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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가 카톡 목록을 본다. 주르륵 바를 넘기다가 평소 늘 활발한 셀카를 올리던 친구 G의 프로필 사진이 기본형으로 되어 있어 뭔 일이 있나 골똘히 생각해본다. J가 카톡 메시지를 보낸다. “요즘 마음날씨는 좀 어떠하니?” 1이 언제쯤 사라지나 기다리다가 J는 다른 일을 한다. 그러다가 다시 1의 사라짐을 확인한다. 마침 G가 답을 한다. “별일 없어. 그냥 그럭저럭 살아.^^” J는 “다행이다:)”란 답을 남긴다.

 

근데 뭔가 마음이 묘하다. “그럭저럭”이란 G의 표현에 안도하면서도 G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면 싶은 생각이 든다. 가만히 있으면 될 걸 J는 기어코 G의 고민거리를 짜내려고 노력한다. 기억력이 좋은 J는 친구들이 사소하게 던진 말들을 잘 줍는 능력이 있다. G에게도 그 능력을 써먹는다. “지난번에 고민하던 그 일은 어떻게 잘 해결되었니?” J는 이 질문을 던질 때 G가 무슨 말을 할지 답변의 유형까지 미리 예상하고 있다. J는 자신이 타인에게 평가받는 것에 신경을 쓴다. 그것도 무척. 고로 G가 이왕이면 “와 고마워. 그걸 기억해주다니”란 말로 답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질문을 던진다. 대신 “??”이라든지 “그건 그냥 내가 알아서 할 게”라는 답변만은 아니길 바란다. 자신의 섬세함이 거부당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J와 같은 사람을 다룬 책들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 매사에 진지하면서도 지나치게 섬세한 촉수를 가진 사람들. 이들은 예민함이란 어감까진 받아들이지만 깐깐함이란 어감으로 자신을 평하진 않았으면 하고 타인을 향해 디테일을 도모하는 사람들이다.

이른바 ‘내향적인 사람들의 장field of Introvert’이 하나의 지적 담론으로 구축되면서 섬세함이 지나친 사람들은 현대인의 인상적인 유형으로 주목받고 있다. 일찍이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은 「대도시와 정신적 삶」이란 에세이를 통해 도시 속 신경/감각 과민 vs 둔감함이라는 정서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다. 심리학적 현미경이 동원된 사회학으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분석하길 좋아했던 짐멜에게 이 사회란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만나 벌이는 세심한 상호작용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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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회적 상호작용에 기반을 둔 내향성의 역사는 의외로 두텁다. 심리학자들은 오랫동안 자신만의 방식으로 ‘신경계로서의 도시와 도시인’을 주목했다. 감각과 자극에 예민한 이들은 그들만큼이나 예민한 학자들의 레이더에 포착되었다. 학자들은 내향적인 것이란 게 무엇인지 자신이 만난 이들의 서사를 기록하고 편집해 설득력을 얻고자 노력했다. 특히 심리학계는 내향적인 사람들의 장을 통해 ‘꿍꿍이’를 분석하는 데 애를 썼다. 그 노력의 성과로 타인에 대해 지극히 너그럽고 이해심 많은 이가 실은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을 시 나오는 부정적 에너지가 상당한 사람이라는 견해를 반복적으로 제시했다. 조력자로서 타인에게 다가가려는 섬세함이라는 메시지가 실은 자신이 구상해놓은 배려의 완벽한 지도를 타인이 제발 무너뜨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맞닿아 있다는 주장이 인기를 얻었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신이 평소에 구축해놓은 자아의 지도와 맞닿아 있는 이 완벽주의적 성향은 간혹 선택공포증에 걸린 이의 우유부단함으로 연결되기 쉽다. 허나 섬세한 사람들의 평가지향성은 이 우유부단함마저 자신의 완벽한 자아에 해가 되는 것을 알기에 나름의 선택항을 준비하여 상황을 진정시키는 데 쓰인다.

 

J와 G의 카톡 대화로 돌아가자. G에게서 뭔가 심각한 일이 있었으면 했지만 밋밋한 답변이 돌아온 것에 대해 실망한 J는 “언제 한번 우리 맛있는 거 먹자^^”라며 애써 마음을 감춘다. 그러면서도 J는 자신의 섬세함이 짜둔 설계도를 접지 못한다. “고마워”라는 답변이 도착하자마자 “우리 이거 늘 하는 빈말 되면 안 되니까 아예 시간을 박아버리자”라는 답변을 남긴다. “나는 언제든 괜찮아. 네 편한 시간에 맞출게”라는 친절어린 말을 해놓고 이것 또한 허언으로 받아들일 것 같은 마음에 J는 용기를 내어(?) 옵션을 건넨다.

 

섬세한 사람들의 그 선한 인상과 제스처는 간혹 타인으로 하여금 그가 ‘랜덤형 인간’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섬세한 사람들은 “당신이 좋아하는 건 아무거나”에 따른 침묵과 그 어색한 상황을 지극히 싫어하기에 차라리 자신이 미리 그 곤욕을 방지할 대비책을 세우는 걸 즐긴다. 심리치료사 크리스텔 프티콜랭은 자신의 저서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에서 이런 섬세한 사람들을 ‘정신적 과잉 활동인’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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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이런 명명을 통해 섬세함이 지나친 사람들을 요즘 유행하는 심리학적 인간으로 몰아세우고 싶진 않다. 다만 이들이 심취해 있는 테마를 통해 우리가 늘 옳다고 여겼던 가치를 다른 시선으로 재고할 필요성을 느낀다. 섬세함이 과한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 세 가지에 중독되어 있으며 여기서 삶의 재미를 느낀다. 이들은 ‘의혹의 중독자’이자 ‘경청의 중독자’이며 ‘성찰의 중독자’이다. 일찌감치 ‘내향성의 사회학’을 고민했던 사회학자 랜들 콜린스는 『사회적 삶의 에너지』에서 내향성의 여러 유형을 분석한다. 그중 콜린스가 보기에 내향적인 지식인은 유난히 과잉 성찰 상태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과잉 성찰 상태는 일반인도 예외는 아니라고 본다. 성찰성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여기서 길게 따져보기란 무리가 있지만 적어도 섬세한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갖는 자기반성의 능력은 탁월하다. 이들은 조목조목 자신의 오류를 잘 짚어내는 반성문 쓰기의 달인이다.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할 따가울 말을 미리 봉쇄해버린다. 이 봉쇄의 효과가 과하면 타인의 주눅 든 상태를 이용해 심리적 방어선을 긋는다. “제가 잘못한 게 있으면 지금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란 표현은 역설적으로 그의 폐쇄적 성찰 상태를 열린 그것으로 만들어버린 듯한 착각을 안긴다.

 

 

말을 퍼 나르는 사람은 있으나 말을 되새기는 사람은 없다는 언어의 무력함을 여기저기서 호소하는 시대에 경청이라는 용어는 성찰이란 구태의연하지만 스테디한 해결책과 함께 인기 있는 인문주의적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경청 만능주의 또한 간혹 타인이 누리고 있는 평온한 일상을 지나치게 문제 있는 사람으로 보려는 태도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마음속에 섬세함의 경우수를 만들기 좋아하는 이들은 간혹 다른 사람들의 삶이 지나치게 심심하고 평온하다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한다. 그리하여 “요즘 뭐 힘든 것 없니?”라는 조력의 메시지는 ‘끄덕끄덕’이라는 자신의 에너지를 투여할 사람 찾기가 되어버린다.



 

심리학자 볼프강 슈미트바우어는 『무력한 조력자』에서 경청에 중독된 사회복지사 프란츠의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바깥일에서 남의 사연을 귀담아 듣는 것에 익숙한 프란츠는 집에 와서도 직장에서의 감각을 유지하려 애쓴다. 그 대상은 자신의 아내였다. 그는 집에 돌아와서 자신이 일을 하는 동안 아내에게 무슨 일은 없는지 깊고 세밀하게 파고들었다. 정작 아내는 할 말이 없었다. 허나 프란츠는 이를 추궁할 정도로 아내에게 문제의 계발을 원했다. 이에 짜증이 난 아내는 외려 프란츠에게는 심리적인 위안을 주었다. 자신의 고된 조력 활동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공격성이 간혹 아내에게 분출될 때 ‘거봐 내가 뭐라 그랬어’로 시작되는 정당화를 맛보고자 프란츠는 은밀하게 아내의 예민함이 분출되도록 도발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런 도발이 곧 프란츠에게는 하루를 버티는 에너지였던 셈이다.

 



프란츠를 비롯해 섬세한 감각을 가지고 타인의 문제를 끄집어내는 사람들은 만남을 통해 타인의 장점을 끄집어내는 재주도 출중하다. 섬세한 사람들은 자신의 간파 능력을 즐긴다. “와 그런 말은 지금껏 처음 들어본 것 같아요”라는 답변을 기대하면서 섬세함이라는 골병에 걸린 사람들은 매력을 발견하는 자신의 능력을 기꺼이 시험대에 올린다.

 

내향성 연구의 권위자 소피아 뎀블링은 『나는 내성적인 사람입니다』에서 관찰자라는 특성을 지닌 내향적인 사람들에 주목한다. 사람 관찰하기 좋은 카페나 극장은 섬세한 사람들이 자신의 관찰력을 뽐낼 최적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들은 늘 남들이 잘 보지 않는 장면을 포착해 공유하길 좋아하며, 거기서 자신의 영민함을 은근히 인정받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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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함이 골병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확인하는 건 결국 털털하고 둔감한 사람들과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그 조화불가능성에 있다. 대개 섬세함은 예찬의 수준으로 두루두루 회자되지만 그것이 지나친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난 그거 별로던데”라는 말이다. 자신이 쏟은 마음 에너지만큼 회수되지 못한다는 감정에 도달하면 섬세함이란 골병을 앓는 사람들은 자신이 잘 수행하는 연극성에 혼란을 느낀다. 어쩔 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섬세함이 과한 사람들은 간혹 자기부정의 극대화를 꾀해 상황을 모면하려 한다. 누군가 자신을 치켜세운다면 언제든 “별말씀을요”라는 한마디가 준비되어 있다.

 

그러면서 상대방의 장점을 과하게 열거하며 그 사람이 사실 나와 맞지 않음을 선언해버린다. 이를 포착한 제3자가 “그럼 나에 대한 칭찬은 가짜야?”라고 물으면 “난 그런 과한 칭찬을 할 때는 그런 상황이란 걸 미리 말하고 계속 이어나가. 넌 물론 예외지”라는 멘트도 준비하면서.

 

지금껏 이 모든 해석은 그간 섬세함이라는 골병을 앓아온 나에 대한 분석이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여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원히 그럴지도 모른다. 미안하다. ‘영원히’라는 표현은 함부로 쓰는 게 아닌데……. 근데, 나 또 미안하다고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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