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커 파머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에 나오는 '마음의 습속'과도 연관이 있지만, 사실 파머의 책을 접하고 나서 떠오른 책은 장 보드리야르의 『아메리카』였다. 주의: 이 거울 속에 비치는 사물들은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을 수 있습니다로 출발점을 끊는 보드리야르의 그 무심한 문체, 사막을 통해 현대사회의 침잠된 정치적 상태와 미국 민주주의의 우울을 풍경과 엮는 인트로는 책을 읽는 당시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가장 정치적인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파트인 「권력의 종언?」에는 '제4세계'라는 표현과 '역설적 신뢰'라는 용어가 울림을 준다. 해방과 팽창, 더 이상의 적대란 없는 시기에 외려 나타나는 미국 사회 내부의 배제는 '깨끗하고 완벽하게'란 구호 아래 더 견고해졌다. 정치적 무관심에 의해 잊힌 사람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레이건 시대가 밀어붙이는 강박적인 행복증 전파, 정말 사람들이 편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편의를 협박조로 구성하는 권력에 대해 보드리야르는 우려의 시선을 보낸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이런 권력의 망에 있는 이 사람들은 공민권을 박탈당한 채 지도에서도 잊힌 사람들로 전락해갔다. 이들은 보드리야르의 표현을 빌자면 "가난한 사람들은 나가야 한다"의 언어에 묶인 사람들이다. 보드리야르는 지워질 운명과 소멸의 통계 곡선에 있는 좀비들을 양산하는 이 사회를 안타까워하며, 그 좀비들을 '제4세계'라고 명명한다. 여기서의 제4세계란 제3세계의 추락점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현대 권력의 통치술이 낳은 비극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보드리야르는 이 챕터에서 '신뢰'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꺼낸다. 보드리야르는 미국인들이 정치의 실재에 대해선 그리 큰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합의된 신뢰의 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신뢰를 권력이 정부가 적절히 관리해주기만 한다면, 정치인들을 향해 믿음이 있는 것처럼 연기하길 좋아하는 게 미국인이라는 강도 높은 비판을 선보인다. 그러면서 그가 제시하는 신뢰에 대한 개념은 '역설적 신뢰'다. '이상하다. 저 정치인은 내가 보기에 갈수록 형편없어지는데 왜 이렇게 사람들이 물고 빨아주는거야?' 보드리야르의 역설적 신뢰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역설적 신뢰는 점점 더 실패하고 점점 더 자질이 없는 이를 위해 부여되는 지지의 감정이다. '자 이제 천년왕국의 그날이 왔소'라는 예언이 실패되어도 그 예언의 실패에 아랑곳하지 않고 휴거를 믿는 종교인들의 비유를 들어 보드리야르는 레이건 정부를 향한 미국인들의 정서를 비판한다. 역설적 신뢰가 무서운 것은 보드리야르의 표현처럼 "실패의 부인에서 나오기 때문에 조금도 약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드리야르는 미국이라는 여행을 통해 무감각의 개입을 실천한다. 출판사에서 잘 만든 부제처럼 '희망도 매력도 클라이맥스도 없는' 이 미국 문명 여행기에서 보드리야르가 경계하는 것은 '어 저곳 나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봤던 건데, 직접 보니 신기하다' 같은 확인의 자세였으며, 이 "갱년기"와도 같은 미국 사회가 주는 모호한 유토피아적 분위기였다. 

"여행은 끝났다"라는 말이 책의 말미가 아니라 거의 책의 시작 부분에 나타나는 건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파커 파머가 어떻게든 이 모난 자식들을 보듬으면서 착한 장남으로서 민주주의의 상태를 복원해보려 한다면, 보드리야르의 이 미국 기행은 늘 같은 표정으로 조용히 살아가는 둘째 특유의 차갑고 무심한 정서가 다분히 느껴진다. 시종일관 차갑고 건조하다. 그러나 둘 다 '지금 이 상태의 사회는 아니다'라는 공통의 정신은 공유하고 있다.



 
 
 

1. 오늘날 '사회적인 것le social'이란 이론적 전장이 우리에게 끼치는 이로움이란 무엇인가? 새삼 고전 사회이론을 다시 들추어보게 되었습니다,란 학자들의 진부한 고백을 넘어 이 전장에서 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주입되는 매혹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사회적인 것에 대한 논의를 담은 관련 논문을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2. 사회적인 것을 오늘날 사회의 종언이란 조금은 섣부른 비평의 감각으로 환원하는 자들이 외치는 평어로 소비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것을 둘러싼 학술적 쟁투는 계속 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쟁투의 형태는 사회적인 것을 선험적인 것-경험적인 것-실천적인 것으로 재구성해보는 논리 게임의 도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며, 보다 적극적인 사회비평의 기능을 탑재한 채, 사회적인 것에서 경제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재정리하고 공적/사적 영역의 공간에 속한 개인의 '정치적 실천의 목표'를 끌어내는 기획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3. 후자의 측면에서 먼저 우리는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과 사르트르의 '사회적 집합들'이 갖는 묘한 유사성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두 인물 다 정치적 실존주의를 견지한 상황에서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이 갖는 가능성에 대해 탐문해보았다.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에 대한 개념을 정리한 김홍중의 견해에 따르자면,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에서 연상되는 행위신학의 귀결은 메시아로서의 '나'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란 이 사회의 부조리함을 해체할 무한한 가능성의 주체로 상정되지 않는다. "아렌트의

메시아는 특정 초인이나 계급이나 젠더나 사회적 집합체가 아니다." 아렌트는 이 희미한 주체의 상정 속에서 기적을 바란다. 아렌트에겐 이 기적이 이뤄지기 위해선 기적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나'가 아닌, 단지 태어났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행위능력만을 가진 '나'의 불완전성을 믿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나는 아렌트가 강조하는 '말들의 사회'에서 참여하는 공적 주체로 나아간다. 


4. 아렌트가 고안한 메시아로서의 나는 사르트르가 사회적 집합들의 세 요소를 설명할 때 나타나는 '조절적 제3자'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사르트르의 논의가 좀 더 사회학적인 향취가 나는데, 그의 설명에 따르면 조절적 제3자란 "우두머리도 아니고 지도자도 아니다. 그것은 자발적인 지시와 지침을 통해서 타인들을 위해 누구라도 될 수 있는 각자다." 


5. 사실 사르트르에게 조절적 제3자란 개념은 사회의 변혁을 위해 필요한 대중의 가능성을 고취시키기 위한 기획어일지 모른다. 알랭 바디우가 『사유의 윤리』에서 잘 정리해놓았듯이 기본적으로 사르트르의 회의주의가 깔려 있는 '사회적 집합들'이란 개념에는 인간의 수동성/능동성에 대한 사르트르의 은밀한 집착이 담겨 있다. 그 집착은 결국 인간은 어떻게든 수동성으로 돌아가고야 만다는 것. 사회성의 평균적인 형태는 분리라는 것이다. 바디우는 사르트르의 이 집착이 사회적 집합들이라는 개념에 관한 매력적인 기술을 뒷받침하면서도 사르트르가 갖는 대중을 향한 일관된 원칙 "대중이 역사를 만든다'에 대한 과신을 낳았다고 보는 듯하다. 사르트르의 이러한 회의주의는 대중에게 할 수 있다를 더 주입시키려는 계몽적 기획으로 태어났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6. 바디우의 깔끔한 정리를 참고해 짧게 재정리해보면, 사르트르는 집합적인 수동성 100의 형태를 계열이라 보았고, 이 계열의 수동성을 깰 집합 형태가 '융합'이라 보았다. 그리고 조직은 정치가 가장 잘 나타나는 곳으로서 여기서 조직이란 융합이란 집합형태가 제도로 구축되는 형태다. 사르트르는 조직을 이끌어가는 데 맹세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조직이란 집합 형태에 있는 개인은 맹세를 통해 배신이란 감정을 체화화게 되고 이러한 배신을 극복하는 것은 맹세 아래 만들어진 형제애다. 그러나 이러한 형제애는 늘 공포와 동반된다. 이 지점에서 조직에 깃든 제도는 능동성이 발휘되었던 융합 상태에 있던 개인을 다시 계열 상태로 돌려보내는 부정적인 역할을 한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제도의 위치에 국가가 있다고 주장한다. 


7. 사르트르의 사회적 집합들에 대한 비유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에서 비롯된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버스를 기다린다'는 동일한 이유 속에서 줄을 서서 기다린다. 그러나 이러한 줄을 선다는 행위가 바로 이 줄 서기에 대한 부당함을 외치는 것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대게 무관심 속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나와 너일 뿐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자연스레 체화한 인간일 뿐이다. 사르트르는 이를 '수동적인 종합' '무력함의 통일성'이라 보고 계열이란 집합 형태로 명명했다. 허나 융합 형태에 오면 사르트르는 "다 같이 항의하러 갑시다"라는 인간의 가능성을 본다. 바로 이 인간의 존재가 '조절적 제3자'이며. 이 존재는 '여느 인간'이다. 이 여느 인간인 조절적 제3자의 말 걸기를 통해 상호성이 구축되고 계열이란 집합 형태가 갖고 있는 수동성, 무기력은 녹아내린다. 


8. 근데 바디우의 문제제기가 재미있다. 상식적이라 더 재미있다. 

'아니, 사르트르. 당신 인간을 그렇게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존재로 본다며? 근데 어떻게 인간이 무슨 계기로 그렇게 서로를 인식하며 뭔가를 바꿔보려는 능동적인 통일성의 존재가 된단 말이야?' 사르트르는 앙드레 말로의 표현을 빌려와 이 극적인 변화의 계기를 종말론이라고 부르는데, 사르트르에게 종말론적 순간은 곧 인간의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분리된 상태를 극복할 사건인 듯하다. 사르트르의 용어로 설명하자면 종말론적 순간은 곧 계열이 용해된 융합의 순간이다. (이 부분부터 바디우는 조금 미심쩍어하는 것 같다)


9. 바디우가 파고드는 사르트르의 '사회적 집합들'이 갖는 허점은 계열이 용해된 융합 단계로 접어드는 대중의 상태가 늘 '반란'이라고 하는 계기를 통해서만 이뤄진다는 사르트르의 경직된 도식이었다. 그리고 이 도식의 문제는 대중을 능동성/수동성의 차원으로 정리하려는 사르트르의 감정적 개입이었다. 바디우는 사르트르의 지나친 차가움이 못마땅하다는 듯, 인민의 능동성이 반드시 수동성으로 회귀하는가란 의문을 표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사르트르는 인간이란 결국 수동적이고 분리된 상태로 돌아가고 만다는 회의주의적 시나리오에 심취해 있었다.


10. 허나 이러한 허점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의 사회적 집합들이란 개념은 아렌트와 더불어 '사회적인 것'의 실천성을 두텁게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것의 논의에 유익한 나름의 중요한 도해라고 여겨진다.사회 속 개인을 무기력, 수동성/능동성이란 정서적 차원에서 보려고 한 사르트르의 사회적 집합들은 감정사회학적 해석의 중요한 영역으로도 고찰해볼 수 있을 듯하다(합리성-합당성-합정성 모델에 기초하여, 우리는 개인의 수동성-능동성에 선/악의 가치를 덧씌우지 않은 채 좀 더 입체적 해석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인가).

김홍중의 사회적인 것에 대한 도해를 참조하자면, 사회적인 것은 베버처럼 인간의 사회적 행위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짐멜처럼 인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뒤르켐처럼 행위 규칙과 도덕적 규범이란 요소를 통해, 루만처럼 시스템을 통해 다양한 논의로 전개되어왔다. 


사르트르가 제시한 사회적 집합들의 계열-융합-조직의 단계를 앞선 '사회적인 것'의 네 요인과 결합해 해석해본다면, 이 작업은 사회적인 것의 개념적 두터움을 도모하는 데 나름의 유익함이 있으리라 본다. 이러한 유익함이 사회적인 것을 둘러싼 쟁투에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매혹일 수 있다. 물론 이 매혹은 우리가 서 있는 세상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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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중, 「사회로 변신한 신과 행위자의 가면을 쓴 메시아 전투: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의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사회학》제47집 5호, 2013, pp.1~33 



 
 
 

1. "초월적 사유의 섬세함을 더 이상 되찾을 수는 없지만, 모든 질병을 세심하게 예방하도록 스스로를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노령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셸 푸코의 국가 박사학위부논문 서설인 「칸트의 『인간학』에 대한 서설」(문지에서 '칸트의 인간학'에 관하여로 출간되었다)을 읽다가 일흔대 칸트의 당시 상태를 짐작해보는 푸코의 이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노년의 역사'류의 책에서 어느 역사학자나 한번쯤은 언급할 진부한 문장 같기도 했지만, 뭔가 마음이 끌린 이유는 몇 페이지 뒤 나오는 '소원들의 등록부'라는 표현 때문이었다. 







2. "철학은 자신의 총체성 안에 건강과 질병의 관계를 포함시키면서, 자신의 절대적인 지평을 형성한다. 확실히 [철학의] 이러한 우위성은 인간이 가진 소원의긴급한 성격에 의해 은폐된다. 우리가 오래 살거나 건강하기를 희망할 때, [이 두 가지 소원 중에] 오직 첫번째 소원만이 절대적인 것이며, 죽음을 통한 해방을 원하던 병자는 [정작] 임종의 순간이 왔을 때는 언제나 [죽음의] 유예를 소원한다. 그러나 소원들의 등록부에서 절대적인 것이 삶의 차원에 있어서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푸코는 이 표현이 나오기까지 칸트의 『인간학』출판과 관련된 사정들을 다 뒤지고 개연성을 만들어나간다. 이는 단지 자신만의 칸트 전기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아니다. 칸트가 묻고 싶었던 인간과 자연의 관계, 푸코 자신이 관심 있었던 철학과 의학의 관계를 전자와 엮는 것을 넘어 생명 자체에 대한 탐문을 시도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3. 푸코의 추적 과정에서 잠시 떨어져 나와 '학자들'에게 노령 혹은 나이듦이란 무엇인가 생각을 해봤다. 출판인들은 가급적 학자들의 총명함에 치우쳐 그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혹은 그 총명함의 기준에 들지 못하면 비판하고 과한 훈계도 보탠다. 그런데 뒤집어보면 후추보다 소금이 많은(이는 나이듦에 대한 오에 겐자부로의 비유다) 나이를 맞이하는 학자들이 갖는 어떤 좌절감은 단순히 정서적으로 (흔히 안타까움이란 표현으로) 미화되어왔다. 혹은 출판인들은 '노병은 죽지 않는다'류의 시선으로 뒤늦게 '학문적 비아그라'를 복용한 이들의 성과와 흔적을 찾아 노령과 거기에 얽힌 지성을 예찬한다.

4. 그런데 사회학자 랜들 콜린스가 『사회적 삶의 에너지』에서 학자들의 일반적인 궤적을 이야기한 것을 고스란히 따르자면, 이런 예찬을 받는 사람은 극히 소수다. 대부분은 자신의 왕성했던 문헌 소화 및 탐독 능력을 떠올리며 한때의 별이었음을 추억한다. 이를 감내하고 무리하지 않은 채 여느 직장인처럼 살아갈 뿐이다. 책이라는 것은 본디 지식의 최적화된 상태를 담아내는 게 상식이지만, 총명함을 향수로만 품고 살수 밖에 없었던 학자들의 삶을 제대로 다루진 않았다. 총기를 잃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건 사람 몇 없는 조용한 학회에서 늙은 고단함에 하품을 몰아 쉬거나, 심지어 코를 골거나, 자신의 질문 차례에서 동문서답을 하는 경우일 수도 있다. 

5. 오랜만에 쓴 논문은 으르렁거릴 에너지로 충만한 젊은 학자들이 보기엔 헛다리 짚기 일쑤고, 진부한 개념어 일색이다. 아이러니는 그 논문의 결과는 결국 지금 그 늙어가는 학자가 쓸 수 있는 최상급이라는 것이며, 이런 간극을 자기만 모를 때 생기는 잡음은 그 늙어가는 학자들이 떠안고 가는 짠한 운명일 수도 있다.

6. 요즘 독서라는 것을 되돌아보면서 그리고 거기서 앎의 최상급이라는 형태로 구현된 각각의 책이라는 사물을 보면서 나는 여기에 투여된 총명함이라는 것 말고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을 발휘할 수 없는 학자들의 사회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건 단순히 그들이 오랫동안 학자로 살아왔다는 것에 대한 관행적인 트리뷰트는 물론 아니다. '어쩌다'로 시작하든 '반드시'로 시작하든 학자라는 굴레 안에서 자신의 지적 감퇴를 인생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사회학은 푸코가 말한 다음의 당연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삶의 지혜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령은 질병이 아니라, 질병이 더 이상 제어되지 않는 때이다. 그리고 이제 시간이 지배한다." 

7. 자신의 지적 황혼을 준비하는 이들이 남몰래 감추어 작성했던 소원들의 등록부를 찾아 들추어볼 때다. 여기엔 예상 외의 흥미와 깨달음이 들어 있을지 모른다.



 
 
 

이상길의 「피에르 부르디외의 언어관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학술지 《문화와 사회》(2013년 14호 수록)

피에르 부르디외의 『사회학의 문제들』(1984/2004) 중 「언어시장」을 읽고 


"저기요 부르디외 선생. 근데 모든 걸 사회학적으로 생각해야 되나요?" 피에르 부르디외의 책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심지어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사회학적으로 보지 않으면 부르디외가 관을 뚫고 나와 삐질 것 같다고. 피에르 부르디외가 2002년 사망하기 전까지 그의 강렬한 투쟁적 사고, 특히 자신이 속한 학문적 위치를 끊임없이 돌아보고 그 거리감을 유지하려 했던 태도는 여느 지성인처럼 많은 지적 선물/산물을 안겨다준 게 사실이다. 특히 그는 주눅이 들어 있는 오늘날 사회(과)학도들에게 영원한 히어로이며, 고급 인문/사회과학 독자층에겐 '고전적 저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그 또한 완전무결한 학자는 아니었다. 나는 부르디외의 그 완전무결함을 깼던 비판적 목소리 중 하나, '총체적 과학으로서의 사회학'이라는 정신을 추구했던 그의 태도에는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는 편이다. 사실 부르디외뿐만 아니라 많은 학자가 그런 사고의 과정을 거치겠지만, 이런 현상을 왜 자신이 속한 학문적 사고로 바라보지 못하느냐 더 나아가 하나의 현상을 해석하고 개념화한 A라는 학문이 왜 자신이 속한 학문적 사고에 비해 빠져 있는 게 많았느냐 비교해보는 것은 학자로서 당연히 고민해볼 지점일 것이다. 문제는 부르디외가 이게 좀 과했고 그리하여 과녁을 잘못 겨냥했다는 점이다. 이를 잘 짚어낸 국내 논문 한 편이 있다. 


국내에서 일급 부르디외 전문가로 평가받는 이상길 교수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언어관에 대한 비판적 검토」라는 논문에서 부르디외가 강조하는 '사회학적-'이라는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언어관과 관련된 학문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언어학이다. 부르디외는 언어학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소쉬르와 촘스키의 논의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지향했던 언어에 대한 태도를 가져와서 '당신들 왜 언어를 사회(학)적으로 보지 못하냐'고 깐다.  

부르디외는 사회라는 현실 속에서 언어를 둘러싼 '나'와 '너'의 관계를 순수하게 바라봐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심지어 언어 공산주의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언어공동체 안에서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맺는 언어를 둘러싼 관계는 전혀 순수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언어를 표현한다는 것은 그 언어를 표현하는 사람의 하비투스를 감안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소쉬르와 촘스키는 순수하고 순진하게 이 세계의 언어를 고찰한 사람처럼 여겨진다. 


이 논지에는 자연스레 사회학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의 중요성을 넘은 사회학적 오만이 들어 있으며, 이 '사회학적-'을 강조하기 위해 비교대상에는 전혀 '사회학적-'이 없는 것처럼 되어야 하는 상황 설정이 발생한다. 허나 이상길 교수의 훌륭한 지적에 따르면, 소쉬르의 언어학이 '순수'언어학이라 불리울 만큼 진공 상태에 있는 학문은 아니었으며, 소쉬르는 그 나름대로 언어의 사회성을 고안하기 위한 주장들을 펼쳐왔다. 다만 그 초점이 조금 다를 뿐이다. 이상길의 논문 인용구는 다음과 같다.


예컨대, 소쉬르는 언어의 사회적 성격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그는 ‘개인적인 파롤’ 대 ‘사회적인 랑그’라는 이분법 위에서 랑그의 사회성에 주목한다. 다만 이 때 소쉬르가 중시하는 특성은 부르디외의 관심사와는 사뭇 다르다. 소쉬르에 따르면, “랑그는 개인 외부에 있는, 언어의 사회적인 부분으로 개인 혼자서는 그것을 창조할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으며,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일종의 과거의 계약 덕분에만 존재”하고 “어느 누구의 뇌 속에서도 완전하지 않으며, 대중 안에서만 완벽하게 존재”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다(Saussure, 1972: 30-31). 뒤르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 이와 같은 개념화는 발화 주체들 외부에서 그들에게 객관적으로 부과되는 규범체계라는 언어의 속성을 무엇보다도 강조한다(124쪽~125쪽).


그다음 촘스키는 아예 부르디외와 언어를 보는 관심사와 태도가 달랐다. 고로 부르디외가 취하는 '사회학적 그물망'에 촘스키가 과하게 끌려온 점이 있다. 촘스키는 부르디외가 바라보는 사회 현실 내 언어의 경험적 다양성보다는 단지 인간의 생물학적 언어능력이 갖는 가능성에 중점을 두었을 뿐이다. 이상길은 촘스키가 취한 연구적 관심사에 대해 부르디외가 비판하려는 그 시선이 촘스키의 시선을 대체하거나 무효화할 꺼리인가라고 반박하고 있다. 


사실 이 논문에서 가장 탁월한 지적은 부르디외의 '외적 관심사에 대한 과잉'이다. 부르디외는 언어가 갖는 메시지 자체의 중요성보다는 메시지가 나타났을 때 이 메시지를 만들어낸 사람의 '상황' 혹은 '조건'에 관심을 기울였다. 쉽게 말해 알맹이는 대충 보고 껍데기에만 집착했다. 껍데기가 갖는 중요성에 과하게 천착했다는 것이다.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계급을 비롯해 사회적 조건이 평등하지 않은 조건에 있다면, 부르디외의 레이더는 자연스레 A라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더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봤을 시 A의 경제적 수준, 교양 상태에 따른 말투와 복식/격식 등을 따지려 든다. 허나 과연 메시지를 둘러싼 하비투스가 부르디외가 기대했던 대로만 움직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로 부르디외가 늘 강조했던 하비투스라는 이 개인의 실천을 좌우하는 행동의 성향 체계는 '개념을 위한 개념'으로 강제된다. 부르디외는 닫혀 있지도 않으면서 열려 있지도 않은 하비투스라는 개념에 대해선 유난히 자신이 강조하는 '성찰성'에 연약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부르디외가 『사회학의 문제들』에서 설명했던 '언어 시장' 속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 관계'를 어떻게 사회학으로 분석하고 폭로할 수 있을까를 알려주는 소중한 지침이다. 그는 언어하비투스, 언어시장, 가격형성의 법칙 같은 경제 용어를 동원해 언어 구사에 내재된 '불평등한' 상호작용에 딴지를 걸고 있으며, 이 딴지는 어느 정도 속이 시원하다. 다만 부르디외가 꿈꾸는 사회학의 세계는 이 사회가 사회학으로 그려지지 않았을 경우, '숨 쉴 틈'을 주는가에 조금 미심쩍은 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통렬한 어퍼컷이 간혹 상대를 잘못 조준했을 경우에 대해 부르디외는 자신의 당황스러움을 어떻게 변호할 것인가.


부르디외 당신, '사회학적-'이 아니라면 삐질 건가?



 
 
 

조금 분절된 이야기지만, 지금 내 상태로는 이 정도 글쓰는 것도 다행이라 생각하기에 우선 남겨놓는 데 의의를 둔다.   

 

 

 

 

  

 

 

 

 

 

 

# 1. 잠깐 딴 이야기  

《이것이 문화비평이다》(2011)(이하 '문화비평')는 《무례한 복음》(2009)(이하 '복음')과 비교해서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물론 이택광은 '복음' 이전에도 왕성하게 자기 주장을 몇몇 단행본으로 해 왔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를 메인스트림으로 올려 놓은 책은 '복음'부터였다고 생각한다. '복음'과 '문화비평'에는 다리 하나가 있다. 그것은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2010)(이하 '인문좌파')이다. 이택광의 글에 등장하는 반복적인 개념들. 왜 이 사람은 이 개념을, 이 이론을 자주 쓸까,라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게 '인문좌파'는 제목처럼 '가이드'가 되어주는 안내서라고 할 수 있다.   

# 2. 왜 벌써 베스트 앨범이 나왔지?

먼저 책을 다 읽고 난 후 소감. 짧게 말해서 난 '문화비평'에서 별 매력을 못 느꼈다. 아마 이 글은 왜 내가 매력을 느끼지 못했는가,를 이택광 개인의 잘못이 아닌 이택광이라는 사람을 둘러싼 학문의 구조와 연결지어 생각해보는 소소한(?)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도를 왜 했는가,를 더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조금 더 '엇박자'를 취한 내 결언을 드러내자면, '문화비평'은 뭔가 피로감을 주는 책이었다. 그리고 뭔가 '자기반복적'이었다. 비유를 들자면 이랬다. 아직 베스트 앨범을 낼 가수가 아닌데, 벌써 베스트 앨범이 나왔네?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앨범이 대략 3집 정도 나왔는데, 그 다음 앨범이 베스트 앨범으로 나왔을 때 뭐야,이거?하는 그 순간 말이다) 

좋게 포장하자면, 이것은 그만큼 이택광 본인의 의지가 '일관된 형태'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나쁘게 직언하자면, 이것은 그가 보여준 다채롭고 새로운 시선이 과연 '발전하는 세계관'으로 이어졌는가,라는 의문을 주는 계기일 것이다.   

 

# 3. 문화연구는 '문화비평'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이택광이 문화연구를 통해 '문화비평'의 중요성을 강조했을 때, 그가 '복음'의 서문을 통해 이야기한 사실처럼 '문화연구자'가 저널리즘적 글쓰기를 했던 시도는 많이 죽어있는 상태였다.(2000년대 초반부터였지?) 현실을 신속하게 사유하는 문화연구자는 광장의 언어 대신 학계의 언어를 정식화하는 데 더 큰 힘을 쏟게 되었다. 덕분에 많은 이론들이 학계를 채우고, 논의도 풍성해졌다. 그러나, 그럴수록 문화연구자들은 '잉여'가 되어 갔다. 현장의 급속한 변화에 놀래며 이러한 놀람을 해석하고 싶은 젊은 연구자들이 날마다 늘어나고 있지만, '문화연구'라는 제도적 과정은 이 젊은 연구자들의 목을 조르는 딜레마로 작용했다. '이론적 배경'의 엄밀성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러한 '이론적 배경'의 엄밀성이  '그럴듯한 논문'을 위해 필요한 도구로 전락하면서, 문화연구가 활용하는 이론은 '당연한 결론'을 위한 제사물로 헌납되었다. 그래서 문화연구자들이 다루는 '논문'은 점점 경직되어 갔으며, 그러한 경직된 논문은 그 논문이 다루는 주제의 신선도가 더 높을수록 진하게 드러났다.   

 

 이런 맥락에서 이택광이 문화연구 안에서 강조하는 '문화비평'이라는 시도는 내가 보기엔 90년대 문화연구의 복권으로 더 강하게 다가왔다. 서동진, 노염화, 김수기, 강내희, 조한혜정, 이재현, 정윤수, 이윤호, 신현준, 김창남 등등 현실에 대한 색다른 해석과 신속한 사유를 제시하는 문화연구자들의 언어는 1990년대 대중문화의 급속한 변화에 놀라며, 그 놀람의 이면을 들쑤시고 다녔던 글쓰기의 시대를 대변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만들어진 '동인'들. 문화를 통해 공유점을 만들어가며 비평집단이 형성되고, 그 비평집단의 모토는 경쟁하듯 표출되었다. 이런 가운데 어느덧 일상은 '공부할 수 있는' 주제가 되었고, 무엇보다 일상의 테이블에서 '재미있게 갖고 놀 수 있는 문화적 안주거리'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택광이 문화연구 안에서 문화비평을 주장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절단과 파격을 주창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그의 주장이 뭔가 새롭게 느껴질 정도의 착각을 느끼게 하는 데,  학계의 몽매함도 있었음을 나는 주장하고 싶다. '문화연구'라는 판은 이리저리 다른 학과에 스며들어 있지만 그래도 어떤 제도적 힘을 갖고 '문화연구'를 주창하는 몇몇 학과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한국언론학회를 통해 움직이는 문화연구자들이다. 이들은 '미디어 /문화연구'라는 명칭을 통해 문화연구자의 '양육과 성장'을 나름 시켜주고 있는 제도권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집단은 앞에 붙은 '미디어'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 그래서 늘 문화연구를 '언론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사고해야 한다는 남모를 압박을 받는다. 여기서 좀 편하게, 넓직하게 자유로이 문화연구를 공부하는 곳이 중앙대 문화연구학과나 연세대 문화학 협동과정 등이 있다. 어느 집단이 더 이론이 강하다, 현장기술이 강하다, 분류할 수 없지만 앞에서 언급한 언론학에서 나타난 '미디어/문화연구'의 경직됨보다는 조금 더 학문적 분위기가 자유스럽다고 할까? 그런 게 있다. 

근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화연구라는 제도권 안에서 이택광이 문화비평이라는 시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전혀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늘 그는 '라깡 전도사'로 소비되거나, 문화연구의 사회학적 사고에 치우친 사람들에게 '정신분석학적 사유', '정치철학적 사유'를 들이대는 '화성인' 문화연구자로 인식되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이 그가 라깡 전도사로서 문화연구를 라깡의 시선으로 해석하는 것의 깊이를 따지는 만큼이나, 이택광이 논문 이외의 글쓰기라는 채널을 통해 갖는 '시도'. 그 시도의 의의를 오늘날 문화연구자들이 함께 이야기해봐야 하지 않겠냐는 점. 이것의 공론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택광의 시도를 공론화함으로써 나는 문화연구자들이 현실에 대해 기계적인 이론의 대입과 반면 현실을 통해 이론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현실에 개입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가를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문화연구자들은 '관성적'으로 기계적으로 이론을 찾고 그것을 논문이라는 양식으로 맞추기에 급급하다. 고로 늘 현실에서 이미 많은 담론은 생산되었는데, 반 박자 수준이 아니라, 두 박자 정도 늦게 열을 올리는 것이 오늘날 문화연구자들의 현실이다. 더 우스꽝스러운 것은 이런 현실이 곧 '학문적 깊이'를 위해 필요한 침착하고 차분한 연구자의 태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과연 그럴까? 그들이 내놓은 결과물은 결국 당연한 말들의 정리안 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정리안으로 희번덕거리며 자족하는 문화연구자들의 테이블에 그들이 연구하는 대중이란 없다. 오직 기계적으로 끼워 맞춘 이론의 그늘에 가려진 '구성된' 대중만이 있을 뿐이다. 

 

# 4. 이택광의 글도 뭔가 지쳐 보인다 

그러나 이런 문화연구의 안타까운 현실과 대조되는 이택광의 문화비평에 대한 열정이 뭔가 지루하고 피곤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나는 여기서 이택광의 문화비평이 갖는 시도를 둘러싼 뜨거운 피드백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그는 다양한 사건이 담긴 그만의 '신화들'(바르트가 쓴)을 쓰고 있지만, 그리고 어느 정도 이러한 시도들이 환영을 받고 있지만 그럴수록 그의 열정적 외침이 '무궁무진'의 세계이기보다는 지나친 메아리로 들려온다. '쾌락의 평등주의', '중간계급' 등등 그가 늘 강조하는 한국 사회를 꼬집는 어떤 개념이 자주 나타남에서 오는 피로감 수준을 벗어나, 이것은 어쩌면 90년대 참 다양한 문화연구자들이 참여하여 만들어냈던 '문화비평'의 판에, 이택광 혼자 분투하고 있는데서 오는 피로감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이 피로감을 덜어내기 위해 문화연구라는 학문에 그리고 이 세계를 뭔가 다르게 해석하고 싶은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이 책에 스며든 다양한 사회적 현실에 대한 해석 a에 대한 반론이자 반응일 것이다. 이미 이러한 반론과 반응은 이택광의 블로그에서, 그리고 그 블로그를 즐겨 찾는 사람들이 시도하고 있는 일이다. 정작 '문화연구'를 한다는 사람들, 자신이 '힙'하다고 자랑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런 시도에 가장 둔감한 점은 학문 사회의 암울함을 보여주는 단면일 것이다. 지금 문화연구자들이야말로 '논문중심주의'를 벗어나 다른 채널로 더 대중에게 다가가야 할 때가 아닌가!

 

(덧붙임) 책의 짜임새로 보자면, 개인적으로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가 제일 낫고, 그다음 《무례한 복음》, 이번 책 《이것이 문화비평이다》가 제일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나는 자음과 모음이 시도하는 '하이브리드 총서'라는 기획도 좀 의문을 갖게 되었다) 

편집부와 저자의 쿵짝이 뭔가 안 맞는다는 느낌이 읽는 내내 들었던 것은 왜 일까.

 



 
 
게슴츠레 2011-07-26 00:42   댓글달기 | URL
이 포스트를 읽으니 격하게 말하자면 광인들 속에서 스스로가 미친 건 줄 알았다가 아 그래도 정상이 이게 맞긴 맞았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군요. 이론이라는 종교가 논문에서 딱딱하게 굳고 웹에서는 되도 않은 입장들을 정당화(결국 타인에게는 안 되고 자기 집단에만)하는 상황 속에서 짧기만 핵심만 담은 단상 공감하고 갑니다. 저 역시 한 때 이론의 자식으로서요.

얼그레이효과 2011-07-27 05:43   URL
게슴츠레님, 오랜만입니다. 정신없이 써서, 글이 좀 그렇죠? ㅜ.ㅜ 좀 더 가지런한 글로 또 한 번 생각나누자구요~

2011-09-02 0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4 0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