파성을 드러내는거랑 학문의 객관성을 침해하는게 같은 걸로 혼동하시는 분들이 많던데, 이분도 그런 케이스 아닐까 싶어요.

2013-04-15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키틀러의 <광학적 미디어>를 정독중이다. 읽으면서 한국의 커뮤니케이션학 교육 과정에 대해 내 경험들을 돌아봤다. 내가 대학생 때 맥루언과 더불어 키틀러의 견해를 비교해서 공부할 수 있는 커리큘럼을 만났다면, 커뮤니케이션학에 대한 지금의 내 심정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을 텐데.  나는 한국의 커뮤니케이션학에 환멸을 느낀다. 


2. <광학적 미디어>는 좋은 번역도 한몫하지만, 키틀러의 생각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 더 나아가 확신이 들었다.


3. 왜 키틀러를 좋아하는 내 지인들이 기술사에 탐닉하는지 그 이유를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4. 지젝의 책과 키틀러의 책을 읽으면서 하나 공통점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은 '의인화/인간화의 오류'라는 것이었다. 이 말은 두 사람의 책을 읽으면서 말을 한번 만들어본 것인데, 가령 지젝은 시장에 대한 의인화가 오늘날 자본주의의 자기증식이 고도화하는 과정 속에서 자본주의의 인간미가 있는 것처럼 포장되고 있음을 개탄한다. (동감한다) 키틀러 또한 기술/기술사를 대하는 태도가 마찬가지다. 키틀러는 마치 기술에 인간을 덧씌워 기술의 비인간성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주장은 무용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기술사는 아예 인간과 무관하다는 전제하에 키틀러는 조금은 센 이 견해 속에서 기술의 '사회문화적 의미'라는 국내에도 한때 참 유행했던 연구들의 무용함을 언급하는 듯하다.


5. 어떻게 보면 문화연구자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과학-'이라는 부분에 대한 광활한 접촉의 필요성과 가능성도 이 책을 통해 다시 생각해본다. 다만, 이런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들이라면, 문화연구의 그 잡식성이'과학'을 흥미로운 수사로 전락시키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6. 문화연구는 참 다양하고 넓은 공부를 하지만, 논문들을 보면, 이런 게 너무 연구가 안 되어왔다 그 정도의 '외로움 호소' 이상은 아닌 것 같아 아쉽다. 이야기가 어쩌다 여기까지..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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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땀구멍이 점점 늘어나는 사회에서 모순적이지만 어떻게 하면 침묵하면서 말할 수 있는가를 요즘 고민해보게 된다. 표현이 아무렇지도 않은 사회에서 표현이 두려워지는 분위기라는 비극에 의연하게 대처하기란 쉽지 않다. 답답하고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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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침이 4에서 5사이를 가리키면 신호가 온다.


2. "너 왜 이렇게 사람 말하는데 몸을 뒤척이니?"라는 옛 친구의 말이 떠오르면서 다시 컴퓨터를 열심히 쳐다보는 척만 한다.


3. 커피를 방금 마셨는데, 포트를 다시 'ON' 상태로. 이미 그날의 에너지는 그날을 위해 다 썼다는 반응이다.


4. 야근 할 겁니까라는 비의지적,무의지적 질문이 사무실을 떠돌아다닌다.


5. 어이 해야죠. (하지만 '먹튀' 생각 가득)


6. 갑자기 내 책상 옆 책꽂이에 책들이 다 잘 있는지 쓰다듬는 눈빛으로 챙겨본다. 


7. 그리고 조금 더 원고를 본다. (이미 마음은 집에)


8. 점심을 먹고 있는데 저녁은 뭐 먹지 하는 기분으로 내일 가방을 쌀 때도 있다.


9. 내일 가방이란, 결국 손과 어깨에 아무 부담도 주지 않은 채 워킹화를 신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의 여부.


10. 바람이 차네? 파주 날씨를 한번 욕해준다.


11. 컴퓨터를 끈다.


12. 퇴근 카드를 찍는다.


13. 고개를 숙인다. 


14. 다른 건물을 쳐다본다.


15. 버스가 방금 지나갔다.


16. 어색한 사람들과 어색한 눈빛을 교환한다.


17. 질주하는 버스를 잡기 위해 손으로 미리 여러 번 흔들흔들 신호를 보낸다.


18. 탄다.


19. 손에 무엇을 쥔 아가처럼 교통카트가 든 지갑을 꼭 쥔다.


20. 연습할 오늘의 랩 음악을 틀어놓고 흥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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