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게도 여기에서의 관찰자는 더이상 실증주의 과학의 초연한 입장이 아니다. 또한 반드시 완전한 참여자도 아닌 것이다.그는 상응관계에 있다고 하자. 그는 분석하려고 하는 어떤 가치들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아마도 그것은 자기 반성에 부분적으로 바탕을 두고 있는 일종의 "심층 사회학"과 관계가 된다. 여기에 관해 어떤 확증을 갖고 있진 못해도 우리는 사회과학에서 이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공범자'가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은 이른바 '낭만적 사회학'에 관여하는 것이다. 사회의 이곳 저곳을 탐색하면서 그들은 많든 적든 그들 스스로 이미 지니고 있는 어떤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에 대해 그의 저서 중 가장 핵심적이라 할 수 있는 장에서 페라로티는 '상호작용으로서의 연대기'를 제시하고 있다. 개인연대기 그 자체가 경험임에 틀림없다는 것은 연대기가 '체험'을 고려하게끔 상정되기 때문이다. 

                                                                     - 미셸 마페졸리(1989), 일상생활의 사회학 : 인식론적 요소들 중에서 - 

한때 '일상생활의 사회학'이란 테마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일상생활연구회라는 것도 덩달아 국내에 생겨났던 기억이 있다) 이 테마의 두 '본좌'를 꼽으라면, 앙리 르페브르와 미셸 마페졸리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르페브르가 현대의 기호와 언어를 통해 현대성을 규정하는 이미지들의 시선에 대한 해부를 놓치지 않았다면, 마페졸리는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일상생활의 사회학을 위한 사유의 방법과 틀을 제조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고 알고 있다. 사실 공부하는 사람에게 두 본좌의 유명세를 비교하는 것은 흔한 '가십'일 수 있으나, 좀 더 대중적으로 알려진 르페브르보다, 나는 마페졸리의 사고에 더 관심이 있었다. 아마도 이것은 내가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까, 연구라는 것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원딩' 초창기 시절, 그 시간에서 나온 고민의 어떤 형태를 마페졸리가 설명하는 구절들로 치유를 받았다고 할까? 그런 것에서 오는 감사함과 소중함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어찌 보면 내가 '문화연구'라는 학문 사회 내 하나의 영역으로 진입하면서, 가장 신기하게 느꼈던 부분이 "내가 살고 있는 이 삶 자체를 연구 주제로 삼을 수 있다니"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른바 '문화'라는 개념 아래 그 문화를 다룬 연구가 오늘날처럼 왕성하게 진행되고 있던 시간은 사실 그리 길다고 볼 수는 없다. (문화연구적 수업의 특징일지 모르지만) 대학원에 들어온 사람들이 수업 시간에 자신의 하루를 나누고, 그 하루 안에 특징지워진 삶의 순간들을 공유한다는 것은 오늘날 너무 당연한 태도인 듯하지만, 여전히 신기하다. 자신이 잘 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특징들, 자신이 늘 타고 다니는 지하철 내 풍경들, 요즘 고민하는 가족 내 문제들 등등이 수업 시간에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그것이 하나의 연구 논문으로 작성되는 순간은, 누구에게는 "먹물로 뒤덮어진" 심층 에세이일 수도 있으나, 어쩌면 이것은 학문과 그것을 마주치는 인간이 함께 노력하여 만든 우리 삶의 또 다른 행복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수업 시간을 채우는 연구 동료들의 수다 안에서 나는 여전히 이론이 갖고 있는 중심이 그리웠고, 그 중심 안에서 이론이 나에게 던져주는 '소유하고 싶은 무거움'이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었다. 사실 한창 공부하고, 수업을 열심히 듣던 시간에는 몰랐다가, 졸업 논문 관계로 약 1년을 학교 밖에서 지내면서,  밀폐된 내 방에서 연출되는 나와 나의 대화, 거기서 다시 내가 끄집어냈던 책이 <일상생활의 사회학>이었고, 그 중에서도 마페졸리의 부분을 반복적으로 읽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쉽게 쓰면서, 그 의미를 제대로 몰랐던 게 '사회성'이란 것이었다. 마페졸리는 사회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일상생활이 도처에 있기 때문에 새삼 그것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의 비판에 대해 나는 일상생활의 사회학이 새로운 붆석형태라기보다 사물들에 대한 하나의 독특한 조망이라는 사실을 길게 설명한 적이 있다.(중략)그렇다고 이러한 관계들이 결코 존재한 일이 없다거나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장님이 아니고서는 그들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그러나 이들 사회관계가 어떤 에토스, 그 속에서 현대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는 어떤 '에토스'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다. 이것은 내가 사회성이라 부르고자 제안한 것으로서, 사람들이 사회관계에서 최소한의 중요성을 가진 잔여요인으로 할 수 없이 인정하는, 단순한 사교성과는 매우 다른 어떤 것이다. 사회성은 유기적 연대,상징적 차원(커뮤니케이션)','비-논리적인 것',그리고 현재에의 관심을 포함한다.(중략) 우리에게 사회성이라는 주제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회체계가 영속적인 상호작용의 산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자연환경의 기반 내에서, 사회적 환경의 다양한 요소들 간에 항시 일어나는 역전성의 산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일상생활의 사회학'에서 강조되는 것은 현상이며, 그리고 그 현상에 개입되는 지식이다. 지식은 단순히 사회를 바라보는 개입의 도구가 아니라, 일상생활이라고 하는 우리가 흔히 '진부함'으로 치부하는 것들을 거리를 두고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연구의 방식이자 관점이 된다. (최근에 발간된 피터 버거의 책 <의심에 대한 옹호>에서 피터 버거 역시 일상생활의 사회학을 주창하던 이였고, 그는 이 사회를 구성하는 상식과 지식의 역할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마페졸리는 일상생활의 사회학에 접근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상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사람들과의 술자리 등에서 주고 받는 통속적인 지혜 그 자체가 사회를 지탱하는 하나의 감각이라고 주장한다.(그는 이 감각을 '사회적 전신감각'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사회성이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단순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교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사회 안에서 연결짓게 하는 일련의 방식을 의미한다. 마페졸리에게 그런 면에서 '사회성'이란 일상생활의 사회학을 위한 '태도'이기도 했다. 그래서 마페졸리는 알프레드 슈츠의 현상학적 사회학을 비롯해, 고프만이 펼쳐 놓았던 '연극무대로서의 삶과 의례'를 이야기하면서, 우리의 삶을 연구한다는 행복과 열정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물론 내 해석이지만) 마페졸리는 사람이 사회에서 살아나가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정체성, 흔히 '역할 놀이'라고 하는 부분들을 비난의 차원이 아니라, 이해의 차원으로 접근하면서, 사람들의 '생활의 역사'를 쓰는 것은 이 다양한 정체성으로 구성된 아직 밝혀지지 않은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 같다.  

 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서 나오는 지혜, 그리고 매일 부딪히는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사람들의 잡담을 꾸준히 지켜보며, 거기서 사회의 묘미를 만끽하는 사람에게 솔깃할 듯한'제3의 장소'라는 개념은  이 개념을 주창한 사회학자 레이 올덴부르그의 재미있는 학술적 에세이를 지탱하는 힘이다. 집과 일터를 벗어나,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 술집, 카페, 식당에서 사람들은 오늘도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아는 사람이 아는 사람끼리 만날 수 있고, 전혀 모른 사람과의 영화적인 만남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제3의 장소'라고 불리는 이러한 공간의 소비를 통해 넓어진 사회적 관계를 체험한다. '제3의 장소'를 통해 사람들은 '이웃'의 발견을 경험하고, 그러한 경험이 주는 흥미가 쌓이면서, '제3의 장소'에 모인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즐기며 발설한다. 이 공간은 오히려 그 '누군가가' 많기 때문에 가능한 '나만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제3의 장소'를 통해 마페졸리가 정의한 '사회성'을 체험하고 또 소비하면서, 그 공간에서 가능한 사회적 의례를 학습한다. 그리고 그 의례가 설정한 사회적 역할 놀이를 즐긴다. 여기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들은 매일 정해진 것일수도 있고, 때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의 다발일 수도 있다. 너무나 당연한 하루와 너무나 예상치 못한 하루. 그것이 사회니까. 오히려 이러한 진부한 설명 자체의 회피를 피할 수 없다는 것에서 나는 사회라는 것의 흥미를 느낀다.  

'진부해서 안된다'라는 강박에서 늘 헤메이던 시절, "그럼 진부함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대로  하지도 못한 나에게 마페졸리가 했던 조언은 "일단 새끼야, 진부함하고 부딪혀 봐"라고 지금은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진부함은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 연구의 대상이 됨으로써 다시 창조적 풍경으로 탈바꿈된다는 것. 그래서 나를 '일상적인 사람'으로 불러주는 친구들이  고맙다.



 
 
2010-09-13 1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5 2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금은 분열된 이야기, 하지만 찬찬히 보면 연결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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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장 3~4절) 

일본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종교학자인 나카자와 신이치의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 중 하나인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이 책에는 위에 언급한 성경 구절과 연관된 소설 <어린 사환의 신(1929), 시가 나오야 작>이 논의의 중요한 길로 제시된다. 신이치는 모스의 증여론을 설명하기 위해 이 소설의 내용을 살펴봤는데, 나는 신이치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 이야기는 아는 사람은 다 알만한 이야기다. 한 어린 사환이 초밥집에서 초밥을 먹고 싶어하는데, 자신에겐 그 초밥을 먹을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 그 모습을 본 A는 사환의 사정을 알고 돕고 싶어한다. 그런데, A는 이 사환에게 자신이 돕겠다는 의지를 보이기 싫어한다. 어떤 댓가를 바라지 않겠다는 뜻, 자신이 돕는 사람인지 몰라야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시간이 지난 후, 사환 몰래 그가 배불리 먹을 초밥 값을 초밥집 주인에게 주고, 뛰쳐나온다. 소년은 생각한다. 이런 선물을 준 그는 과연 누구일까? (심지어 사환은 그를 신의 존재로 생각한다. 여기서 더 빠지면 신이치가 마련해놓은 사유의 길로 가게 된다. 여기서 잠시 중단)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A가 느끼는 괴로움이다.  길지만 소설의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A는 묘하게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은 얼마 전에 소년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동정을 했다. 그래서 가능하면 이런 식으로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우연히 기회가 주어져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소년도 만족했을 터이고, 그러니 나 자신도 만족해도 좋을 것이다. 남을 기쁘게 해준다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나는 당연히 어떤 기쁨을 느낄 만한 자격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왜 이렇게 묘하게 쓸쓸한 느낌이 드는 걸까? 이런 느낌은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마치 남몰래 나쁜 짓을 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어쩌면 나 자신이 좋은 일을 했다는 우쭐한 마음을 갖고 있어서, 본래의 진정한 마음이 그런 의식을 비판하고 배반하고 비웃기 때문에 이런 쓸쓸한 느낌이 드는 건 아닐까? 자신이 한 일을 좀더 가볍게 그리고 마음 편하게 생각하면, 사실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구속을 받고 있다. 하지만 부끄러운 일을 한 것이 아닌 건 분명하다. 적어도 불쾌한 느낌을 갖고 있지는 않아도 좋을 듯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23쪽) 

 인터넷에 이런 고민을 고백하는 한 유저의 글이  올라왔다고 치자. 이 글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아마 "님 좀 짱^^!"이란 덧글을 달며, 그의 선행을 응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경우도 있다. 이 글이 어느새 그 날의 베스트 게시물로 선정되고,  어떤 사람이 그 게시물을 뒤늦게 읽어본다."아니, 뭐 도와주면 도와준거지. 이런 것도 엄연히 자랑 아니야. 쳇". 물론 예상 가능한 반응이다. 사실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본주의와 착함을 덧붙인 지금 이 시대를 비판하는' 자선파티의 정치경제학'이다.

2   

 

 

 

 

 

 

 

 

착한 자본주의는 가능한가? 요즘 주위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자주 들려온다. 읽고 있는 여러 저널에도, 또 알라딘을 비롯해 주요 서점의 인문,사회과학 분야를 채우고 있는 몇몇 책들의 테마도, 이 주제를 놓치지 않고 있다. 이 이야기는 얼마 전 내가 썼던 <윤리적 소비와 인간미를 판매하기>(http://blog.aladin.co.kr/717962125/3950531)와 연결될 수 있다. 윤리적 소비, 생태 자본주의, 문화적 자본주의, 자본주의화된 사회주의. 지젝부터 스퐁빌까지. 그냥 평범한 삶을 사는 나와 같은 사람들은 헷갈린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던 사람들은 심심한 참에 잘 되었다고 달려들거나, 아니면 정말 진지하게 이 논의에 참여하는 것 같다.  유명한 영화 감독의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자들이 시대가 지나면서 점점 착해져서 당황스럽다고. 며칠 전  지인이 사는 어느 신도시의 거리를 같이 걷다가,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이사온지 얼마 안 되었지만. 이 동네 뭔가 있어. 사람들이 다 있어 보이는데, 뭔가 다들 선하고 여유로워 보여" <어린 사환의 신>에서 A는 어린 사환을 돕는 것까지 모자라, 아예 그 도움 자체로 괴로워하고 있다. 누가 이 사람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누구는 돌을 던질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지금 그것을 실행한다면 수많은 무리에 둘러싸여  돌을 맞을 확률이 크다. 그래서 일단 고개를 숙이고, 가면을 벗길 준비를 한다.  

 

종영된 KBS 드라마 중 <부자의 탄생>이란 작품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기대하던 드라마였다. 그 이유는, 이 드라마가 부자가 되는 방법을 현실적으로 그려보겠다고 당찬 포부를 밝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웬 걸? 이 드라마는 결국 부자가 되고 싶은 한 가난한 사나이가 결국 부자였던 아버지를 발견하게 된다는 스토리다. 결국 부자의 아들이었던 자는, 가난한 자의 삶에 잠시 내려온 것 뿐. 여기서 드라마는 부자가 되는 방법 대신 혈연으로 모든 것을 덮는다. 남는 건 이시영이 보여주는 부자의 삶에 대한 희화화. 결국 서민들이 부자의 삶에 깊게 다가가는 길이란 없다. 이 드라마는 애초의 목표를 시원하게 배신하면서, 그저 부자를 바라보라고 한다. 아니면 정말 부자는 우리 시대의 '로또'인 것이다. (당신이 이 로또를 맞기 위해 쇼핑몰을 차린다고 해도, 이미 늦었다. 연애 프로그램에 나오는 그 잘나가는 쇼핑몰 CEO 대신, 홈페이지 만들고, 거래처 조금 잡다가 종 치는 CEO들이 수두룩하니까)  결국, 우리 시대의 서민이 던지는 최고의 항의는 <서울의 달>과 같은 서민들의 드라마를 제발 만들어달라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부자들을 구경하는 시대의 비극이다. 그리고 정녕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멀어져 가게끔 만드는 미디어의 책략. 분석 대신 분노와 투영만이 깃든다.

 

 

 

 

 

 

 

 

 

자본주의는 정말 사회적 나눔으로 인해 발산되는 소모의 쾌락, 소모됨으로써 솟구치는 오르가스무스의 길을 자신의 생애에서 최고의 목표로 삼았는가? (그래도 정액은 끊임없이 공급될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모되어도 끊임없이 나오는 정액. 그것이 우리를 둘러싼 자본의 현실 아니겠는가) 조르주 바타이유를  꺼내오자면, 그리고 오늘의 이야기를 위해 조금 비튼 상태로 함부로 / 거칠게 원용하자면, 이 착한 부자들의 원천은 '파괴'일 것이다. 이 파괴의 의미를 돈으로 연결짓자면, '써도 또 써도, 그 '씀'으로 하루 하루를 버텨나가는 자들. '자선파티의 정치경제학'은 여기서 '기부의 이면'을 보라고 충고한다. 가령 구조조정 뒤에 기부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의 문제. 구조조정을 한 B로 인해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B의 기부금으로 인생을 미약하게 연명하거나, 아니면 그 기부금이 전혀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이 B를 어떻게 봐야 할까. (심지어 그가 한때는 사회주의자였다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거기서 어떤 황당함 이상의 반응들을 세심하게 펼쳐볼 수 있을까) 

한 쪽에서는 너무 심한 것 아니요?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반응이, 다른 한 쪽에서는, 여러분 지금 그거 달다고 덥썩 물으면 안 됩니다. 언젠가 독이 든 과일이 될 거에요,라고 경고한다. 여기서 우리에게 허락된 '가지 않은 길'은 무엇일까.  혹자는 강경하게,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무안하게 만드는 어투로) 자본주의의 착함 운운한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 아니냐라고 주장한다. 결국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어도, 그 기술의 유해와 이로움은 사람의 사회적 사용에 달려있는 것처럼, 자본주의 자체의 사회적 활용을 우리가 잘 해야하는 문제로 덮을 수 있는 것일까?    

 

 5

 그렇다고 우리가 가면을 벗기기 귀찮아서 / 힘들어서 랩으로 이 자본주의 녀석의 얼굴을 꽁꽁 싸매어, 자본주의 자체를 질식시킬 수 있다는 희망은 섣부르고 뜬금없어 보인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보다 인류학적인 태도. 손과 발에 달린 눈으로 사람들의 모습을 포착하고, 매만지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믿는 쪽이다. 그들이 확실한 대답을 줄 수는 없겠지만, 이 조각들이 모였을 때, 우연의 힘은 냉소로 시작했던 의도를 넘어설 것이다.  (그리고 차분함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공부) 하지만. 이런 내 소심한 결론 뒤에 숨은 하나의 확신. 자본주의가 착해서 그렇다, 나빠서 그렇다에서 우리가 시원한 아이스크림같은 대답을 먹고 싶어한다면, 우리는 가장 맛있는 부위가 이미 땅에 떨어져 있음을 알고 후회한다는 것이리라.  

다만, 앞에서 인용했던 성경 구절이 좌파에겐 상당히 신랄한 꾸짖음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고민을 잠시 내려놓고자 한다. 여기엔 물론 나만의 비유와 비약이 들어간다. 양해를. 이 시대의 좌파(왼손)들은 정말 우파(오른손) 가 하고 있는 일을 모른다기 보다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너무 잘 알아서 문제인 시대를 살고 있다. 여기서, '잘 안다는' 문제는 사회를 바라보는 감정과 시선의 차원, 앎의 누적에서 오는 교만함과 그 교만함을 어리광부리는 태도로 바꾼 냉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을 때, "오른손이 왼손이 보도록 자신을 과시하고 있다"라는 차원의 문제, 그래서 오른손은 결국 속물이었어라고 못박아 버리게 만드는 유혹. 이때 좌파들이 왼손과 오른손의 일 모두를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신'의 경지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것은 아닌가,하고 우려를 표하게 된다. 정작, 자신은 사람으로서 왼손과 오른손의 일로 분열하고 있는데, 신의 눈으로 자신을 보려는 사람들. 그 전지전능함의 최후는 무엇일까.  그들이 착한 거북이 행세를 하면서, 스스로의 겸양된 시안으로 지면들, 페이지들, 쪽들을 채울 때. 나는 그들이 "사실은 나 저기 가 있는 토끼인데.."라고 위안을 삼은 채 거북이 행세를 하는 것 같아 두렵다.  토끼가 거북이와 개미의 기믹까지 다 먹어버린 시대로 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먼 길을 돌아왔지만, 착한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는 지금 이 순간 지극히 '문제적'이다. 

A를 신으로 생각하려는 어린 사환에게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그 이야기를 정작 들려주려고 하는 나는, 이미 이런 이야기 다 끝난 것 아니요,라는 오판으로 "사실은 (이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고 해석을 할 줄 아는) 내가 신이야"라고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사이, 인간은 운다. 오른손으로는 밥을 먹고, 왼손으로는 자위를 하는 게 이제 이 삶의 낙인가,라는 찬 바람이 자신을 에워싸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가 (그리고 이 사회가) 확성기를 대고 설파하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삶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냉소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복잡한 문제에서 오는 쾌락을 맛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요즘 그래서 '착한 자본주의는 가능한가?'라는 문제에 첫 걸음을 뗀 나에게 가장 필요한 치유는, 냉소라는 지옥에서 탈출하기다.  '착한 자본주의는 가능한가'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 때마침 필요했던, 그 심심함을 달래줄 고마운 적을 만들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정말 우리에게 닥칠 불안한 미래인 것일까?  우리는 이 논의에서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사랑의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를 사랑해달라고 애원할 때. 우리는 사람을 사랑할 것을 택하겠다고. 다시,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다. 굿바이! 미스터 냉소주의.  

먼 길을 돌아간 이야기, 결국 나에게로 돌아갔던 이야기.



 
 
바라 2010-09-01 03:19   댓글달기 | URL
냉소하니까 지젝도 생각나고 그러네요. 자선이나 기부, 착한 자본주의 관련해서는 제가 얼마 전에 읽은 재밌는 글이 떠오릅니다. 이미 보셨을지도 모르겠지만.. http://socialandmaterial.net/?p=104

얼그레이효과 2010-09-01 03:28   URL
바라님 늦은 밤 반갑습니다.^^ 논문이 잘 정리가 안 되서, 헛글을 써 봤습니다. 크. 링크 고맙습니다. 읽어보고 고민해보도록 하지요.

2010-09-02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2 0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음. 원래 공부를 '독고다이'로 해온 편인데, 이번 학기에는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또 공부의 열의가 있는 사람들끼리 '감정사회학'이라는 테마로 모임을 가져볼까 생각 중이다. 사실 김홍중 선생의 책 <마음의 사회학>을 읽으면서, 마음을 어떻게 사회학적으로 이론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나는 이것이 매체 연구에서의 어떤 전환을 야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물론 내 소견이다)  

가령, 미디어 연구에서는 (아직까지도!) 어떤 새로운 매체가 나오면, 그 매체를 활용한 사람들이 이런 효과를 얻었다더라,수준에 머무르거나(대표적으로 이런 방법론을 이용과 충족 연구라고 한다.국내에서는 1980년대 인기를 얻었고, 지금도 언론학 하시는 분들은 이 방법 좋아라한다) 문화연구의 시선 처리를 배운 게 그나마 수용자의 능동적 해독방식 정도이다( 1990년대부터 미디어 연구에 회의를 느낀 사람들의 절충안으로서, 그나마 더 나아간 것 같지만, 사실 포장만 번지르르할 뿐.아직 갈 길이 먼 것 같다. )  

난 차라리 일정한 매체의 수용 과정에서 나오는 사랑, 기쁨, 미움, 속물, 진정성 등등 그런 다양한 감정들 하나, 하나를 사회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가령 내 졸업논문 내용 중에 들어가 있는 비디오 시대의 영화광들을 둘러싼 담론에는 속물과 진정성의 대립이 포진되어 있다. (그랬을때 나는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과연 영화를 속물적으로 본다는 것은 무얼 의미할까? - 이 과정은 내 만두 속에) 

 

 

 

 

  

 

 

 

 

감정의 상품화라는 테마 또한 염두에 두고 있다(이 테마에 대해 벌써 식상해져가는 이 학문 소비자들이 두렵다!) 나는 통치성론과 좀 다른 맥락에서 크리스토퍼 래쉬가 '치료국가'라고 불렀던 개념을 더 깊게 팔 생각이다 (졸업 논문을 쓰는 과정에, 나는 래쉬의 치료국가론을 통해,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부 시절. 한국의 '문화'와 도덕주의 그리고 정신의 관계가 어떻게 가정에 개입하였는가,의 문제. 특히 문화 소비와 관련하여, 국가와 여성의 도덕주의적 접점이 만들어지는 데  개입한, 지식을 활용하는 연구소들의 담론, 그 문제점을 짚는 작업을 했다)

 

 

 

 

 

 

 

 

 

 

  

 

 

  크리스토퍼 래쉬를 공부하다 보면, 필립 리예프를 알아야 하고, 그러다보면 다시 앤서니 기든스와 지그문트 바우만으로 돌아온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외부적'인 시선에서 문화를 진공상태로 만들지 않기다. 에바 일루즈가 말한 것 처럼, 문화 내부의 논리를 어떻게 복합적으로 바라볼 것인가의 차원. 그 차원에서 보다 우리를 복잡미묘하게 만드는 감정과 지식, 감정과 경제, 감정과 문화. 이것을 보다 '사회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눈을 길러보고 싶다. 무엇보다 나는 진흙탕 속에 빠져있는 미디어/문화연구의 획기적인 기획을 꿈꾸면서, 내 무기를 단련시켜보고자 한다. 이게 내 이번 학기 목표가 아닐까 한다(졸업을 앞두고 이 무슨 짓인감 ㅋ) 



 
 
2010-08-30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30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31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31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요즘 진화심리학 관련 책들을 조금씩 보기 시작했는데, 내가 갖고 있던 과학의 편견들을 깰 수 있어서 좋았다. 무엇보다 내가 화해하고 싶지 않았던 부분들, 특히 문화연구를 하면 으레 갖게 되는 기능주의 사회학과 심리학의 조합에서 오는 거부감들을 어떤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정리(비판)해볼 것인가의 문제. 그 고민들을 다음 학기에 더 다듬어 따로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문화연구에서 너무나 소외당하고 있는 게 바로 '과학'이다. 과학은 정작 우리 사회 안에서 할 이야기가 너무나 많은데도, 많은 문화연구자들이 '인간' 적인 것 대 '과학'적인 것이란 이상한 구도를 만들어, '인권의 정치'를 오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공학에 대한 관심이 조금 있긴 한데, 그것도 '생명'의 윤리라는 애초에 정해진 답을 정해놓고 쌓아둔 논리적 탑들만 보이는 것 같아 아쉽다. 더 깊은 시선이 나오기 위해선, '공학' 그 자체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3  

테크놀로지에 대한 연구는 많지만, 아직까지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이 오랫동안 왕좌의 자리에 있는 듯하다. (그래서 올해 초부터, 조금씩 이것을 깨보려고 브루노 라투르의 책도 기웃거리고 있다) 문화연구 자체가 '사람의 행위'에 대해 쏠려 있다보니, 기술 자체가 갖고 있는 '기능'에 대한 더 깊은 탐색과 어우러진 행위의 연관성은 제대로 탐색되고 있지 못하다. 문화연구 안에 너무 쏠려있는 이상한 '휴머니즘' 같은 게 있는데, 질린다.  



 
 
 

 

 

 

 

 

 

 

 

 

 1

친구가 윤리적 소비에 대한 연구를 하는 중이다. 덕분에 화장품 가게나 커피숍 등에 걸린 윤리적 소비에 관련된 카피 / 이미지들을 유심히 보는 버릇이 생겼다. 윤리적 소비에 관한 서적이 국내에도 꽤 출간되었다. 대부분 윤리적 소비란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춘 책들이기 때문에, 개념 '설명', 관련된 현상 설명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그러나 천규석 씨처럼 윤리적 소비를 비판적으로 보는 서적 또한 있다.  

외국의 경우 예전부터 윤리적 소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회학자, 경제학자, 문화연구자 들의 견해들이 흥미롭게 펼쳐지고 있다. 특히 푸코의 '통치성'이론을 바탕으로, 윤리적 소비가 '자유의지'를 가장한 새로운 통치의 형식으로 시민들의 삶에 다가가고 있다는 견해가 제법 눈에 띈다. (그러나, 역시 '통치성'론의 현대적 개입은, 사람들로부터 "뭘 이런 것까지 까고 있소?"라는 멘트, "너무 과장된 음모론의 일환이 아니오?"라는 의심을 받기 좋은 것이 사실이다) 비단 통치성론의 한계라고만 한정지을 수 없겠지만, 통치성론을 적용함으로써 생기는 부작용은 바로 기업을 '선과 악'의 틀에 종속시키는 것이다(국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악에 대한 부정적이고 선험적인 규정으로 인해 윤리는 상황들의 개별성을 사고할 수 없다"는 알랭 바디우의 지적을 떠올려본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고는 '윤리적 소비' 안에서 윤리를 이해한다는 것이 보다 입체적이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고로 윤리적 소비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이해해야 할 윤리는 소비 행위를 통해 지향하는 '선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로만 이해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이 문제는 어렵다. 좋은 일 하고 있는 것 아니오?라고 하는 질문에 화려한 비판으로 대응한다고 하더라도, 윤리적 소비가 그렇게 친밀하게 다가오지 않은 듯한 현실에서, 비판은 이른 음모론이 될 수 있는 한계 또한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국내의 논의를 보면, 윤리적 소비가 개인의 일상에 그리 친밀하게 뿌리내리지 않은 것 같은 상황에서, 윤리적 소비 확산론과 비판론이 거의 동시에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통 확산론의 점진적 증대가 있은 후, 그것에 뒤따르는 비판론과 회의론이 시차를 두고 나오기 마련인데, 흥미롭게도 윤리적 소비에 대한 비판론 또한 동시에 쑥쑥 커 가고 있다. 이건 문화연구 같은 문화이론과 정치적 의지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학문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소위 학습효과 같은 것도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대표적으로 이동연 선생의 견해를 살펴보면 그런 느낌을 받는다. 윤리적 소비가 하나의 독창적인 문화 실천이라곤 그는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그의 주장을 보면 그것이 가져다 줄 영향에 대한 비판과 회의는 사뭇 소비의 긍정성과 주체성에 비판적 입장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문화연구의 한 경향과 흡사해 보인다.  즉 그런 비판론이 나오게 된 이전의 사례들에서 학습된 성과를 윤리적 소비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는 그런 사고틀이 보이는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문화연구는 소비자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냄으로써, 기업과 공명하고 있다는 의심을 주위로부터 많이 받아왔다. 그리고 그런 의심들을 떨쳐내기 위한 반성론이 국외를 시작으로 국내에도 꽤 오랫동안 논의되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소비자의 능동적 수용에 대한 회의를 드러내는 견해들이 꽤 나타나는가 싶더니, 올해 관련 논문들을 보니 다시 이런 회의적 질문들에 대한 재반박이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김수정과 같은 문화연구자는, 문화에 정치를 기입하려는 문화연구자들의 이데올로기를 깨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의도적으로 논쟁을 펼치기 위해 도발적인 논문을 썼다. 그리고 여기에 조금은 연한 응대로 이희은 같은 연구자가 '문화적 시민권'이란 개념을 통해 김수정의 논의와 유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학문 사회의 이 비겁하고 소심한 '동료 의식'은 김수정 선생의 도발을 외면하고 있다. 딱한 현실이다) 

윤리적 소비에 비판적 메스를 가하는 대표적 견해 중 하나는, 기업이 노동 과정에 대한 '진정성'을 표출함으로써 나타나는 그 영향이 과연 노동자의 현실 자체를 좋은 쪽으로 인도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다. 즉 노동 과정의 열악함, 특히 국제 정세를 볼 때, 열국의 위치에 있다고 간주되는 국가 내부의 노동 현실을 '피해자'의 입장으로만 인식한 나머지, 그런 입장의 강화가 오히려, 노동 현실의 세부적인 모순을 은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란 주장이 있다. 특히 소비 행위와 연관될 수밖에 없는 개념인 '상품화'를 떠올려보면, 이런 '진정성의 상품화'가 주는 감정 구조의 딜레마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기업이 노동 과정을 드러내고 그 과정 안에서 나타나고 있는 부정적 현실을 소비자에게 '떳떳하게'보여주겠다는 건, 예전과는 다른 문제다. 물론 여기엔 소비자들 스스로 현대 사회의 위험 요소 안에서 안전망을 확보하기 위한 실천도 가미되어 있을지도 모른다.윤리적 소비가 웰빙과도 연관되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리고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비판론이 계급에 대한 시각이다. 윤리적 소비는 정녕 노동자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문화 개념인가?라고 묻는다면, 여기에 대해서도 비판론자들은 할 말이 많다. 기업이 소비자에게 손을 건네고, 함께 노동자에게 허그를 합시다,라는 광경이 윤리적 소비의 한 축이라고 한다면, 비판론자들은 여기서 소비자의 계급을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랬을 때, 아직 윤리적 소비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자기 만족의 문화적 실천'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비판적 견해는 강화된다. 이처럼 기업이 노동 과정에 대한 성찰을 드러냄으로써 시도하는 투명성과  비판론자들의 불투명성이란 대립 관계는 견고하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기업 나쁜 놈!'하고 규정해버린다면, 앞에서 설명했듯이 우리의 단순한 윤리에 대한 이해가, 윤리적 소비의 긍정적 가능성과 열린 비판에 대한 잠재성 모두를 폐쇄시킨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3   

 

 

 

 

 

 

 

 

요즘 내가 윤리적 소비와 관련하여 고민하는 것은 '기업은 정치를 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포르셍연구소에서 발간된 <도덕적 명령>이란 책을 보면 윤리적 소비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이 책에선 '도덕 사업'을 펼치는 기업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데, 특히 '도덕욕'이란 개념을 통해, 도덕 자체가 기업의 미래 준칙이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그랬을 때, 기업에게 상품 자체를 파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상품과 함께 따라오는 도덕의 의미와 언어들이 소비자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기업은 과거 국가가 하던 도덕의 의미 부여를 스스로 하게 된다.  

제품 판매가 더 이상 유일한 종극 목적이 아니며, 기업은 동등하게 도덕과 국민의 주체이어야 한다.자신의 환경 안에서 기업은 점차 자신의 불투명성을 버리고,점점 더 국민과 책임자로서 위치하게 되고, 국가에 대한 책임을 가진다고 선언하며,사회적 사명(예를 들어 다논)(43)(과 건강을 위한 다논재단)을 이어받는다. - 43,44쪽  

과거에 우리는 국가를 통해 도덕의 의미를 부여받고, 우리의 선배들은 이러한 삶에 익숙했다. 여기서 기업은 국가의 성취를 전시하는 기능을 맡았다. 기술 국가주의를 통해 기업의 기술적 성과가 세계에 도드라지면, 그러한 성과는 국가 내 위치한 개인의 내면을 고취시키고, 이것에 맞는 건전한 생활과 '일등 시민'으로서의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선전이 국가와 언론의 합작을 통해 나타났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측면일 것이다.  국가와 기업의 관계에서, 국가의 힘이 우세하던 시절을 지나, 이제 국가는 기업에서만 통용되던 '경영'이란 표현을 정치에 기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업의 이러한 경영 개념이 국가의 정치 전술로 채택되면서, 기업은 자연스럽게 국가 내부에 종속된 기구가 아니라, 기업 스스로의 강화된 입지를 펼칠 수 있는 통로를 확장시키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윤리적 소비의 등장 이후, 이제 기업은 개인을 소비자의 범주에만 넣지 않고, '시민'에게 윤리를 부여함으로써, 국가와 사회에 위치한 개인의 내면에 더 깊이 개입하길 원한다. 기업은 특히 윤리적 소비를 통해 세계-시민으로서의 역할, 권리를 소비자에게 강조하면서, 그들에게 세계-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려보지 않겠느냐라는 정치적 조언을 한다. 시민의 역사적 형성 과정엔 물론 자본의 기여도 있었으나, 현대 사회에서, 기업이 윤리적 소비를 통해 선보이는 개인의 '시민-되기'현상은 나에게 제법 신선해 보인다. 여기엔 과거와 달리 내가 윤리적 소비를 한다고 해서 어느 국가보다 앞선 일류 국가의 시민이라는 집단적 우월의식의 문제가 아니라는 시선 또한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만 내가 윤리적 소비를 한다는 그 실천의 '개인성' 그것과 관련된 개인화된 시민의식의 발현은 그 어떤 집단적 의지에 구속되지 않은 채 개인 스스로 자족하며 윤리를 체화하려는 현대 시민의 속성과 더 깊게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통치성론을 통해 윤리적 소비를 비판하는 자들은 이 지점에서 주체의 자유 의지를 노리는 국가와 기업의 의도를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통치성론은 이런 통치 방식의 연성화가 가져다 주는 무시무시한 부정적 효과를 강조하는 데는 적절한 개념이지만, 정작 그것의 무시무시함을 수용하는 주체의 개별적 실천에 대한 고려와 그 실천을 둘러싼 갈등에는 취약한 것 같다. 그 무시무시한 통치의 부정적 효과를 서술하는 데만 신경을 쓰다보니, 수용자 또한 그 효과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 잠식되어 있다는 섣부른 가정이 숨어있다는 말이다.) 

과연 기업은 정치를 하고 있는가, 기업은 정치를 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윤리적 소비가 던지는 흥미로운 질문이다. '경영'이란 말과 찰싹 달라붙은 기업에게 정치란 말이 함께 배치됨으로써 발생하는 예견된 미래, 그것에 대해 과장된 함의를 설파할 필요는 아직 없을 듯하다. 다만, 기업이 윤리적 소비를 통해 선보인 소비자의 '시민-되기'는, 기업이 단순하게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는 일차적 이해에서 더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든다.  

윤리적 소비를 통해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하는 문구는 '착한 소비', '착한 기업', '착한 경영' 같은 것이다. 나는 궁금하다. 왜 하필 '착한'이란 수식어가 붙었을까. 기업은 정녕 과오를 깨닫고, 자신의 성찰을 몸소 보이기 위해 시민들에게 고해성사를 하려는 것일까? 비판론자들은 묻는다. 이 고해성사는 정녕 진실한 것일까? 기업이 윤리적 소비를 통해 들고 온 개념은 진실성과 투명성이다. 노동과정이란 옷의 단추를 풀고, 자신의 몸을 보여주려고 한다. 사람들은 이것에 '양심'의 문제를 가지고 온다. 혹은 만족의 문제이기도 하다. 가장 기본적으로 윤리적 소비는 내가 스스로 사고 싶은 물건에 대한 만족과 더불어 따라오는 '옵션 형태의 나눔'정도라고 간단하게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깊은 회의론자들은 말한다. 이런 옵션 형태의 나눔은 결국 중산층의 자기 만족에만 그칠 것이며, 정작 수혜자들은 없을 것이라고.  

다시 정치의 이야기로 돌아왔을 때, 윤리적 소비를 통해 우리는 기업이 국가보다 더 나은 정치의 언어를 시민들에게 부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업은 더 나아가,  소비자를 세계-시민으로 만들기 위한 정치의 언어 발명에 실제로 깊은 고민을 하고 있는가?  

이건희 회장이 일전에 "모든 국민이 정직해졌으면 좋겠다"라고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당시 '정직'이란 표현에 쏠려, 이건희를 비판했지만, 내가 보기에 더욱 더 크게 보고 비판해야 할 지점은 그가 '모든 국민'이라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썼다는 말이다. 한 기업의 총수가 한 국가 내 시민들의 도덕의식을 짚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싱거운 언사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내게 이 발언은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기업이 도덕과 윤리라는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은 윤리적 소비 등을 통한 도덕 사업을 통해, 때 아닌 '인간미'를 과시하는 듯하다. 시민 되기의 과정에서 우리가 정치를 통해 학습하는 중요한 부분 하나가 바로 인권 등으로 비롯된 인간미를 상실하지 않기일 것이다. 그들은 그리고 상품이란 형식을 통해 우리에게 인간미를 함께 판매하고 있다. 우리가 동물이 아닌 인간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해주는 실천이 '소비'라는 건 재미있는 측면인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걱정은 있다. 인권위원회 같은 기구가 생겨, 우리의 인권을 직제화된 곳을 통해 인식하고, 사회를 생각하는 인간의 최저선을 확인받아야 하는 이 마당에, 인간미를 판매하는 기업을 통해 소비라는 실천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그 메시지가 "그래도 당신은 인간이군요"하는 그 섬뜩한 과정 말이다. 기업이 윤리적 소비를 통해 들고 온 인간미, 그리고 좀 과장되게 표현해서 인권을 판매하는 상황을 뒤돌다보면, 이것은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확신시키보다는, 이 사회에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음 자체의 의지가 계속해서 나약해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현상은 아닌가의 문제가 내 안에 들어오는 듯하다.  나의 인간미를 사물을 소비함으로써 확인받아야 하는 그 상황에서  깊은 고민에 빠진다.



 
 
saint236 2010-07-23 10:19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윤리적인 소비를 지지합니다. 단순히 상품을 소비하는 피동성에서 벗어나 능동적인 상품 소비를 통하여 기업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소비자의 최소한의 권리고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동생이 매일 안암동 쪽에 있는 스타벅스에 가서 공정무역 커피 판매하냐고 물었습니다. 뭘 그러냐는 제 물음에 분명 공정 무역 커피를 본사에서는 판매하는데 지점에서는 모른다고 하면서 이래야 가져다 놓는다는 말에 피식 웃었습니다. 그런데 두 달을 그러니 다음에 가져다 놓더라고요. 분명 윤리적인 소비에는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더해도 장점이 더 크다고 할 수 있겠죠. 아직 초창기인 한국에서 단점을 내세우면서 비판하는 것은 아직 학교도 안들어간 아이들에게 성적이 떨어졌다고 혼내는 것과 같은 상황이 아닐까요?

얼그레이효과 2010-07-23 23:17   URL
윤리적 소비에 대한 비판론을 한국 사회에 적용했을 때 무리가 있긴 한 듯 해요. 님 말씀처럼, 또 제 글에서 강조했듯이 윤리적 소비라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보편화된 현상은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기업의 윤리적 소비 전략과 시민사회가 실천하는 윤리적 소비에 대한 접점, 혹은 배치, 그리고 절합 등 그 세부적인 관계 들을 더 크게 보아야 하겠지요. 제 글은 일단 기업의 전술로 제한되게 본 점은 있습니다만, 일단 제 입장은 윤리적 소비의 긍정성을 무한 찬양하고싶진 않다는 신중론으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게 더 확산되어야 한다, 혹은 제재를 받아야 한다의 차원은 또 논의를 해봐야겠지요. (뭐 어떤 정치진영의 일반화된 전술 채택 / 시민사회가 강조하려는 전술이라든지 같은 이야기가 포함된다면 말이죠)

고고씽휘모리 2010-07-23 10:58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문명이 너무 지나친 소비를 하고 있고 '소비'를 줄여가는 방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윤리적 소비품들이 산넘고 물건너 오면서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고 하는 이런저런 논란외에 제게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많은 윤리적 소비를 말하는 기업들이 여전히 '소비'를 부추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요즘 제가 결혼을 준비하고 있으면서 이런 고민이 더 커졌습니다. 가능하면 환경을 많이 훼손하지 않는 방향으로 하려고 하는데, 여기서도 여전히 고민이 되는 것은 제가 이런저런 것들을 시장에 내맡기고 소비 한다는 것이지요. 그 간편함에 불필요한 것들까지 너무 많이 사용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내가 내 몸에 좋은 것과 이웃에 좋은 것, 환경에 좋은 것이 마구 같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도 듭니다.

소중한 글 잘 읽고, 제 고민도 조금 깊어집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7-23 23:16   URL
제가 '고민'이란 표현을 쓴 것 또한, 어떤 복잡다단함이 섞여있는 듯 한 것 같습니다. 소비라는 것 자체에 너무 큰 부담감을 가질 필요는 없을 듯 하지만, 휘모리님처럼 긴장감 혹은 거리두기라는 생각을 갖고 내가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한 자각이라고 할까요, 삶에 대한 의식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을 늘 가까이하는 게 소중하지 않나 싶습니다(너무 원론적이라 죄송하네요) 한 살 한 살 먹어가면서, 이런 고민들이 하나, 둘 늘어나는 게 한편으론 삶에 대한 건강성을 잃지 않은 것 같아 좋지만, 삶을 뭐 이렇게 피곤하게 사나, 하는 자조감 같은 것도 사실 들어오는 요즘이네요. 솔직한 고민 고맙습니다.

알리샤 2010-07-23 12:58   댓글달기 | URL

얼그레이효과님,블로그같은 공간에서 공짜로 무심히 읽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글이네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7-23 23:18   URL
친구가 요즘 이 주제로 고민이 깊어, 덩달아 관련 자료를 읽다가 생각을 정리해봤는데요. 온라인이다보니 뭔가 또 제한적인 생각으로 나오는 것 같아 아쉽네요.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 좀 이런 두터운 글을 자주 올려보려고 합니다. 함께 고민 부탁드려요.

쉽싸리 2010-07-24 07:52   댓글달기 | URL
처음 뵙겠습니다.

기업쪽에서 내세우는 윤리적 소비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기업의 본질로부터 그러하다고 봅니다.
기업말고 협동조합(생협 등)에서 얘기하는 윤리적 소비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그 측면도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할 필요는 있겠지요. 예를 들어 천규석 선생님은 협동조합쪽의 윤리적 소비니,공정무역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고 계시지요. 자급자족을 하자는 데에 개인적으로 참으로 찬성합니다만 이건 맨땅에 헤딩도 이만한 게 없는 판국이라 그야말로 숨이 턱 막힐 지경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7-24 14:45   URL
쉽싸리님 반갑습니다. 아직은 언론 쪽에서 '기획성'으로 윤리적 소비에 대한 실천을 장려하던데요. 여기에 대한 검토가 좀 꼼꼼하게 되었으면 하네요. 너무 미화되어 '선을 향한 소비'같은 식으로 가다보면, 오히려 우리가 놓친 그런 것들로 점철되지 않을까 싶어요.

미지 2010-07-26 03:38   댓글달기 | URL
동네 편의점에 관한 얼그레이님 얘기를 먼저 읽었습니다만, 이 부분도 딜레마죠. 저는 생협회원이라 야채를 주문해서 먹는데요 동네 다니다 길가에 앉아 야채 몇 포기 열어놓고 파시는 할머니들 만나면 그냥 막막한 게 마음도 아프고 해서 어떨 땐 집에 있는데도 사게 되는... 그러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윤리적 소비에 대해서... 생혐의 유기농 야채를 사먹는 것과 노점상 할머니의 비유기농 또는 중국산 야채를 사먹는 것에 대해서... 결론이 쉽게 안 나더군요... 윤리적 소비 문제도 논의가 정리되긴 해얄 것 같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7-26 23:29   URL
그렇군요. 세상 일이 갈수록 입체적인 부분이 늘어나는 것 같아요. 고민도 더 세밀하게 하게 되는군요.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