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어제 (1)을 쓰고 나서, 읽고 또 읽었다. 드는 생각은 "내가 일을 넘 크게 벌렸나?" 왜냐하면 난 이 책이 주는 메시지 자체를 부정하진 않기 때문이다(나같은 미천한 블로거에게 '논쟁'이란 것은 과분하고, 또 그것을 잘 할 능력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다 -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미안하다). (1)에서 느껴지는 내 표현의 애매모호함, 그리고 부적절함 등이 없었는가를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이하 '열노가')를 재차 읽으면서 돌아보게 되었다. (2)에서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전에, 일단 (1)에서 내가 꺼냈던 몇몇 시선들을 다시 주워담아 정리하고, 더 명확하게 내놓으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감정사회학' 이야기를 꺼냈다고 해서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이하 '열노가')를  아카데믹한 위치에 놓고 바라보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최근 몇 년간 국내 번역된 일부 인문,사회비평서 및 연구서 그리고 국내 연구서 및 문화비평집들의 경향을 쭉 뒤돌아보니 중요한 키워드는 '감정'이었고, 또 감정을 심리학이 아닌 사회학적 시선으로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흔적/성과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정도를 말한 것이었다.  그 경향 속에서 '열정'이라는 키워드로 오늘날 한국의 자본주의를 분석한 '열노가'를 위치지을 수 있겠다 정도의 의견이었다.  

둘째, '열노가'가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문화산업 종사자들의 아픔과 현실,그것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들인 정성과 시선에 대해 조금 아쉬움을 표한 대목은, 내용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저자들이 주장하는 시각들이 더 견실하고 촘촘하게 제시되면  좋았을텐데,라는 차원의 아쉬움이었다. 난 이 책 전반의 내용을 동의한다.  

셋째,  난 '열정 노동의 이론화'과정이 조금 더 두텁게 서술되었으면 하고 바랬다. 이론과 개념 설정에 대한 인식이 무조건 "저 높은 곳을 항하여"(찬송가 제목이다)모드 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이론화 과정'을 거쳤다고 저자들이 책 속에서 말을 한 상황에서 이론화 과정을 시도함으로써 생기는 어떤 책임감 같은 것?은 분명 있어야 한다고 봤다. 그리고 그 책임감에는 '열정 노동'을 개념으로 만드는 데 있어 더 충실한 참고 자료의 제시 혹은 열정 노동을 언급하면서 이런 언급을 책 속에 계속함으로써 이 개념 설정이 갖는 한계는 없을까라는 성찰이 진중하게 고려되었으면 하는 내 아쉬움이 충분히 피력될 수 있다고 봤다.   

 

 

# 6

넷째, '열정 노동'의 이론화 과정을 책을 통해 지켜보면서 내가 이미 제시된 유사 주장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음에 대해. (2)는 이 부분 부터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사실 '유사 주장'이라는 표현을 써 놓고, 이 표현이 충분히 내 생각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사 주장? 그럼 이 책 이전에 이미 이런 논의를 한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 일차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책을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저자들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다만 내가 '유사 주장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은 저자들이 서문에서 잠깐 꺼내놓은 우려. "우리는 곧, 대체 어떤 것이 열정 노동이 '아니라고'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15)에서 보듯, 저자들이 염두에 둔 '열정 노동'의 대상이 처음에는 프로게이머와 문화 산업의 종사자들이었는데 그 범주를 확산시킬 필요성을 느꼈다는 데서 시작된 이 책이 가진 어떤 야심에 대한 우려였다.   

'열노가'는 참 다양한 주제들을 건드리고 있다. 근래 논의되어 왔던 그리고 지금도 현재 진행중인 사회적 논제들을 다 끄집어 내고 이야기하고 있었다.'88만원 세대' 이야기, '학자금 대출 제도', '자기 계발 담론', '면접 문화 - 준비 과정과 기업 면접의 현실 그리고 스펙', '노동자의 죽음', (<마음의 사회학>이후 부쩍 자주 언급되는) '속물, 진정성', '보보스', '창조 경제', '신지식인', '벤처기업의 굴곡', '90년대는 문화의 시대', '신자유주의', 'IT 산업', '문화산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오류', '한류', '고 최고은 작가의 죽음', '오디션 프로그램의 폐해', '활동가(달리 말하면 사회운동가)의 죽음', '윤리적 소비', '사회적 기업', '고령화와 저출산율', '재스민 혁명', '대안 경험의 상품화'문제 등등. 누구는 책을 읽고서 저자들의 의견처럼 이 다양한 논제들이 '열정 노동'으로 다 꿰어질 수 있을 것 같은데요?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난 그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저자들이 고생해서 각각의 구슬을 꿰고 있지만, 일단 저 하나 하나의 구슬을 '열정 노동'으로 꿰기 이전에 한 구슬, 한 구슬 자체도 참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그냥 가볍게 훑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 거기서 발생하는 산만한 구성? 그 '방식'에 대한 아쉬움을 (1)에서 말하고 싶었다는 게 내가 '열정의 계보학은 완성되었는가'를 쓰게 된 목적이다.  

그랬을 때 '열정 노동'이 이론화되는 과정이 담긴 3장<오렌지 족, 그리고 '신지식인'의 열정>은 저 다양한 주제들이 커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챕터로 구성되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3장은 저자들이 집중적으로 조망하는 '문화산업의 종사자들', 그들이 90년대 소비문화의 주체로서 그들이 향유하고 있던 소비문화 혹은 대중문화에서 만들어놓은 / 느낀 어떤 정서, 어떤 쾌락, 어떤 문화적 취향을 그들이 생산하는 주체로 변모하면서 상품으로 직접 만들고 그것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과정의 지원과 한계들에 대한 서술에 더 치중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난 (1)에서 '헐겁다'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저 다양한 주제들을 꺼낸다는 것은 저 다양한 주제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존재할 수도 있겠으나, 내 입장은  저 하나하나의 주제들도 책 한 권, 한 권으로 담기에도 모자랄 수 있는데, '열노가' 한 권이 모든 짐을 다 떠 안고 가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걱정이 든 것이었다. '관통'이라고 하기엔 건드리는 주제들 하나 하나가 만만찮은?  그래서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열정 노동 > 88만원 세대 담론 + 오디션 프로그램의 폐해 + 한류 + 대안 경험의 상품화 + 기타 문제 등등으로 처리될 수 있는 문제인가라는 의문을 낳을수도 있겠다는 인상 정도를 언급하고 싶다.   이런 맥락에서 난 아마도 책을 읽기 전에 '열정 노동'에 대한 '독창적인 서술'을 기대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본 책은 '열정 노동'의 언급 속에서 열정 노동이 껴 안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논제에 대해 이미 언급된 좋은 시각 몇몇 자체를 끌어 와서 '선택'하고 간략하게 서술한 정도라는 인상이 강했다. 서동진의 무엇? 엄기호의 무엇? 리처드 세넷의 무엇? 지그문트 바우만의 무엇?을 부속적으로 인용하는 차원에서 그친. 사회비평집 같은 구성에 사회 문제에 대한 보고서 같은 구성이 혼합되면서 느낀 어떤 산만함이 계속 아쉽게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었을까. 독자로서 충분히 문제를 제기해봄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하자면 이 인용된 견해들, 다양한 사회적 논제들이 열정 노동이라는 개념을 만드는 데 가까이 참여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저자들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다양한 사회적 논제들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이 한 권의 책을 빌어 '다 언급하자!'라는 열정 아래, '열정 노동'이라는 그 용어를 무리하게 '끌어온'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다.   

또 하나. 독자로서 아쉬움을 느낀 건 열정이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로 담론화되어 왔는지에 대한 역사적 서술이 빈약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열정의 역사적 시원을 찾으라고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 한국의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서 적어도 저자들이  명시해놓은 그 90년대를 분기점으로 해서, 70년대 노동 구조에서 열정의 사회적 맥락, 80년대 노동 구조에서 열정의 사회적 맥락 같은 것에 대한 언급 같은 것. 그랬을 때 열정을 둘러싼 담론적 맥락의 굴곡 및 단절 등이 열정 노동의 개념을 더 도드라지게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완수되면 본 책에서 강조하는  90년대의 문화에 대한 소비의 열정 그리고 그 이후 그 열정을 관리하는 국가와 기업에 대한 미진한 인식에 대한 서술을 주안점으로 삼아 '열정 노동'이  오늘날 문화산업의 특수성과 그 종사자들의 특수성을 더 돋보이게 해주지 않을까라는 설정 같은 것을 독자 입장에서 기대했던 것 같다.

 

   

 

 

 

# 7 

앨버트 허쉬만의 1977년 저작 <열정과 이해관계>라는 책이 생각난다. '열노가'와 밝히려고 하는 견해의 차이는 있지만, 열정과 자본주의의 속성을 연결지어 보려했다는 점에서 두 책은 비슷한 점도 있다. '열노가'는 최근에 출간된 바바라 애런라이크의 <긍정의 배신>과도 함께 읽으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열정이라는 좋은 감정의 상태, '긍정'이라는 인간이 누리고 싶어하고 지속시키고 싶어 하는 감정의 상태. '열노가' 나 '긍정의 배신' 모두 이 올바른 감정들을 '전유'하는 국가, 기업, 사회적 분위기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이 <처음에는 희극으로, 다음에는 비극으로>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요즘 성행하는 '행복학'이 오늘날 자본주의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신자유주의를 하나의 '문화'로 봄으로써  현대인들에게 감정과 경제의 관계가 이로 인해 발생한 상징성은 어떤 압박감으로 다가오는지. 우리는 그 친밀한 유혹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비평의 언어들을 접하고 있고,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는 사회 현상도 맞닥뜨리고 있다. 우리는 이 좋은 감정을 '성행'한다는 차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측정 /관리/평가하려는 체계에 대한 비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열노가'가 '열정 노동'을 통해 강조하려는 것은 열정의 제도화, 열정의 프로그램화, 열정의 서열화일 것이다.   

 

 

  

 

 

 

 

 

 

 

  

앨버트 허쉬만은 열정이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학자들의 다양한 논의 속에서 통제받아야 하고, 관리받아야 하며, 억압되어야 하는 감정이었음을 밝혔다. '(역사인류학자 리하르트 반 뒬멘이 쓴 <개인의 발견>을 보면 이 시기가 인간에 대한 탐구가 확산되는 시기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탐구의 열의와 그 결과는 개인의 힘을 발견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 개인의 힘을 활용하여 지배의 언어로 삼으려는 노력도 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열노가'도 언급하는 부분이지만, 열정은 차고 넘치는 감정의 문제이기 때문에 '적당한' 감정이 사회적으로 무해한 것이며, 그것을 고안하기 위한 논의들, 그리고 실천들이 일어난 것이다. 허쉬만은 그것을 학자들의 논의에서 발견했다. 흄,스피노자,몽테스키외, 애담 스미스 등등. 열정이라는 것, 특히 돈에 대한 소유욕과 같은 탐욕으로 열정이 저급하게 치부되면서 이것은 곧 국가를 통치하는 통치자가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에 대한 매뉴얼을 만들기, 그리고 그 통치가 잘 이루어지기 위해 통치자의 밑에 있는 사람들의 정서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의 차원에서 '열정'은 예전부터 위험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나쁘게만 볼 수 없는. 그래서 더 좋은 방식, 더 유연한 형태로 변환시켜 사람들을 적당히 구슬릴 수 있는 감정으로 발명되어야 했다. 그 결과 '이해관계'라는 용어(경제행위에 포함되는 상거래를 지지하기 위한)가 열정과 함께 사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점점 중요해지는 돈, 그리고 그것을 활용하는 경제 행위가 사회에 도움이 될 것이며, 국가의 통치에 도움이 될 것이며, 그리고 개인의 이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등등 다양한 견해들이 나왔다. 하지만 공통적인 지점은 열정이 이해관계라는 '무해한 열정'을 지칭하는 용어로 전환되면서 그것이 예측 가능하고 안정적이라는 형태로 유지되기 위한 '전략적 개념'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허쉬만의 발견을 통해 열정의 '전략적 개념'과 '열노가'가 주장하는 '열정의 제도화 속에서 자본주의 체제가 각인시키는 어떤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 듯하다.  열정의 관리!

우리가 한때 신자유주의라고 크게 이름 붙이며 비판의 테마로 삼았던 이 체제가 인간의 문화적 형태로 잠식하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일상 속 상징. 그 상징의 핵심어들이 우리 삶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발견하는 작업들이 증가하고 있다.  가령, 최근 서동진이 <무엇이 정의인가>에서 밝힌 신자유주의가 내세우는 그 정의의 윤리에 새겨진 '책무성'과 '투명성'은 우리 사회에 상당히 공정하고 옳은 감정의 한 형태, 혹은 사유의 한 형태로 다가오는 듯하지만, 자본주의는 오히려 그런 '성찰적 사유'가 기업 혹은 국가, 혹은 시민단체까지 그들의 이미지 신장을 위한 도구로 쓰일 수 있음을 은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열노가'가 추출한 신자유주의의 문화적 상징은 '열정'이었다. 노동은 인간의 열정이 담김으로써 그 개인이 추구하려는 목표, 의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지만, 저자들은 거기서 더 나아가  그러한 과정을 함부로 재단하고 비인격적으로 개인의 열정을 무시해버리는 이 사회에 대해 한탄하며 분석의 언어로 더 당당하게 맞서야 함을 설파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문화적 상징을 추출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열노가'의 미덕은 존중하고 공유하고 싶다.  그리고 그 미덕의 공유는 이 책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오늘날 노동의 의미 / 노동자의 의미'를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적극적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용기로 이어져야 할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열노가'는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이지만 그 '우리'가 회피하려는 질문을 책을 읽고 질문해볼 것을 권한다. "당신은 노동자입니까?"   

- 못난 독자의 글 끝. (한국 보안업체는 이지아와 서태지의 신비주의를 본받아라! 본받아라!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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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4-21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 난리났네요. BBK 매장설까지 떠도는 모양입니다. 혹시, 얼그레이님도 주위를 분산시키기 위해 언급을...? (썰렁한 농담.^^; 글 잘 읽고 가요.^^)

얼그레이효과 2011-04-24 06:55   좋아요 0 | URL
전 서태지는 '풀잎파리'줄 알았는데, '무성'인간이요.ㅋ 그 사람도 남자였군요. 풉.^^

2011-04-25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25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1-05-13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뒤늦게 글을 보게 됐네요. ^^ 좋은 리뷰 너무 감사해요. 이렇게까지 독서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텐데. 이 책도 그렇지만 얼그레이효과님도 한 권 써 내신 듯한 기분이 리뷰를 읽는내내 드네요. ^^ 그리고 이달의 당선작에 충분히 당선될 글이라 여겨집니다. 살까 말까 망설이는데 얼그레이효과님의 리뷰를 보고 저도 한 번 사색하고 싶다는 마음이 확 들었어요. 거기에 비숫한 류의 추천 책까지! 지존이십니다. ^^

얼그레이효과 2011-05-14 00:14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몇몇 구석은 책 구성이 아쉬웠어요. 근데 책이 술술 잘 넘어가고, 요즘 사람들이 마음 속에 늘 품어왔던 주제를 잘 건드렸다고 생각엔 동의하며 읽었어요. 지존이고 싶은데,,아직 부족합니다. 갈 길이 멀어요.~
 

 

 

 

 

 

 

 

 

   

# 1 

인문/사회판에 대한 촉이 발달되어 있는 이라면 알겠지만, 근래 사회학자나 문화연구자들은 감정이라는 인간의 주관적인 측면을 객관화시키는 구조에 대해 관심이 많다. 이러한 관심은 학문 사회 안에 있는 젊은 연구자들이라면 쓰고 싶은 '힙'한 연구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 이런 주제를 교수에게 쓰고 싶다 밝히면, 백이면 백 말리는 경우가 많다. '감정'이라는 그 불확실한 측면을 어떻게 사회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란 말인가?라는 질문이,  어젯밤 강하게 가졌던 대학원생들의 '야심'을 단번에 꺾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정은 심리학의 전유물이었고, 인문 도서란에는 여전히 감정을 흥미롭게 실험한 사례들이 듬뿍 담긴 심리학서들이 주류를 차지한다. 그러나, 도전은 계속되었다. 감정을 사회학적으로 이론화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잭 바바렛 같은 감정사회학자들을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사회학이 애초에 인간의 감정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재선언하는 효과를 가져왔고, 감정사회학은 아직 국내에선 '힙'한 연구분과로 여성학(여성학은 한국 사회에서 학문 유행을 가장 잘 타는 학문분과 중 하나다),사회학, 문화연구자들이 도전하고 싶은 연구 테마로 분류되어 있다. 서동진의 <자유의 의지, 자기 계발의 의지>나 김홍중의 <마음의 사회학>을 감정사회학이라고 딱 잘라 분류하긴 어렵지만, 이 두 연구자들이 갖는 이견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불확실해 보였던 인간의 마음 상태, 혹은 인간이 추구하고 싶은 추상적인 욕망의 형태가 어떻게 가시적인 형태로 우리의 일상에 들어오고 있는지 사회학적 성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젊은 연구자들은 더욱 이런 연구 형태에 욕심을 내고 있고, 앞으로 더욱 그러리라 본다.    

 

 

 

 

 

 

 

 

 

 

# 2  

최근 출간된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는 열정이라는 인간의 내면에 담긴 감정의 한 형태가 어떻게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변질되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언젠가는 꼭 나왔어야 할 기획이었다고 생각했다. 특히 이 책이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창의산업'의 폐해는 한국 사회의 불안, 그 정점에 서 있는 젊은 노동자들의 가능성을 점점 코너로 몰고 있다는 점에서 과연 인간의 창의성이라는 것이 긍정적으로만 활용되고 있는가,라는 중요한 문제제기를 한다는 점 또한 동의하면서 읽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드는 여러가지 아쉬움도 많았음을 기록해두고 싶다. 가장 아쉬운 부분은 저자들이 '열정 노동'의 이론화를 시도하고 있다 밝힌 3장 <오렌지 족, 그리고 신지식인의 열정>이다. 이 장을 기대한 것은 과연 저자들이 열정이라는 그 인간 내면의 형태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인간의 일상생활에 파고 들었으며, 그것이 오늘날 '노동'이라는 인간 행위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그리고 '열정'과 '노동'이라는 두 개념이 접합되었을 때 이러한 접합이 갖는 이론화에 대한 시도가 별 무리는 없었는가에 대한 꼼꼼한 점검 혹은 언급이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 3 

그러나, 아쉽게도 저자들은  '열정'이라는 개념을 면밀히  검토하지 않고, 자신들이 비판하고 싶은 사회 현상을 더욱 특색있게 보여주기 위해 '열정'이 수사적 기능으로만  보여지고 있지 않은가란 점을 간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말해서 굳이 '열정'이라는 말을 넣어서 이 책이 소개하고 있는, 그리고 우리 사회가 주목해야 할 노동 문제를 바라봐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먼저 든 것이었다. 오히려 본 책이 주목하는 '창의성'이 한국 사회 안에서 어떻게 오용되고 악용되고 있는가에 대한 더 세부적인 검토가 있었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창의 산업'과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연관성, 그리고 이 관계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문화생산자라는 개념을 포함한)의 모습을 담은 비평 그리고 연구는 예전부터 국내외적으로 그 논의의 장을 구축해 왔다. 대표적으로  안젤라 맥로비나 존 하틀리 같은 문화연구자들은 소비문화를 향유하는 청소년들이 느끼는 즐거움이 어떻게 상품화에 필요한 아이디어가 되었는지, 그들이 그 과정 속에서 어떻게 문화 생산의 주체이자 기업의 피해자가 되었는지 혹은  창의산업에 대한 정의는 어떻게 구체적으로 내릴 수 있는가를 검토해 왔다. 이런 논의를 참조하여 국내에서도 '창의성'을 기반으로 한 문화생산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이들의 일상에 영향을 주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체제의 속성은 무엇인지 연구가 이루어졌다. 문화연구자 김예란의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문화생산 공간과 실천에 대한 연구>(2007)는 대표적이다. 그녀는 이 연구를 통해 '문화판'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문화'를 강조하게 된 한국 사회의 정치사회적 특수성과 그것을 관장하고 있던 정부의 정책 형태를 비판하고, 또 문화의 소비자인 90년대 청소년 세대들이 자신들이 즐기던 문화를 어떻게 자신들의 노동 형태로 만들고 살아가는지, 그 속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은 없는지를 심층 인터뷰 형태로 분석하였다. (김숙현의 2006년논문 <문화백수의 정치성과 정체성에 대한 연구>도 유사한 관점을 가진 글이다. 관심 있는 사람은 읽어보시라) 

# 4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리고 다양한 사례로 펼쳐진 문제들. 인간의 재능을 프로그램화하고, 그 프로그램의 틀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 순응의 구조를 만드는 오늘날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열정'이라는 개념으로 다 끌어안고 가기에는 지나치게 헐겁다는 생각은 책 속에서 느낀 어떤 산만함 혹은 더 나아갈 듯하다가 멈춰버린 구성 같은 것에서 강하게 느껴졌다. 다시 앞의 논의로 들어와서 열정이라는 것이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어 우리 앞에 담론적인 한 구성물로 등장할 수 있다면, 그랬을 때 그 열정이 비단 90년대 한국 사회의 소비 문화, 거기서 발생한 소비 주체의 특수성, 신지식인이라는 국가 주도의 담론 정책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쉽게 단언할 수 있을까? 여기서, 열정은 확고하고 적확한 개념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일까? 더 나아가 열정 노동의 이론화 과정이 그 외 챕터에서 제시된 열정 노동의 사례라고 든 부분들과 제대로 엮이고 있는가?  내가 이런 생각을 갖는 건, 이 책이 새롭게 제시하는 '열정 노동'이라는 개념이 이미 제시된 유사 주장들을 모아놓은 것 이상은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 나머진 다음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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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4-20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리뷰가 궁금했어요.^^ 글 잘 읽었습니다. (2)도 기대할께요.

얼그레이효과 2011-04-24 06:56   좋아요 0 | URL
빵가게님 기대에 못미친, 몸사리 (2)를 적어 죄송합니다.^^;

Arch 2011-04-20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보고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얼그레이님 리뷰를 보니까 좀 더 기다렸다가 비슷한 주제의 다른 책을 읽는게 낫다란 생각이 들었어요. 문화백수의 정체성과 정치성에 대한 탐구 논문은 재미있을 것 같아요.

얼그레이효과 2011-04-24 06:59   좋아요 0 | URL
문화백수 논문이 학위논문이라 아마 연대도서관에만 있는 것 같던데, 저자분이 미국 유학 중인 걸로 알고 있어서 이 문화백수라는 개념을 나중에 더 확장시켜 발표하실지 궁금하네요. 저자가 책으로 발전시켜보시면 arch님도 쉽게 구해 보실 수 있을텐데요 ; ' 열.노.가' 책은 사서 보시기에 그리 무리는 없을 듯해요^^ 재미있는 인터뷰 내용도 담겨져 있더라구요.

무해한모리군 2011-04-20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2)가 기대가 됩니다.

얼그레이효과 2011-04-24 07:00   좋아요 0 | URL
(2)가 좀 재미없게 쓰여졌네요. 죄송합니다. 쿨럭. ㅜ.ㅜ

게슴츠레 2011-04-20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겁게 읽었고 (2)를 기대합니다.ㅎㅎ 다만 "이미 제시된 유사 주장들을 모아놓"는 행위도 이론화만큼이나 나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글이라는 행위가 꼭 '이론'이나 '개념'의 형태로만 사회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요.

얼그레이효과 2011-04-24 07:00   좋아요 0 | URL
제가 그 표현부분을 제 마음껏 이야기 못한 부분이 있어 (2)에 좀 적어 봤습니다. 그 여부를 떠나서 게슴츠레 님의 말도 당연히 맞구요^^ 말씀 고맙습니다.

아킬레우스 2011-04-20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프리 알렉산더의 인터뷰(http://www.youtube.com/watch?v=61x7VZMtlu4)인데요 이러한 알렉산더의 작업도 감정에 대한 논의로 포함할 수 있지 않을까요?ㅎㅎ(사실 감정이라기보단 문화적인 차원 혹은 상징적인 차원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겠지만 알렉산더의 논의에서 상징은 단순히 인지적인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충전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1-04-24 07:01   좋아요 0 | URL
제가 꼼꼼히 링크분 보고 또 말씀 드리겠습니다. 밤새고 댓글 다는중이라 헤롱헤롱하네욧. 맥락을 더 자세히 이해해서 추가 댓글 달께요. ㅜ.ㅜ

루쉰P 2011-04-21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꼭 사보고 싶은 책이어서 리뷰가 궁금해 이렇게 들어와 읽고 갑니다. ^^ 좋은 리뷰 감사해요.

얼그레이효과 2011-04-24 07:02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장문을 써서 구절구절이 좀 길고 딱딱한데, 다음엔 좀 더 유연하고 쉽게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덧글 고맙습니다!
 


 

 

 

 

 

 

 

 

# 1 올곧지만 무기력한 

 
<대학의 몰락>은 “이 시대에 적합하고 수용 가능한 대학의 본질과 사명이 무엇인지”(9)를 묻는 책이다. 그리고 그 물음을 위해 저자가 동원하는 것은 역사적 접근이다. 책 속에서 역사적 접근은 대학의 ‘변질’을 고발하는 주요 방식이다. 원래 대학은 이런 모습이었는데, 오늘날의 대학은 이렇게 변하였다는 사고는 ‘대학의 몰락’이라는 제법 묵시록적인 책의 제목을 지탱하는데 필요한 정석이라고 할 수 있다. ‘정석’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본 책에서 저자는 깔끔한 도식을 만들어낸다. 저자가 책 속 도식에서 강조하는 잣대는 ‘세상과의 비판적인 거리라는 조건’(27)인 듯하다. 오늘날 세상은 자본주의의 논리에 침윤되어 있고, 여기서 대학도 무관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대학이 추구하는 학문적 이상이 시장의 아이템으로 절하되고, 이러한 대학은 현실과의 불화를 더 이상 꾀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는 것. 저자는 시종일관 이 주장을 밀어붙인다.

그러나 저자의 이러한 주장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오늘날 이러한 주장과 그 주장을 위해 쓰이는 저자의 서술 방식이 ‘대학의 위기론’을 진단하는 전략으로서 무기력함을 숨길 수 없었다. 좀 더 나아가자면 이 책은 요즘 횡행하는 ‘~의 인문학’과 같이 ‘인문학’을 ‘생활용 교양’으로 취급하려는 사회적 분위기에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들었다. (조금 맥락에서 벗어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책 뒤에 적힌 네 분의 추천사도 이 책을 ‘정직하게’ 판단하고 쓴 것인가라는 생각까지 했다)


# 2 ‘인상 깊은’ 현실이 아닌 ‘인상만’ 남은 책 속 대학

 

특히 저자가 언급하는 대학 내 현실에 대한 문제점들이 큼직하다보니 그러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언어들도 지나치게 피상적이고 굳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굳은’ 언어는 그 어떤 문제점들이 닥쳐도 주변 상황에 개의치 않은 채 ‘성스러운 비판적 사유’를 전개하겠다는 ‘ 옳은 태도’를 보여주는 데 장점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옳은 태도’는 “자본과 시장과 경쟁이라는 이 시대의 대학의 우상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한다”(260)는 주장 그 자체의 올곧음만을 도드라지게 하는 데만 그 가치를 다한다고 느껴졌다.

저자는 ‘대학의 기업화’를 강요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적 사유, 그것을 행할 수 있는 거리(distance)의 힘을 강조하지만, 정작 그 ‘거리의 힘’은 오늘날 대학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부딪히는 ‘대학- 현장’과의 간극을 드러내는 한계로 작용한 듯 보인다. 물론 이것은 대학의 잘못된 현실을 꾸짖는 데 있어 ‘대학의 이상과 목적을 질문하기 위한 사유’라는 실천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책이 ‘대학의 몰락’을 걱정하면서도 그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이 처한 생활상, 구체적으로 ‘대학생’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그들과 관계 맺고 있는 사회상에 관련된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인상이 짙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아쉬웠던 점은 2장 ‘대학의 역사에서’와 3장 ‘대학과 철학’을 위해 할애한 저자의 ‘논리적 에너지’가 결국 대학의 현실을 ‘인상 깊게’ 살피는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인상만’ 살피는 데 동원되었다는 점이다)

  

# 3 대학, 조금 더 들어보자

 

저자가 ‘대학의 몰락’을 극복하기 위한 작은 방편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면 그것에 맞는 ‘몰락의 징후’혹은 ‘몰락의 현실’들을 더 듣고 챙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 일까? 이것은 비단 저자뿐 아니라 근래 ‘20대 담론’과 엮어 ‘대학의 위기’를 논하는 사람들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학점 쌓기? 토익 공부 치중? 경영학의 인기? 취업난? 경쟁? 효율성? (이미 많은 논자들이 제기하였듯이) ‘대학의 위기론’이 하나의 담론적 유형으로 우리 사회에 인식되면서 그러한 위기론을 강조하기 위해 드는 사례 혹은 개념들도 너무나 안이하게 관습적으로 분류, 배치되고 있다. 이러한 분류, 배치를 통해 문제가 되는 것은 ‘대학의 위기는 이 정도 알았으면 되었다’로 섣불리 귀결되어 이후 기계적으로 제시되는 온갖 해결의 언어들이다. 여기서 대학의 위기에 대한 ‘해결어’(특히 ‘20대 담론’과 묶어서)에 대하여 정작 대학을 다니는 사람들이 흥미를 보이고 있지 않다는 것은 다시 한 번 꼬집어 볼 대목이다.

관심 있는 사람은 알다시피, ‘대학의 위기론’은 ‘20대 담론’과 마찬가지로 말하기 신난 사람들만 더욱 신난 구조가 지속 되고 있는 것 같다. 이를 통해 대학을 감싸고 있는 문제들을 더욱 끌어내지 못함으로써 문제점들을 단순하게 유형화시키고, 그 문제점 안에서만 대학의 몰락과 동시에 대학생의 몰락이란 비난 섞인 비판이 온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인기 있는 대화거리가 되었다.(여기서 인기 있는 이유가 ‘재단하기 쉽다’와 유사한 의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대학의 몰락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 대학에서 힘겹게 ‘생존’하고 있는 자들의 언어를 더 듣고 모으려는 진심어린 노력이라고 본다. 이 정도면 다 들었지 않았는가,라는 오만함을 버리고 대학 내 현장의 언어를 당사자들이 더 말하게 함으로써, 그 말함의 표출을 ‘분노의 힘’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 인문학은 너무나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만이 넘친다. 정작 ‘말하도록 돕는’ 인문학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저자가 “인문이라는 학문의 언어는 원래 고백과 증언의 언어였다”(51)라는 언급한 대목을 지나칠 수 없었다. 단, 대학의 문제를 논함 가운데 이런 고백과 증언의 언어가 ‘대학의 위기론’을 설파하는 사람들만이 확보한 제한된 권리로만 행사된다면 유감일 것이다. 이는 정작 ‘인문학’의 길이 아니라 ‘인무(人無)-학’의 길로 빠지는 지름길이 아닐까. ‘대학의 몰락’을 걱정하면서도 ‘대학의 몰락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더불어 걱정해야 함을 깨닫게 된 것은 이 책을 통해 느낀 유감이자 이 책에서 얻게 된 어떤 교훈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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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7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7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요즘 책 한 권의 완독이 버겁다. <모나리자 훔치기>를 읽다가 접고, 읽다가 접고 하다가 내일까진 다 읽고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2  

최근 문화 분석(문화연구를 포함한) 경향들을 국내외 논문들을 살펴보며 정리해보고 있는 중이다. 확실히 하나의 감정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는 연구들이 늘고 있다. '감정사회학'은 지금은 소수 영역이지만 앞으로 꾸준히 관심가질만한 관점이며, 더 확장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일찍이 '감정 구조'라는 개념을 통해, 감정과 사회의 연관성을 강조해왔지만, 이것을 현상 분석에 끌어왔던 연구자들은 '감정 구조'를 수사로 쓴 경우가 많았다.  이제 그 감정 자체를 사회의 큰 구조 속에서, 미디어 담론의 틀 속에서 더 구체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문화 - 시민권 - 민주주의에 대한 문화연구적 접근도 국내외적으로 계속 시도되고 있다. - 문화연구와 정치 의식에 대한 성찰, 그 방향의 선상에서 문화연구자들이 현실에 개입하여 내놓으려는 대안적인 탐색인 것 같다.

 

정보 과잉의 시대에, 오늘날 대중 지식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라는 이론화 작업도 (국내와 달리) 국외에서 자주 논의되고 있는 듯하다.   

 

정체성 (동성애 문제를 포함하여)/ 다문화주의 / 국가 브랜드- 글로벌 체제 / 경제위기의 사회적 구성..등도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던 문제였지만, 계속해서 단골 연구 주제로 나올 듯하다. (생각이 더 여무는대로 추가를..) 

 

## 요즘 둥지 하나를 더 만들었다. 그 이름은 '페북'(facebook). 책 읽으면서, 영화보면서 기록하고 싶은 생각들을 순간순간 남겨놓는 재미에 빠졌다. http://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1707348473#!/profile.php?id=100001707348473 

(성의있는 글이 아니니 주목할만한 포스트에 올리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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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1-01-31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페북을 그런 단상을 올리는 용도로 사용해봐야겠네요.
메인이미지가 아주 멋진데요 ㅎㅎ

얼그레이효과 2011-02-03 11:0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친구가 아이폰으로 그려준거에요.ㅋ 휘모리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욧!
 

  

  

 

 

 

 

 

  

영화를 좀 '의미있게' 보고 싶은 사람들, 영화보다 '영화-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조금씩 내가 걸어온 여정을 나누고자 한다. 이러한 여정에 담겨진 이야기들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일수도, 또 그런 이야기들을 조금 더 깊이 판 사람들의 이야기일수도, 아니면 전혀 동의할 수 없는 딴 세상 이야기일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정체성을 밝히자면, (영화 연구라는 자장 안에서) 영화를 '사회학적'으로 보는 사람이다. 이것은 오래 전 문화연구의 영향을 받아온 덕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 나는 문화연구가 이제는 '미학'에 다시 접근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미학은 어두운 시네마떼끄 안에서 고립된 영화적 묘미를 즐기는 영화광들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개념이자 현상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주장한다. 

이번에 논문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문화연구가 갖고 있는 사회학적 시각이 영화의 미학, 특히 영화의 존재론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자 했다. 앙드레 바쟁은 문화연구자들의 적이 아니며, 오히려 바쟁의 '완전영화의 신화'와 같은 글들은 문화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다시 해독해봐야 할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영화 연구를 한다는 것은? 영화학자 패트릭 필립스의 이야기대로, 영화를 보는 우리들의 경험을 더 잘 설명하고 잘 이해하기 위해서다. 영화 연구의 역사는 사실 이게 전부다.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충돌, 결합되어 왔고, 우리는 수혜자로 살아가며 새로운 길을 모색할 기회를 잡았다. 

영화 연구는 장르, 텍스트, 스타, 산업을 비롯한 다양한 대상들을 연구 과제로 삼아왔지만, 무엇보다 '관객성(spectatorship)'을 둘러싼 견해의 충돌, 누적은 영화 연구가 걸어온 여정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영화 이론을 조금 공부한 사람이라면, '관객성 연구'는 스크린 이론을 둘러싼 순응과 저항, 그리고 그 틈을 벌려 보다 문화적이고 사회학적인 시각에서 고안된 '영화 수용자 연구'로 전개되어 왔다. 

학문을 '잘'하고 싶다면, 무엇보다 필요한 건 언어에 대한 민감함일 것이다(나는 아직도 모자르지만). 영화 관객과 영화 수용자는 그래서 비슷한 듯 하지만, 다른 층위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이것은 그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 개인의 시각일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 학문적인 검증 안에서 공개된 견해이기도 하다. 이 견해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다양한 책이 있지만, 비교적 쉽게 이 개념을 정리해놓은 패트릭 필립스(phillips,1996)의 <spectator, audience and response>를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필립스의 의견에 따르자면, 영화 관객성 연구는 어두운 극장에 들어선 개인이 영사기와 스크린 사이에서 위치지어지는 방식을 탐색하는 데서 출발한다. 특히 '영화적 장치'라고 하는 스크린 이론의 강령은, 영화를 보는 관객을 주체로 '호명'한다고 하는, 구조주의적 접근과의 만남을 선언했다. 여기서 발생하는 '개인 - 영화'의 만남, 그러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영화에 대한 감정은 영화를 '시네마'라는 명칭 안에서 특별하고 위대하게 만들어보이도록 했다. 영화는 일상생활과 격리된 경험 그 무엇이었고, 그러한 특수성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영화 연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영화 수용자라는 것은, '수용자(audience)'라는 명칭을 자주 쓰는 문화연구의 탐독을 필요로 한다. 수용자라는 개념을 자세히 그리고 역사적으로 알고 싶다면, 가장 기본적으로 데니스 맥퀘일의 <매스커뮤니케이션 이론>을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거칠게 정리해보면, 영화 + 수용자의 결합은 영화의 특권적 경험 대신 '일상 안에 놓여진 영화의 위상과 그것을 규정하는 사람들의 소비 행위'를 탐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영화 소비'(film consumption)'는 영화 수용자를 연구할 때 애용되는 개념으로써, 극장 이외의 경험, 특히 '가정'에서 어떻게 영화가 받아들여지고 있는가를 설명할 때 요긴하다. 이것은 VCR,DVD,케이블 TV, VOD, 다운로드 등의 소비 경험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영화 관객'에서 '영화 수용자'로 전환되는 과정은, 영화 연구에서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보기 위해' 필요한 과정들, 보는 것과 함께 가는 다양한 실천들이 고려된다. 자연스럽게 이러한 수용자의 실천은 '애매모호한 자유'와 맞닿아 있다. 이것은  영화 수용자의 행위를 다른 한 편에서 규정하는 시장의 힘 때문이다. 영화를 만들어내는, 그리고 영화 수용자의 다양한 영화 문화를 생산해 내고, 그것에 민감하게 접근하는 기업의 행위는 한편으로 새로운 영화 수용자 연구의 딜레마로 작용한다. 

시장의 엄청난 조사 능력은 영화 수용자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듯 하지만, 그 자유는 사실 진정한 수용자의 자유는 아닌 상황. 디지털 시대를 맞아, 영화의 존재론을 영화 경험과 함께 사유하는 유명한 학자, 토마스 엘세서 같은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자유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동료들을 모은다. 가령 앨세서는 DVD의 서플먼트가 보여주는 풍성한 정보, 영화 잡학이 영화를 적극적으로 사랑하려는 이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한다. 

하지만, 새로운 영화 테크놀로지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영화에 대한 소유'는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영역 안에서 영화의 미래를 모색하는 긍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한다. 마셜 맥루언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영화는 '핫 미디어'이기 때문에, 그 참여도가 적은 매체라고 했지만, 시대는 맥루언의 의견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말하는 중이다. 

영화를 접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지성의 망안에 포획하려는 것이 나 같은 놈의 일상사지만, 결론은 결국 내 망에 가두어지지 않은 이들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자유를 보존해주는 것이리라. 이번 논문에 담긴 내 신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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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4 0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1 0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