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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일 [월]에 방영된 유시민의 일요인터뷰를 보면서, 문득 10.28 재보선 결과를 통해 진보진영의 위기를 분석한 레디앙과 프레시안의 기사 내용이 떠올랐다. (솔직히 말해 노무현의 죽음 이후 끊임없이 유시민에게 '잠룡'의 위치에서 깨어날 것을 요구하고 기대했던 이들은, 인터뷰에서 유시민이 했던 말 한마디,한마디에 시원함과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 이번 재보선에서 가장 큰 위기의식을 느낀 곳은 한나라당이 아니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아닐까 싶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사표론'과 '비지론'의 차원에서 '희생'을 강요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걸 감안해야 할 것이다.  

유시민은 인터뷰에서 친노신당의 포지션을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이가 아니라, 민주당과 민노당/ 진보신당의 사이에 있는 '중도진보'라고 설명했다. 지금 누구를 찍어야 하나라고 고민하는 많은 누리꾼들에게 '솔깃한' 소식일게다. 다만, 기존 진보진영에서는 좌불안석이 될 수밖에 없을 게다.  다만 민주당의 이번 결과를 볼 때, 민주당도 그리 안심할 수 없는 건 '민주당에게는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대안은 아직까지도 '엠비를 아직도 믿으십니까'같은 구호일텐데, '심판론'의 구호는 그렇게 안정적인 전략은 아니지 싶다. 사실 이 '심판론'의 구호 안에 전략적으로 뭉치는 진보진영의 경우, 생각보다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없다는 것은, 심상정이나 노회찬 같은 '인물론'이 아직 대중들에게 낯설다는 것 또한 분명 봐야할게다. 그들은 아직 '좋은' 정치인으로 인식될 뿐이지, '이끌어갈 수 있는' 정치인으로 인식되지 않는 듯하다. 대중들은 '좋은 정치인'이 이 정치판을 좋게 '이끌어갈 수 있다'라고 보진 않을 것이다. 그 '좋은'에는 역설적으로 대중들 사이에 공유되는 '좋지 않지만 인정해야 할 부분을 보여주는 것'로서의 '좋은'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 게다. (이것이 정치인 걸까) 

지난 총선 이후, '홍정욱에게 아쉽게 패한 노회찬'의 이미지가 좋게 각인되는 등의 일정 수확으로 진보신당 등에 새로운 기운들이 유입되곤 했었지만, 그 새로운 기운을 형성하는 층이 진보신당을 고정적으로 지지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기 때문에, 진보진영은 심오한 고민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싶다. 그리고 유시민은 인터뷰에서 분명 밝혔듯이,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이 '자기들의 실현을 위한 정당'이라고 말하면서, 선을 어느 정도 그었다. 이 선 긋기는 분명 친노신당의(이 갖고 있을만한) 자신감 확보와 이후 연대 전략이 생길 경우,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영향력있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다만, 유시민 스스로가 언급했듯이 친노신당은 분명 '리스크가 있는 정당'이다.  좀 서둘러 가자면, 차후 서울시장 선거는 강금실 대 오세훈보다 더 재미있는 장면을 연출할 듯하다. 다만,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이나 이번 재보선에서 느낀 것처럼, 한나라당 후보보다 민주당 후보가 누가 나오는 지를 더 걱정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여기 친노신당 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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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간, '논쟁'이란 말을 들으면, 뉴스에서 사람들을 '낚으려고' 너무나 쉽게 쓰는 '파문'이란 말을 대할때의 부정적인 생각을 하곤 했다. "이것들, 사람 또 낚으려고 하는구나"하는 그런 좀 못된 심보말이다. 이건 사실 나만의 생각은 아닌 듯하다. 한겨레나 경향을 보던 지인들이 어떤 논쟁들을 보면, 그 논쟁에 대해 '개입적인' 말을 하기보다는, 언론이 또 '괜히' 의제를 만들어보려고 안달이 났구나라는 반응이 의외로 많았다. 그래서 그 논쟁에 참여한 이는 '흥행 없는 배우'들이 되는 것이고. 우리는 또 그렇게 '관중'의 위치에만 머무른다.  가장 최근의 사례는 조정환-이택광의 '중간계급- 촛불' 블로그 논쟁이 아니었나 싶다. 최 원의 개입을 통해 달궈질 가능성이 농후했던 논쟁이었고, 흥미로운, 나름 유의미한 논쟁이었다고 보는데, 주변 반응은 그냥 두 지식인의 '팬덤' 대결이 아니었냐는 의견이었던 것 같다.  

예상보다 꽤 오랫동안 지속되는 논쟁이 있으니, 그것은 요즘 <레디앙>에서 벌어지는 '체제 논쟁'이다. 나는 아직 20대고, 그렇기때문에 과거 '사회구성체논쟁', '한국 자본주의 성격 논쟁', '시민사회 논쟁' 등등 뜨거웠던 논쟁사를 역사서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체험한 세대이다. 하지만 요즘 워낙 이런 '생산적' 논쟁이 희소한지라, 옛날 그 뜨거웠던 논쟁의 나날들이 그리워진다. (사실, '그리워진다'라는 표현은 당시의 경험을 '글'로만 체험한 나에겐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리라. 하지만 왠지 이 표현을 쓰고 싶어졌다. 일정한 양해를) 

사실 조희연 - 서영표 vs 손호철 구도에 머무른 채, <레디앙>에서 억지로 살려보려고 기를 쓴 느낌도 들지만, 그런 '불투명한' 의심은 하기는 싫고, 중간에 최 원 선생이 '지배어'의 생산이라는 고민의 의제를 잘 던져놓은 덕분에, 논쟁의 불씨는 계속 남은 형국이다. 이 논쟁 덕분에 얼마전 윤건차 선생의 <한국 현대사상의 흐름>을 다시 집어들어 정독했다. '레디앙'에서 본 조희연 선생과 손호철 선생의 사진을 보다가, 윤건차 선생의 문자 속에 새겨진 조희연과 손호철이라는 이름을 보니, (과장됨 없이)뭔가 가슴이 뜨끔하는 느낌이 들었다(미어진 기운보다는 약간 덜한). 그 뜨거운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 그렇기때문에 그 뜨거움을 유지하고 싶은 이 지식인들의 열망, 욕망. 이 열망과 욕망이 가로새겨진 이름들을 하나하나 짚을때마다, 그 어떤 사상과 이념의 적대를 떠나, 그 적대를 아우르는 지성에 대한 존경은 감히 숨길 수 없는 그 어떤 보존의 존재로 남는다는 것은 당연하리라. 

하지만, 이런 '추억의 경제'가 지금 이 논쟁을 '효율과 실리'에 머무르게 만든다면, 그것은 '탈정치'보다 더 못난 얼굴을 가진 게 분명하다. 고로 나는 이런 '생산적 논쟁'이 더 뜨거워지길 바란다. 사실  비평과 해석의 의미에 흠뻑 빠진 우리 젊은 세대에게, 진중권이 시사인에서 언급한 '제작학'으로서의 학문적 의식이 참 없다는 게 안타깝다. 늘 다가오는 현상의 해석에 힘을 쏟은 채, 그 현상의 모순을 극복해보려는 대안의 시간은, '당연한 말만이 돌아올 대답'을 해대는 '당연한 질문'의 시간으로 전락한다. (사실 고단수 선생들은 이런 젊은 제자들의 뻔한 질문질이, 제자들 그들의 '인정 투쟁'임을 안다. 그 인정 투쟁에 결국 '나'는 있고, 사람은 간과된다. 오 인간이 죽어있는 학문이여! 대학생들 반성하자!) 

그런 맥락에서 '체제 논쟁'은 현상 분석의 시간을 넘어, 현상 극복의 시간을 창발적으로 이야기해보려는 '장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태의연한'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고 확신한다. 다만 이승원 선생이 말한 것처럼(좀 더 정확히 말해 해석해보면), 이런 전략들이 지나친 '현실 정치와의 접점 형성'으로 간다면, 이론이 가진 '지속가능함'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리라 본다. 이 맥락에서 나 또한 조희연 선생이 던진 '어떤 민주주의인가' 그리고 최 원 선생이 언급한' 더 많은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의제임을 고백해본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라는 개념에 이어, '더 많은 민주주의'라는 개념 속에서, '다이내믹 코리아'는 희망의 지속가능성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 (부디 '수사'가 되지 않길 바라며) 

조희연, ‘반신자유주의 연합’ 비판…"국민정치적 공간+반신자유주의"(9월 10일, 레디앙)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481

 

[조희연-서영표 비판] "97년체제론에 대한 왜곡에 답한다"(9월 16일, 손호철)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530

 

[논쟁-손호철 선생님께] 추상적 논의-경험주의 편향 넘기 위해(9월 23일, 서영표)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616

 

[서영표 교수에게] ‘공허하고 추상적인’ 체제논쟁의 이유(9월 24일, 손호철)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632

 

[손호철 선생께①] ‘반신자유주의 헤게모니 정치’ 고민하자(9월 28일, 조희연)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662

 

[손호철 선생께②] “08년 체제는 87년 체제에 대한 역전”(9월 28일, 조희연)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670 

 

[투고-체제논쟁] 조희연-서영표와 라클라우-무페…김대중-노무현에 대한 착각(10월 5일, 최원)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733 

 

 [정치사회비평-체제논쟁] 민주후보-독자후보 논쟁 넘어 삶의 변화로(10월 9일, 이승원)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785

 

[체제논쟁] 최원씨에게…헤게모니 전략과 ‘민주주의적 변혁주의’(10월 19일, 조희연)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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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이, 그건 다 그 사람 걱정하니까 그런 말 하는 것이에요" 

2. "아니, 그런 말도 못합니까? 자기만 성군인가?" 

1번과 2번으로 채워질 반응을 미리 예상해 본다. 어제 [pd 수첩]을 보고 난 후 나는 사람들이 어떤 '반응 표출'의 게임을 즐기는 것 같았다. 말을 좀 붙여 만들자면, '공포-게임'이라고 할까. '공익고발자'('내부고발자'보다는 이 말이 좋은 것 같다)를 자처한 한 영관장교의 용기있는 소신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사람의 용기로 인해 발생할 어떤 긍정성보다는, 그가 처할 부정적 미래에 대한 진단을 내놓는 경우가 많았다. 아, 물론 "대단하다"는 표현 또한 많았다. 그러나, 그 수 만큼이나 사람들은 그 소령을 둘러싼 어두운 미래를 뱉어내기 좋아했다. "어이구, 이 분 끝이네요", "옷 벗으시겠네요" 이건 좀 심정을 밝히는 차원이지만, 난 괜히 이런 사람들이 밉다. '얄밉다'라는 표현이 맞겠지.  

그런 부정적 언어의 표출을 보면서,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서 했던 말이 생각났다.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계속 말을 하는 것은..결국 자신의 죽음을 부인하고 싶어서다"라는 그 말. 김영수 소령은 '두려움'이란 말을 꺼냈다. 우리는 그 말, 그 말에 담긴 어떤 감정을 통해 '인간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음과 동시에, 그 '두려움'을 맞이함으로써 '나의 안전망'을 무의식적으로 확보하려는 그 어떤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그 두려움을 내 입에서 나오는 '타자가 처할 두려움'을 발설하면서, 구경하는 쾌락의 순환고리가 발생하는 것은 아닐지.  

우리가 '남의 집 불구경하기'라는 표현을 쓸 때 상상하는 것은, 활활 타올라 잿더미로 변한 집들을 보면서, 옆에서 자신과 함께 보는 이들과 '불타오르는 광경'을 공유하는 것이다. 내가 너무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보는지 몰라도. 그 불구경 속에서 인간의 '공공적' /'이타적' 정신을 찾기보다는, "우리 집은 안 탔으니, 되었다"는 이상한 틈들이 더 가까이 연상되는 것은 왜일까.  

 그런 '공포'의 기제들이 만연된 일상. 이것은 왠지 이번 정부들어서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특수한' 현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더한 공포들이 이전에도 작동하고 있었지만, 지금 이 공포들은 참 우리 일상을 아무렇지 않게, 부정적 자극을 그냥 참고 외면해버리게 하는 자기 검열의 형태라 모호한 두려움이 앞선다.  

결국 우리는 그 소령의 용기에서, 용기 자체에 대한 진정한 인정보다는, "또 무슨 (흥미로운) 일, 그 알 수 없는 실체의 흥미로운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지"라는 심정을 은밀하게 표출하는지 모른다. 그 소령의 용기는 그리하여, 또 '소비'되는 것이다. 타자가 느끼는 공포를 타자를 둘러쌀 공포로 반응하면서. "맞아, 당신 느끼는 두려움 그대로 될 거야"라는 이 수준을 "오 후덜덜합니다"라는 (약간 착한 듯한) 감정의 표출로 조심스레 교환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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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전, 문학평론가 권명아 선생이 제기한 문제,  왜 국문학이 이리도 '식민지 연구'에 매달리는가라는 문제는 요즘 국문학 수업을 청강하는 내게 흥미로운 사안이다. 몇 년 전부터 국문학, 역사학, 사회학 등등을 중심으로 '식민지 시기 연구'의 붐이 만들어지고 있다. 요즘 들리는 서점들 역사 코너에 가봐도 대부분이 이 시기 연구 저서들로 채워져 있었다. 알라딘 역사 파트 신간도 마찬가지다. 내가 속해 있는 문화연구 진영도 요즘 '역사적 문화연구'라는 이름 아래, 슬슬 이 시기 연구에 동참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데, 나는 좀 이런 분위기가 우려스럽다.  

권명아 선생이 잘 지적한 것처럼, 식민지 시기 연구의 과잉은 역사가 '현재의 진단학'으로 가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 '발굴'로서의 역사? 물론 좋지만, 그런 '발굴'로서의 역사가 역사 담론 속에서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소통의 매개가 되는지는 의문이다.  요즘 연구자들이 그냥 '역사 연구'라는 큰 공간 속에서, 남들이 하지 않은 '소재'의 빈 틈을 찾아가는 것에 더 혈안이 되어 있지 않은지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아마도 '논문'이라는 대학 사회 내 제도적  산물 속에서, 어떤 창의의 지점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예전부터 느낀 것이지만, '발굴'로서의 역사가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화살표가 서로를 겨누지 못하고, 난립의 상태만 조장하는 꼴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a라는 연구가가 한 의견을 제시하면, 그것은 그것 자체로 소비될 뿐, 그 이상의 반론과 논쟁이 붙지 않는 형국. 그러다보니, 역사 담론은 더 많이 증가될수록, 소비의 운명에 갇히게 되어버린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역사 담론의 과잉이 오히려 '비역사성'을 조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사실 한국 사회가 '역사물'에 환호하고, 또 그런 환호가 실제로 많은지도 모르겠지만, 연구자들이 계속 '역사에 관심을 갖자'고 하는 말 속에서, 한정된 시기의 역사 성과에 집착하는 것이 되려 역사적인 것으로의 탈피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오히려 그런 '과거' 시기 자체의 발굴에 집착함으로써, 우리는 역사에 대한 충실한 명제, 과거 - 현재 - 미래의 가교가 되는 역사의 개념을 잊으려는 것은 아닐까. 일상의 정치적 무기력함을 과거에 대한 신비스러움으로 치환해버리려는 것은 아닐까. 청강하러 들어간 국문학 수업 중, 젊은 연구자들이 너도나도 그 시기를 연구하겠다길래, 나는 좀 의아했다. 과연 당신은 그 시기가 왜 의미있다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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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지 못하는 분노. 우리 시대는 과연 '분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분노를 어리게 보는 사람들은 어림을 '어리석음'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렇기때문에 뭔가 분노와 행동이 이어져야할 때, 분노를 경계하는 사람들은 '조금만 참자'고 말한다. 그것이 '준엄한 분노'를 위한 성실한 준비로 연결된다면 납득할 만하지만, 그 시간을 자신만의 유희로 '자위'하려는 사람들에게 아량을 베풀고 싶은 선의는 없다. 그것마저 다원성이라는 이름으로 '그냥 그렇게' 넘어가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한다면, 가운데 손가락은 내 머리보다 솔직할 것이다. 

고로 사람들의 입에서 관성적으로 튀어 나오는 "죄송합니다. 먹고 살기에 바빠서요"라는 말에 담긴 우리들의 생각은 가슴 속에 묻어난 그 어떤 '비판적 사고'를 도모하도록 한다. 분노하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이들, 나는 이들이 '관객의 윤리'에 갇혔다고 생각한다. 입만 산 사람들은 그래놓고 '강단 좌파', '입 진보'라는 꼬리를 달기 좋아하며, 자기 예외의 논리로 맞선다. 남의 집에 불이 났는데, 그것을 걱정하지만, 물을 채울 양동이가 있는지 위치만 확인하고서는, 그냥 누가 대신 물을 뿌려주겠지라는 심리. 나는  어떤 역사적 '대사건'을 바라고, 그 '대사건'을 하나의 희생양으로 삼아 대중들이 이것을 기회로 일어나야 한다는 구호를 촉구하는 게 아니다. 다만, 나를 포함한 우리들의 무기력감. 걱정은 하지만, '죄송합니다'라는 말 하나를 인터넷 덧글로 남긴 채, 사실은  소녀시대나 원더걸스의 근황을 다른 커뮤니티 사람들과 낄낄 거리며, "사람이 어떻게 매번 치열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조금 쉬어 가야죠.."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하지만, 이것을 어떤 예의의 차원으로 몰고 갈 생각도 전혀 없다. 예의에 대한 굴복 말이다.) 

관객이 있다면, 관객이 낄낄 거리거나 울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무대, 그리고 그 무대를 장식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관객도 참 다양한 성향이 있겠지만, 무대 위 사람들의 퍼포먼스에 일희일비하는 것에 만족하는 관객, 그 일희일비에 수긍하는 것에 그치는 관객에게 그 무대 위 사람들은 자신이 '광대의 운명, '광대의 윤리'에 복속되어 있음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하지만 이 광대를 자조적으로 평가하기보다는, 관객의 윤리가 만들어 낸 '상상의 대상'이라고 해두자.) 

현실 세계의 수많은 열악함들이 우리를 뒤덮는 가운데, 우리에게 정치 현실이란, 그리고 그 정치 현실을 해석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치 교양이란 회사에서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지내기 위해 '낯선 공백'을 채우는 '정치  정보에 종속되고 만다. 고로 정치 정보의 '기능'은 정치 교양이 갖고 있는 잠재성, 현실 세계의 변화 가능성을 대화의 종결과 함께 틀 지운다. 고로 사람들의 대화는 또 다른 역사적 대사건을 기다리고, 사람들은 끊임없는 대사건의 연속에 그 대사건이 주는 '진지한 자극'들을 쉽게 잊어버린다. 

솔직히 말해서, 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사람들의 몰아치는 이 '반성'이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진다. 한. 원한. 분노. vs, 대, 대결...혹시 우리는 이 '반성'을 현실 세계의 답없음과 교환하는 데 만족하는 것은 아닐까. 고로 이 반성은 '관행적 반성', '기계적 반성'이 되어, 우리는 또 다른 노무현을 만들어, 거기에 '희생양 의식'을 투여하는 것은 아닐까. '나'가 다행히 살아 있어, 죽은 이의 넋을 기리며, 그 뜻을 받들자는 구호의 욕망 속에, '지금 당장' 의지를 분출할 이 시간을 유예하고,그 시간에 자신의 '약함'을 동정 어린 변명으로 내세워 그냥 시간 속에 묻혀버리게 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고로, 그렇게 우리 이 순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구호 또한 '관객의 윤리'에 갇힌 대중들에 의해, 스쳐 지나가는 역사적 대사건의 하나로 남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냥 광장 하루 갔다 왔어. 출석했어. 나 장하지' 참 잘했어요 도장 하나 받고, 그것에 대한 만족으로 '우리는 할 일 다했어'라고 우리의 권리를 애써 축소하고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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