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년에 나온 계간지 기획 중 가장 주목할 기획을 개인적으로 꼽는다면 『F』5호(2012)일 것이다. 부르디외 타계 10주년을 기념해 기획한 '부르디외를 읽자' 는 작은 몸집에서 우리가 고민할 수 있는 큰 이야깃거리를 잘 생산해냈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 기획의 각 꼭지 가운데 부르디외의 제자이자 우리에겐 『가난을 엄벌하다』로 잘 알려진 사회학자 로익 바캉의 회상 「부르디외를 기억하며」도 좋지만 재미있는 꼭지는 부르디외가 『문화재화의 경제』(가제)라는 제목으로 출간하려 했던 한 장의 초고인 「아노미의 제도화: 19세기 프랑스 미술계에서의 상징혁명」이었다고 본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면, 일단 이 짧은 초고에서 우리는 '예술사회학'이라는 학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술사회학도가 무엇을 연구하는지를 알려줄 수 있는 꽤 다양한 범주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1-주

한국에는 아직 예술사회학이 많이 확산되진 않았다. 국내에는 부르디외 일급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이상길 교수가 가장 '예술사회학다운' 연구와 학술적 실천을 하는 가운데, 한준과 최샛별 교수 등등이 부르디외의 문화자본, 경제자본, 사회자본이라는 주요 개념을 통한 한국 사회의 문화적 취향도를 그리는 데 매진하고 있다. 이상길 교수가 보다 이론적 토대를 닦으려는 데 집중하고 있다면, 두 학자는 실증 연구에 주력하는 편이다. 





2

그간 내가 예술사회학에서 받은 인상을 쉽게 풀어보면 '뒷담화의 전환술'이라고 이름붙여볼 수 있을 듯하다. 다들 알다시피 미학은 작품-텍스트의 가치 판별/판단에 주목한다. 그 작품이 왜 뛰어나며,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철학적 사유를 동원한다. 그리고 그 사유와 연관된 역사 또한 검토한다. 이 역사에는 우리가 감탄해마지않는 작가에 대한 천재성도 꼭 들어가곤 한다. '천재성'이라는 키워드를 연결고리로 삼아 예술사회학으로 돌아오자면, 예술사회학은 그 천재성이란 것에 대한 '사회학적 의혹'을 제기하는 학문이다. 작가의 천재성을 둘러싼 사회학적 요인, 더 쉽게 말해서 관련성과 관계성을 꼼꼼히 파헤쳐보려는 학문이다.가령 이 작가가 '명성'을 얻는 데 드는 경제적 비용은 어떻게 따져볼 수 있을까? 경제적 후원을 해주는 스폰서의 위치와 역할은? 이 작가가 지금의 위치에 있는데 유지되는 인간 관계적 특성은 무엇일까? 그를 둘러싼 예술가들의 커뮤니티 유형과 그 성격은? 이 작가의 천재성 혹은 그 작품 세계에 스며든 인문적 메시지를 휘감는 맥락은 무엇일까? 그의 전공은? 학교는? 지도교수는? 그리고 아카데미가 부과하는 예술적 규범이란 것도 있겠지?


예술사회학은 당신이 갤러리에 가서 "야야 이 작가 이야기 들었어?"로 시작하는 뒷담화를 어쩌면 조금 더 체계적인 학술적 체계에 담은 연구일지 모른다. 그래서 이 학문의 운명은 '정말 신선한 학문'이거나 때론 '좀더 괜찮은 뒷담화' 수준일 수도 있는 가녀림을 지녔다.


3

암튼, 다시 본문 이야기로 돌아와서 「아노미의 제도화」는 당신이 예술사회학이 무엇을 공부하는 학문인지 감을 잡는 데 도움을 주는 아티클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 부르디외가 다루는 것은 결국 대중이 '무형의 그 틀 없는 상태'라고 여기는 예술이 결국 '무형의 틀' 속에 있다는 주장의 경험적, 역사적 진술이다. 

3-주

나는 부르디외의 이론을 '무형의 틀'이라고 부르기 좋아한다. 그가 늘 강조하는 하비투스, 장 이론에 스며든 비구조적 속성 가운데 나타나는 구조성. 즉 자율적인 무엇으로 보이는 무엇을 통제하는 하나의 구조적 작동, 하지만 그 구조 또한 자율적인 무엇에 의존해야 유지될 수 있는 관계를 설명하기엔 '무형의 틀'이라는 모순적인 표현이 어울릴 것 같았다. 


예술가, 더 나아가 작가는 자신의 예술적 자율성을 만들어가는가. 결국 이 예술가들이 줄다리기하는 경제자본(돈)과의 관계, 무엇보다 작가 자신의 예술적 세계관을 보이는 데 큰 작용을 한다고 볼 수 있는(적어도 부르디외에겐) 아카데미, 학문 사회와 예술가들의 존재를 직간접적으로 책임지는 국가 소유의 예술기관들이 부과하는 일종의 학문적 양식과 규범들(문화자본)에 대한 수용과 저항 등은 결국 우리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예술 작품의 액자 속 틀이 말해주는 것과는 다른 틀에서 논의해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어쩌면 더 나아가 작품의 액자 속 틀과 지금껏 말해온 부르디외의 논의 틀은 섞여 있다고 볼 수 있다.


4

다만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늘 그렇듯이 한 개인의 행위에 대한 사회학 특유의 의혹은 '전략과 의도'라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작품을 '순수하게' 즐기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이 학문이 그리 맞진 않을 것이다. 이 학문은 제법 우아한 '뒷담화'이지만, 한편으론 '뒷담화' 특유의 차가움도 가지고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왜 작가들의 가치관을 그런 식으로 의심해야 하지?라는 질문에 대해 예술사회학자들은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변론으로 그 어떤 학술적 주장과 수사들이 동원될 수 있겠지만 다만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진부한 결론은 지금 이 세계를 더 깊고 색다르며 유의미하게 바라볼 수 있는 도구를 준다는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오늘날 자본에 잠식되어버린 예술 혹은 예술가들의 세계를 우리가 더 구조적으로 접근하면서 '학술적 실천'이 가져다주는 앎으로서 대상의 비극에 더 다가가려는 제스쳐가 될 수 있겠다.


5

다만 예술사회학의 운명이 더 기대되는 대목은 바로 이 아티클에서 강조하는 '상징혁명'이다. 국가와 아카데미에 예속되어 있던 예술가들의 양식과 그 가치관들에 저항하며 나타난 신진세력들의 행위와 그것을 떠받드는 사회학적 요인들의 매혹은 예술사회학에서 느낄 수 있는 어떤 오르가슴이다. 무엇보다 이런 오르가슴을 느끼게 하는 매개자의 역할로 예술사회학은 비평가를 주목하며, 예술사회학은 또한 '비평가의 사회학'을 만드는 데 앞장서고 있다는 데서 흥미로운 학문이기도 하다. 예술계의 구세력과 신진세력의 충돌 속에서 비평가들은 구세력의 옹호자이기도 하며, 신진세력은 자신들의 메시지를 이해시키기 위해 자신 스스로가 비평가가 되며, 혹은 '친구'로서의 비평가와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우리는  부르디외가 다른 글에서 꺼낸 미켈란젤로의 한 일화를 확인한 채 이런 상징혁명의 쾌감을 유지해보려는 연습을 시도하면 될 것이다. 그것이 이어진다면 우리는 새 시선도 다음과 같이 더불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자주 그렇게 하듯이, (상업권력, 경제권력 쪽에 놓이거나 혹은 진보와 혁신 쪽에 놓이는) '전지구화'와 문화주권의 보존이라는 고루한 형식과 결부된 민족주의를 대립시킨다면 문제를 잘못 제기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실상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들은 전 세계에 '비즈니스'의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확장하고자 하는 상업권력과 그것들을 통치하는 사람들 간의 투쟁이기 때문이다. 관건은 창작자들의 국적 없는 인터내셔널이 생산한 문화작품의 보편성 옹호에 바탕을 둔 문화의 저항이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대단한 후원자였던 교황 율리우스 2세와의 관계에서 의전상의 형식을 거의 지키지 않았다. 그래서 교황은 미켈란젤로를 앞서 가기 위해서 언제나 최대한 서둘러야만 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미켈란젤로가 제시한 이 전통을 지속시켜야만 한다. - 피에르 부르디외, 「문화의 생존 가능성」중 (이상길 옮김) 


덧붙임) 그리고 예술사회학이 숨겨놓은 또다른 반전은 그 신진세력이 저항하는 새로운 가치관 또한 언제든 예술사회학이 쳐놓은 '무형의 틀'에 예속될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모순적인 내 해석과 표현이지만, 그들은 새로워지자마자 그들은 곧 옛사람이 될 각오를 해야 한다. 예술사회학은 그 지점 또한 놓치지 않고 해석할 준비를 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