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미 예찬 - 고요함의 멋과 싱거움의 맛, '담백한' 중국 문화와 사상의 매혹 산책자 에쎄 시리즈 5
프랑수아 줄리앙 지음, 최애리 옮김 / 산책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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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맛들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중심'(또는 도)의 싱거움이야말로 "가장 음미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음미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쓰기 시작했다. -10쪽

(...)중국 문화에서는, 무미가 하나의 가치로 인정된다. 그것도, 가운데요 바탕을 이루는 가치로 말이다. 이러한 발상은 이미 고대 사상에서부터 중요한 것으로, 현인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에서건 도를 논하는 일에서(12)건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그것은 중국인들의 미학적 전통을 풍부하게 만들어왔으니, 중국에서 발전한 예술들은 그러한 직관의 소산인 동시에 그 근본적 맛없음을 한층 더 감지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중국 예술의 사명은 바로 그 무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음률과 시가와 회화를 통해, 무미는 체험이 된다. -11쪽

스승은 자신을 지혜나 학식을 가진 자로 묘사하지 않으며, 이미 성취한 것들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겸손에서만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갱신과 지속의 반복 속에 있는 긴장이기 때문이다 - 이 부단한 향상심은 그 안에서 자신의 목표(그의 '행복)를 발견하며, 삶을 젊음 가운데, 정진 가운데 유지한다.-18쪽

맛은 대립시키고 분리시키지만, 맛없음은 현실의 다양한 양상들을 연결시키고 서로 열어주며 소통하게 해준다. 그것은 다양한 양상들의 공통점을, 그리고 그 근본적인 성격을 보여준다.-45쪽

덧없는 인상,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영속성, 순수성, 정신적 차원, 그리고 '황량한 잿빛 분위기'-이 모든 것이 예술 작품 가운데 자리 잡기 시작하는 담백함이라는 기호의 보완적 면모들이다. -59쪽

담의 '아득함'은 모종의 내적 여정을 통해서만 도달 가능하며, 동시에 담은 그 여정을 용이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담의 기호는 기호의 '본연의' 소명, 즉 재현을 수행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탈재현의 기능을 한다. 그 '너머'는 상징적이지 않다. -129쪽

담담함은 일종의 선동이 된다. -161쪽



 
 
 
사회과학의 빈곤
피터 윈치 지음, 박동천 옮김 / 모티브북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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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 목표는 전투가 벌어지는 두 전선이 외견상으로는 상이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전혀 다르지 않음을 명확히 보이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철학의 본질에 관하여 명쾌해지는 일과 사회연구의 본질에 관하여 명쾌해지는 일이 결국 마찬가지라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그 까닭은 사회에 관하여 가치 있는 연구는 그 성격상 철학적일 수밖에 없고,또한 철학 역시 해볼 만한 것이 되려면 인간 사회의 본질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54쪽

실재가 이해 가능한 것이냐는 물음은 곧 사유와 실재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실재가 이해 가능한 것이냐는 물음은 언어가 실재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느냐에 대한 물음 즉, 무언가를 말한다는 일이 무슨 일이냐는 물음과 불가분하게 묶이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철학자가 언어에 대하여 가지는 관심은 언어와 관련되어 발생하는 혼동 하나하나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언어라는 현상 전반의 본질에 대한 혼동을 해결하기 위함인 것이다. -66쪽

(김샥샥 주: 동의 차원의 인용은 아니다) 사회과학 분야의 연구 도중에 제기되는 매우 중요한 이론적 문제 가운데 많은 수가 과학에 속하기보다는 철학에 속한 문제이고, 따라서 경험적 탐사에 의해서보다 개념적 분석에 의해서만 해소될 수 있는 종류이다. 또, 사회적 행태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사회적 행태라는 개념을 조명할 필요에 대한 요청이다. 이러한 종류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경험적 탐사의 결과를 "기다려 살펴보는" 절차는 초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73)개념이 함축하는 바를 거슬러 찾아 올라가는 일이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73,74쪽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반대 또한 이해하는 일이다. 정직하게 행동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내가 이해한다는 것은 곧 정직하게 행동하지 않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내가 이해하는 것에 더함도 덜함도 없이 똑같다. -136쪽

명료한 해석이라고 해서 반드시 옳은 해석은 아니라는 베버의 지적은 확실히 옳다.(중략)베버가 말하듯 통계가 사회학적 해석의 타당성에 관한 결정적이고도 궁극적인 재판관이 될 수는 없음을 역설하고 싶다. -198쪽

(김샥샥 주: 동의 차원의 인용은 아니다)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정당하게 사용하는 방식은 오직 익숙하고 뻔한 일들에 대하여 우리의 주의를 환기함에 있는 것이지,그런 일들을 버리고 다른 것을 택할 수 있음을 보이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205쪽

(김샥샥 주: 동의 차원의 인용은 아니다) 사회과학자가 연구하고자 하는 사회에서 제도 안에 형상화된 사유의 틀은 그 사회 구성원들이 행동하는 방식을 규율한다.-216쪽



 
 
 
나는 철학자다 - 부르디외의 하이데거론 이매진 컨텍스트 5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김문수 옮김 / 이매진 / 2005년 6월
절판


무엇보다 방법 훈련의 일환인 이 텍스트는 고발의 지평과는 다른 지평에 서 있다. 과학적 분석은 소송의 논리나 그 논리가 제기하는 질문들(하이데거는 나치였는가,하이데거의 철학은 나치다운가,하이데거를 가르칠 필요가 있는가 등등)과는 하등 관련이 없기에,오늘날 그 철학자를 에워싸고 있는 병적인 흥분이,아마도 여전히 때맞지 않을 이 작업을 환대하는 데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지는 확실치 않다.-9쪽

1)시간성 이론의 핵심에 감춰져 있는 사회보장 국가에 대한 저주,2)방랑에 대한 저주로 승화된 반유대주의,3)나치참여-그 흔적은 융거와 나눈 대화에서 빙빙 돌려 표현된 여러 암시들에 역력히 남아있다-에 대한 참회의 거부,4)초보수혁명주의 - 이것은 근본적 극복이라는 철학적 전략을 채택하는 데서나, 히틀러 체제와 단절하는 데서나 주요한 영감이 된다.특히 히틀러 체제와의 단절은, 휴고 오트가 보여 주었듯이,철학적 지도자의 사명을 떠맡으려는 철학자의 혁명적 열망이 인정받지 못한 데 따른 환멸로 인한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하이데거의 여러 텍스트에서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정통 독해의 수호자들은 이와 같은 정치적 함의들을 거부한다.-10쪽

*(얼그레이효과: 사팔뜨기,란 용어는 여기서 부르디외가 말하고자 하는 시각을 간결하게 보여주는 것 같단 생각이다)사팔뜨기. 이 말은 문법적으로 처음에는 어떤 뜻을 공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구성상 상당히 모호한 표현법을 지녀 명료한 발성이 매우 곤란한 구절을 말할 때 쓰인다.따라서 한 구절이 '사팔뜨기'가 되는 것은 그 구절을 구성하는 낱말들의 특수한 배치 때문이다.즉 낱말들이 처음 볼 때는 특정한 관계를 맺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관계를 맺을 때 그 구절은 '사팔뜨기'가 된다. 마찬가지로 '사팔뜨기'인 사람은 어떤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른 곳을 보는 사람이다. -11쪽

적합한 분석은 이중의 거부 위에 구축된다.그것은 우선 텍스(13)트를 그것이 생산된 가장 일반적인 상황으로 곧바로 환원해버리려는 시도를 거부한다.뿐만 아니라 그것은 철학적 텍스트가 절대적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또 이 주장과 상관적으로 모든 외적인 참조를 거부하는 방식 역시 거부한다.물론[텍스트의]독립성은 인정될 수 있다.단, 이 독립성이 철학장의 내적 작동 방식을 관장하는 특수 법칙들에 대한 의존성의 다름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확히 이해하는 한에서만 그렇다.마찬가지로 [텍스트의]의존성도 인정될 수 있다. 단 의존성이 오직 철학장의 특수 메커니즘을 매개로 해서만 관철된다는 사실로 인해 텍스트의 효과들이 겪게 되는 체계적 변형을 염두에 두는 한에서만 그렇다. -12,13쪽

따라서 근본적으로 모호성에 따라 규정되는 글,말하자면 두 정신적 공간에 대응하는 두 사회적 공간에 준거하여 규정되는 글에 대해서는,철학적 독해 대 정치적 독해라는 대립구도를 포기하고,이중적 독해,곧 정치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독해를 해야만 한다.-13쪽

나치와 가깝다는 이유로 하이데거 철학을 비난하는 비방자든,나치참여와 하이데거 철학을 분리시키는 찬양자든 다음과 같은 점을 무시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한다.곧 하이데거의 철학이란 철학적 생산장이 강요하는 특수한 검열 때문에,하이데거를 나치즘에 밀착하(14)게 했던 정치적,윤리적 원리들을 철학적으로 승화시킨 것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는 점 말이다. 전기적 사실과 저작의 내적 논리를 연결시키지 않은 채 끈질기게 전기적 사실만을 물고늘어진다는 점에서 하이데거 적대자들은 하이데거 옹호자들이 명시적으로 요구한 '사실관계의 비판적 확립'과 '텍스트 해석'의 구별에 동의하는 셈이다.-14,15쪽

하이데거의 경우 바로 다음과 같은 작업이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즉 철학적 생산장의 구조,또 그런 구조에 이르게 된 전역사, 하이데거가 즐겨 했던 말처럼 철학자 단체에 '터'를 제공하고 또 그 기능을 지정해 주는 대학장의 구조,교수들의 위치와 그 위치의 변천을 규정하는 권력장의 구조를 재구성하는 일,그런 방식으로 점차 바이마르 시기 독일의 사회구조 전체를 재구성하는 일이(18)바로 그것이다.-18,19쪽

구별에 대한 실천적 숙달은 일종의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방향 감각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경우마다 희미하나마 전체적인 구별들을 생산해낼 수가 있다.이 전체적인 구별들은 다른 사용자가 활용하는 구별들과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벽히 다르지도 않다.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이것들은 당대의 모든 표현들에 통일적인 분위기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이 통일적 분위기는 논리적 분석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동시대성을 사회학적으로 정의하는 데 중요한 구성 요소 중 하나가 된다. -46쪽

시대정신이라는 통일성의 원리는 공통의 이데올로기적 모태이자 사상가들이 공유하는 공통 도식들의 체계다.겉으로는 무한히 다양하게 보이는 이 도식들은 상투적 논거,즉 사유를 구조화하고 세계관을 조직하는 근본 대립들(대략 보면 이 대립들은 서로 등가다)의 집합을 발생시킨다.-47쪽

발생적 아비투스들,곧 독특하면서도 객관적으로 일치하는 성향들의 체계들은,그것들 각자가 산출한 생산물들의 만화경 같은 다양성을 통해,또 그 다양성 안에서 통일성을 확보한다.이 산물들은 단지 다른 변종들의 변종으로서,어디나 중심이면서 중심이 어디에도 있지 않은,그런 원을 형성하는 것이다.-53쪽

이중적 거부의 산물로서,논리상 '보수혁명'이라는 자기-해체적 개념에 이르게 되는 사유는,구조적으로 모호하다.그리고 이 구조적 모호성은 그 사유의 원천인 발생적 구조 안에 각인되어 있다.왜냐하면 그것은 극복할 수 없는 일체의 대립들을 영웅적인 혹은 신비적인 도주를 통해,이를테면 앞질러서 미리 도주해버림으로써 극복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이기 때문이다.-57쪽

'철학적 감각'을 갖는다는 것은 철학적 공간에 좌표를 놓아 주는 관습적 기호들을 의식적,실천적으로 숙달한다는 것과 동일하다.그리고 바로 이 철학적 감각을 통해 전문인들은 이미 표시된 위치들을 기준으로 자기 자신을 구별할 수 있게 되며, 향후 십중팔구 자신에게 전가될 모든 비난에서 자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요컨대 철학적 감각은 전문인이 지닌 차이를 알아보게(68)해 주는 모든 기호들을 갖춘 형식 아래에서,또한 그러한 형식을 통해,전문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지닌 차이를 주장하도록 해 준다.-68,69쪽

철학적인 것으로 사회적 인정을 받은 사유란 철학적 입장들의 장에 준거함을 함축하는 사유이며,그 사유가 이 장에서 차지하는 위치의 진리에 어느 정도 의식적으로 숙달되어 있음을 함축하는 사유다.-69쪽

철학적으로 형식을 갖춘다는 것,이것은 곧 정치적으로 격식을 준수한다는 것이다.또한 특정한 정신적 공간과 분리될 수 없는 특정한 사회적 공간에서 다른 사회적 공간으로의 이전이 전제하는 형식-변경[변형]은,대체로 최종 생산물과 이 생산물의 원천에 있는 사회적 규정 요인들이 맺는 관계를 오인되게끔 한다.왜냐하면 하나의 철학적 입장은,체계를 제쳐두고 본다면 '소박한' 윤리-정치적 입장과 상동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81쪽

무엇보다도 하이데거가 지적인 장과 맺었던 곤혹스럽고도 긴장된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철학장에서 이 철학자가 차지했던 특수한 위치를 이해할 수 없다.바로 이 관계 덕분에 하이데거는 좀처럼 있을 법하지 않은 희귀한 사회적 궤도를 밟게 되는 것이다.실상 칸트 철학의 위대한 스승들에 대한 하이데거의 적대,특히 카시러에 대한 적대의 뿌리가 바로 아비투스간의 심층적인 적대에 있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89쪽

물론 겉모습에 사로잡히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그렇지만,이미 스승과 제자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이 '명석한'대학 선생의 '실존적인 의상'과 지방색 강한 말투에는 무언가 과시적인 데가 있다.이 모든 것,그리고 농부 세계를 이상화시키는 언급 역시 허식으로 느껴지며,기껏해야 지성계와의 곤란한 관계를 철학적 태도로 바꾸는 한 방식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명석하면서도'벼락출세한 자,배척되면서도 배척하는 자,하이데거는 지성계에 또 다른 지적 삶의 방식,-91쪽

말하자면(가령 텍스트를 대할 때나 언어를 사용할 때는)더 '진지하고' 더 '고심'하는 또 무엇보다도 더 총체적인 지적 삶의 방식을 도입했다.다시 말해,과학에 대한 반성으로 축소되어 버린 철학의 옹호자들보다 더 크고 막중한 책임을 위임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도,그 대신 목자의 사명과 낙원의 도덕의식 역할을 자임함으로써 절대적이로 비타협적으로 모범적 실존에 참여하는 사유의 스승이라는 삶의 방식을 지성계에 도입한 것이다. -92쪽

위치들이 체험되고 입장들이 규정되는 것은,공감이나 반감,분개나 동조 같은 감정 속에서 어느 정도 혼돈되어 지각되는 바로 이러한 감각적인 외형에 의거해서 가능해진다. 철학장에서 하는 성공적인 투자와 이동은 윤리적이며 정치적인 동시에 철학적인 놀이 감각을 전제한다. -96쪽

철학적 전략은 곧 철학장 가운데서 수행되는 정치적 전략이기도 하다.가령 형이상학에 대한 칸트적 비판의 토대에서 형이상학을 발견한다는 것을,곧 칸트적인 전통에 결부되어 있는 철학적 권위라는 자본을,'수백 년간 찬양되어온'이성 내에 사유의 가장 끈질긴 적'이 있음을 감지해내는 본질적 사유에 이익이 되게끔 유용한다는 것이다.이것은 신칸트학파와 싸우되,칸트 철학의 이름으로 싸울 수 있게 하는 최고의 전략,따라서 칸트 철학에 대한 이의제기에서 얻는 이윤과 칸트의 권위에서 얻는 이윤을 모두 축적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최고의 전략이다.이런 식의 전략은 모든 정당성이 칸트로부터 유출되는 장에서는 드문 것이 아니다.-108쪽

말로써 수행되는 전회는 실존하는 것의 본질적 역사성을 주장함으로써,또한 존재,즉 무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에다 역사와 시간성을 새겨 넣음으로써,역사주의를 피할 수 있게 해 준다.이런 전회야말로,철학적 문제를 다룰 때 보수혁명이 가동시키는 모든 철학적 전략의 범형이다.늘 근본적인 극복을 원리로 삼는 이 전략들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듯 가장하여 결국 모든 것을 보존할 수 있게(113)한다.이것은 바로 상반되는 것들을,야누스처럼 두 얼굴을 지닌 사유 속으로,따라서 얼굴을 돌릴 수 없는[불가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얼굴의 모든 면을 동시에 정면에 오게 할 수 있으므로-사유 속으로 다시 통일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 요컨대 본질적 사유의 방법적 극단주의는, 우파를 좌파의 좌파가 되도록 아니면 좌파를 우파의 우파가 되도록 전회의 지점까지 이끌어 감으로써,좌우파의 가장 급진적인 테제를 모두 극복할 수 있게 해 준다. -113쪽

저작에 대한 두 가지 독해의 구별을 저작 자체 내에다 설정해두는 것,이것이야말로 격에 맞는[순응적인]독자를 얻는 수단이다. [저작 내에서]극히 껄끄러운 신소리나 뻔한 진부함을 발견할 경우,격에 맞는 독자는 자신이 지나치게 잘 이해했을 뿐인데도 자기 이해의 본래성을 의심하여,결정적 신기원이라고 간주된 저작을 자기 자신의 이해 척도로 판단하기를 스스로 금하면서,자기도 모르게 결국 대가의 감시 아래로 되돌아간다.-163쪽

하이데거 언어의 가장 특수한 효과로 보이는 것들,특히 설교투의 부드러운 수사를 구성하는 그 모든 효과들,무한하고 끈질긴 주석-고갈될 수 없는 정의를 통해 한 주체를 고갈시키려는 의지로 정향된-의 모태로서 기능하는 한 성스러운 텍스트의 여러 말들에서 일어나는 변이, 이것들은 베버가 말했듯,'강단예언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비범하다는 가상을 일상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게 해 주는 전(168)문적인 곡예와 술수의 표본적인 극한에 불과하며,따라서 이러한 가상에 대한 절대적 정당화에 지나지 않는다. -168쪽

다른 때 같으면 무례하다고 곧바로 기각되었을 하이데거'정치사상'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졌던 데에는,중립성을 지키라는 학적 명법에 대한 위반,철학자를 나치당에 가입시키는 것만큼이나 예외적인 위반이 필요했다.하지만 이런 위반 역시 중립화의 한 형식이다.왜냐하면 철학 교수들은 정치로 열려 있는 준거를 철학에서 배제하는 정의를 너무나 깊숙이 내면화한 나머지,결국 하이데거 철학이 철저하게 정치적이었다는 점을 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69쪽

말들을 미처 다 이해하기도 전에 이루어지는 이해는 여전히 표현되지 않고 억압된 표현적 이익과,격에 맞는 표현,즉 이미 철학장에 암묵적으로 수용된 규범에 맞게 실현된 표현,이 둘의 만남에서 생겨난다.-170쪽

우리는 철학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고유한 철학적 가상이란,특정한 언어의 채택으로 환원되지 않으며,오히려 같은 낱말에서[그것이 지닌]여타의 의미들을 제거하게 하는 특정한 정신적인 태도의 채택을 전제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물론 모든 사람들이 철학적 담론을 건드려볼 수 있을지 모른다.하지만 그것을 진정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다음과 같은 이들뿐이다.-183쪽

즉 알맞은 코드만 가진 것이 아니라,구문들을 알맞은 명부에 위치시키면서,곧 철학이라는 사회적 공간에 본래적으로 참여한 모든 이들이 공유하는 정신적 공간에 위치시키면서,구문들의 고유한 의미를 공명하게 할 읽기 방식을 가진 사람들 말이다. -183쪽

옮긴이 후기 中 하이데거를 통해서 철학장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려는 부르디외 기획은 자연스럽게 철학과 사회학의 관계에 대해 물음을 던지게 한다.(중략)하이데거에 대한 부르디외의 비판적 분석은 당대 철학에 의해 억압받아온 사회학의 복수이자,인문학에 있어서 늘 사회학과 경쟁관계에 있는 철학에 대한 사회학의 우위를 간접적으로 선언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도 있다. 부르디외 자신은 "철학에 대한 진정한 사회학적 분석은(.,.)철학들과 그것의 계승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며,따라서 철학자들의 유산(190)에 새겨진 사유되지 않은 것에서 철학자들을 자유롭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말한다.-190쪽



 
 
 
보이지 않는 용 -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데이브 히키의 전복적 시선
데이브 히키 지음, 박대정 옮김 / 마음산책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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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 정치의 무도장에서 신성불가침의 이미지란 없다. 모든 이미지에는 영향력이 잠재한다. 형편없는 인쇄 미술작품으로 인해 좋은 정부가 전복되는가 하면, 그 안에 담긴 좋은 사상이 맥을 못 추기도 한다. 즐거움과 힘, 아름다움에 유동적인 뉘앙스를 부여하는 것은 오늘날의 문화적인 환경에서 매우 중대한 문제다. -37쪽

아름다움의 임무는 애호가들을 참여시켜 발언권을 주고 그들의 힘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즉,이미지와 구경꾼이 서로 공유하는 가치의 영역을 지정해준 다음, 이 영역 안에서 그림의 미심쩍은 내용에 일정한 가치를 부여하여 논의를 개진하도록 만든다. 사물에 대한 구경꾼의 시각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절박한 의도가 없다면, 이미지는 존재할 이유가 없으며, 아름다워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친밀한 것의 편안함은 언제나 색다른 것의 두근거림을 품고 있다. 이 융합의 결과가 이상적으로 나타날 경우 그것은 설득력 있는 흥분, 즉 시각의 즐거움이 된다. -38쪽

하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본다. 미술의 즐거움에 대한 기준을 제도적 기관에 수용된 군마들 앞에서 왠지 모르게 느끼는 슬픔에 두는 것이 좋은지, 미술작품들을 제작 즉시 미술관에 안치해서 영화를 보러 가듯 관람해야 그 가치가 향상되는지, 그 미술작품들이 안치되기 전에 바깥세상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할 수 있는 일은 없는지,하고 말이다. -41쪽

메이플소프의 작품처럼 구경꾼에게 직접 호소하며 치료기관의 '보호'를 멸시하는 이미지들을 마주 대할 경우, 기관의 정체는 드러난다. 바로 다원적 문명사회의 도덕 고물수집장이라는 것이다. -48쪽

즉,20세기의 우리가 미술작품을 일컬어, 우리가 평생 이해하려 애쓰며 우리가 그 앞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가장하면서도 우리에게 무언가 요구하는, 매혹적이며 자율적인 존재물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그저 미술작품의 역할을 재배치해서 성경적 가부장의 전통을 잇는 것이다. 즉 관계가 소원하며 아버지의 책임에 태만한 남성의 역할을 그것에 지우는 것일 따름이다. 비록 미술비평가라도 이런 가학적 무시와 태만으로부터 벗어나 쉼을 얻을 자격이 있지 않겠는가. -81쪽

17세기 전시실로 들어가면서 제일 먼저 깨닫는 것은 그림 화면의(83)변환이다. 들여다보는 16세기의 창이 그 자리에서 회전하여 내다보는 17세기의 창이 된다. 즉,16세기 전시실에서는 우리가 그림을 들여다보는 입장이지만,17세기 전시실에서는 그림이 우리를 내다보는 입장,즉 우리가 보임을 당하는 입장이 된다. 16세기의 후퇴한 화면은 17세기 그림에서 앞뒤가 단축된 화면이 되고 '여성적'공간은 '남성적'침입으로 바뀐다.-83,85쪽

16세기 전시실에서는 현실에서 벗어나 화면을 통해 이상적인 자비의 가능성 안으로 들어오라고 우리를 부르는 르네상스 시대의 초대가 있었지만,17세기 전시실에 들어서면 바로크 시대의 냉랭한 자연주의는 내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인 것으로 자신을 인식해줄 것을 요구한다. 구경꾼으로서의 우리의 역할은 급격하게 변경된다. 16세기 전시실에서는 우리가 구경꾼이었다.즉,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등 뒤로 후퇴하며 아련히 멀어지는 아르카디아의 '천상의 음문'에 들라고 그들의 초대를 받은,환영받는 손님들이었다. 그런데 17세기 전시실에 들어서면 그와는 반대로, 바라보는 우리가 구경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응시와 환영의 권위에 눌려, 그 그림들의 공간 밖에 꼼짝없이 머무르게 된다. 우리는 높이 걸려 있는 리베라의 성인과 엘 그레코의 성직자, 벨라스케스의 군인 등이 무정하게 내려다보는 피고인석에 위치한다.그 인물들 넘머에,그들의 등 뒤에,신비의 매력이란 없다.피신처도 없으며 쉼도 없다. 오직 어둠만이 있을 뿐이다. -85쪽

이렇듯 이미지와 구경꾼 사이에 맺는 전통적인 계약상의 제휴는(이 계약의 서명자는 아름다움이며, 여기에 표준이 되는 미덕이 있다고 가정하는 일은 없다) 고결하다고 생각되는 미술작품과 이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구경꾼 사이의 상하위계의 제휴로 대체된다. 이것이 치료기관의 서명이다. -108쪽

16세기의 그 이탈리아인들은 파라고네paragone라는 고대의 미술 담론을 부활시켰다. 파라고네는 서로 비슷한 것들에 대한 논쟁적인 비교를 하고, 그것들을 서로 경합하게 하여 순위를 매기는 것이었다. '신新학문', 즉 인문학의 열광적 추종자들은 부인할 수 없는 가치의 전형들을 구별해냄으로써 객관적인 기준의 확립을 추구했다. 그들은 분류학적 체계를 세워 디자인과 디자인의 관계,그림과 그림 사이의 관계, 미술가와 미술가 사이의 관계, 장르와 장르 사이의 관계를 고찰하고 재고했다. -116쪽

파라고네가 재확립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미지를 보는 올바른 방법은 그것을 '꿰뚫어 읽는'것이었다. 즉,이미지에 묘사하도록 의뢰된 사건들의 해석을 이미지의 현혹적인 깊이에서 가려내는 것이었다.그런데 파라고네는 그러지 않고, 그림의 실제적 속성과 관념적 속성에 주의를 환기하고 그림은 그림끼리 비교한다. 이렇게 비슷한 것끼리 비교 평가됨으로써 그림들의 공식적인 내용은 여러 경합 범주들(최고의 수태 고지 그림,최고의 출애굽기 그림, 최고의 그리스도 십자가 수난 그림 등)로 분류된다.(116)그렇게 해서 신앙심과 정치적 권력의 공인된 도구들이 사적인 즐거움의 대상으로 바뀌게 된다. -116,117쪽

나는 전통적으로 아름다움과 추함이, 즐거움과 고통이 각기 서로 대립해온 점을 습관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비범한 상황들에 대해 진정 반대의 위치에 있는 것은 중립적인 편안함에서 오는 진부함이며,이 진부함을 다른 것보다 문제시했기 때문이다.이것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라고도 볼 수 있다. 둘째,미술시장에 관해 논할 때 내가 '상업'과 자본주의'를 동일시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독자들은 알 것이다. 여기서 상업은 모든 인간 문화의 특징이며 자본주의는 소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듫을 괴롭혀온 체제를 가리킨다.이것은 사실의 문제다.-173쪽

오히려 메이플소프의 외설적인 사진을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예술작품으로 박제하여 논쟁을 차단해버리는 비평가들의 행동이 히키에게는 반민주적이다.-180쪽

대학 제도 내부로 흡수된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 구조주의 철학은 빠른 속도로 진보적 성격을 상실했다. 모든 것을 텍스트로 치환하는 얼치기 기호학 방법론은 젊은 이론가,평론가들을 작품 비평에서 이격시켜 세상 전체를 비평하는 돈키호테로 만들었고, 타자성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페티시즘의 등장은 소수자가 만든 수준 낮은 예술품을 함부로 비판할 수 없는 이상한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교조적 탈식민주의 연구의 유행은 똑똑한 연구자들을 근대 초기의 시각문화연구에 묶어두는 부정적 효과를 발휘했다.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이 되자, '바로 지금'의 문제와 작품 자체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좌파 미술사학자, 평론가,이론가는 어느덧 희귀한 존재가 됐다. -192쪽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4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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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하면, 나의 문화비평은 나의 장르다.장르를 이해하려면 그 장르를 지배하는, 또는 구성하는 내적 논리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나의 문화비평은 이런 장르의 논리에 기대어 불가해한 영역을 가해한 매개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노력이다. -19쪽

칸트에게 "개념"은 경험적 세계에 "선험적"으로 적용됨으로써 타당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칸트에게 개념은 선험적 비판의 근거들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런 맥락에서 칸트는 개념의 비합법적 사용을 폭로하고 그것의 합법적 사용을 궁구했다. 한편, 신칸트주의자들은 명제의 타당성이라는 것은 이런 경험적 세계와 무관하게 "논리"를 통해서 수립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가치체계나 타당성의 영역은 플라톤의 "아이디어"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플라톤에게 "아이디어"는 일종의 형식forma이었는데, 이는 절대적 인식의 대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35쪽

허위를 통해서 진실에 대한 인식을 획득하는 것, 바로 여기에서 개념을 통한 새로운 사유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40쪽



 
 
poptrash 2011-07-25 05:00   댓글달기 | URL
얼그레이효과 님 아침형 인간이시군요...!

얼그레이효과 2011-07-25 05:02   URL
아니. 팝님도 이 아침에! (근데 요즘 잠이 안 오네요..큰일입니다.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