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철학자다 - 부르디외의 하이데거론 이매진 컨텍스트 5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김문수 옮김 / 이매진 / 2005년 6월
절판


무엇보다 방법 훈련의 일환인 이 텍스트는 고발의 지평과는 다른 지평에 서 있다. 과학적 분석은 소송의 논리나 그 논리가 제기하는 질문들(하이데거는 나치였는가,하이데거의 철학은 나치다운가,하이데거를 가르칠 필요가 있는가 등등)과는 하등 관련이 없기에,오늘날 그 철학자를 에워싸고 있는 병적인 흥분이,아마도 여전히 때맞지 않을 이 작업을 환대하는 데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지는 확실치 않다.-9쪽

1)시간성 이론의 핵심에 감춰져 있는 사회보장 국가에 대한 저주,2)방랑에 대한 저주로 승화된 반유대주의,3)나치참여-그 흔적은 융거와 나눈 대화에서 빙빙 돌려 표현된 여러 암시들에 역력히 남아있다-에 대한 참회의 거부,4)초보수혁명주의 - 이것은 근본적 극복이라는 철학적 전략을 채택하는 데서나, 히틀러 체제와 단절하는 데서나 주요한 영감이 된다.특히 히틀러 체제와의 단절은, 휴고 오트가 보여 주었듯이,철학적 지도자의 사명을 떠맡으려는 철학자의 혁명적 열망이 인정받지 못한 데 따른 환멸로 인한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하이데거의 여러 텍스트에서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정통 독해의 수호자들은 이와 같은 정치적 함의들을 거부한다.-10쪽

*(얼그레이효과: 사팔뜨기,란 용어는 여기서 부르디외가 말하고자 하는 시각을 간결하게 보여주는 것 같단 생각이다)사팔뜨기. 이 말은 문법적으로 처음에는 어떤 뜻을 공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구성상 상당히 모호한 표현법을 지녀 명료한 발성이 매우 곤란한 구절을 말할 때 쓰인다.따라서 한 구절이 '사팔뜨기'가 되는 것은 그 구절을 구성하는 낱말들의 특수한 배치 때문이다.즉 낱말들이 처음 볼 때는 특정한 관계를 맺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관계를 맺을 때 그 구절은 '사팔뜨기'가 된다. 마찬가지로 '사팔뜨기'인 사람은 어떤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른 곳을 보는 사람이다. -11쪽

적합한 분석은 이중의 거부 위에 구축된다.그것은 우선 텍스(13)트를 그것이 생산된 가장 일반적인 상황으로 곧바로 환원해버리려는 시도를 거부한다.뿐만 아니라 그것은 철학적 텍스트가 절대적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또 이 주장과 상관적으로 모든 외적인 참조를 거부하는 방식 역시 거부한다.물론[텍스트의]독립성은 인정될 수 있다.단, 이 독립성이 철학장의 내적 작동 방식을 관장하는 특수 법칙들에 대한 의존성의 다름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확히 이해하는 한에서만 그렇다.마찬가지로 [텍스트의]의존성도 인정될 수 있다. 단 의존성이 오직 철학장의 특수 메커니즘을 매개로 해서만 관철된다는 사실로 인해 텍스트의 효과들이 겪게 되는 체계적 변형을 염두에 두는 한에서만 그렇다. -12,13쪽

따라서 근본적으로 모호성에 따라 규정되는 글,말하자면 두 정신적 공간에 대응하는 두 사회적 공간에 준거하여 규정되는 글에 대해서는,철학적 독해 대 정치적 독해라는 대립구도를 포기하고,이중적 독해,곧 정치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독해를 해야만 한다.-13쪽

나치와 가깝다는 이유로 하이데거 철학을 비난하는 비방자든,나치참여와 하이데거 철학을 분리시키는 찬양자든 다음과 같은 점을 무시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한다.곧 하이데거의 철학이란 철학적 생산장이 강요하는 특수한 검열 때문에,하이데거를 나치즘에 밀착하(14)게 했던 정치적,윤리적 원리들을 철학적으로 승화시킨 것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는 점 말이다. 전기적 사실과 저작의 내적 논리를 연결시키지 않은 채 끈질기게 전기적 사실만을 물고늘어진다는 점에서 하이데거 적대자들은 하이데거 옹호자들이 명시적으로 요구한 '사실관계의 비판적 확립'과 '텍스트 해석'의 구별에 동의하는 셈이다.-14,15쪽

하이데거의 경우 바로 다음과 같은 작업이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즉 철학적 생산장의 구조,또 그런 구조에 이르게 된 전역사, 하이데거가 즐겨 했던 말처럼 철학자 단체에 '터'를 제공하고 또 그 기능을 지정해 주는 대학장의 구조,교수들의 위치와 그 위치의 변천을 규정하는 권력장의 구조를 재구성하는 일,그런 방식으로 점차 바이마르 시기 독일의 사회구조 전체를 재구성하는 일이(18)바로 그것이다.-18,19쪽

구별에 대한 실천적 숙달은 일종의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방향 감각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경우마다 희미하나마 전체적인 구별들을 생산해낼 수가 있다.이 전체적인 구별들은 다른 사용자가 활용하는 구별들과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벽히 다르지도 않다.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이것들은 당대의 모든 표현들에 통일적인 분위기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이 통일적 분위기는 논리적 분석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동시대성을 사회학적으로 정의하는 데 중요한 구성 요소 중 하나가 된다. -46쪽

시대정신이라는 통일성의 원리는 공통의 이데올로기적 모태이자 사상가들이 공유하는 공통 도식들의 체계다.겉으로는 무한히 다양하게 보이는 이 도식들은 상투적 논거,즉 사유를 구조화하고 세계관을 조직하는 근본 대립들(대략 보면 이 대립들은 서로 등가다)의 집합을 발생시킨다.-47쪽

발생적 아비투스들,곧 독특하면서도 객관적으로 일치하는 성향들의 체계들은,그것들 각자가 산출한 생산물들의 만화경 같은 다양성을 통해,또 그 다양성 안에서 통일성을 확보한다.이 산물들은 단지 다른 변종들의 변종으로서,어디나 중심이면서 중심이 어디에도 있지 않은,그런 원을 형성하는 것이다.-53쪽

이중적 거부의 산물로서,논리상 '보수혁명'이라는 자기-해체적 개념에 이르게 되는 사유는,구조적으로 모호하다.그리고 이 구조적 모호성은 그 사유의 원천인 발생적 구조 안에 각인되어 있다.왜냐하면 그것은 극복할 수 없는 일체의 대립들을 영웅적인 혹은 신비적인 도주를 통해,이를테면 앞질러서 미리 도주해버림으로써 극복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이기 때문이다.-57쪽

'철학적 감각'을 갖는다는 것은 철학적 공간에 좌표를 놓아 주는 관습적 기호들을 의식적,실천적으로 숙달한다는 것과 동일하다.그리고 바로 이 철학적 감각을 통해 전문인들은 이미 표시된 위치들을 기준으로 자기 자신을 구별할 수 있게 되며, 향후 십중팔구 자신에게 전가될 모든 비난에서 자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요컨대 철학적 감각은 전문인이 지닌 차이를 알아보게(68)해 주는 모든 기호들을 갖춘 형식 아래에서,또한 그러한 형식을 통해,전문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지닌 차이를 주장하도록 해 준다.-68,69쪽

철학적인 것으로 사회적 인정을 받은 사유란 철학적 입장들의 장에 준거함을 함축하는 사유이며,그 사유가 이 장에서 차지하는 위치의 진리에 어느 정도 의식적으로 숙달되어 있음을 함축하는 사유다.-69쪽

철학적으로 형식을 갖춘다는 것,이것은 곧 정치적으로 격식을 준수한다는 것이다.또한 특정한 정신적 공간과 분리될 수 없는 특정한 사회적 공간에서 다른 사회적 공간으로의 이전이 전제하는 형식-변경[변형]은,대체로 최종 생산물과 이 생산물의 원천에 있는 사회적 규정 요인들이 맺는 관계를 오인되게끔 한다.왜냐하면 하나의 철학적 입장은,체계를 제쳐두고 본다면 '소박한' 윤리-정치적 입장과 상동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81쪽

무엇보다도 하이데거가 지적인 장과 맺었던 곤혹스럽고도 긴장된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철학장에서 이 철학자가 차지했던 특수한 위치를 이해할 수 없다.바로 이 관계 덕분에 하이데거는 좀처럼 있을 법하지 않은 희귀한 사회적 궤도를 밟게 되는 것이다.실상 칸트 철학의 위대한 스승들에 대한 하이데거의 적대,특히 카시러에 대한 적대의 뿌리가 바로 아비투스간의 심층적인 적대에 있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89쪽

물론 겉모습에 사로잡히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그렇지만,이미 스승과 제자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이 '명석한'대학 선생의 '실존적인 의상'과 지방색 강한 말투에는 무언가 과시적인 데가 있다.이 모든 것,그리고 농부 세계를 이상화시키는 언급 역시 허식으로 느껴지며,기껏해야 지성계와의 곤란한 관계를 철학적 태도로 바꾸는 한 방식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명석하면서도'벼락출세한 자,배척되면서도 배척하는 자,하이데거는 지성계에 또 다른 지적 삶의 방식,-91쪽

말하자면(가령 텍스트를 대할 때나 언어를 사용할 때는)더 '진지하고' 더 '고심'하는 또 무엇보다도 더 총체적인 지적 삶의 방식을 도입했다.다시 말해,과학에 대한 반성으로 축소되어 버린 철학의 옹호자들보다 더 크고 막중한 책임을 위임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도,그 대신 목자의 사명과 낙원의 도덕의식 역할을 자임함으로써 절대적이로 비타협적으로 모범적 실존에 참여하는 사유의 스승이라는 삶의 방식을 지성계에 도입한 것이다. -92쪽

위치들이 체험되고 입장들이 규정되는 것은,공감이나 반감,분개나 동조 같은 감정 속에서 어느 정도 혼돈되어 지각되는 바로 이러한 감각적인 외형에 의거해서 가능해진다. 철학장에서 하는 성공적인 투자와 이동은 윤리적이며 정치적인 동시에 철학적인 놀이 감각을 전제한다. -96쪽

철학적 전략은 곧 철학장 가운데서 수행되는 정치적 전략이기도 하다.가령 형이상학에 대한 칸트적 비판의 토대에서 형이상학을 발견한다는 것을,곧 칸트적인 전통에 결부되어 있는 철학적 권위라는 자본을,'수백 년간 찬양되어온'이성 내에 사유의 가장 끈질긴 적'이 있음을 감지해내는 본질적 사유에 이익이 되게끔 유용한다는 것이다.이것은 신칸트학파와 싸우되,칸트 철학의 이름으로 싸울 수 있게 하는 최고의 전략,따라서 칸트 철학에 대한 이의제기에서 얻는 이윤과 칸트의 권위에서 얻는 이윤을 모두 축적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최고의 전략이다.이런 식의 전략은 모든 정당성이 칸트로부터 유출되는 장에서는 드문 것이 아니다.-108쪽

말로써 수행되는 전회는 실존하는 것의 본질적 역사성을 주장함으로써,또한 존재,즉 무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에다 역사와 시간성을 새겨 넣음으로써,역사주의를 피할 수 있게 해 준다.이런 전회야말로,철학적 문제를 다룰 때 보수혁명이 가동시키는 모든 철학적 전략의 범형이다.늘 근본적인 극복을 원리로 삼는 이 전략들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듯 가장하여 결국 모든 것을 보존할 수 있게(113)한다.이것은 바로 상반되는 것들을,야누스처럼 두 얼굴을 지닌 사유 속으로,따라서 얼굴을 돌릴 수 없는[불가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얼굴의 모든 면을 동시에 정면에 오게 할 수 있으므로-사유 속으로 다시 통일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 요컨대 본질적 사유의 방법적 극단주의는, 우파를 좌파의 좌파가 되도록 아니면 좌파를 우파의 우파가 되도록 전회의 지점까지 이끌어 감으로써,좌우파의 가장 급진적인 테제를 모두 극복할 수 있게 해 준다. -113쪽

저작에 대한 두 가지 독해의 구별을 저작 자체 내에다 설정해두는 것,이것이야말로 격에 맞는[순응적인]독자를 얻는 수단이다. [저작 내에서]극히 껄끄러운 신소리나 뻔한 진부함을 발견할 경우,격에 맞는 독자는 자신이 지나치게 잘 이해했을 뿐인데도 자기 이해의 본래성을 의심하여,결정적 신기원이라고 간주된 저작을 자기 자신의 이해 척도로 판단하기를 스스로 금하면서,자기도 모르게 결국 대가의 감시 아래로 되돌아간다.-163쪽

하이데거 언어의 가장 특수한 효과로 보이는 것들,특히 설교투의 부드러운 수사를 구성하는 그 모든 효과들,무한하고 끈질긴 주석-고갈될 수 없는 정의를 통해 한 주체를 고갈시키려는 의지로 정향된-의 모태로서 기능하는 한 성스러운 텍스트의 여러 말들에서 일어나는 변이, 이것들은 베버가 말했듯,'강단예언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비범하다는 가상을 일상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게 해 주는 전(168)문적인 곡예와 술수의 표본적인 극한에 불과하며,따라서 이러한 가상에 대한 절대적 정당화에 지나지 않는다. -168쪽

다른 때 같으면 무례하다고 곧바로 기각되었을 하이데거'정치사상'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졌던 데에는,중립성을 지키라는 학적 명법에 대한 위반,철학자를 나치당에 가입시키는 것만큼이나 예외적인 위반이 필요했다.하지만 이런 위반 역시 중립화의 한 형식이다.왜냐하면 철학 교수들은 정치로 열려 있는 준거를 철학에서 배제하는 정의를 너무나 깊숙이 내면화한 나머지,결국 하이데거 철학이 철저하게 정치적이었다는 점을 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69쪽

말들을 미처 다 이해하기도 전에 이루어지는 이해는 여전히 표현되지 않고 억압된 표현적 이익과,격에 맞는 표현,즉 이미 철학장에 암묵적으로 수용된 규범에 맞게 실현된 표현,이 둘의 만남에서 생겨난다.-170쪽

우리는 철학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고유한 철학적 가상이란,특정한 언어의 채택으로 환원되지 않으며,오히려 같은 낱말에서[그것이 지닌]여타의 의미들을 제거하게 하는 특정한 정신적인 태도의 채택을 전제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물론 모든 사람들이 철학적 담론을 건드려볼 수 있을지 모른다.하지만 그것을 진정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다음과 같은 이들뿐이다.-183쪽

즉 알맞은 코드만 가진 것이 아니라,구문들을 알맞은 명부에 위치시키면서,곧 철학이라는 사회적 공간에 본래적으로 참여한 모든 이들이 공유하는 정신적 공간에 위치시키면서,구문들의 고유한 의미를 공명하게 할 읽기 방식을 가진 사람들 말이다. -183쪽

옮긴이 후기 中 하이데거를 통해서 철학장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려는 부르디외 기획은 자연스럽게 철학과 사회학의 관계에 대해 물음을 던지게 한다.(중략)하이데거에 대한 부르디외의 비판적 분석은 당대 철학에 의해 억압받아온 사회학의 복수이자,인문학에 있어서 늘 사회학과 경쟁관계에 있는 철학에 대한 사회학의 우위를 간접적으로 선언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도 있다. 부르디외 자신은 "철학에 대한 진정한 사회학적 분석은(.,.)철학들과 그것의 계승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며,따라서 철학자들의 유산(190)에 새겨진 사유되지 않은 것에서 철학자들을 자유롭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말한다.-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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