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홍상수 감독의 <북촌 방향>을 총 36씬으로 나누는 편이다. 즉흥이 곧 규칙이 되는 그의 영화답게 9번째 씬-17번째 씬-25번째 씬, 이렇게 8개 장면 단위로 작품의 주무대 술집인 '소설'이 나온다.


2. <북촌 방향> 속 인물들의 대화는 성격심리학에서 '개인구성개념'이라 부르는 내용에 충실하다. 이는 '나'가 낯선 누군가를 만나, 자신이 보유한 사람의 감정지식이 담긴 고유의 틀에 따라, 그 상대가 어떠한 사람인지 정리하고 평해주는 태도를 뜻한다. 본 영화에선 유난히 '난 어떤 사람인 것 같아요?'란 질문이 많다(홍상수 영화엔 이 질문이 자주 나온다). 영화의 주인공인 영화감독 성준(유준상), 그의 선배인 영화평론가 영호(김상중), 또다른 선배인 영화배우 중원(김의성)은 그 질문에 능수능란하면서도 확신에 찬 답을 내놓는다.


3. 이 영화의 공인된 하이라이트는 아마도 36번째 씬에서 성준이 사진가인 한 영화팬(고현정)을 만나 기념사진을 찍기 전까지 예전에 알고 지내던 영화 관계자와 우연히 조우하는 씬의 연속일 것이다. 이는 같이 술을 마신 영화학과 교수 보람(송선미)이 술자리에서 꺼낸 화제가 그대로 이행되는 것이기도 하다.


4. 17번째 씬.보람은 중원이 끼어 새 술자리가 된 소설에 오기 전까지, 20분간 영화감독, 영화제작자, 음악감독을 우연히 차례로 만난 일이 너무나 신기하다며 이야기한다. 이에 성준은 이유가 없는 게 이유라고 답한다. 삶은 어쨌든 나름의 살만한 이유를 사람들이 조합해가며 산다는 맥락에서, 성준은 스스로 누군가의 성격이나 특성을 파악하고 평해주는 자신의 태도를 자신도 모르게 조롱한다. 이는 같은 자리에 있던 영호와 중원의 태도에도 해당된다.












5. 홍상수의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보법'(걷는 법)을 눈여겨본다. 여기서 보법이란 어떻게 걷느냐가 아니라, 다리와 발이 딛고 있는 땅이란 현실감각이 무색해지는 어떤 몽환에 가깝다. 다리와 발이 디디는 땅에선 말이 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게 정상이라 생각하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이를 늘 어긴다.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평범한 말들("넌 참 착해" "좋은 사람이야" "넌 특별해")에 집착하며 생각을 하고 살아야겠다며 매번 다짐한다. 
벤야민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그들이 걷는 이 도시 속 장소엔 늘 꿈나라가 스며들어 있다. 
각성하면 괴롭지만 그렇다고 각성하지 않으면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다는 처연한 핑계로 홍상수가 늘 집착하는 김현의 명제인 '잘 살아간다는 것/살아볼만한 것'의 의미를 부착하고 지내야 하는 인물들이 그려진다.


그러나 홍상수 영화에서 인물들의 각성 여부가 중요한 건 아니다. 그래서 인물들은 늘 덜 깨어 있다. <북촌 방향> 속 인물들의 안부 인사가 "ㅇㅇ야 너 되게 피곤해 보인다"라는 건 그저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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