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최근 관심을 갖게 된 소설가다. 이력에 대한 흥미. 문화연구자 출신의 소설가란 이력이 끌렸다. 최근 나온 10명의 작가가 참여한 테마 소설집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아름답고 착하게>란 작품을 거기에 발표했고, 칼국수면을 이로 끊어먹는 아이의 도입부 묘사가 좋아서 페이질 끈질기게 잡았다.


그녀의 소설집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를 샀다. 좋은 영화를 보고 나오면 대체로 좋은 몸살 기운을 안고 돌아온다. 한데 그러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시달려야만 하는 기운이었다. 좋다 나쁘다기보단 내가 휘말려서 뭔가로 빚어내야 하는 기운이었다.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를 볼 때 그랬다. 보고 와서 몸져 누웠다. 비슷한 기운. 소설집의 표제작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가 그랬다.

몸살의 연원이 잔인, 잔혹에서 오는 묘사의 수위는 아니었던 듯하다. 그럴 것 같으면 전아리 작가가 더 셀지 모른다. 뭔가 마음을 툭 건드리는 표현이 맴돌고 그게 속에서 밍밍하게 돌다가 돌덩이가 되는 그런 경우.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엔 '부산물'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그게 속을 밍밍하게 했다.

낙태의 경계에 있는 아이를 의미하는 그 표현은 '실토'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서 작품의 미묘한 잔혹함을 뒷받침하는 핵심어다.

형과 동생이 등장한다. 기이한 형이 있고 세상의 여자들은 그 형을 사랑했다. 화자인 동생은 병약한 병신이라 불리운다. 형만이 동생을 병신이 아니다라고 해준다. 온화는 불화를 조장한다. 작품은 이 불화를 형과 동생의 직접적인 갈등으로 넣지 않는다. 그사이에 형을 좋아한 그녀가 있다.

병신인 동생은 병신이 아니야라고 해주는 형을 위해 뭔갈 해야 했다. 형은 동생에게 형의 그녀가 있는 곳으로 잠입하라고 시킨다. 그녀가 부산물이라고 하는, 존재의 상태. 아이를 지우기 위해서다. 동생은 형의 그녀와 살면서 그녀를 병신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순간을 노리는 생활이 시작되었고, 작품은 그 죄책감을 페이지의 분위기로 끌어낸다.

사람은 악취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 그것을 사랑한다는 귄터 그라스의 말이 이 작품에 인용되는데, 작품엔 정말 악취가 난다. 비린내에 가깝다.

소설집 속 해설이 추려주는 관점이기도 하지만, 박민정 작가는 '가족 불능'을 시인해버리는 '고의적 미성장'이란 지점에 관심이 많은 듯 보였다.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도 해당된다.

인물들은 성장과 성숙에 관심이 없다. 아니, 아예 그것을 '놓아버리는' 인물들이다. 놓아버린다는 건 지쳤다는 것이다. 혹은 부러 놓아서 누군가 자신을 지치게 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래야 그 고단함이 자신의 악취미가 된다.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는 고단함이 악취미가 된 이 세상의 세태를 묻는다. 악취미는 튼튼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비릿한 게임 언어가 되어 누가 더 잘 지치는지 시험한다. 누가 더 잘 이 세상을 '놓아버릴 것인가' 대책도 대안도 없다. 통제불능의 상태.

저는 짐승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전 글러먹었으니 제가 당신을 안 잡아먹기보단 차라리 당신이 제게 안 잡히도록 도망가세요란 '미안함'은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에서 느낀 몸살 기운이었다.
오늘날 미안하다는 말은 악취미적 인사가 되었다. 


시달릴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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