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테리 이글턴의 《이론 이후》를 읽다가 의미를 좀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을 발견했다. 그 대목은 아래와 같다. 

인간과 다른 동물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다고 주장해온 인본주의자들은 양자를 비교할라치면 질색하곤 했다. 오늘날에는 문화주의자들이 이런 비교에 불쾌해한다. 인간의 본성이나 본질 같은 개념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문화주의자들은 인본주의자들과는 다르다. 그러나 한편에는 언어와 문화를, 다른 한편에는 잔인하고 말 못하는 자연을 놓은 채 양자를 날카롭게 구분하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인본주의자들과 같다. 혹은 그렇지 않다면 문화주의자들은 시종일관 문화를 통해서 자연을 개척해야 한다고, 자연의 물질성을 분해해 의미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본주의자들과문화주의자들의 반대편에는 이른바 자연주의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인간성의 자연적 측면을 강조하며 인간과 다른 동물의 연속성을 보려고 한다.  

사실상 도덕은 자연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물질적인 것과 의미 있는 것을 이어준다. 요컨대 우리의 물질적 자연[본성]은 우리의 도덕적 육체속에서 의미나 가치와 융합된다. 문화주의자들과 자연주의자들은 서로 상반된 목적 때문에 이 수렴 과정을 간과한다. 인간과 다른 동물의 연속성을 무시시하거나 과대평가하는 식으로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문화주의자들이 옳다. 그들의 주장처럼, 언어를 습득한다는 것은 감각 세계를 포함해 우리의 세계 전체를 변모시키는 비약적인 발전이다

인용한 구절이 길지만, 요약하자면 이렇다. 테리 이글턴은 《이론 이후》를 통해 '문화 이론'의 형성과 역사를 그려내고 있다. 그는 특히 문화연구의 오류 몇 가지를 책 속에서 지적한다.  인용한 구절은 그 중 문화연구가 취약하다고 주장한 '도덕'의 문제를 논하는  6장 도덕에 나온다. 내가 여기서 읽고 갸우뚱한 대목은 '문화주의자'라고 번역된 대목이다. 원문에 어떻게 표기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문화연구에서 '문화주의'라는 개념이 꽤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글턴이 설명하는 '문화주의자'와 '자연주의자'의 대립 관계는 좀 엄밀하게 설명될 필요가 있다. 

더 뚜렷하게 말해보자면, 이글턴의 216쪽 내용은 '문화주의'와 '문화주의자'가 다르다는 것을 설명해줘야 한다이 대목이 정확하게 전달되려면 가령 이런 식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이글턴이 여기서 말한 '문화주의자'는 첫째, '문화주의'를 따르는 자인가? 둘째, 아니면 '문화'의 엘리트적인 개념을 신봉했던 리비스나 매튜 아놀드 같은 사람들을 따르는 '문화'+ '주의자'인가?  

첫째, '문화주의'Culturalism를 따르는 자,라면 이 책은 '문화주의'의 개념을 설명해주고, 이글턴은 여기서 이런 의미로 '기존의 '문화주의' 개념과는 다른 무엇을 설명하는 것 같다,고 해주는 것이 좋은 역자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럼 과연 '문화주의'가 무엇이길래? 문화주의는 쉽게 말해서 '문화연구'의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일종의 '정치적 기획'이라고 줄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삶의 총체적 방식'이라고 정의내렸던 '문화'. 문화는 더 이상 우리 세계의 주변부가 아니며, 무엇보다 경제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지향점이었다. 이 지향점은 나중에 '구조주의'를 받아들이는 스튜어트 홀 같은 사람을 통해 두 개로 분리된다.  

무엇보다 '문화주의'는 계급적 권력에 관심이 많았다. 고로 권력을 가진 계급과 국가의 관계를 탐구하며, 이 관계로 인해 억압 당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위치, 그리고 그 위치 속에서 그들 스스로 만들어 내는 삶 속 저항의 목소리[일종의 저항 방식]에 관심이 많았다. 이러한 맥락 아래, 문화주의는 '그들의' 삶에 직접 들어가서 삶을 기록하고 관찰하는 '연구방법론'의 의미도 포괄한다.  

(나의 설명은 크리스 바커나, 요시미 순야, 프랜시스 뮬런 같은 문화연구자의 시선을 따랐다)

자, 이렇게 본다면 테리 이글턴이 주장하는 '문화주의자'와 '자연주의자'의 대립 속에서 '문화주의'+'자'란 도식이 있을 때, 뭔가 어색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주의'의 개념을 따른다면 이는 '문화주의'의 한계를 인식했던 문화연구자들이 내놓은 대안이었던 '구조주의'와 대립 혹은 상보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 

이제 두번째 문제. 내가 보기에 이글턴이 말하고 싶었던 '문화주의자'란, '문화'의 의미 변화를 역사적으로 고찰하기 좋아했던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방식과 유사하다고 본다. 즉, 오늘날 우리의 삶 자체를 문화로 긍정할 수 있기 이전의 시대, 그 당시 '문화'가 갖는 어떤 우월성을 자신의 우월적 존재로 일치시키려 했던 사회. 그랬을 때, 이 사회를 주도했던 권력자 혹은 지식인들에게 '문화'는 일종의 질 높은 교양이자, 자신을 다른 존재와 구별짓는 '문명인'으로서의 징표였을 것이다. 고로 내가 보기에 물론 원어라는 것이 있지만, 한국어로 더 다가오는 이글턴의 구도는 '문화주의자' 대 '자연주의자'이기보다 '문명주의자' 대 '자연주의자'로 보인다. 그랬을 때 인간 본위의 사고로 인해 자연을 '구분'하려는 태도가 낳은 오류를 더 쉽게 독자들에게 인식시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다.   



 
 
이재원 2012-05-27 04:46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역자입니다 ^^;; 본의 아니게 이해를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하네요. 일단 원래 표현은 "문화주의자"(culturalist[s]), "인문주의자"(humanist[s])입니다. 제가 번역할 때 사용한 하드커버판(Allen Lane, 2003) 156~157쪽의 내용이 문제네요. 제가 이해하기로 얼그레이효과님은 "문화주의자"와 "문화연구자"를 구분하고, 이글턴이 해당 부분에서 비판하는 "문화주의자"는 사실상 "문화+주의자"(리비스, 아놀드 등)=문명주의자 아니냐, 이렇게 보시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역자로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이글턴이 말하는 "문화주의자"는 "오늘날에는"(원어로는 these days)이라는 수식어가 함축하듯이 리비스나 아놀드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얼그레이효과님이 구분하는 바로 그 문화주의자가 맞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 책의 논의 구도에서 이글턴이 말하는 문화주의자는 곧 문화연구자입니다. 더 간단히 말해서 윌리엄스나 홀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보는 게 이글턴의 논의구도입니다. 그러니 보기에 따라서는 "싸잡아" 비판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 일단 이글턴의 논의구도가 그렇다는 겁니다.

그럼 이런 이글턴의 논의구도(더불어 표현법)가 정당하느냐......하는 문제가 남는데, 저도 문화이론을 전공하고 있지만, 이글턴이 좀 과하다는 생각은 드는데 사실 저도 뭐라 딱히 잘라 말하기가 좀...... 제가 해당 부분에 "좋은 역자"로서의 개입을 못/안 했던 건 제 자신이 이렇게 (아직도!) 결정을 못 내리고 있어서입니다. 긴 해제로 퉁칠려고 했는데 좀 부족했나 봅니다 ^^;;

그런데 바커, 순야, 뮬런 등이 "문화주의자"와 "문화연구자"(혹은 문화이론가)를 딱 구분하는 법을 제시했던가요? "문화주의[자]"라는 표현이 "문화" 만큼이나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지라 저는 그 방법이 궁금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