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긴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취향은 자신의 문화적 선호를 분명히 밝히는 용어가 아닌, 그러한 선호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불안과 그 방어에 가까운 용어임을 우리는 이미 실생활에서 느끼고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취향을 밝힌다는 것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일이다. 물론 이는 내가 어떤 영화를, 음악을, 회화를 보고 공유하는 것에 대한 설렘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이런 걸 밝힘으로써 누가 날 공격할까?라는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생겨버린다. 

이번 《문학과사회》 여름호 기획 ' 취향에 대해 논쟁할 수 있는가'에 참여한 필자들 또한 이런 시선의 바탕 안에서 흥미로운 논지를 전개해나간다. 오늘날 '취존(취향을 존중합니다)'이니 '개취(개인의 취향이 있는 거니까요)'라는 표현은 곧 진정한 상호 존중이 아닌, 사실은 내가 당신과 더 이상 이 문제를 두고 깊은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소, 라는 단절과 폐쇄를 선언하는 것이다. 이처럼 취향을 밝힌다는 것의 피로감은 별것 아닌 듯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취존과 개취는 곧 취향을 두고 정서적 에너지를 쏟기 싫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서동진 선생은 "사악한 윤리적 기회주의"라는 강도 높은 표현으로 "취향 없는 취향"(정성일)의 시대를 우려한다. 정성일 선생은 오늘날 취향이라는 말 자체는 취향이라는 그 말 자체를 부정하기 위해 시장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견해를 밝히기도 한다. 이러한 취향을 둘러싼 윤리적 풍경에 부정이란 없다. 오직 긍정만이 있을 뿐이다. 무엇을 부정한다는 것은 곧 타인과의 쟁투로 이어지기에 이를 애써 막을 방도는 "좋아요"이다. "그 영화두 좋아요" "그 음악 괜찮죠(각자 다 즐기는 기준은 다르니까요)"

사실 가장 점잖은 것 같지만 도발적인 언사를 표하는 글은 이상길 선생의 <취향, 교양, 문화>다. 이상길 선생의 글 내용을 보면 사람들은 이미 부르디외가 될 채비를 갖추고, 이를 잘 써먹는다. 아 이 계급이면 이런 문화를 좋아하지, 아니야 이 계급이라고 해서 이런 문화를 반드시 좋아한다는 보장은 없지? 하는 마인드로 문화를 소비한다는 것이다. 허나 이상길 선생의 진정한 관심사는 이러한 사회학주의가 아니다. 사회학자인 그가 보기에 오늘날 문화, 예술을 다루는 관점은 지극히 사회학주의에 치우쳐 있다. '나'가 이러한 문화를 좋아하는 것에 대한 외부의 결정적 요인을 자연스레 이어보고자 하는 태도, 이러한 사회학주의를 넘어서는 것이 오늘날 취향-교양-문화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필요하다. 

그는 이러한 맥락에서 푸코의 '자기 배려' 개념을 검토하며 주체의 능력에 주목한다. 그는 언뜻 오늘날 주어진 교양의 일반적 규범(가령, 이런 정도는 읽어줘야지 않겠어?란 말이 따라오는 하나의 문화적 위계라고 한다면)을 습득해가는 사람을 향해 '교양의 몰이해''줏대 없는 시류의 영합과 편승'이란 쪽으로 몰아가는 것에 반대한다. 그러면서 '자기 계발'이라고 하는 표현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하는 듯하다. 어떤 인문주의와 교양주의에 함몰되지 않은 채, '나'가 자기 배려라는 능력을 통해서, 사람들이 합의해놓았지만 '뭐 그게 중요한 텍스트이긴 한데, 편한 것부터 읽어, 그게 그리 중요한가'라는 태도로 그 합의를 은근히 숨겨놓은 듯한 문화적 환경에 주체적으로 설 수 있는가. 이상길 선생은 그 문제를 건드리고 싶어하는 듯 보인다. 쉽진 않겠지만, 이란 말과 함께.  

서동진 선생(<이토록 아둔한 취미를 보라>)은 개취, 취존의 인류학에서 나타나는 윤리적 합의의 풍경을 우려하면서 '합의'의 공동체가 갖는 한계를 지적한다. 그가 보기에 지향해야 할 공동체는, 공동체의 불가능성을 주창하는 이의의 공동체다. 정성일 선생(<21세기 신사숙녀 '反' 매너 가이드>)은 취향에서 안전을 추구하는 풍토를 걱정하면서 취향이 불안과의 모험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가 보기에 영화를 통해 취향을 밝힌다는 것에서 영화는 없다. 오직 (취향을 밝힘으로써 나타나는 불안감을 감지한) '나'만 존재할 뿐이다. 

세 필자의 글에서 두 가지 특성을 발견해보았다. 서동진 선생과 정성일 선생의 글에서 공통으로 나오는 '인류학/인류학자'라는 표현(이상길 선생은 명시하지 않았지만 부르디외의 인류학적 접근이 들어간 《구별짓기》의 마인드를 체득한 소비자-시민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 필자 다 그 용례는 미세하게 다르지만, 사람들은 이미 문화를 소비할 때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과 함께 이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의 반응을 챙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견해가 깔려 있는 것 같다.
고로 '나'는 영화를 보지만, 영화를 보는 것은 아니다. 나와 함께 영화를 보는 사람들과의 정서적 반응과 무의식적인 교류를 챙긴다. 컴컴한 극장과 스크린에서 압도되어진  '집중'(흔히 극장주의자들이 잘 썼던) 대 이 산만하고 할 일 많은 가운데서 여러 개로 발산되는 듯한 가정 내 '분산'이란 구도는 어찌보면 다시 한번 관에 들어가야 한다(많은 영화학자가 밝힌 것처럼).

다른 하나는 아쉬운 점이다. 세 필자 모두 '존취(당신의 존중을 취향합니다)'란 이 비문적 실천을 챙기진 않는다. 존취라는 용법은 아직까진 남녀의 외형적 매력에 국한되어 있는 듯하다. '아니 저런 남자가 잘생겼어요?' '아니 저 여자가 정말 예쁘다구요?' '당신 눈이 어떻게 된 것 아닌가요?'라는 뜻이 한꺼번에 담긴 이 익살스러운 '존취'는 허나 정작 문화적 취향의 전쟁터인 영화나 음악에선 찾아보기가 힘들다.
어쩌면 존취는 취존이 갖고 있는 '취향을 밝힌다는 것에 대한 불안'을 더 떠안은 표현일 것일까. '취향 없는 취향'의 시대를 사는 '자신의 자신 없는' 상태를 극도로 방어하기 위한 용법일까. '존취'의 인류학이 궁금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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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푸코에게 고등사범학교 신입생 다니엘 드페르와의 만남은 특히 그의 인생 말년을 정의하는 데 중요했다. 이후 1984년 6월 푸코가 죽기 전까지 다니엘 드페르는 푸코 인생의 반려자가 되어주었다. 푸코가 죽고 나서 20년간 드페르는 푸코의 죽음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명사의 죽음이 그렇듯, 고인이 된 푸코의 사인을 둘러싼 예의없고 입싼 저널리즘의 태도가 두려웠던 드페르는 2004년 오랜 침묵을 깨고 리베라시옹의 유명 저널리스트 에릭 파브로와 나눈 인터뷰의 게재를 허락했다. 

드페르가 이 인터뷰를 통해서 강조하고 싶은 건 고인과의 친밀했던 추억을 되살리고 그의 영예로움을 보존하는 것보다는 그의 죽음으로 촉발된 정치적 투쟁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푸코와 AIDS의 관계를 둘러싸고 드페르는 의학 지식이 개인을 어떻게 함부로 다루었으며, 그러한 의학 지식의 수행자들과 환자-환자의 동반자가 벌이는 권력의 게임이 어떤 상처와 분노를 가져다주었는지를 인터뷰에서 밝힌다(읽고 나서 거칠게 정리해봤는데 인터뷰 내용은 디테일하고 흥미로우며 새겨들을 부분이 많다. 드페르가 푸코의 입원 수속을 받는 과정, 검사에서 푸코를 함부로 다루거나 경계하는 과정, 에이즈에 대한 병원 내 인식, 푸코의 죽음 뒤 저널리스트가 어떻게 에이즈와 명사의 관련성을 스캔들로 묶으려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나와 있다).

그런 권력 게임의 상처와 푸코의 죽음은 AIDS는 곧 동성애라는 그 당시 프랑스의 사회적 인식에 저항하기 위해, 드페르가 직접 AIDS에 대한 보수적 인식에 저항하는 운동가로 변신하는 계기가 되었다(드페르는 프랑스에서 최초로 에이즈에 대한 인식 재고를 위한 기관을 만든 사람이었다). 드페르는 자신의 연인인 푸코가 이 사회를 위해 실천했던 다양한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노동자, 동성애자, 에이즈 양성 반응자, 죄수들을 위한 목소리의 필요성을 역설해야 한다는 투쟁 의식을 갖는다. 

폴 벤느, 디디에 에리봉, 질 들뢰즈의 시선에서 이제는 푸코의 반려자이자 사회학자인 드페르의 시선을 직접 접해볼 때다. 이 책이 꼭 국내에 출간되길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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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디외의 국가론 강의가 국내 계약되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부르디외의 국가론에 대해 깊이 공부해본 적은 없다. 다만 이 책의 4장 「국가의 정신들: 관료 장의 생성과 구조」를 읽다보면 부르디외가 국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금 정리해볼 수 있다. 지적 자극을 우선시하는 이에겐 외형적으로 푸코의 생정치보다 그 전개 과정이 심심할 수 있다. 허나 "낱말은 사물을 만든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부르디외는 국가가 만들어지는 조금은 상식적인 역사를 기술하면서도 권력의 형성과 분배 과정 안에 깃든 실천의 이름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이는 또다른 지적인 자극과 호기심으로 다가온다. 


가령 부르디외는 국가 권력에서 '임명'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왕과 영주 사이의 법적 관계를 보면 영주는 자신의 관할구역 안에서 법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점 왕을 중심으로 한 법 권력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보편'이라는 이름의 상징이 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왕의 이름을 대신하는 '법률적 인간'이 만들어지고, 영주의 법적 권한은 소멸된다. 이 시기에 왕에게 '임명'이라는 절차가 강조된다. 임명은 곧 국가가 부여하는 상징을 배분하는 실천이다. 명예와 평판이라고 하는 상징적 자본을 관료들은 받게 되며, 국가는 이런 관료들의 마음을 적절히 관리하면서 세금과 군사 등 '보편'이라고 하는 국가의 상징을 유지할 사회 체계를 잘 유지할 수 있도록 관료 장의 역동성을 기대한다. 내부의 다양한 권력자들이 갖고 있던 물리적 권력은 이제 왕과 관료 장이라는 형태로 일원화된다. 

부르디외는 세금이란 무엇인가도 묻는다. "반대 급부 없는 징수" 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부르디외가 보기에 세금 징수와 납부라는 실천은 곧 국가의 비인격성을 드러내는 사회적 논리로 구성되었다. 권력을 가진 이들을 위한 납부라는 저항을 막기 위해 나타난 큰 이유는 군대와 영토의 보존이었으며, 부르디외는 여기에 영토 방위에 따른 민족주의라는 연원을 끌어들인다. 군주의 이익을 위함이 아닌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이란 동의의 정서가 나타났다는 것이다(여기엔 국가 외부 세력에 대한 안전과 더불어 국가 내부의 치안을 위해 세금 납부와 징수가 상식이 되는 역사적 과정 기술은 빠져 있다). 이러한 세금 징수를 통해 국가가 애를 쓴 것은 자연스레 통계와 조사였으며, 통계와 조사라는 실천은 곧 법률적, 언어적, 계량적 규범의 통일로 이어진다. 부르디외는 이 과정을 기술하면서 '문서'라는 사물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사실 이 틀에서 보론으로 실린 '가족 정신'이라는 부르디외의 글에서는 가족은 국가와 동떨어질 수 없다는 그의 입장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이 부분은 1970~80년대 가족 관련한 국내 정부의 백서를 연구 자료로 찾아 읽고 어떤 해석틀을 마련하는 데 푸코뿐만 아니라 부르디외의 가족론도 큰 활용도가 있음을 시사하는 내용으로 꽉 차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르디외는 가족이란 "잘 확립된 허구"라고 본다. 이것은 오늘날 인기 있는 신자유주의의 '-테크론'을 들먹이며 '기획된-'을 주장하는 가족론이 아니다. 어찌보면 좀 더 푸코적인 '국가와 호적'이라는 문서적/인구적 차원의 가족이 어떻게 오늘날 그 존재를 인증받고 있는가를 부르디외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부르디외가 보기에 국가의 관료장은 문서화라는 형식을 통해 가족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구성한다. 부르디외에게 그래서 호적이란 문제는 그냥 지나칠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특히 가족 정신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가족 특유의 따뜻하고 은밀/긴밀/친밀한 정서가 그냥 주어진 소여의 상태가 아니라 국가에서 비롯된 공적 활동의 소산이라고 주장한다. 부르디외에게 가족이라고 하는 프라이버시는 곧 공적 기관이 부과하는 기능들의 발명품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결을 정리해보면, 부르디외는 '보편'이라고 하는 상징적 자본을 행사하는 국가를 향한 의심을 던지기 위해 어떻게 우리는 국가를 상식적으로 따르게 되었는가를 역사적으로 다시 돌아보는 작업을 선보인다. 부르디외에게 상징 폭력이란 그 폭력을 당한 당사자가 정작 그 폭력이 폭력인지 모르는 상태 혹은 그 폭력을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상태라는 점에서, '보편'이란 상징적 자본은 의혹을 위한 제1항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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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커 파머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에 나오는 '마음의 습속'과도 연관이 있지만, 사실 파머의 책을 접하고 나서 떠오른 책은 장 보드리야르의 『아메리카』였다. 주의: 이 거울 속에 비치는 사물들은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을 수 있습니다로 출발점을 끊는 보드리야르의 그 무심한 문체, 사막을 통해 현대사회의 침잠된 정치적 상태와 미국 민주주의의 우울을 풍경과 엮는 인트로는 책을 읽는 당시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가장 정치적인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파트인 「권력의 종언?」에는 '제4세계'라는 표현과 '역설적 신뢰'라는 용어가 울림을 준다. 해방과 팽창, 더 이상의 적대란 없는 시기에 외려 나타나는 미국 사회 내부의 배제는 '깨끗하고 완벽하게'란 구호 아래 더 견고해졌다. 정치적 무관심에 의해 잊힌 사람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레이건 시대가 밀어붙이는 강박적인 행복증 전파, 정말 사람들이 편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편의를 협박조로 구성하는 권력에 대해 보드리야르는 우려의 시선을 보낸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이런 권력의 망에 있는 이 사람들은 공민권을 박탈당한 채 지도에서도 잊힌 사람들로 전락해갔다. 이들은 보드리야르의 표현을 빌자면 "가난한 사람들은 나가야 한다"의 언어에 묶인 사람들이다. 보드리야르는 지워질 운명과 소멸의 통계 곡선에 있는 좀비들을 양산하는 이 사회를 안타까워하며, 그 좀비들을 '제4세계'라고 명명한다. 여기서의 제4세계란 제3세계의 추락점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현대 권력의 통치술이 낳은 비극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보드리야르는 이 챕터에서 '신뢰'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꺼낸다. 보드리야르는 미국인들이 정치의 실재에 대해선 그리 큰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합의된 신뢰의 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신뢰를 권력이 정부가 적절히 관리해주기만 한다면, 정치인들을 향해 믿음이 있는 것처럼 연기하길 좋아하는 게 미국인이라는 강도 높은 비판을 선보인다. 그러면서 그가 제시하는 신뢰에 대한 개념은 '역설적 신뢰'다. '이상하다. 저 정치인은 내가 보기에 갈수록 형편없어지는데 왜 이렇게 사람들이 물고 빨아주는거야?' 보드리야르의 역설적 신뢰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역설적 신뢰는 점점 더 실패하고 점점 더 자질이 없는 이를 위해 부여되는 지지의 감정이다. '자 이제 천년왕국의 그날이 왔소'라는 예언이 실패되어도 그 예언의 실패에 아랑곳하지 않고 휴거를 믿는 종교인들의 비유를 들어 보드리야르는 레이건 정부를 향한 미국인들의 정서를 비판한다. 역설적 신뢰가 무서운 것은 보드리야르의 표현처럼 "실패의 부인에서 나오기 때문에 조금도 약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드리야르는 미국이라는 여행을 통해 무감각의 개입을 실천한다. 출판사에서 잘 만든 부제처럼 '희망도 매력도 클라이맥스도 없는' 이 미국 문명 여행기에서 보드리야르가 경계하는 것은 '어 저곳 나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봤던 건데, 직접 보니 신기하다' 같은 확인의 자세였으며, 이 "갱년기"와도 같은 미국 사회가 주는 모호한 유토피아적 분위기였다. 

"여행은 끝났다"라는 말이 책의 말미가 아니라 거의 책의 시작 부분에 나타나는 건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파커 파머가 어떻게든 이 모난 자식들을 보듬으면서 착한 장남으로서 민주주의의 상태를 복원해보려 한다면, 보드리야르의 이 미국 기행은 늘 같은 표정으로 조용히 살아가는 둘째 특유의 차갑고 무심한 정서가 다분히 느껴진다. 시종일관 차갑고 건조하다. 그러나 둘 다 '지금 이 상태의 사회는 아니다'라는 공통의 정신은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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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 '사회적인 것le social'이란 이론적 전장이 우리에게 끼치는 이로움이란 무엇인가? 새삼 고전 사회이론을 다시 들추어보게 되었습니다,란 학자들의 진부한 고백을 넘어 이 전장에서 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주입되는 매혹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사회적인 것에 대한 논의를 담은 관련 논문을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2. 사회적인 것을 오늘날 사회의 종언이란 조금은 섣부른 비평의 감각으로 환원하는 자들이 외치는 평어로 소비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것을 둘러싼 학술적 쟁투는 계속 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쟁투의 형태는 사회적인 것을 선험적인 것-경험적인 것-실천적인 것으로 재구성해보는 논리 게임의 도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며, 보다 적극적인 사회비평의 기능을 탑재한 채, 사회적인 것에서 경제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재정리하고 공적/사적 영역의 공간에 속한 개인의 '정치적 실천의 목표'를 끌어내는 기획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3. 후자의 측면에서 먼저 우리는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과 사르트르의 '사회적 집합들'이 갖는 묘한 유사성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두 인물 다 정치적 실존주의를 견지한 상황에서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이 갖는 가능성에 대해 탐문해보았다.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에 대한 개념을 정리한 김홍중의 견해에 따르자면,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에서 연상되는 행위신학의 귀결은 메시아로서의 '나'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란 이 사회의 부조리함을 해체할 무한한 가능성의 주체로 상정되지 않는다. "아렌트의

메시아는 특정 초인이나 계급이나 젠더나 사회적 집합체가 아니다." 아렌트는 이 희미한 주체의 상정 속에서 기적을 바란다. 아렌트에겐 이 기적이 이뤄지기 위해선 기적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나'가 아닌, 단지 태어났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행위능력만을 가진 '나'의 불완전성을 믿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나는 아렌트가 강조하는 '말들의 사회'에서 참여하는 공적 주체로 나아간다. 


4. 아렌트가 고안한 메시아로서의 나는 사르트르가 사회적 집합들의 세 요소를 설명할 때 나타나는 '조절적 제3자'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사르트르의 논의가 좀 더 사회학적인 향취가 나는데, 그의 설명에 따르면 조절적 제3자란 "우두머리도 아니고 지도자도 아니다. 그것은 자발적인 지시와 지침을 통해서 타인들을 위해 누구라도 될 수 있는 각자다." 


5. 사실 사르트르에게 조절적 제3자란 개념은 사회의 변혁을 위해 필요한 대중의 가능성을 고취시키기 위한 기획어일지 모른다. 알랭 바디우가 『사유의 윤리』에서 잘 정리해놓았듯이 기본적으로 사르트르의 회의주의가 깔려 있는 '사회적 집합들'이란 개념에는 인간의 수동성/능동성에 대한 사르트르의 은밀한 집착이 담겨 있다. 그 집착은 결국 인간은 어떻게든 수동성으로 돌아가고야 만다는 것. 사회성의 평균적인 형태는 분리라는 것이다. 바디우는 사르트르의 이 집착이 사회적 집합들이라는 개념에 관한 매력적인 기술을 뒷받침하면서도 사르트르가 갖는 대중을 향한 일관된 원칙 "대중이 역사를 만든다'에 대한 과신을 낳았다고 보는 듯하다. 사르트르의 이러한 회의주의는 대중에게 할 수 있다를 더 주입시키려는 계몽적 기획으로 태어났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6. 바디우의 깔끔한 정리를 참고해 짧게 재정리해보면, 사르트르는 집합적인 수동성 100의 형태를 계열이라 보았고, 이 계열의 수동성을 깰 집합 형태가 '융합'이라 보았다. 그리고 조직은 정치가 가장 잘 나타나는 곳으로서 여기서 조직이란 융합이란 집합형태가 제도로 구축되는 형태다. 사르트르는 조직을 이끌어가는 데 맹세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조직이란 집합 형태에 있는 개인은 맹세를 통해 배신이란 감정을 체화화게 되고 이러한 배신을 극복하는 것은 맹세 아래 만들어진 형제애다. 그러나 이러한 형제애는 늘 공포와 동반된다. 이 지점에서 조직에 깃든 제도는 능동성이 발휘되었던 융합 상태에 있던 개인을 다시 계열 상태로 돌려보내는 부정적인 역할을 한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제도의 위치에 국가가 있다고 주장한다. 


7. 사르트르의 사회적 집합들에 대한 비유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에서 비롯된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버스를 기다린다'는 동일한 이유 속에서 줄을 서서 기다린다. 그러나 이러한 줄을 선다는 행위가 바로 이 줄 서기에 대한 부당함을 외치는 것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대게 무관심 속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나와 너일 뿐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자연스레 체화한 인간일 뿐이다. 사르트르는 이를 '수동적인 종합' '무력함의 통일성'이라 보고 계열이란 집합 형태로 명명했다. 허나 융합 형태에 오면 사르트르는 "다 같이 항의하러 갑시다"라는 인간의 가능성을 본다. 바로 이 인간의 존재가 '조절적 제3자'이며. 이 존재는 '여느 인간'이다. 이 여느 인간인 조절적 제3자의 말 걸기를 통해 상호성이 구축되고 계열이란 집합 형태가 갖고 있는 수동성, 무기력은 녹아내린다. 


8. 근데 바디우의 문제제기가 재미있다. 상식적이라 더 재미있다. 

'아니, 사르트르. 당신 인간을 그렇게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존재로 본다며? 근데 어떻게 인간이 무슨 계기로 그렇게 서로를 인식하며 뭔가를 바꿔보려는 능동적인 통일성의 존재가 된단 말이야?' 사르트르는 앙드레 말로의 표현을 빌려와 이 극적인 변화의 계기를 종말론이라고 부르는데, 사르트르에게 종말론적 순간은 곧 인간의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분리된 상태를 극복할 사건인 듯하다. 사르트르의 용어로 설명하자면 종말론적 순간은 곧 계열이 용해된 융합의 순간이다. (이 부분부터 바디우는 조금 미심쩍어하는 것 같다)


9. 바디우가 파고드는 사르트르의 '사회적 집합들'이 갖는 허점은 계열이 용해된 융합 단계로 접어드는 대중의 상태가 늘 '반란'이라고 하는 계기를 통해서만 이뤄진다는 사르트르의 경직된 도식이었다. 그리고 이 도식의 문제는 대중을 능동성/수동성의 차원으로 정리하려는 사르트르의 감정적 개입이었다. 바디우는 사르트르의 지나친 차가움이 못마땅하다는 듯, 인민의 능동성이 반드시 수동성으로 회귀하는가란 의문을 표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사르트르는 인간이란 결국 수동적이고 분리된 상태로 돌아가고 만다는 회의주의적 시나리오에 심취해 있었다.


10. 허나 이러한 허점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의 사회적 집합들이란 개념은 아렌트와 더불어 '사회적인 것'의 실천성을 두텁게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것의 논의에 유익한 나름의 중요한 도해라고 여겨진다.사회 속 개인을 무기력, 수동성/능동성이란 정서적 차원에서 보려고 한 사르트르의 사회적 집합들은 감정사회학적 해석의 중요한 영역으로도 고찰해볼 수 있을 듯하다(합리성-합당성-합정성 모델에 기초하여, 우리는 개인의 수동성-능동성에 선/악의 가치를 덧씌우지 않은 채 좀 더 입체적 해석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인가).

김홍중의 사회적인 것에 대한 도해를 참조하자면, 사회적인 것은 베버처럼 인간의 사회적 행위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짐멜처럼 인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뒤르켐처럼 행위 규칙과 도덕적 규범이란 요소를 통해, 루만처럼 시스템을 통해 다양한 논의로 전개되어왔다. 


사르트르가 제시한 사회적 집합들의 계열-융합-조직의 단계를 앞선 '사회적인 것'의 네 요인과 결합해 해석해본다면, 이 작업은 사회적인 것의 개념적 두터움을 도모하는 데 나름의 유익함이 있으리라 본다. 이러한 유익함이 사회적인 것을 둘러싼 쟁투에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매혹일 수 있다. 물론 이 매혹은 우리가 서 있는 세상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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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중, 「사회로 변신한 신과 행위자의 가면을 쓴 메시아 전투: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의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사회학》제47집 5호, 2013, p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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