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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진화심리학 관련 책들을 조금씩 보기 시작했는데, 내가 갖고 있던 과학의 편견들을 깰 수 있어서 좋았다. 무엇보다 내가 화해하고 싶지 않았던 부분들, 특히 문화연구를 하면 으레 갖게 되는 기능주의 사회학과 심리학의 조합에서 오는 거부감들을 어떤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정리(비판)해볼 것인가의 문제. 그 고민들을 다음 학기에 더 다듬어 따로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문화연구에서 너무나 소외당하고 있는 게 바로 '과학'이다. 과학은 정작 우리 사회 안에서 할 이야기가 너무나 많은데도, 많은 문화연구자들이 '인간' 적인 것 대 '과학'적인 것이란 이상한 구도를 만들어, '인권의 정치'를 오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공학에 대한 관심이 조금 있긴 한데, 그것도 '생명'의 윤리라는 애초에 정해진 답을 정해놓고 쌓아둔 논리적 탑들만 보이는 것 같아 아쉽다. 더 깊은 시선이 나오기 위해선, '공학' 그 자체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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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로지에 대한 연구는 많지만, 아직까지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이 오랫동안 왕좌의 자리에 있는 듯하다. (그래서 올해 초부터, 조금씩 이것을 깨보려고 브루노 라투르의 책도 기웃거리고 있다) 문화연구 자체가 '사람의 행위'에 대해 쏠려 있다보니, 기술 자체가 갖고 있는 '기능'에 대한 더 깊은 탐색과 어우러진 행위의 연관성은 제대로 탐색되고 있지 못하다. 문화연구 안에 너무 쏠려있는 이상한 '휴머니즘' 같은 게 있는데, 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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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에 대한 옹호>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이렇다. '의심'보다 필요한 건 '괴롭힘'이라고. "나를 괴롭혀주세요"라는 부탁의 대상은 밀리언셀러클럽의 스릴러 소설이나 끝나기 5분 전 관객의 뒷골을 땡기는 영화만 속하는 건 아니다. '학문'도 충분히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언젠가부터 출판계를 점령하고 있는 지식인들의 제스츄어는 무엇인가. "자, 여기 불 따끈따끈하게 피워 놨어. 저기 안락 의자 보이지? 간식도 몇 개 챙겨놓았어. 자. 이 정도면 내 이야기 들을 준비 충분하지?" 권장할만한 자세다. 하지만 그 자세가 정체된 자신의 지식을 보호하는 데 이용되어선 안 된다. 굳이 긴 이야기로 꾸미지 않아도, 자신이 세운 이념형의 논리적 조각을 잘 맞추었다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성과로 이 세상에 대한 '열정'을 도모하려는 건 속된 말로 '날로 먹는 것이다'. 

<의심에 대한 옹호>엔 '의심'의 물질성이 없다. 저자들은 민주주의의 열정을 복원하기 위한 실천 윤리로 '의심'을 제안하지만, 여기서 '의심'은 논리적으로 잘 맞춰진 퍼즐 혹은 쌓여진 탑일 뿐이다. 즉, 그 '형식미'에서는 박수를 쳐 줄 만하다. 그러나, 그 '형식미'가 일상 속에 있는 행위자, 사람들에게 더 '친밀한 무엇'으로 인식될 것이라는 점은 다른 층위에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버거와 지터벨트는 내가 이 정도로 치열하게 논리적으로 잘 정리를 해 보았으니, 제안한 이 개념, 충분히 쓸모 있지 않아?라고 전달하는 듯하다. 하지만, 의심을 둘러싼 담론의 역학은 거의 보이지 않은 채, '의심'의 대당인 믿음, 그 믿음과 확실성에 가려진 '관성화'된 사고를 고쳐보도록 하자는 '건전송'만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오래전 버거는 루크만과 함께 <지식형성의 사회학>에서 사회학자로서의 사명을 밝힌 바 있다. (이 구절은 <일상생활의 사회학>에서 가져 왔다)

우리의 목적이 일상생활의 현실 - 더욱 자세히 말해서 일상생활에서 행동을 유도하는 지식-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에 있으며,또한 여러가지 이론적 안목에 있어서 이러한 현실이 지식인들에게 어떻게 다양한 이론적 조망으로 비추어지는가에 대하여 오로지 관심이 있으므로, 먼저 사회의 평범한 구성원들의 상식에 이용될 수 있는 현실을 명백히 밝혀야 한다. 

<의심에 대한 옹호>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사회학자로서 그가 가진 소신의 일관성은 여전히 무너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의심에 대한 옹호>에서 나타난 그의 서술 태도를 보면, '상식의 재구성'수준에도 못 나가고 있는 듯하다.(사실 가만히 있던 '의심'이란 개념을 통한 '상식의 재구성' 이것이 저자가 노린 의도였을텐데 말이다)  

a란 사고 잘못 되었지? b란 사고 허점이 있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니? a의 장점만 취하고, b의 단점을 피해서 c란 대안을 일상 속에서 생각해보자구. 그게 바로 내가 '의심'을 통해 추구하고 싶은 '중용의 정치'라는 거야.  

하지만, 여기엔 오직 '상식의 되풀이'만 남았다. 내가 요즘 가장 우려하는 지식 시장의 종교적 현상, 바로 '반복을 도모하는 예배의 언어'들, 그것의 넘쳐남 말이다. 

제대로 된 기독교의 구원은 타락을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타락을 반복하는 것이다.-133쪽 

슬라보예 지젝은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기독교의 핵심에는 '반복'이 있다고 했다. 고로 기독교에 필요한 건 신자의 순결함이 아니라, 신자의 타락이다. 타락이 없다면 기독교가 갖는 '반복'의 힘. 예배당에 와서 반복적 회개를 요구하고, 그것을 통해 정당화를 획득할 기회는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의 지식 시장에도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세게 말해 미안하지만) 피터 버거와 안톤 지터벨트가 책에서 보여주는 사고와 태도는 '나'의 지적 타락을 도모하는 것 같다. 그들은 사회학적 개념과 원칙들을 꼼꼼하게 정리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자신들이 책임져야 할 개념 '의심'에 대한 과감한 계보학적 탐색을 펼쳤어야 했다. 하지만, 이 책에는 '계보학적'탐색이 보이지 않는다. 앨버트 허쉬먼의 <열정과 이해관계>같은 성과를 기대했던 분들에게는 실망스럽게도, 이들이 주창하는 것은 '의심'이라는 개념의 또 다른 '이념형'을 만들어내는 정도다. 고로 이 책은 한창 사회학에 빠져든 한 대학원생의 페이퍼가 갖고 있는 정돈된 열정을 보여주는 듯 하지만, 정작 그 '열정'에는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다.  

무엇보다 불만스러운 건, 상대주의와 근본주의 사이에서 해결점을 찾으려는 과정 자체다. 상대주의에서 발견되는 니힐리즘을 깨고, 근본주의가 갖고 있는 '절대성'이라는 광신을 깨기 위한 무엇의 발견. 두 저자는 "우리는 광장의 언어에 무심하지 않아"같은 제스츄어를 드는 사례 및 직접적인 몇몇 구절로 넌지시 표시해두지만, 정작 이들이 무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광장'의 복잡다단함이었다. 그들은 학문의 언어가 갖고 있는 개념의 건실함을 '일상생활'에 친숙하게 '설명'하려는 태도로 일관하면서, 정작 '일상생활'의 심층적인 부분들에는 '테두리식 접근'에만 머무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자신이 주창하려는 개념을 '쉽게' 설명하려는 태도 자체가 자신이 독자들의 세계를 충분히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일까?  <의심에 대한 옹호>는 이 질문에 대한 선명함이 부족하다. 그래서 '원칙의 검토와 확인'만이 있을 뿐, 오히려 자신이 사고하고 밀어붙이는 '원칙'에 대한 믿음이 도리어 강화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들은 의심을 '예찬'하면서, 자신들이 주창하는 그 의심 자체에 대한 '믿음'을 강화할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그게 바로 그들이 추구하자고 제안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건실함을 지탱하는 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반박이 들어올 수밖에 없는 건, 앞에서 말했다시피, '의심'자체에 대한 물질성, 그것이 사회 세계에서 언어의 물질성을확보하고, 사회를 영위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교류되고 배치되었는지에 대한 계보학적 분석이 없기 때문이다. '의심'자체의 진공상태가 확정된 상황에서, 그것을 위해 깔아놓은 논리적 무기들은, 논술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한 교재에 더 가깝지, 그것이 그들이 갈구하는 민주주의를 향한 실천윤리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피터 버거와 안톤 지터벨트가 의심을 제대로 옹호하기 위해선,자신들의 책을 읽는 독자들의 뒷골을 오싹하게 할 공포스러운 '이단적 언어의 창조와 재구성'. 그것이 주는 '괴롭히는 사회학적 태도'의 강화여야 했다. 

그들은 '맛난 밥상'의 선결 조건은,  바로 '맛있음'에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 음식은 어디서 시켜먹든, 밥이야 햇반으로 하든, 일단 친절하게 밥상만 잘 차려보자라는 식의 태도가 불편하다. 정작 그들이 차려놓은 밥상을 먹어보니, 준비한 태도에서 나오는 저자들의 '인간적인 매력과 도덕적 건강함'만이 조금 느껴질 뿐이다. 상식의 재론에 큰 일 했다고 자화자찬하는 학자들과 상식에 너무 과장된 찬사를 보내는 시민들의 신앙 가운데, 점점 크는 건 시민들의 망각을 노리는 '온화하고 건전한 교양 민주주의의 언어'일 뿐이다. 그래서 시민들은 오늘날 보편화된 라이프스타일 양식인 '명강의의 언어'에 들뜨고, 잊어버리면 또 그 명강의의 언어에 은혜를 받고 '사실은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했던 죄를 씻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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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12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의심에 대한 옹호>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는데 글을 보니 읽을 마음이 샥~ 살아지는데요~ㅎㅎ 아, 그나저나 쓰신 글 중에서 의문사항이 있어서요..'의심에 대한 과감한 계보학적 탐색'을 펼치는 것과 '온화하고 건전한 교양 민주주의의 언어'의 차이가 그렇게도 큰 것인지요? 의심에 대한 과감학 계보학적 탐색은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과 같은 논의방식을 말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흄이 했던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인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책이 '정치하지 않다'로 받아들이는데..맞는지요? 그리고 온화하고 건전한 교양민주주의의 언어는 어떤 언어인가요? 보편화된 라이프 스타일에 맞춘 EBS 명강의의 언어..그런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모르겠습니다. 그런 언어가 있었다는 것을요..쓰신 글의 맥락상 이런 언어는 '의심 자체에 대한 물질성'을 획득할 수 없어 보이는데...그렇다면 의심 자체에 대한 물질성은 도대체 무엇인가요? 의심 자체에 대한 물질성?? 아~ 도저히 모르겠습니다..ㅠㅠ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1:22   좋아요 0 | URL
아고, 부족한 글(사실 책에 대한 기대와 어긋난, 제 분노에 치우친 글)에 덧글 고맙습니다. 덧글이라 시각상으로 잘 나타나질 진 모르겠지만, 당시 제가 이 글을 썼던 마음의 상태와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yamoo님의 지적 중, '계보학'에 대한 이야긴, 푸코 쪽이었습니다. 사실 '제목'도 그랬고, (물론 출판사의 부가적인 타이틀 부각도 있었지만) '계보학적 탐색'이 갖고 있을 때, 주는 그 언어의 변동 양상이라고 할까요. '의심'이 사회와 부딪히면서, 발생하는 역사 속 그 단절의 순간, 그러면서 애초에 우리가 몰랐던 '의심'이라는 개념 자체의 새로운 시각을 함께 고민해보기. 사실 이런 걸 기대했었습니다. '의심'을 둘러싼 언어-지식-권력, 이것에 대한 세세한 역사적 탐색과 그것으로 인해 발생된 효과들, 뭐 이런 것에 대한 저자들의 귀기울임을 기대했었거든요. 그런데, 책의 구조가, 이미 '의심'은 신의 의자에서 놀고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심'은 우리가 최상의 목표로, 우리 시대의 실천 윤리로, 행동 강령으로 정해놓은 상태란 말이지" 원제가 비록 '의심 예찬'이긴 하나, 이런 예찬은 기대했던 게 아닌데..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두번째, 교양민주주의 언어 측면에서, 요즘 제가 고민하는 부분이, 바로 지식과 지식 수용에 있어 발생하는 목회자- 양들 간의 관계라고 할까요. 사실 상식의 재론 수준에 머무는 책 자체가 갖는 '너무나 당연한 말들을 위한 목가'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은 이런 것에 대한 제 비판적 시각을 적어본 것인데, 고민의 세밀함이 아직 더 해, 제 진심의 강도는 아직 약한 것 같습니다.^^;;(노력해야겠습니다.) '상식화된'민주주의, '정보제공자'로 추락한 지식인들..또 그런 책들의 출간 러쉬..같은 것.(전 개인적으로 유명 지식인들 몇몇 출판사에서 짬뽕으로 이리저리 넣어, '다시,민주주의를 말한다'같은 책을 내는 것에 대해 별로 동의하지 않거든요. 그런 지식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제 의견이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심 자체에 대한 물질성이라는 표현은, 담론에 대한 제 생각을 넣은 표현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의심 자체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술'(테크놀로지)에 의해 맺어진 하나의 양식인가, 그 양식은 시대를 거쳐가며 변해왔는가,시대의 권력자들, 지식을 소유한 이들은 '의심'을 어떻게 전유했는가, 변용시켜왔는가, 그러면서 우리는 일상 속에서 어떻게 '의심'을 구성해왔는가 등등의 생각들이요. 그런데 <의심에 대한 옹호>에는 그런 시각이 없더라구요.(개인적으로 앨버트 허쉬먼의 <열정과 이해관계>같은 책이나, 자크 르 고프의 <돈과 구원>같은 책을 기대했었던지라, 제 아쉬움이 더 큰 것 같습니다.)

2010-08-12 1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2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이함 자체의 가치 절하를 말한 것은 아니랍니다.^^ 그것과는 다른 결의 주장인데, 아직 제 생각이 채 여물지 못한 듯 합니다. 꼼꼼한 지적 고맙습니다!

2010-08-12 16: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2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닙니다! 진지하게 잘 들었습니다. 언어에 대한 신중함은 사실 참 중요한 것인데, 저도 이 참에 다시 제 포스트 하나, 둘 돌아봤네요. 성의있는 주고 받음을 위한 다리 놓기라는 생각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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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윤리적 소비에 대한 연구를 하는 중이다. 덕분에 화장품 가게나 커피숍 등에 걸린 윤리적 소비에 관련된 카피 / 이미지들을 유심히 보는 버릇이 생겼다. 윤리적 소비에 관한 서적이 국내에도 꽤 출간되었다. 대부분 윤리적 소비란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춘 책들이기 때문에, 개념 '설명', 관련된 현상 설명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그러나 천규석 씨처럼 윤리적 소비를 비판적으로 보는 서적 또한 있다.  

외국의 경우 예전부터 윤리적 소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회학자, 경제학자, 문화연구자 들의 견해들이 흥미롭게 펼쳐지고 있다. 특히 푸코의 '통치성'이론을 바탕으로, 윤리적 소비가 '자유의지'를 가장한 새로운 통치의 형식으로 시민들의 삶에 다가가고 있다는 견해가 제법 눈에 띈다. (그러나, 역시 '통치성'론의 현대적 개입은, 사람들로부터 "뭘 이런 것까지 까고 있소?"라는 멘트, "너무 과장된 음모론의 일환이 아니오?"라는 의심을 받기 좋은 것이 사실이다) 비단 통치성론의 한계라고만 한정지을 수 없겠지만, 통치성론을 적용함으로써 생기는 부작용은 바로 기업을 '선과 악'의 틀에 종속시키는 것이다(국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악에 대한 부정적이고 선험적인 규정으로 인해 윤리는 상황들의 개별성을 사고할 수 없다"는 알랭 바디우의 지적을 떠올려본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고는 '윤리적 소비' 안에서 윤리를 이해한다는 것이 보다 입체적이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고로 윤리적 소비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이해해야 할 윤리는 소비 행위를 통해 지향하는 '선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로만 이해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이 문제는 어렵다. 좋은 일 하고 있는 것 아니오?라고 하는 질문에 화려한 비판으로 대응한다고 하더라도, 윤리적 소비가 그렇게 친밀하게 다가오지 않은 듯한 현실에서, 비판은 이른 음모론이 될 수 있는 한계 또한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국내의 논의를 보면, 윤리적 소비가 개인의 일상에 그리 친밀하게 뿌리내리지 않은 것 같은 상황에서, 윤리적 소비 확산론과 비판론이 거의 동시에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통 확산론의 점진적 증대가 있은 후, 그것에 뒤따르는 비판론과 회의론이 시차를 두고 나오기 마련인데, 흥미롭게도 윤리적 소비에 대한 비판론 또한 동시에 쑥쑥 커 가고 있다. 이건 문화연구 같은 문화이론과 정치적 의지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학문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소위 학습효과 같은 것도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대표적으로 이동연 선생의 견해를 살펴보면 그런 느낌을 받는다. 윤리적 소비가 하나의 독창적인 문화 실천이라곤 그는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그의 주장을 보면 그것이 가져다 줄 영향에 대한 비판과 회의는 사뭇 소비의 긍정성과 주체성에 비판적 입장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문화연구의 한 경향과 흡사해 보인다.  즉 그런 비판론이 나오게 된 이전의 사례들에서 학습된 성과를 윤리적 소비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는 그런 사고틀이 보이는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문화연구는 소비자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냄으로써, 기업과 공명하고 있다는 의심을 주위로부터 많이 받아왔다. 그리고 그런 의심들을 떨쳐내기 위한 반성론이 국외를 시작으로 국내에도 꽤 오랫동안 논의되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소비자의 능동적 수용에 대한 회의를 드러내는 견해들이 꽤 나타나는가 싶더니, 올해 관련 논문들을 보니 다시 이런 회의적 질문들에 대한 재반박이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김수정과 같은 문화연구자는, 문화에 정치를 기입하려는 문화연구자들의 이데올로기를 깨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의도적으로 논쟁을 펼치기 위해 도발적인 논문을 썼다. 그리고 여기에 조금은 연한 응대로 이희은 같은 연구자가 '문화적 시민권'이란 개념을 통해 김수정의 논의와 유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학문 사회의 이 비겁하고 소심한 '동료 의식'은 김수정 선생의 도발을 외면하고 있다. 딱한 현실이다) 

윤리적 소비에 비판적 메스를 가하는 대표적 견해 중 하나는, 기업이 노동 과정에 대한 '진정성'을 표출함으로써 나타나는 그 영향이 과연 노동자의 현실 자체를 좋은 쪽으로 인도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다. 즉 노동 과정의 열악함, 특히 국제 정세를 볼 때, 열국의 위치에 있다고 간주되는 국가 내부의 노동 현실을 '피해자'의 입장으로만 인식한 나머지, 그런 입장의 강화가 오히려, 노동 현실의 세부적인 모순을 은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란 주장이 있다. 특히 소비 행위와 연관될 수밖에 없는 개념인 '상품화'를 떠올려보면, 이런 '진정성의 상품화'가 주는 감정 구조의 딜레마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기업이 노동 과정을 드러내고 그 과정 안에서 나타나고 있는 부정적 현실을 소비자에게 '떳떳하게'보여주겠다는 건, 예전과는 다른 문제다. 물론 여기엔 소비자들 스스로 현대 사회의 위험 요소 안에서 안전망을 확보하기 위한 실천도 가미되어 있을지도 모른다.윤리적 소비가 웰빙과도 연관되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리고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비판론이 계급에 대한 시각이다. 윤리적 소비는 정녕 노동자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문화 개념인가?라고 묻는다면, 여기에 대해서도 비판론자들은 할 말이 많다. 기업이 소비자에게 손을 건네고, 함께 노동자에게 허그를 합시다,라는 광경이 윤리적 소비의 한 축이라고 한다면, 비판론자들은 여기서 소비자의 계급을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랬을 때, 아직 윤리적 소비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자기 만족의 문화적 실천'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비판적 견해는 강화된다. 이처럼 기업이 노동 과정에 대한 성찰을 드러냄으로써 시도하는 투명성과  비판론자들의 불투명성이란 대립 관계는 견고하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기업 나쁜 놈!'하고 규정해버린다면, 앞에서 설명했듯이 우리의 단순한 윤리에 대한 이해가, 윤리적 소비의 긍정적 가능성과 열린 비판에 대한 잠재성 모두를 폐쇄시킨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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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가 윤리적 소비와 관련하여 고민하는 것은 '기업은 정치를 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포르셍연구소에서 발간된 <도덕적 명령>이란 책을 보면 윤리적 소비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이 책에선 '도덕 사업'을 펼치는 기업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데, 특히 '도덕욕'이란 개념을 통해, 도덕 자체가 기업의 미래 준칙이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그랬을 때, 기업에게 상품 자체를 파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상품과 함께 따라오는 도덕의 의미와 언어들이 소비자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기업은 과거 국가가 하던 도덕의 의미 부여를 스스로 하게 된다.  

제품 판매가 더 이상 유일한 종극 목적이 아니며, 기업은 동등하게 도덕과 국민의 주체이어야 한다.자신의 환경 안에서 기업은 점차 자신의 불투명성을 버리고,점점 더 국민과 책임자로서 위치하게 되고, 국가에 대한 책임을 가진다고 선언하며,사회적 사명(예를 들어 다논)(43)(과 건강을 위한 다논재단)을 이어받는다. - 43,44쪽  

과거에 우리는 국가를 통해 도덕의 의미를 부여받고, 우리의 선배들은 이러한 삶에 익숙했다. 여기서 기업은 국가의 성취를 전시하는 기능을 맡았다. 기술 국가주의를 통해 기업의 기술적 성과가 세계에 도드라지면, 그러한 성과는 국가 내 위치한 개인의 내면을 고취시키고, 이것에 맞는 건전한 생활과 '일등 시민'으로서의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선전이 국가와 언론의 합작을 통해 나타났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측면일 것이다.  국가와 기업의 관계에서, 국가의 힘이 우세하던 시절을 지나, 이제 국가는 기업에서만 통용되던 '경영'이란 표현을 정치에 기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업의 이러한 경영 개념이 국가의 정치 전술로 채택되면서, 기업은 자연스럽게 국가 내부에 종속된 기구가 아니라, 기업 스스로의 강화된 입지를 펼칠 수 있는 통로를 확장시키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윤리적 소비의 등장 이후, 이제 기업은 개인을 소비자의 범주에만 넣지 않고, '시민'에게 윤리를 부여함으로써, 국가와 사회에 위치한 개인의 내면에 더 깊이 개입하길 원한다. 기업은 특히 윤리적 소비를 통해 세계-시민으로서의 역할, 권리를 소비자에게 강조하면서, 그들에게 세계-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려보지 않겠느냐라는 정치적 조언을 한다. 시민의 역사적 형성 과정엔 물론 자본의 기여도 있었으나, 현대 사회에서, 기업이 윤리적 소비를 통해 선보이는 개인의 '시민-되기'현상은 나에게 제법 신선해 보인다. 여기엔 과거와 달리 내가 윤리적 소비를 한다고 해서 어느 국가보다 앞선 일류 국가의 시민이라는 집단적 우월의식의 문제가 아니라는 시선 또한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만 내가 윤리적 소비를 한다는 그 실천의 '개인성' 그것과 관련된 개인화된 시민의식의 발현은 그 어떤 집단적 의지에 구속되지 않은 채 개인 스스로 자족하며 윤리를 체화하려는 현대 시민의 속성과 더 깊게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통치성론을 통해 윤리적 소비를 비판하는 자들은 이 지점에서 주체의 자유 의지를 노리는 국가와 기업의 의도를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통치성론은 이런 통치 방식의 연성화가 가져다 주는 무시무시한 부정적 효과를 강조하는 데는 적절한 개념이지만, 정작 그것의 무시무시함을 수용하는 주체의 개별적 실천에 대한 고려와 그 실천을 둘러싼 갈등에는 취약한 것 같다. 그 무시무시한 통치의 부정적 효과를 서술하는 데만 신경을 쓰다보니, 수용자 또한 그 효과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 잠식되어 있다는 섣부른 가정이 숨어있다는 말이다.) 

과연 기업은 정치를 하고 있는가, 기업은 정치를 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윤리적 소비가 던지는 흥미로운 질문이다. '경영'이란 말과 찰싹 달라붙은 기업에게 정치란 말이 함께 배치됨으로써 발생하는 예견된 미래, 그것에 대해 과장된 함의를 설파할 필요는 아직 없을 듯하다. 다만, 기업이 윤리적 소비를 통해 선보인 소비자의 '시민-되기'는, 기업이 단순하게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는 일차적 이해에서 더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든다.  

윤리적 소비를 통해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하는 문구는 '착한 소비', '착한 기업', '착한 경영' 같은 것이다. 나는 궁금하다. 왜 하필 '착한'이란 수식어가 붙었을까. 기업은 정녕 과오를 깨닫고, 자신의 성찰을 몸소 보이기 위해 시민들에게 고해성사를 하려는 것일까? 비판론자들은 묻는다. 이 고해성사는 정녕 진실한 것일까? 기업이 윤리적 소비를 통해 들고 온 개념은 진실성과 투명성이다. 노동과정이란 옷의 단추를 풀고, 자신의 몸을 보여주려고 한다. 사람들은 이것에 '양심'의 문제를 가지고 온다. 혹은 만족의 문제이기도 하다. 가장 기본적으로 윤리적 소비는 내가 스스로 사고 싶은 물건에 대한 만족과 더불어 따라오는 '옵션 형태의 나눔'정도라고 간단하게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깊은 회의론자들은 말한다. 이런 옵션 형태의 나눔은 결국 중산층의 자기 만족에만 그칠 것이며, 정작 수혜자들은 없을 것이라고.  

다시 정치의 이야기로 돌아왔을 때, 윤리적 소비를 통해 우리는 기업이 국가보다 더 나은 정치의 언어를 시민들에게 부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업은 더 나아가,  소비자를 세계-시민으로 만들기 위한 정치의 언어 발명에 실제로 깊은 고민을 하고 있는가?  

이건희 회장이 일전에 "모든 국민이 정직해졌으면 좋겠다"라고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당시 '정직'이란 표현에 쏠려, 이건희를 비판했지만, 내가 보기에 더욱 더 크게 보고 비판해야 할 지점은 그가 '모든 국민'이라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썼다는 말이다. 한 기업의 총수가 한 국가 내 시민들의 도덕의식을 짚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싱거운 언사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내게 이 발언은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기업이 도덕과 윤리라는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은 윤리적 소비 등을 통한 도덕 사업을 통해, 때 아닌 '인간미'를 과시하는 듯하다. 시민 되기의 과정에서 우리가 정치를 통해 학습하는 중요한 부분 하나가 바로 인권 등으로 비롯된 인간미를 상실하지 않기일 것이다. 그들은 그리고 상품이란 형식을 통해 우리에게 인간미를 함께 판매하고 있다. 우리가 동물이 아닌 인간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해주는 실천이 '소비'라는 건 재미있는 측면인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걱정은 있다. 인권위원회 같은 기구가 생겨, 우리의 인권을 직제화된 곳을 통해 인식하고, 사회를 생각하는 인간의 최저선을 확인받아야 하는 이 마당에, 인간미를 판매하는 기업을 통해 소비라는 실천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그 메시지가 "그래도 당신은 인간이군요"하는 그 섬뜩한 과정 말이다. 기업이 윤리적 소비를 통해 들고 온 인간미, 그리고 좀 과장되게 표현해서 인권을 판매하는 상황을 뒤돌다보면, 이것은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확신시키보다는, 이 사회에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음 자체의 의지가 계속해서 나약해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현상은 아닌가의 문제가 내 안에 들어오는 듯하다.  나의 인간미를 사물을 소비함으로써 확인받아야 하는 그 상황에서  깊은 고민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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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0-07-23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윤리적인 소비를 지지합니다. 단순히 상품을 소비하는 피동성에서 벗어나 능동적인 상품 소비를 통하여 기업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소비자의 최소한의 권리고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동생이 매일 안암동 쪽에 있는 스타벅스에 가서 공정무역 커피 판매하냐고 물었습니다. 뭘 그러냐는 제 물음에 분명 공정 무역 커피를 본사에서는 판매하는데 지점에서는 모른다고 하면서 이래야 가져다 놓는다는 말에 피식 웃었습니다. 그런데 두 달을 그러니 다음에 가져다 놓더라고요. 분명 윤리적인 소비에는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더해도 장점이 더 크다고 할 수 있겠죠. 아직 초창기인 한국에서 단점을 내세우면서 비판하는 것은 아직 학교도 안들어간 아이들에게 성적이 떨어졌다고 혼내는 것과 같은 상황이 아닐까요?

얼그레이효과 2010-07-23 23:17   좋아요 0 | URL
윤리적 소비에 대한 비판론을 한국 사회에 적용했을 때 무리가 있긴 한 듯 해요. 님 말씀처럼, 또 제 글에서 강조했듯이 윤리적 소비라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보편화된 현상은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기업의 윤리적 소비 전략과 시민사회가 실천하는 윤리적 소비에 대한 접점, 혹은 배치, 그리고 절합 등 그 세부적인 관계 들을 더 크게 보아야 하겠지요. 제 글은 일단 기업의 전술로 제한되게 본 점은 있습니다만, 일단 제 입장은 윤리적 소비의 긍정성을 무한 찬양하고싶진 않다는 신중론으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게 더 확산되어야 한다, 혹은 제재를 받아야 한다의 차원은 또 논의를 해봐야겠지요. (뭐 어떤 정치진영의 일반화된 전술 채택 / 시민사회가 강조하려는 전술이라든지 같은 이야기가 포함된다면 말이죠)

무해한모리군 2010-07-23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문명이 너무 지나친 소비를 하고 있고 '소비'를 줄여가는 방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윤리적 소비품들이 산넘고 물건너 오면서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고 하는 이런저런 논란외에 제게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많은 윤리적 소비를 말하는 기업들이 여전히 '소비'를 부추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요즘 제가 결혼을 준비하고 있으면서 이런 고민이 더 커졌습니다. 가능하면 환경을 많이 훼손하지 않는 방향으로 하려고 하는데, 여기서도 여전히 고민이 되는 것은 제가 이런저런 것들을 시장에 내맡기고 소비 한다는 것이지요. 그 간편함에 불필요한 것들까지 너무 많이 사용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내가 내 몸에 좋은 것과 이웃에 좋은 것, 환경에 좋은 것이 마구 같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도 듭니다.

소중한 글 잘 읽고, 제 고민도 조금 깊어집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7-23 23:16   좋아요 0 | URL
제가 '고민'이란 표현을 쓴 것 또한, 어떤 복잡다단함이 섞여있는 듯 한 것 같습니다. 소비라는 것 자체에 너무 큰 부담감을 가질 필요는 없을 듯 하지만, 휘모리님처럼 긴장감 혹은 거리두기라는 생각을 갖고 내가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한 자각이라고 할까요, 삶에 대한 의식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을 늘 가까이하는 게 소중하지 않나 싶습니다(너무 원론적이라 죄송하네요) 한 살 한 살 먹어가면서, 이런 고민들이 하나, 둘 늘어나는 게 한편으론 삶에 대한 건강성을 잃지 않은 것 같아 좋지만, 삶을 뭐 이렇게 피곤하게 사나, 하는 자조감 같은 것도 사실 들어오는 요즘이네요. 솔직한 고민 고맙습니다.

Alicia 2010-07-23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그레이효과님,블로그같은 공간에서 공짜로 무심히 읽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글이네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7-23 23:18   좋아요 0 | URL
친구가 요즘 이 주제로 고민이 깊어, 덩달아 관련 자료를 읽다가 생각을 정리해봤는데요. 온라인이다보니 뭔가 또 제한적인 생각으로 나오는 것 같아 아쉽네요.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 좀 이런 두터운 글을 자주 올려보려고 합니다. 함께 고민 부탁드려요.

쉽싸리 2010-07-24 0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뵙겠습니다.

기업쪽에서 내세우는 윤리적 소비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기업의 본질로부터 그러하다고 봅니다.
기업말고 협동조합(생협 등)에서 얘기하는 윤리적 소비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그 측면도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할 필요는 있겠지요. 예를 들어 천규석 선생님은 협동조합쪽의 윤리적 소비니,공정무역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고 계시지요. 자급자족을 하자는 데에 개인적으로 참으로 찬성합니다만 이건 맨땅에 헤딩도 이만한 게 없는 판국이라 그야말로 숨이 턱 막힐 지경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7-24 14:45   좋아요 0 | URL
쉽싸리님 반갑습니다. 아직은 언론 쪽에서 '기획성'으로 윤리적 소비에 대한 실천을 장려하던데요. 여기에 대한 검토가 좀 꼼꼼하게 되었으면 하네요. 너무 미화되어 '선을 향한 소비'같은 식으로 가다보면, 오히려 우리가 놓친 그런 것들로 점철되지 않을까 싶어요.

미지 2010-07-26 0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네 편의점에 관한 얼그레이님 얘기를 먼저 읽었습니다만, 이 부분도 딜레마죠. 저는 생협회원이라 야채를 주문해서 먹는데요 동네 다니다 길가에 앉아 야채 몇 포기 열어놓고 파시는 할머니들 만나면 그냥 막막한 게 마음도 아프고 해서 어떨 땐 집에 있는데도 사게 되는... 그러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윤리적 소비에 대해서... 생혐의 유기농 야채를 사먹는 것과 노점상 할머니의 비유기농 또는 중국산 야채를 사먹는 것에 대해서... 결론이 쉽게 안 나더군요... 윤리적 소비 문제도 논의가 정리되긴 해얄 것 같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7-26 23:2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세상 일이 갈수록 입체적인 부분이 늘어나는 것 같아요. 고민도 더 세밀하게 하게 되는군요.고맙습니다.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얼마나 팔렸는지 잘 아는 출판사 주간에게 물어봤다. 판매부수가 예상수치보다 어마어마하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는 기사를 실은 언론들의 프레임은 이것이었다.  '자기계발서 'vs '인문-사회과학'의 그 진부한 구도 말이다. 아직 책을 다 읽어보진 못했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센델이 정치철학을 소개하는 방식을 살펴보면,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드는 사례 배치의 '자기계발서식' 형태가 센델의 이 책에 고스란히 적용되어 있는 느낌이다.그래서 고리타분하지 않고, 입력이 잘 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러나, 이런 느낌에 대해 이 책과 저자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한국 사회 안에 들어있는 '종교적 제의의 두드러짐'? 그런 것을 요즘 많이 돌아보게 하는데, 여기에 이 책을 소비하는 문화도 자리 하나를 차지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회개'라는 말까지 과장되게 쓰고 싶지는 않다. (한국 사람들이 그 정도로 착하다고 생각하진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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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9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9 1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10-07-19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술이 매우 자연스럽고 부드럽죠? 생각보다 술술 읽힙니다. 얼마전 나온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는 반면에 좀 딱딱 끊어지는 느낌이네요. 잘 읽히지 않고, 생각보다 내용이 별로 없어요.

얼그레이효과 2010-07-19 17:26   좋아요 0 | URL
아프락사스님의 근면독서가 부럽습니다. 저는 요즘 사실 책에 대한 성실함이 떨어져서 걱정이네요.힝.

마늘빵 2010-07-20 07:16   좋아요 0 | URL
저도 요새 책을 안 읽어서... 하버드 두 책만. 올해는 영 읽기가 부실하네요.

얼그레이효과 2010-07-20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극복하시겠지요.^^!
 

오랜만에 한국 문화연구 영역에서 좋은 논문이 나왔다. 그 주인공은 김수정 선생이 쓴 <수용자연구의 해독모델과 존 피스크에 대한 재평가 : 수용자연구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열린 논쟁을 위하여>이다. <언론과 사회>2010년 봄호에 실린, 이 논문은 지금 문화연구자에게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알려주는 지침서라고 감히 생각한다.  (김수정 선생은 현대 문화연구자의 선구자격이라고 할 수 있는, 특히 본 논문의 중심 테마인 능동적 수용자론의 형성에 주요 지침이 되는 데이비드 몰리의 연구를 이론적으로 다시 파악하여 발표한, 몰리에게 큰 인상을 남긴 연구자이다. -참고로 몰리의 책을 보면, 김수정 선생에 대한 언급이 나와 있다. 문화연구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한 번 찾아보시길.)

사실 1990년대 중반부터, 문화연구가 국내에 활황을 이루면서, 과연 '한국의 문화연구는 있는가?'란 문제가 제기되었다.(이는 조한혜정, 김영민 선생 등이 강조했던, '이론의 식민화 과정과 글쓰기'와 결부된 것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한국의 문화연구자인 원용진 선생은 '술이부작'이란 표현까지 써 가면서, 해외 이론의 습득에만 능하고, 그것을 제대로 활용/구성/반박/재창조하지 못하는 연구 풍토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런 비판적 수사들 또한 한때 활황을 이루면서, 내가 '문화연구자들의 성찰게임'이라고 부르는 문화연구 내부의 비판적 아티클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결국 이들은 '태도 지적적/지향적 중심의 아티클'을 썼기 때문에, 확실한 현실 분석이 없었다. 고로 인상 비평에 머무른 윤리적 태도의 정립으로 마무리 될 운명에 처한 논문들이 누적되어 갔다.  

참고로 문화연구 영역은 워낙 다양해서 구분하기가 어렵다. 문화연구자들은 스스로에 대한 학문 분과 영역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많은데, 일례로 '문화연구(Cultural Studies)'인가?' 문화에 대한 연구(studies on cultural)'인가의 구분도 고민한다. (이러한 구분에 대한 언급은 국내 학자로는 문화연구 내 신진학자로 명명되는 이영주 선생의 논문, 그리고 해외에서는 대표적인 문화연구 지식인 크리스 바커의 책 등에 소개된다.) 그래서 언론학을 중심으로 한 연구자들은, '미디어/문화연구'라는 학문 분과 명칭을 단독적으로 쓰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명칭 자체가 때로는 미디어의 범주를 어디까지 볼 것인가를 또 고민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이기형 선생 같은 경우, 마샬 맥루언이 <미디어의 이해>에서 보여준 것처럼, '범미디어주의'를 표하며, 도시공간 연구로 연구 테마를 확장시키고 있다. 주로 신문,방송,뉴 미디어와 같은 우리가 쉽게 '미디어'라고 부르는 영역에 대한 저항이기도 한 이기형 선생의 연구 방식은, 국내 문화연구의 또 다른 고민이자 미래이기도 하다. 그런 맥락에서 강준만 선생이 예전부터 보여준 그 노력의 결실, 최근 '간판'을 미디어로 간주하고 연구하며, 논문으로 발표하는 그 색깔 있는 주제 선택과 문제 의식은 바로 지금 우리에게 내려진 또 다른 연구적 도전이자 밝은 미래이기도 하다.- 바깥 사람들에게(이 표현이 참 불편하지만, 학계의 보수성과 급진성을 동시에 사유하기 위해 쓰겠다) 아니, 간판을 미디어로 보지 않을 이유가 있나?라고 반문이 들어올 수 있으나, 실제로 학문 영역은 꼼꼼하게 따지고, 논문으로서 이게 될까 성공할까 망할까의 여부를 단칼에 잘라버리거나, 기존의 것을 따라가라는 식으로 정해버릴 때가 많다. 그래서 젊은 연구자들에게는 이런 연구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기도 한다. 

이런 외부적 이야기는 여기서 중단하겠다. 다시 김수정 선생의 논문 이야기로 돌아오자. 김수정 선생의 주장은 아마 내가 예전에 빵가게재습격님과 나누었던 고민과 비슷한 것이다. 즉, 빵가게재습격님은 내가 이론을 고민하고 공부한다는 것에서 지나치게 정치성/비판성을 강박적으로 이어붙이려는 것이 아니냐는 소중한 지적을 해주셨다. 사실 이런 유연하고 올바른 지적이 있음에도, 그것을 심적으로 잘 받아들이지 않았던 시간은 길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기존의 정치 사회 현실에 대한 모순들이 점증해가면서, 발생하는 내 스스로의 당위성을 이론을 공부하면서, 그 이론에 다 '전가'하려는 것은 아니었나. 이런 반성을 지적 을 통해 견고히 하게 된 것이다. 즉, 이론은 또 한 번 소비되고, 재구성/재창조될 공간,시간이 사라지게 되었다. 어리석은 공부를 한 것이다. 이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김수정 선생은 인상적인 언급을 한다. 

   
  필자는 텍스트나 수용자의 해독을 더 부정적(negative)으로 평가하는 것이 더 비판적이거나 정치적인 것이라고 믿지 않으며,동시에 긍정적(affirmative)평가가 꼭 대중추수주의적(populist)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40쪽)  
   

 

이 주장을 논리적으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주장을 논리적으로 풀어보는 것이 김수정 선생의 논문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스튜어트 홀은 현대 문화연구의 창시자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해독의 세 가지 모델을 제시하면서, 텍스트와 수용자의 관계를 정립하려는 데 노력했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공부하면서, 문화주의 경향에 경도되어 있던 문화연구 내 구조주의의 역할을 강조했고,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접하면서, 영국의 대처리즘을 문화정치학적으로 비판하는 사유를 시도하는 등, 다양한 전술과 활동을 진행해왔다.' 

 

즉, 스튜어트 홀이나 존 피스크 같이, 수용자 이론에 중심 토대가 되었던 학자들의 이론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결과, 국내 연구자들은 기존 텍스트를 부정적으로,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능동적이며, 그것에 찬동하는 사람들은 거의 수동적으로 몰아가는 경향을 선보였다는 것.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렇다.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읽는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정치적으로 진보적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당연하지만, 간과되어 왔다. 고로, 국내 문화연구는 지나치게 옳은 정치적 시민의식의 상을 간주하고, 능동적수용자론을 그 상에 끼워맞춘 꼴은 아니었을까? 김수정 선생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고로, 텍스트를 능동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비판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차분한 재점검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참고로, 이 논문의 성과는 스튜어트 홀이 말한 '반대적 해독'과 존 피스크가 말한 '저항적 해독'의 개념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김수정 선생의 이런 지적이 나오기 이전까지 국내 연구는 이 개념을 혼용해서 쓴 것이 사실이다. 특히, 정치적으로 진보적 스탠스를 갖추고, 비판 사회이론을 강조하는 흐름 안에서, 이 '비판'이라는 단어에 지나친 경직성, 규범을 무의식적으로 강요한 나머지,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읽는다는 것이 반드시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항을 표출하는 것인가?라는 문제는 그냥 무시된 것이다. 김수정 선생은 스튜어트 홀은 텍스트에 대한 반대적 의미를 고민해보는 '양식'에 더 집중한 연구자였고, 존 피스크는, 텍스트에 대한 그 반대의 해석(내용)과 그 내용이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맺는 관계에 더 고민한 연구자였다고 구분하여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존 피스크는 우리에게 '기호학적 민주주의'로 잘 알려진 대표적인 문화연구자이다. 특히, 대중문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텔레비전 등의 매체 문화 연구를 통해 '즐거움'과 해독이라는 중요한 해석의 모델을 연구했다. 그는 저항과 즐거움이란 테마로 인하여, 일부 연구자들로부터 너무 능동자들의 능력을 과대포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피스크에 대한 새로운 기념적 학술 연구가 시도되면서,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김수정 선생의 논문도 이 지점에 있다. 김수정 선생은 국내 연구자들이 존 피스크의 수용자 모델 이론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고, 오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또, 김수정 선생은, '능동적 수용자','능동적 수용자'우리가 이렇게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우리가 지나치게 수동적 수용자의 측면은 가볍게 보거나, 안일하게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라고 질문한다. 그러면서 그는 수동적 수용자에 대한 면밀한 고려 없이, 능동적 수용자에 대한 언급을 바로 앞세웠다가는, 수용자가 텍스트를 접하는 그 복잡한 과정에서 오는 해독의 교섭 상태를 지나쳐버린다고 설명한다. 탁월한 지적이다. 

김수정 선생의 논문은 특히 진보적인 사유를 하는 사람들이 갖는 아포리아. 현실 세계의 비판적 사유를 위해, 하나의 이론을 공부할 때, 그 이론의 당연성을 너무 믿은 나머지, 제대로 검토하지 않는 풍토를 꼬집을 수 있는 간접적 매개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이런 지적과 언급은 자주 /쉽게 나올 수 있지만, 생각보다 그렇게 또 활발하지 않다는 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이론에 대한 열정을 재점검하게 만든다.  

김수정 선생이 지적한대로, 한때 한국 문화연구 계를 휩쓸었던 수용자 연구가 좀 시든 감이 없지 않다. 그것에 대한 이론적 논의는 아예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문화연구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논쟁을 위한 꼼꼼한 이론적 검토이다. 괜히 '급진'이니, '비판적'이니 라는 수사를 앞에 붙여 놓고, 문화연구 이래선 안 된다라며, 그 주장을 감싼 화려한 정치 철학 이론을 갖다 붙이는 시각은, 내가 늘 주장하는 '선도부장'역할 그 이상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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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11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어려운 공부를 하시는군요?
남편이가 요즘 이 비슷한 공부를 하고 있어서....신기하게 쳐다보고 있는 중인데...ㅋㅋ.

얼그레이효과 2010-05-11 14:52   좋아요 0 | URL
오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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