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즘 책 한 권의 완독이 버겁다. <모나리자 훔치기>를 읽다가 접고, 읽다가 접고 하다가 내일까진 다 읽고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2  

최근 문화 분석(문화연구를 포함한) 경향들을 국내외 논문들을 살펴보며 정리해보고 있는 중이다. 확실히 하나의 감정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는 연구들이 늘고 있다. '감정사회학'은 지금은 소수 영역이지만 앞으로 꾸준히 관심가질만한 관점이며, 더 확장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일찍이 '감정 구조'라는 개념을 통해, 감정과 사회의 연관성을 강조해왔지만, 이것을 현상 분석에 끌어왔던 연구자들은 '감정 구조'를 수사로 쓴 경우가 많았다.  이제 그 감정 자체를 사회의 큰 구조 속에서, 미디어 담론의 틀 속에서 더 구체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문화 - 시민권 - 민주주의에 대한 문화연구적 접근도 국내외적으로 계속 시도되고 있다. - 문화연구와 정치 의식에 대한 성찰, 그 방향의 선상에서 문화연구자들이 현실에 개입하여 내놓으려는 대안적인 탐색인 것 같다.

 

정보 과잉의 시대에, 오늘날 대중 지식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라는 이론화 작업도 (국내와 달리) 국외에서 자주 논의되고 있는 듯하다.   

 

정체성 (동성애 문제를 포함하여)/ 다문화주의 / 국가 브랜드- 글로벌 체제 / 경제위기의 사회적 구성..등도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던 문제였지만, 계속해서 단골 연구 주제로 나올 듯하다. (생각이 더 여무는대로 추가를..) 

 

## 요즘 둥지 하나를 더 만들었다. 그 이름은 '페북'(facebook). 책 읽으면서, 영화보면서 기록하고 싶은 생각들을 순간순간 남겨놓는 재미에 빠졌다. http://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1707348473#!/profile.php?id=100001707348473 

(성의있는 글이 아니니 주목할만한 포스트에 올리지 말아주세요~!) 



 
 
고고씽휘모리 2011-01-31 09:01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페북을 그런 단상을 올리는 용도로 사용해봐야겠네요.
메인이미지가 아주 멋진데요 ㅎㅎ

얼그레이효과 2011-02-03 11:03   URL
고맙습니다.^^ 친구가 아이폰으로 그려준거에요.ㅋ 휘모리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욧!
 

  

  

 

 

 

 

 

  

영화를 좀 '의미있게' 보고 싶은 사람들, 영화보다 '영화-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조금씩 내가 걸어온 여정을 나누고자 한다. 이러한 여정에 담겨진 이야기들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일수도, 또 그런 이야기들을 조금 더 깊이 판 사람들의 이야기일수도, 아니면 전혀 동의할 수 없는 딴 세상 이야기일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정체성을 밝히자면, (영화 연구라는 자장 안에서) 영화를 '사회학적'으로 보는 사람이다. 이것은 오래 전 문화연구의 영향을 받아온 덕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 나는 문화연구가 이제는 '미학'에 다시 접근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미학은 어두운 시네마떼끄 안에서 고립된 영화적 묘미를 즐기는 영화광들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개념이자 현상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주장한다. 

이번에 논문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문화연구가 갖고 있는 사회학적 시각이 영화의 미학, 특히 영화의 존재론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자 했다. 앙드레 바쟁은 문화연구자들의 적이 아니며, 오히려 바쟁의 '완전영화의 신화'와 같은 글들은 문화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다시 해독해봐야 할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영화 연구를 한다는 것은? 영화학자 패트릭 필립스의 이야기대로, 영화를 보는 우리들의 경험을 더 잘 설명하고 잘 이해하기 위해서다. 영화 연구의 역사는 사실 이게 전부다.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충돌, 결합되어 왔고, 우리는 수혜자로 살아가며 새로운 길을 모색할 기회를 잡았다. 

영화 연구는 장르, 텍스트, 스타, 산업을 비롯한 다양한 대상들을 연구 과제로 삼아왔지만, 무엇보다 '관객성(spectatorship)'을 둘러싼 견해의 충돌, 누적은 영화 연구가 걸어온 여정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영화 이론을 조금 공부한 사람이라면, '관객성 연구'는 스크린 이론을 둘러싼 순응과 저항, 그리고 그 틈을 벌려 보다 문화적이고 사회학적인 시각에서 고안된 '영화 수용자 연구'로 전개되어 왔다. 

학문을 '잘'하고 싶다면, 무엇보다 필요한 건 언어에 대한 민감함일 것이다(나는 아직도 모자르지만). 영화 관객과 영화 수용자는 그래서 비슷한 듯 하지만, 다른 층위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이것은 그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 개인의 시각일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 학문적인 검증 안에서 공개된 견해이기도 하다. 이 견해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다양한 책이 있지만, 비교적 쉽게 이 개념을 정리해놓은 패트릭 필립스(phillips,1996)의 <spectator, audience and response>를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필립스의 의견에 따르자면, 영화 관객성 연구는 어두운 극장에 들어선 개인이 영사기와 스크린 사이에서 위치지어지는 방식을 탐색하는 데서 출발한다. 특히 '영화적 장치'라고 하는 스크린 이론의 강령은, 영화를 보는 관객을 주체로 '호명'한다고 하는, 구조주의적 접근과의 만남을 선언했다. 여기서 발생하는 '개인 - 영화'의 만남, 그러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영화에 대한 감정은 영화를 '시네마'라는 명칭 안에서 특별하고 위대하게 만들어보이도록 했다. 영화는 일상생활과 격리된 경험 그 무엇이었고, 그러한 특수성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영화 연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영화 수용자라는 것은, '수용자(audience)'라는 명칭을 자주 쓰는 문화연구의 탐독을 필요로 한다. 수용자라는 개념을 자세히 그리고 역사적으로 알고 싶다면, 가장 기본적으로 데니스 맥퀘일의 <매스커뮤니케이션 이론>을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거칠게 정리해보면, 영화 + 수용자의 결합은 영화의 특권적 경험 대신 '일상 안에 놓여진 영화의 위상과 그것을 규정하는 사람들의 소비 행위'를 탐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영화 소비'(film consumption)'는 영화 수용자를 연구할 때 애용되는 개념으로써, 극장 이외의 경험, 특히 '가정'에서 어떻게 영화가 받아들여지고 있는가를 설명할 때 요긴하다. 이것은 VCR,DVD,케이블 TV, VOD, 다운로드 등의 소비 경험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영화 관객'에서 '영화 수용자'로 전환되는 과정은, 영화 연구에서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보기 위해' 필요한 과정들, 보는 것과 함께 가는 다양한 실천들이 고려된다. 자연스럽게 이러한 수용자의 실천은 '애매모호한 자유'와 맞닿아 있다. 이것은  영화 수용자의 행위를 다른 한 편에서 규정하는 시장의 힘 때문이다. 영화를 만들어내는, 그리고 영화 수용자의 다양한 영화 문화를 생산해 내고, 그것에 민감하게 접근하는 기업의 행위는 한편으로 새로운 영화 수용자 연구의 딜레마로 작용한다. 

시장의 엄청난 조사 능력은 영화 수용자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듯 하지만, 그 자유는 사실 진정한 수용자의 자유는 아닌 상황. 디지털 시대를 맞아, 영화의 존재론을 영화 경험과 함께 사유하는 유명한 학자, 토마스 엘세서 같은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자유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동료들을 모은다. 가령 앨세서는 DVD의 서플먼트가 보여주는 풍성한 정보, 영화 잡학이 영화를 적극적으로 사랑하려는 이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한다. 

하지만, 새로운 영화 테크놀로지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영화에 대한 소유'는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영역 안에서 영화의 미래를 모색하는 긍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한다. 마셜 맥루언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영화는 '핫 미디어'이기 때문에, 그 참여도가 적은 매체라고 했지만, 시대는 맥루언의 의견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말하는 중이다. 

영화를 접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지성의 망안에 포획하려는 것이 나 같은 놈의 일상사지만, 결론은 결국 내 망에 가두어지지 않은 이들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자유를 보존해주는 것이리라. 이번 논문에 담긴 내 신념이다.



 
 
2010-12-14 00:23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1 0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유난히 문제가 되고 있는 '연예인'을 향한 사회적 비난, '연예인'의 이미지 추락에 대한 냉소. 이것은 비단 '한국 사회'의 일만은 아니라는 걸, 우린 브리트니 스피어스, 패리스 힐튼, 린제이 로한 등의 소식을 통해 알고 있다. 이것과 관련하여 내가 최근에 주목하고 있는 신진 미디어-문화연구자인 조 리틀러가 스티브 크로스와 함께 [Celebrity and Scahdenfreude : The cultural economy of fame in freefall]이란 논문을 지난 6월에 발표했다.    

샤덴프로이데라는 표현을 잘 알고 싶다면, 미국 법정 드라마 [보스턴 리갈]을 참고하는 게 좋을 듯하다. 한 유능한 남자의 아내가 된 젊은 여자가 '살인 혐의'를 받게 되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살인 이유에 '남편의 재산'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 이 에피소드에서 중요한 건, '잘 나가던' 타인의 불행을 은근히 바라고 거기서 행복을 추구하려는 주변인들의 심리(샤덴프로이데를 설명하는)였다. 주인공 제임스 스페이더는 법정에서 바로 이 '샤덴 프로이데'(속된 말로 '쌤통의 심리학'이라고 이름 붙여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말을 꺼낸다.   

 

(조 리틀러의 모습)

본 논문은 '샤덴프로이데'가 현대 사회의 일상에 어떻게 '잠입'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저자들은 셀레브리티를 향한 '샤덴프로이데'가 신자유주의적 문화의 한 단면이라고 주장한다. '명성'의 문화경제 속에서, 사람들의 '평등 추구 심리'. 거기에 개입된 증오와 적개심엔 경제와 감정 그리고 그것을 매개하는 정치의 관계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저자들의 견해 포인트인 것 같다. 어제 MBC 스페셜에 나왔던 이야기 중 일부와 공명하는 바가 있다.  (시간이 나는대로, 이 논문을  해석하여, 심층 해부해 보도록 하겠다) 

 

덧붙임) 문화연구의 새로운 맥락 속에서, 요즘 내가 주목하고 있는 학자는 조 리틀러다. 정치철학적 논의를 통해 '윤리적 소비'가 갖고 있는 문화정치학적 함의를 끄집어내기도 했던 그녀는, 다방면의 정치이론,문화이론,사회이론의 수렴을 통해, 문화연구의 새로운 흐름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손님 2010-10-09 12:24   댓글달기 | URL
전 서점에 '샤덴 프로이데' 코너가 따로 개설되어야 한다고 늘 주장해 왔어요.

얼그레이효과 2010-10-09 22:09   URL
이 코너 따로 진열되면, 볼만하겠는데요. ~

2010-11-09 03:47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0 1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문화연구 입문'이란 표현이 가능하다면, 반드시 거치게 되는 두 학자가 있다. 한 명은 레이먼드 윌리엄스, 다른 한 명은 스튜어트 홀이다. 최근에 교보문고에 들려,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키워드>가 출간된 걸 확인했다. (의미의 '과장'이 좀 필요하겠지만) 난 이 출간이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요즘 문화연구하는 친구들은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텍스트를 읽으려 하지 않는다. 이 말을 좀 풀어보자면, 꼭 레이먼드 윌리엄스를 거쳐야하는 필요성을 모르는 '새로운 문화연구 세대'의 도래. 이것이 지금 '문화연구의 흐름'이다. 오히려 요즘 문화연구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찾는 과거 '레이먼드 윌리엄스 급'의 텍스트, 그 자리에는 슬라보예 지젝이 들어왔다고 본다.  

왼쪽에 링크를 걸어놓은 [New Cultural Studies]란 책은, 바로 '새로운 문화연구 세대의 도래'를 알리는 국외 텍스트이다.(아직 번역되진 않았다.) 게리 홀이라고 하는 신진 문화연구자의 기획으로 만들어진 이 컴필레이션 텍스트의 서문은 '지금' 문화연구 세대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채워져있다. 이 서문의 내용을 구성하는 가장 큰 기준에 문화연구의 '제도화'에 기여한 '버밍엄 학파'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문화연구의 기초를 닦았던 이들, 이미 문화연구의 '판테온'에서 '명예고문'으로 있는, 호가트, 톰슨, 윌리엄스, 홀 등등등.

그러나 이 서문에는 '문화연구'하면 으레 떠오르는 사람들의 업적 나열이 없다. 요즘 문화연구자들은 분산되어 있고, 각자가 옹호하는 이론가 /이론도 다르다. 목차를 보면, 맥루언이나 윌리엄스 대신 키틀러가 들어가 있고, 문화연구- 정치를 담당하던 스튜어트 홀의 자리엔 지젝, 아감벤이 들어가 있다. 어쩌면 이건 문화연구 특유의 빠른 '흡수력'이란 장,단점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인지 모른다. 고로 뉴 컬쳐럴 스터디즈란 책의 개정판이 몇 년 후에 나와, 내용을 바꿔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 자리에 다른 이론 /이론가들이 들어가 있다는 건 전혀 상상 외의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서문은 단순히 우리 시대의 새로운 이론을 옹립하려는 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다만, 우리 시대의 문화연구자들이 더 이상 과거 '버밍엄 학파'의 유산에 구속되지 않은 채, (과거 책을 읽은 내 기억을 좀 되살려보자면) '문화연구자'로 정의될 수 없는 문화연구자들, 이 시대의 흐름을 깊이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로 나타나는 듯하다.   

(책의 표현처럼) "버밍엄이여 영원하라!, 버밍엄은 죽었다"  의 시대, 이것이 지금 문화연구의 시대이다.

이 맥락에서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키워드]는 누군가에게는 '유품'으로,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도전'으로 남을 것이다.

 



 
 
2010-10-09 21:26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9 2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9 2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9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0 09:54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1 0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킬레우스 2010-10-11 11:02   URL
네. 감사합니다^^
 

 

당연하게도 여기에서의 관찰자는 더이상 실증주의 과학의 초연한 입장이 아니다. 또한 반드시 완전한 참여자도 아닌 것이다.그는 상응관계에 있다고 하자. 그는 분석하려고 하는 어떤 가치들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아마도 그것은 자기 반성에 부분적으로 바탕을 두고 있는 일종의 "심층 사회학"과 관계가 된다. 여기에 관해 어떤 확증을 갖고 있진 못해도 우리는 사회과학에서 이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공범자'가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은 이른바 '낭만적 사회학'에 관여하는 것이다. 사회의 이곳 저곳을 탐색하면서 그들은 많든 적든 그들 스스로 이미 지니고 있는 어떤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에 대해 그의 저서 중 가장 핵심적이라 할 수 있는 장에서 페라로티는 '상호작용으로서의 연대기'를 제시하고 있다. 개인연대기 그 자체가 경험임에 틀림없다는 것은 연대기가 '체험'을 고려하게끔 상정되기 때문이다. 

                                                                     - 미셸 마페졸리(1989), 일상생활의 사회학 : 인식론적 요소들 중에서 - 

한때 '일상생활의 사회학'이란 테마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일상생활연구회라는 것도 덩달아 국내에 생겨났던 기억이 있다) 이 테마의 두 '본좌'를 꼽으라면, 앙리 르페브르와 미셸 마페졸리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르페브르가 현대의 기호와 언어를 통해 현대성을 규정하는 이미지들의 시선에 대한 해부를 놓치지 않았다면, 마페졸리는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일상생활의 사회학을 위한 사유의 방법과 틀을 제조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고 알고 있다. 사실 공부하는 사람에게 두 본좌의 유명세를 비교하는 것은 흔한 '가십'일 수 있으나, 좀 더 대중적으로 알려진 르페브르보다, 나는 마페졸리의 사고에 더 관심이 있었다. 아마도 이것은 내가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까, 연구라는 것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원딩' 초창기 시절, 그 시간에서 나온 고민의 어떤 형태를 마페졸리가 설명하는 구절들로 치유를 받았다고 할까? 그런 것에서 오는 감사함과 소중함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어찌 보면 내가 '문화연구'라는 학문 사회 내 하나의 영역으로 진입하면서, 가장 신기하게 느꼈던 부분이 "내가 살고 있는 이 삶 자체를 연구 주제로 삼을 수 있다니"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른바 '문화'라는 개념 아래 그 문화를 다룬 연구가 오늘날처럼 왕성하게 진행되고 있던 시간은 사실 그리 길다고 볼 수는 없다. (문화연구적 수업의 특징일지 모르지만) 대학원에 들어온 사람들이 수업 시간에 자신의 하루를 나누고, 그 하루 안에 특징지워진 삶의 순간들을 공유한다는 것은 오늘날 너무 당연한 태도인 듯하지만, 여전히 신기하다. 자신이 잘 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특징들, 자신이 늘 타고 다니는 지하철 내 풍경들, 요즘 고민하는 가족 내 문제들 등등이 수업 시간에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그것이 하나의 연구 논문으로 작성되는 순간은, 누구에게는 "먹물로 뒤덮어진" 심층 에세이일 수도 있으나, 어쩌면 이것은 학문과 그것을 마주치는 인간이 함께 노력하여 만든 우리 삶의 또 다른 행복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수업 시간을 채우는 연구 동료들의 수다 안에서 나는 여전히 이론이 갖고 있는 중심이 그리웠고, 그 중심 안에서 이론이 나에게 던져주는 '소유하고 싶은 무거움'이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었다. 사실 한창 공부하고, 수업을 열심히 듣던 시간에는 몰랐다가, 졸업 논문 관계로 약 1년을 학교 밖에서 지내면서,  밀폐된 내 방에서 연출되는 나와 나의 대화, 거기서 다시 내가 끄집어냈던 책이 <일상생활의 사회학>이었고, 그 중에서도 마페졸리의 부분을 반복적으로 읽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쉽게 쓰면서, 그 의미를 제대로 몰랐던 게 '사회성'이란 것이었다. 마페졸리는 사회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일상생활이 도처에 있기 때문에 새삼 그것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의 비판에 대해 나는 일상생활의 사회학이 새로운 붆석형태라기보다 사물들에 대한 하나의 독특한 조망이라는 사실을 길게 설명한 적이 있다.(중략)그렇다고 이러한 관계들이 결코 존재한 일이 없다거나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장님이 아니고서는 그들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그러나 이들 사회관계가 어떤 에토스, 그 속에서 현대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는 어떤 '에토스'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다. 이것은 내가 사회성이라 부르고자 제안한 것으로서, 사람들이 사회관계에서 최소한의 중요성을 가진 잔여요인으로 할 수 없이 인정하는, 단순한 사교성과는 매우 다른 어떤 것이다. 사회성은 유기적 연대,상징적 차원(커뮤니케이션)','비-논리적인 것',그리고 현재에의 관심을 포함한다.(중략) 우리에게 사회성이라는 주제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회체계가 영속적인 상호작용의 산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자연환경의 기반 내에서, 사회적 환경의 다양한 요소들 간에 항시 일어나는 역전성의 산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일상생활의 사회학'에서 강조되는 것은 현상이며, 그리고 그 현상에 개입되는 지식이다. 지식은 단순히 사회를 바라보는 개입의 도구가 아니라, 일상생활이라고 하는 우리가 흔히 '진부함'으로 치부하는 것들을 거리를 두고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연구의 방식이자 관점이 된다. (최근에 발간된 피터 버거의 책 <의심에 대한 옹호>에서 피터 버거 역시 일상생활의 사회학을 주창하던 이였고, 그는 이 사회를 구성하는 상식과 지식의 역할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마페졸리는 일상생활의 사회학에 접근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상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사람들과의 술자리 등에서 주고 받는 통속적인 지혜 그 자체가 사회를 지탱하는 하나의 감각이라고 주장한다.(그는 이 감각을 '사회적 전신감각'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사회성이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단순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교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사회 안에서 연결짓게 하는 일련의 방식을 의미한다. 마페졸리에게 그런 면에서 '사회성'이란 일상생활의 사회학을 위한 '태도'이기도 했다. 그래서 마페졸리는 알프레드 슈츠의 현상학적 사회학을 비롯해, 고프만이 펼쳐 놓았던 '연극무대로서의 삶과 의례'를 이야기하면서, 우리의 삶을 연구한다는 행복과 열정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물론 내 해석이지만) 마페졸리는 사람이 사회에서 살아나가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정체성, 흔히 '역할 놀이'라고 하는 부분들을 비난의 차원이 아니라, 이해의 차원으로 접근하면서, 사람들의 '생활의 역사'를 쓰는 것은 이 다양한 정체성으로 구성된 아직 밝혀지지 않은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 같다.  

 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서 나오는 지혜, 그리고 매일 부딪히는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사람들의 잡담을 꾸준히 지켜보며, 거기서 사회의 묘미를 만끽하는 사람에게 솔깃할 듯한'제3의 장소'라는 개념은  이 개념을 주창한 사회학자 레이 올덴부르그의 재미있는 학술적 에세이를 지탱하는 힘이다. 집과 일터를 벗어나,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 술집, 카페, 식당에서 사람들은 오늘도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아는 사람이 아는 사람끼리 만날 수 있고, 전혀 모른 사람과의 영화적인 만남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제3의 장소'라고 불리는 이러한 공간의 소비를 통해 넓어진 사회적 관계를 체험한다. '제3의 장소'를 통해 사람들은 '이웃'의 발견을 경험하고, 그러한 경험이 주는 흥미가 쌓이면서, '제3의 장소'에 모인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즐기며 발설한다. 이 공간은 오히려 그 '누군가가' 많기 때문에 가능한 '나만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제3의 장소'를 통해 마페졸리가 정의한 '사회성'을 체험하고 또 소비하면서, 그 공간에서 가능한 사회적 의례를 학습한다. 그리고 그 의례가 설정한 사회적 역할 놀이를 즐긴다. 여기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들은 매일 정해진 것일수도 있고, 때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의 다발일 수도 있다. 너무나 당연한 하루와 너무나 예상치 못한 하루. 그것이 사회니까. 오히려 이러한 진부한 설명 자체의 회피를 피할 수 없다는 것에서 나는 사회라는 것의 흥미를 느낀다.  

'진부해서 안된다'라는 강박에서 늘 헤메이던 시절, "그럼 진부함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대로  하지도 못한 나에게 마페졸리가 했던 조언은 "일단 새끼야, 진부함하고 부딪혀 봐"라고 지금은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진부함은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 연구의 대상이 됨으로써 다시 창조적 풍경으로 탈바꿈된다는 것. 그래서 나를 '일상적인 사람'으로 불러주는 친구들이  고맙다.



 
 
2010-09-13 12:31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5 2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