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디외의 국가론 강의가 국내 계약되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부르디외의 국가론에 대해 깊이 공부해본 적은 없다. 다만 이 책의 4장 「국가의 정신들: 관료 장의 생성과 구조」를 읽다보면 부르디외가 국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금 정리해볼 수 있다. 지적 자극을 우선시하는 이에겐 외형적으로 푸코의 생정치보다 그 전개 과정이 심심할 수 있다. 허나 "낱말은 사물을 만든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부르디외는 국가가 만들어지는 조금은 상식적인 역사를 기술하면서도 권력의 형성과 분배 과정 안에 깃든 실천의 이름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이는 또다른 지적인 자극과 호기심으로 다가온다. 


가령 부르디외는 국가 권력에서 '임명'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왕과 영주 사이의 법적 관계를 보면 영주는 자신의 관할구역 안에서 법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점 왕을 중심으로 한 법 권력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보편'이라는 이름의 상징이 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왕의 이름을 대신하는 '법률적 인간'이 만들어지고, 영주의 법적 권한은 소멸된다. 이 시기에 왕에게 '임명'이라는 절차가 강조된다. 임명은 곧 국가가 부여하는 상징을 배분하는 실천이다. 명예와 평판이라고 하는 상징적 자본을 관료들은 받게 되며, 국가는 이런 관료들의 마음을 적절히 관리하면서 세금과 군사 등 '보편'이라고 하는 국가의 상징을 유지할 사회 체계를 잘 유지할 수 있도록 관료 장의 역동성을 기대한다. 내부의 다양한 권력자들이 갖고 있던 물리적 권력은 이제 왕과 관료 장이라는 형태로 일원화된다. 

부르디외는 세금이란 무엇인가도 묻는다. "반대 급부 없는 징수" 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부르디외가 보기에 세금 징수와 납부라는 실천은 곧 국가의 비인격성을 드러내는 사회적 논리로 구성되었다. 권력을 가진 이들을 위한 납부라는 저항을 막기 위해 나타난 큰 이유는 군대와 영토의 보존이었으며, 부르디외는 여기에 영토 방위에 따른 민족주의라는 연원을 끌어들인다. 군주의 이익을 위함이 아닌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이란 동의의 정서가 나타났다는 것이다(여기엔 국가 외부 세력에 대한 안전과 더불어 국가 내부의 치안을 위해 세금 납부와 징수가 상식이 되는 역사적 과정 기술은 빠져 있다). 이러한 세금 징수를 통해 국가가 애를 쓴 것은 자연스레 통계와 조사였으며, 통계와 조사라는 실천은 곧 법률적, 언어적, 계량적 규범의 통일로 이어진다. 부르디외는 이 과정을 기술하면서 '문서'라는 사물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사실 이 틀에서 보론으로 실린 '가족 정신'이라는 부르디외의 글에서는 가족은 국가와 동떨어질 수 없다는 그의 입장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이 부분은 1970~80년대 가족 관련한 국내 정부의 백서를 연구 자료로 찾아 읽고 어떤 해석틀을 마련하는 데 푸코뿐만 아니라 부르디외의 가족론도 큰 활용도가 있음을 시사하는 내용으로 꽉 차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르디외는 가족이란 "잘 확립된 허구"라고 본다. 이것은 오늘날 인기 있는 신자유주의의 '-테크론'을 들먹이며 '기획된-'을 주장하는 가족론이 아니다. 어찌보면 좀 더 푸코적인 '국가와 호적'이라는 문서적/인구적 차원의 가족이 어떻게 오늘날 그 존재를 인증받고 있는가를 부르디외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부르디외가 보기에 국가의 관료장은 문서화라는 형식을 통해 가족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구성한다. 부르디외에게 그래서 호적이란 문제는 그냥 지나칠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특히 가족 정신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가족 특유의 따뜻하고 은밀/긴밀/친밀한 정서가 그냥 주어진 소여의 상태가 아니라 국가에서 비롯된 공적 활동의 소산이라고 주장한다. 부르디외에게 가족이라고 하는 프라이버시는 곧 공적 기관이 부과하는 기능들의 발명품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결을 정리해보면, 부르디외는 '보편'이라고 하는 상징적 자본을 행사하는 국가를 향한 의심을 던지기 위해 어떻게 우리는 국가를 상식적으로 따르게 되었는가를 역사적으로 다시 돌아보는 작업을 선보인다. 부르디외에게 상징 폭력이란 그 폭력을 당한 당사자가 정작 그 폭력이 폭력인지 모르는 상태 혹은 그 폭력을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상태라는 점에서, '보편'이란 상징적 자본은 의혹을 위한 제1항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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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커 파머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에 나오는 '마음의 습속'과도 연관이 있지만, 사실 파머의 책을 접하고 나서 떠오른 책은 장 보드리야르의 『아메리카』였다. 주의: 이 거울 속에 비치는 사물들은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을 수 있습니다로 출발점을 끊는 보드리야르의 그 무심한 문체, 사막을 통해 현대사회의 침잠된 정치적 상태와 미국 민주주의의 우울을 풍경과 엮는 인트로는 책을 읽는 당시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가장 정치적인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파트인 「권력의 종언?」에는 '제4세계'라는 표현과 '역설적 신뢰'라는 용어가 울림을 준다. 해방과 팽창, 더 이상의 적대란 없는 시기에 외려 나타나는 미국 사회 내부의 배제는 '깨끗하고 완벽하게'란 구호 아래 더 견고해졌다. 정치적 무관심에 의해 잊힌 사람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레이건 시대가 밀어붙이는 강박적인 행복증 전파, 정말 사람들이 편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편의를 협박조로 구성하는 권력에 대해 보드리야르는 우려의 시선을 보낸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이런 권력의 망에 있는 이 사람들은 공민권을 박탈당한 채 지도에서도 잊힌 사람들로 전락해갔다. 이들은 보드리야르의 표현을 빌자면 "가난한 사람들은 나가야 한다"의 언어에 묶인 사람들이다. 보드리야르는 지워질 운명과 소멸의 통계 곡선에 있는 좀비들을 양산하는 이 사회를 안타까워하며, 그 좀비들을 '제4세계'라고 명명한다. 여기서의 제4세계란 제3세계의 추락점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현대 권력의 통치술이 낳은 비극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보드리야르는 이 챕터에서 '신뢰'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꺼낸다. 보드리야르는 미국인들이 정치의 실재에 대해선 그리 큰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합의된 신뢰의 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신뢰를 권력이 정부가 적절히 관리해주기만 한다면, 정치인들을 향해 믿음이 있는 것처럼 연기하길 좋아하는 게 미국인이라는 강도 높은 비판을 선보인다. 그러면서 그가 제시하는 신뢰에 대한 개념은 '역설적 신뢰'다. '이상하다. 저 정치인은 내가 보기에 갈수록 형편없어지는데 왜 이렇게 사람들이 물고 빨아주는거야?' 보드리야르의 역설적 신뢰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역설적 신뢰는 점점 더 실패하고 점점 더 자질이 없는 이를 위해 부여되는 지지의 감정이다. '자 이제 천년왕국의 그날이 왔소'라는 예언이 실패되어도 그 예언의 실패에 아랑곳하지 않고 휴거를 믿는 종교인들의 비유를 들어 보드리야르는 레이건 정부를 향한 미국인들의 정서를 비판한다. 역설적 신뢰가 무서운 것은 보드리야르의 표현처럼 "실패의 부인에서 나오기 때문에 조금도 약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드리야르는 미국이라는 여행을 통해 무감각의 개입을 실천한다. 출판사에서 잘 만든 부제처럼 '희망도 매력도 클라이맥스도 없는' 이 미국 문명 여행기에서 보드리야르가 경계하는 것은 '어 저곳 나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봤던 건데, 직접 보니 신기하다' 같은 확인의 자세였으며, 이 "갱년기"와도 같은 미국 사회가 주는 모호한 유토피아적 분위기였다. 

"여행은 끝났다"라는 말이 책의 말미가 아니라 거의 책의 시작 부분에 나타나는 건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파커 파머가 어떻게든 이 모난 자식들을 보듬으면서 착한 장남으로서 민주주의의 상태를 복원해보려 한다면, 보드리야르의 이 미국 기행은 늘 같은 표정으로 조용히 살아가는 둘째 특유의 차갑고 무심한 정서가 다분히 느껴진다. 시종일관 차갑고 건조하다. 그러나 둘 다 '지금 이 상태의 사회는 아니다'라는 공통의 정신은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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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 '사회적인 것le social'이란 이론적 전장이 우리에게 끼치는 이로움이란 무엇인가? 새삼 고전 사회이론을 다시 들추어보게 되었습니다,란 학자들의 진부한 고백을 넘어 이 전장에서 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주입되는 매혹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사회적인 것에 대한 논의를 담은 관련 논문을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2. 사회적인 것을 오늘날 사회의 종언이란 조금은 섣부른 비평의 감각으로 환원하는 자들이 외치는 평어로 소비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것을 둘러싼 학술적 쟁투는 계속 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쟁투의 형태는 사회적인 것을 선험적인 것-경험적인 것-실천적인 것으로 재구성해보는 논리 게임의 도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며, 보다 적극적인 사회비평의 기능을 탑재한 채, 사회적인 것에서 경제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재정리하고 공적/사적 영역의 공간에 속한 개인의 '정치적 실천의 목표'를 끌어내는 기획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3. 후자의 측면에서 먼저 우리는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과 사르트르의 '사회적 집합들'이 갖는 묘한 유사성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두 인물 다 정치적 실존주의를 견지한 상황에서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이 갖는 가능성에 대해 탐문해보았다.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에 대한 개념을 정리한 김홍중의 견해에 따르자면,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에서 연상되는 행위신학의 귀결은 메시아로서의 '나'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란 이 사회의 부조리함을 해체할 무한한 가능성의 주체로 상정되지 않는다. "아렌트의

메시아는 특정 초인이나 계급이나 젠더나 사회적 집합체가 아니다." 아렌트는 이 희미한 주체의 상정 속에서 기적을 바란다. 아렌트에겐 이 기적이 이뤄지기 위해선 기적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나'가 아닌, 단지 태어났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행위능력만을 가진 '나'의 불완전성을 믿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나는 아렌트가 강조하는 '말들의 사회'에서 참여하는 공적 주체로 나아간다. 


4. 아렌트가 고안한 메시아로서의 나는 사르트르가 사회적 집합들의 세 요소를 설명할 때 나타나는 '조절적 제3자'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사르트르의 논의가 좀 더 사회학적인 향취가 나는데, 그의 설명에 따르면 조절적 제3자란 "우두머리도 아니고 지도자도 아니다. 그것은 자발적인 지시와 지침을 통해서 타인들을 위해 누구라도 될 수 있는 각자다." 


5. 사실 사르트르에게 조절적 제3자란 개념은 사회의 변혁을 위해 필요한 대중의 가능성을 고취시키기 위한 기획어일지 모른다. 알랭 바디우가 『사유의 윤리』에서 잘 정리해놓았듯이 기본적으로 사르트르의 회의주의가 깔려 있는 '사회적 집합들'이란 개념에는 인간의 수동성/능동성에 대한 사르트르의 은밀한 집착이 담겨 있다. 그 집착은 결국 인간은 어떻게든 수동성으로 돌아가고야 만다는 것. 사회성의 평균적인 형태는 분리라는 것이다. 바디우는 사르트르의 이 집착이 사회적 집합들이라는 개념에 관한 매력적인 기술을 뒷받침하면서도 사르트르가 갖는 대중을 향한 일관된 원칙 "대중이 역사를 만든다'에 대한 과신을 낳았다고 보는 듯하다. 사르트르의 이러한 회의주의는 대중에게 할 수 있다를 더 주입시키려는 계몽적 기획으로 태어났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6. 바디우의 깔끔한 정리를 참고해 짧게 재정리해보면, 사르트르는 집합적인 수동성 100의 형태를 계열이라 보았고, 이 계열의 수동성을 깰 집합 형태가 '융합'이라 보았다. 그리고 조직은 정치가 가장 잘 나타나는 곳으로서 여기서 조직이란 융합이란 집합형태가 제도로 구축되는 형태다. 사르트르는 조직을 이끌어가는 데 맹세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조직이란 집합 형태에 있는 개인은 맹세를 통해 배신이란 감정을 체화화게 되고 이러한 배신을 극복하는 것은 맹세 아래 만들어진 형제애다. 그러나 이러한 형제애는 늘 공포와 동반된다. 이 지점에서 조직에 깃든 제도는 능동성이 발휘되었던 융합 상태에 있던 개인을 다시 계열 상태로 돌려보내는 부정적인 역할을 한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제도의 위치에 국가가 있다고 주장한다. 


7. 사르트르의 사회적 집합들에 대한 비유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에서 비롯된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버스를 기다린다'는 동일한 이유 속에서 줄을 서서 기다린다. 그러나 이러한 줄을 선다는 행위가 바로 이 줄 서기에 대한 부당함을 외치는 것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대게 무관심 속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나와 너일 뿐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자연스레 체화한 인간일 뿐이다. 사르트르는 이를 '수동적인 종합' '무력함의 통일성'이라 보고 계열이란 집합 형태로 명명했다. 허나 융합 형태에 오면 사르트르는 "다 같이 항의하러 갑시다"라는 인간의 가능성을 본다. 바로 이 인간의 존재가 '조절적 제3자'이며. 이 존재는 '여느 인간'이다. 이 여느 인간인 조절적 제3자의 말 걸기를 통해 상호성이 구축되고 계열이란 집합 형태가 갖고 있는 수동성, 무기력은 녹아내린다. 


8. 근데 바디우의 문제제기가 재미있다. 상식적이라 더 재미있다. 

'아니, 사르트르. 당신 인간을 그렇게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존재로 본다며? 근데 어떻게 인간이 무슨 계기로 그렇게 서로를 인식하며 뭔가를 바꿔보려는 능동적인 통일성의 존재가 된단 말이야?' 사르트르는 앙드레 말로의 표현을 빌려와 이 극적인 변화의 계기를 종말론이라고 부르는데, 사르트르에게 종말론적 순간은 곧 인간의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분리된 상태를 극복할 사건인 듯하다. 사르트르의 용어로 설명하자면 종말론적 순간은 곧 계열이 용해된 융합의 순간이다. (이 부분부터 바디우는 조금 미심쩍어하는 것 같다)


9. 바디우가 파고드는 사르트르의 '사회적 집합들'이 갖는 허점은 계열이 용해된 융합 단계로 접어드는 대중의 상태가 늘 '반란'이라고 하는 계기를 통해서만 이뤄진다는 사르트르의 경직된 도식이었다. 그리고 이 도식의 문제는 대중을 능동성/수동성의 차원으로 정리하려는 사르트르의 감정적 개입이었다. 바디우는 사르트르의 지나친 차가움이 못마땅하다는 듯, 인민의 능동성이 반드시 수동성으로 회귀하는가란 의문을 표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사르트르는 인간이란 결국 수동적이고 분리된 상태로 돌아가고 만다는 회의주의적 시나리오에 심취해 있었다.


10. 허나 이러한 허점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의 사회적 집합들이란 개념은 아렌트와 더불어 '사회적인 것'의 실천성을 두텁게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것의 논의에 유익한 나름의 중요한 도해라고 여겨진다.사회 속 개인을 무기력, 수동성/능동성이란 정서적 차원에서 보려고 한 사르트르의 사회적 집합들은 감정사회학적 해석의 중요한 영역으로도 고찰해볼 수 있을 듯하다(합리성-합당성-합정성 모델에 기초하여, 우리는 개인의 수동성-능동성에 선/악의 가치를 덧씌우지 않은 채 좀 더 입체적 해석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인가).

김홍중의 사회적인 것에 대한 도해를 참조하자면, 사회적인 것은 베버처럼 인간의 사회적 행위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짐멜처럼 인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뒤르켐처럼 행위 규칙과 도덕적 규범이란 요소를 통해, 루만처럼 시스템을 통해 다양한 논의로 전개되어왔다. 


사르트르가 제시한 사회적 집합들의 계열-융합-조직의 단계를 앞선 '사회적인 것'의 네 요인과 결합해 해석해본다면, 이 작업은 사회적인 것의 개념적 두터움을 도모하는 데 나름의 유익함이 있으리라 본다. 이러한 유익함이 사회적인 것을 둘러싼 쟁투에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매혹일 수 있다. 물론 이 매혹은 우리가 서 있는 세상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 


*

김홍중, 「사회로 변신한 신과 행위자의 가면을 쓴 메시아 전투: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의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사회학》제47집 5호, 2013, p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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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월적 사유의 섬세함을 더 이상 되찾을 수는 없지만, 모든 질병을 세심하게 예방하도록 스스로를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노령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셸 푸코의 국가 박사학위부논문 서설인 「칸트의 『인간학』에 대한 서설」(문지에서 '칸트의 인간학'에 관하여로 출간되었다)을 읽다가 일흔대 칸트의 당시 상태를 짐작해보는 푸코의 이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노년의 역사'류의 책에서 어느 역사학자나 한번쯤은 언급할 진부한 문장 같기도 했지만, 뭔가 마음이 끌린 이유는 몇 페이지 뒤 나오는 '소원들의 등록부'라는 표현 때문이었다. 







2. "철학은 자신의 총체성 안에 건강과 질병의 관계를 포함시키면서, 자신의 절대적인 지평을 형성한다. 확실히 [철학의] 이러한 우위성은 인간이 가진 소원의긴급한 성격에 의해 은폐된다. 우리가 오래 살거나 건강하기를 희망할 때, [이 두 가지 소원 중에] 오직 첫번째 소원만이 절대적인 것이며, 죽음을 통한 해방을 원하던 병자는 [정작] 임종의 순간이 왔을 때는 언제나 [죽음의] 유예를 소원한다. 그러나 소원들의 등록부에서 절대적인 것이 삶의 차원에 있어서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푸코는 이 표현이 나오기까지 칸트의 『인간학』출판과 관련된 사정들을 다 뒤지고 개연성을 만들어나간다. 이는 단지 자신만의 칸트 전기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아니다. 칸트가 묻고 싶었던 인간과 자연의 관계, 푸코 자신이 관심 있었던 철학과 의학의 관계를 전자와 엮는 것을 넘어 생명 자체에 대한 탐문을 시도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3. 푸코의 추적 과정에서 잠시 떨어져 나와 '학자들'에게 노령 혹은 나이듦이란 무엇인가 생각을 해봤다. 출판인들은 가급적 학자들의 총명함에 치우쳐 그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혹은 그 총명함의 기준에 들지 못하면 비판하고 과한 훈계도 보탠다. 그런데 뒤집어보면 후추보다 소금이 많은(이는 나이듦에 대한 오에 겐자부로의 비유다) 나이를 맞이하는 학자들이 갖는 어떤 좌절감은 단순히 정서적으로 (흔히 안타까움이란 표현으로) 미화되어왔다. 혹은 출판인들은 '노병은 죽지 않는다'류의 시선으로 뒤늦게 '학문적 비아그라'를 복용한 이들의 성과와 흔적을 찾아 노령과 거기에 얽힌 지성을 예찬한다.

4. 그런데 사회학자 랜들 콜린스가 『사회적 삶의 에너지』에서 학자들의 일반적인 궤적을 이야기한 것을 고스란히 따르자면, 이런 예찬을 받는 사람은 극히 소수다. 대부분은 자신의 왕성했던 문헌 소화 및 탐독 능력을 떠올리며 한때의 별이었음을 추억한다. 이를 감내하고 무리하지 않은 채 여느 직장인처럼 살아갈 뿐이다. 책이라는 것은 본디 지식의 최적화된 상태를 담아내는 게 상식이지만, 총명함을 향수로만 품고 살수 밖에 없었던 학자들의 삶을 제대로 다루진 않았다. 총기를 잃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건 사람 몇 없는 조용한 학회에서 늙은 고단함에 하품을 몰아 쉬거나, 심지어 코를 골거나, 자신의 질문 차례에서 동문서답을 하는 경우일 수도 있다. 

5. 오랜만에 쓴 논문은 으르렁거릴 에너지로 충만한 젊은 학자들이 보기엔 헛다리 짚기 일쑤고, 진부한 개념어 일색이다. 아이러니는 그 논문의 결과는 결국 지금 그 늙어가는 학자가 쓸 수 있는 최상급이라는 것이며, 이런 간극을 자기만 모를 때 생기는 잡음은 그 늙어가는 학자들이 떠안고 가는 짠한 운명일 수도 있다.

6. 요즘 독서라는 것을 되돌아보면서 그리고 거기서 앎의 최상급이라는 형태로 구현된 각각의 책이라는 사물을 보면서 나는 여기에 투여된 총명함이라는 것 말고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을 발휘할 수 없는 학자들의 사회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건 단순히 그들이 오랫동안 학자로 살아왔다는 것에 대한 관행적인 트리뷰트는 물론 아니다. '어쩌다'로 시작하든 '반드시'로 시작하든 학자라는 굴레 안에서 자신의 지적 감퇴를 인생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사회학은 푸코가 말한 다음의 당연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삶의 지혜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령은 질병이 아니라, 질병이 더 이상 제어되지 않는 때이다. 그리고 이제 시간이 지배한다." 

7. 자신의 지적 황혼을 준비하는 이들이 남몰래 감추어 작성했던 소원들의 등록부를 찾아 들추어볼 때다. 여기엔 예상 외의 흥미와 깨달음이 들어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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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길의 「피에르 부르디외의 언어관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학술지 《문화와 사회》(2013년 14호 수록)

피에르 부르디외의 『사회학의 문제들』(1984/2004) 중 「언어시장」을 읽고 


"저기요 부르디외 선생. 근데 모든 걸 사회학적으로 생각해야 되나요?" 피에르 부르디외의 책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심지어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사회학적으로 보지 않으면 부르디외가 관을 뚫고 나와 삐질 것 같다고. 피에르 부르디외가 2002년 사망하기 전까지 그의 강렬한 투쟁적 사고, 특히 자신이 속한 학문적 위치를 끊임없이 돌아보고 그 거리감을 유지하려 했던 태도는 여느 지성인처럼 많은 지적 선물/산물을 안겨다준 게 사실이다. 특히 그는 주눅이 들어 있는 오늘날 사회(과)학도들에게 영원한 히어로이며, 고급 인문/사회과학 독자층에겐 '고전적 저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그 또한 완전무결한 학자는 아니었다. 나는 부르디외의 그 완전무결함을 깼던 비판적 목소리 중 하나, '총체적 과학으로서의 사회학'이라는 정신을 추구했던 그의 태도에는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는 편이다. 사실 부르디외뿐만 아니라 많은 학자가 그런 사고의 과정을 거치겠지만, 이런 현상을 왜 자신이 속한 학문적 사고로 바라보지 못하느냐 더 나아가 하나의 현상을 해석하고 개념화한 A라는 학문이 왜 자신이 속한 학문적 사고에 비해 빠져 있는 게 많았느냐 비교해보는 것은 학자로서 당연히 고민해볼 지점일 것이다. 문제는 부르디외가 이게 좀 과했고 그리하여 과녁을 잘못 겨냥했다는 점이다. 이를 잘 짚어낸 국내 논문 한 편이 있다. 


국내에서 일급 부르디외 전문가로 평가받는 이상길 교수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언어관에 대한 비판적 검토」라는 논문에서 부르디외가 강조하는 '사회학적-'이라는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언어관과 관련된 학문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언어학이다. 부르디외는 언어학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소쉬르와 촘스키의 논의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지향했던 언어에 대한 태도를 가져와서 '당신들 왜 언어를 사회(학)적으로 보지 못하냐'고 깐다.  

부르디외는 사회라는 현실 속에서 언어를 둘러싼 '나'와 '너'의 관계를 순수하게 바라봐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심지어 언어 공산주의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언어공동체 안에서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맺는 언어를 둘러싼 관계는 전혀 순수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언어를 표현한다는 것은 그 언어를 표현하는 사람의 하비투스를 감안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소쉬르와 촘스키는 순수하고 순진하게 이 세계의 언어를 고찰한 사람처럼 여겨진다. 


이 논지에는 자연스레 사회학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의 중요성을 넘은 사회학적 오만이 들어 있으며, 이 '사회학적-'을 강조하기 위해 비교대상에는 전혀 '사회학적-'이 없는 것처럼 되어야 하는 상황 설정이 발생한다. 허나 이상길 교수의 훌륭한 지적에 따르면, 소쉬르의 언어학이 '순수'언어학이라 불리울 만큼 진공 상태에 있는 학문은 아니었으며, 소쉬르는 그 나름대로 언어의 사회성을 고안하기 위한 주장들을 펼쳐왔다. 다만 그 초점이 조금 다를 뿐이다. 이상길의 논문 인용구는 다음과 같다.


예컨대, 소쉬르는 언어의 사회적 성격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그는 ‘개인적인 파롤’ 대 ‘사회적인 랑그’라는 이분법 위에서 랑그의 사회성에 주목한다. 다만 이 때 소쉬르가 중시하는 특성은 부르디외의 관심사와는 사뭇 다르다. 소쉬르에 따르면, “랑그는 개인 외부에 있는, 언어의 사회적인 부분으로 개인 혼자서는 그것을 창조할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으며,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일종의 과거의 계약 덕분에만 존재”하고 “어느 누구의 뇌 속에서도 완전하지 않으며, 대중 안에서만 완벽하게 존재”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다(Saussure, 1972: 30-31). 뒤르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 이와 같은 개념화는 발화 주체들 외부에서 그들에게 객관적으로 부과되는 규범체계라는 언어의 속성을 무엇보다도 강조한다(124쪽~125쪽).


그다음 촘스키는 아예 부르디외와 언어를 보는 관심사와 태도가 달랐다. 고로 부르디외가 취하는 '사회학적 그물망'에 촘스키가 과하게 끌려온 점이 있다. 촘스키는 부르디외가 바라보는 사회 현실 내 언어의 경험적 다양성보다는 단지 인간의 생물학적 언어능력이 갖는 가능성에 중점을 두었을 뿐이다. 이상길은 촘스키가 취한 연구적 관심사에 대해 부르디외가 비판하려는 그 시선이 촘스키의 시선을 대체하거나 무효화할 꺼리인가라고 반박하고 있다. 


사실 이 논문에서 가장 탁월한 지적은 부르디외의 '외적 관심사에 대한 과잉'이다. 부르디외는 언어가 갖는 메시지 자체의 중요성보다는 메시지가 나타났을 때 이 메시지를 만들어낸 사람의 '상황' 혹은 '조건'에 관심을 기울였다. 쉽게 말해 알맹이는 대충 보고 껍데기에만 집착했다. 껍데기가 갖는 중요성에 과하게 천착했다는 것이다.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계급을 비롯해 사회적 조건이 평등하지 않은 조건에 있다면, 부르디외의 레이더는 자연스레 A라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더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봤을 시 A의 경제적 수준, 교양 상태에 따른 말투와 복식/격식 등을 따지려 든다. 허나 과연 메시지를 둘러싼 하비투스가 부르디외가 기대했던 대로만 움직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로 부르디외가 늘 강조했던 하비투스라는 이 개인의 실천을 좌우하는 행동의 성향 체계는 '개념을 위한 개념'으로 강제된다. 부르디외는 닫혀 있지도 않으면서 열려 있지도 않은 하비투스라는 개념에 대해선 유난히 자신이 강조하는 '성찰성'에 연약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부르디외가 『사회학의 문제들』에서 설명했던 '언어 시장' 속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 관계'를 어떻게 사회학으로 분석하고 폭로할 수 있을까를 알려주는 소중한 지침이다. 그는 언어하비투스, 언어시장, 가격형성의 법칙 같은 경제 용어를 동원해 언어 구사에 내재된 '불평등한' 상호작용에 딴지를 걸고 있으며, 이 딴지는 어느 정도 속이 시원하다. 다만 부르디외가 꿈꾸는 사회학의 세계는 이 사회가 사회학으로 그려지지 않았을 경우, '숨 쉴 틈'을 주는가에 조금 미심쩍은 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통렬한 어퍼컷이 간혹 상대를 잘못 조준했을 경우에 대해 부르디외는 자신의 당황스러움을 어떻게 변호할 것인가.


부르디외 당신, '사회학적-'이 아니라면 삐질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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