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내 '밥상'에 죽음이 찾아온다긔?

『고기, 먹을수록 죽는다』(모비, 박지연 외, 현암사, 2011)는 '비건'(쉽게 말하면 ‘엄격한’ 채식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들의 생활 제안서 혹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짚고 넘어가야 할 사회 보고서라고 거칠게 그 내용을 줄여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책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찌들게 만드는 증거들을 만나게 된다. 이 증거는 " 아니, 이 기업이 이런 비리를 저지르고 있었단 말이야?"와 같은 '폭로'의 방식이거나, 아니면 "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화장실보다 더러운 것은 사실 부엌입니다"와 같이 상식을 뒤집는 설명으로 나타난다(흔히 통계적 수치와 함께). 이를 통해 우리는 아무렇게 방치해둔 우리네 삶의 모양을 점검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우리네 삶의 '우선순위'가 될 수는 없다. 사람들의 관심 분야를 서적 분야의 장르 선호도로 따질 수 없지만, 사람들의 우선순위에서 생태와 환경을 다룬 서적은 '재미없는' 분야, '밍숭맹숭'한 분야, 냉소적인 사람에게는 '호들갑스러운' 분야로 인식되는 듯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책을 통해 '밥상'에 놓인 것은 반찬이 아니라 '죽음을 앞당기는' 반찬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쳐보려고 노력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바쁘게 살기도 벅찬데, 이런 문제에 관심 가질 '여유'가 없다"라는 취급을 받기 쉽상인 것이다.
그러나 몇 달 전부터 '윤리적 소비'를 연구하는 동무의 작업을 도와주면서 '이런' 책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지적인 지도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2. '이런 책'을 읽는 방법 1 - '지속가능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런 책'은 환경문제부터 노동의 가치까지 '윤리와 경제'의 접점을 찾으려는 자장 안에서 읽어보면 그 연결고리가 맞아 들어가는 사례들이 있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제시되는 열쇳말 중 하나가 '지속가능성'이다. 저널리즘에서도, 기업 홈페이지나 자체 운영 경제연구소 사이트에서도, 정부 보고서에서도 보듯, '지속가능성'은 하나의 트렌드 / 국가 전략 / 기업 전략 등 다양한 형태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환경사회학이나 생태경제학 등(최근에는 인문지리학까지)의 학술 담론이 경제와 엮이면서 '지속가능성'은 뜨거운 개념이 되었다. 이 개념은 우리의 후손이 더 건강한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소중한 정신, 가치가 동반된 실천을 지금 이 세대가 지향하는 태도라는 지극히 규범적인 정의 차원뿐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적극적인 비판을 시도해보는 ‘견해들 간의 영역’으로 관심 받고 있다. 가령, '지속가능한 개발'이라고 하는 용어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속가능'과 '개발'은 서로 어울리는 걸까? '지속가능'이 강조되려면 '개발'은 그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야, 그래도 우리의 지금 삶을 유지하는 건 '개발'이라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잖아, 지속가능이 좋다고 해도 '개발'이라는 초점을 흐려선 안 돼 등. 환경 / 생태 문제가 '자본주의'와 엮이면서 생기는 모순에 대해 깊이 사고하고 의견을 제시하려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지속가능성’은 뜨는 이슈로 자리 잡았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당신이 이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앤서니 기든스의 『기후변화의 정치학』(홍욱희 옮김, 에코리브르, 2009)를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3장 <녹색운동과 그 이후>는 ‘녹색’과 ‘성장’, ‘생태’와 ‘자본주의’ 등과 같이 과거에는 접합하기 어려웠던 개념이 ‘녹색 성장’, ‘생태 자본주의’(혹은 어떤 책 제목처럼 ‘자연 자본주의’) 등의 정책으로 제시되면서, 그것이 갖는 아이러니라는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만약 저자인 기든스가 “여러분, 지구가 아픕니다. 이 지구를 위해 우리 모두 재활용에 동참해요! 우리 건강을 다 해치는 악덕 기업을 몰아내요!”와 같은 견해를 책 속에서 펼쳤다면, 이 책은 어느 녹색운동가의 강건함이 담긴 (그러나 외면받기 쉬운) 에세이 정도로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기든스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화두를 던진다. 

 

 

  

 

“우리는 자연을 신성시하거나 자연에 경외감을 갖는 태도 역시 거부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가치의 중심을 인간으로부터 지구 자체로 옮겨가고자 하는 관점도 포함된다. (중략) 녹색운동은 그 배후에 중요한 딜레마를 안고 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기후변화를 완화하고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경제 성장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일까? (중략) 우리는 녹색운동에서 나온 개념들이 과연 얼마나 유용한 지에 대해서도 자문할 필요가 있다. 그런 개념들에는 사전예방 원칙, 지속가능성, ‘오염자 부담’ 원칙 등이 포함된다”(87~88쪽)

 




기든스는 인용된 위의 세 개념들을 하나씩 설명해 나간다. 그 중에서 ‘지속가능성’은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용례 속에서 각 주체들이 자신의 입장에 따라 강조점을 달리 설정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환경주의자라면 ‘지속가능성’에, 정부와 산업계는 ‘개발’에 더 집중하기 마련(96)이라는 식이다. 기든스는 특히 이런 개념들이 일종의 ‘글로벌 스탠다드’로 제시되는 상황에서, 그 상황이 불가피하게 묵인하는 권력 관계는 없는가 묻는다. 이미 ‘개발’을 통해 높은 / 강한 자리에 있는 선진국, 그리고 그 자리에 올라서기 위해 노력하는 ‘개발도상국’이 있다고 쳤을 때, ‘지속가능한 개발’이 ‘개발’의 중요성을 희석시키고 이미 누릴 것은 다 누리는 선진국 중심의 전략으로 나타난다면 개발도상국은 이 상황을 그냥 순전히 받아들여야만 할까?라는 점은 도덕적인 비난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기든스는 개발도상국들에게 일정 수준의 ‘오염시킬 수 있는 면허증’이 발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든스의 이와 같은 주장은 호불호가 분명 갈리지만 적어도 ‘지속가능성’을 둘러싼 ‘이견’들이 우리에게 깊고 큰 고민을 준다는 점에서 참조할 만하다. 이를 통해 『고기, 먹을수록 죽는다』에 등장하는 저자의 시선을 단순히 삶의 보호, 환경 보호, 생태 보호라는 덕목 차원에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 시선을 둘러싼 복잡한 맥락을 살펴볼 가능성을 열어두면 좋을 듯하다. 


  

# 3-1. '이런 책'을 읽는 방법 2 - '투명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런 책’을 읽을 때, ‘지속가능성’과 함께 살펴볼 또 다른 열쇳말은 ‘투명성’이다. ‘지속가능성’이 정부/ 기업 등의 논의를 통해 다분히 거시적이고 접근하기 어려운 듯한 인상을 준다면, 오늘날 ‘투명성’은 시장 질서 안에서 정부를 비롯하여 기업과 시민사회가 맺는 특정한 관계를 읽어내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개념은 최근 ‘윤리적 소비’가 포괄하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의제들과 소비라는 행위의 접점, 그것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2008년 사회학과 학회지 <한국사회학>에 발표된 <한국사회 투명성 패러다임의 전환>(장용석, 송은영 저)이란 논문을 보면, 한국의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투명성’이라는 개념이 어떤 변화 과정을 거쳤는가를 알 수 있다. 연구자들은 한국 사회가 ‘기술적 투명성’에서 ‘문화적 투명성’으로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기술적 투명성’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정보와 관련이 있다. 과거에는 기업들이 이윤을 창출하는 과정 가운데서 그 이윤을 내기 위해 사용한 정보를 공개하기 싫어했다. 그래서 기업과 일반 시민들은 정보를 둘러싼 비대칭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행여 이런 시민들의 투명성을 향한 요구가 적극적인 기업 내 정보 공개로 이어져도, 그것은 기업이 저지른 비리 혹은 환경 오염과 같은 문제들이 ‘이미’ 일어났을 때 뒷수습 차원에서 만들어 낸 제한적인 정보 공개 수준에 머물렀다(회계 감사는 대표적인 기술적 투명성의 실천 전략이다). 그래서 이런 ‘기술적 투명성’은 ‘결과적 투명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것을 ‘과정의 투명성’으로 바꿔보려는 움직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기업은 투명성을 적극적인 기업의 전략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오늘날 ‘윤리 경영’, ‘책임 경영’, ‘지속가능한 경영’ 등의 이미 유행이 된 전략적 개념으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과정의 투명성’은 기업의 열린 이미지를 통한 이미지 신장 차원과 동시에 기업의 이윤 생산 과정에 ‘시민의 목소리’를 참여시키는 형태로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문화적 투명성’이라고 부른다. 

  
 

 

 

# 3-2. '이런 책'을 읽는 방법 3 - ‘과정을 소비하기’ / ‘투명성’을 요구하기

이런 개념의 설명과 설정이 기업 중심적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고기, 먹을수록 죽는다』와 같은 책을 여러 권 읽어보면 ‘문화적 투명성’을 일반 시민인 우리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는 대목도 구상해볼 수 있을 듯하다. 최근 ‘윤리적 소비’에 관한 여러 기사들과 연구 자료들을 읽어보면서 나는 ‘자본주의와 창(窓)’이라는 설정을 생각해 봤다. 『고기, 먹을수록 죽는다』를 단순히 ‘채식주의자’의 파격적 폭로로만 치부하지 않기 위해서는, 책 속에서 주장들을 제시하는 용법과 그 용법을 시도하게 된 맥락, 그리고 그 맥락의 효과 같은 것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런 책’에서 우리가 얻는 지식은 바로 우리가 일상에서는 몰랐던 ‘상품 생산 과정’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생산 과정을 소비자인 ‘나’가 밝혀냈다는 것, 그리고 그 가능성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윤리적 소비’가 흔히 ‘과정을 소비하는 것’으로 소개되는 것도 이제 사람들은 “이거, 중국산이잖아, 에이 안 사”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그 소비를 둘러싼 ‘과정의 맥락’,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생산과정의 정치경제적 맥락 /사회문화적 맥락’을 읽어낸다는 특성 때문이다.
『고기, 먹을수록 죽는다』이나 예전에 나온 『죽음의 밥상』 같은 서적은 ‘소비’는 포기하지 않되, ‘어떤 소비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그랬을 때 “당신은 채식주의자니까. 그런 주의를 따르는 일관된 삶을 사시오” 혹은 “에이 그렇게 나보고 살라고?”와 같은 심심한 이분법보다는 ‘채식주의자’라는 주체로 자신을 선언하게 된 용법을 파악하는 게 중요할 것 같다. 그 용법을 요구하게 된 다양한 맥락을. 그랬을 때 책 속에 등장하는 저자들은 자신의 삶에서 오늘날의 경제적 체제가 주는 폐해를 꼬집는다. 무엇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깊이 파고드는 상품의 이면, 그 이면을 ‘생산 과정의 윤리’의 측면에서 분석한다. 그리고 이런 분석에서 우리는 ‘투명성’이라는 개념을 기업이 소비자에게 떳떳하고 착한 기업이 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시민인 우리가 그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생산과정의 ‘창’을 더 투명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과정을 소비한다는 것’에서 오는 윤리의 만족감이, 실제 과정을 바꿀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 4. 채식 '위주'냐, 채식 '주의'냐  

 

최근 이효리가 한우홍보대사 계약이 끝나자마자 채식 위주로 식단을 조절하겠다는 내용이 기사로 공개되었다. 기사에서는 (내 표현으로) ‘언론스럽게’ “이효리, 채식주의자 선언”과 같은 제목으로 사람들을 흥분한 생선마냥 낚는 내용이 대다수였다. 어떤 사람들은 “무슨 연예인 생활에 이리도 관심이 많아”같이 평이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상도덕에 어긋난 처신을 했다”고 질타했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기사와 그 반응들을 읽어보면서 제법 재치 있는 덧글 하나를 봤다. “채식 위주랑..채식주의자랑은 그 차이가 큰데..”

오늘날 우리가 ‘무슨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진지한 일이라기보다는 다분히 ‘별난’ 일이다. 과거 무슨주의자는 진중한 선언을 대변하는 사람을 나타냈지만, 이제 무슨주의자는 그냥 형형색색의 라이프스타일을 구성하는 한 범주로 취급받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무슨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건 혼자 지키고 싶은 일이지만 찬사와 희화화의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가엾은 존재의 현실을 보여준다. 차라리, 희화화라도 한다면 속이 시원하겠지만 “와 대단하시네요” 같은 찬사는 내가 무슨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오, 남들에게 깊은 관심 받을 사안도 아니란 걸 보여주는 비극의 답례일 것이다.

‘무슨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타인이 꾸준히, 그렇지만 티는 나지 않게 던지는 의문과 엮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보여준다. 당신의 순수성을 의심하고, 당신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당신의 일관성을 의심하기. 이런 의심은 이제 ‘경제 인간’이라는 제법 철지난 개념어를 둘러싼 거부할 수 없는 시장 체제가 무슨주의자의 일상 생활에 더 깊이 관계맺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 징후다. 어떤 면에서 이효리가 어겼다는 그 상도덕의 문제는 이효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저지른 경솔함을 지시하는 비난의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무슨주의자로 살았을 때 다가오는 어려움을 바로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조건’에 있다는 것이리라. 그랬을 때 ‘채식주의자’로 간주된 이효리의 삶보다 더 곤란함을 겪고 있는 건 오늘날 우리 주변에 있는 채식주의자들이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건 사실 채식만 한다는 ‘별종’으로 분류된 시선이 아니라, “너 그것만 먹고 힘이 나겠어” 뒤에 생략된 표현. “너, 그것만 먹고 힘이 나겠어. (사회 생활하려면) 고기 먹고 힘내서 돈 벌고 계속 노동하기 위한 조건을 만들어내야지”라는 일상 속 사람들이 쏟아내는 규범적 시선이 아닐까. 고로 우리에게 ‘채식 위주’로 산다는 것과 ‘채식 주의’로 산다는 것의 간극은 더 멀다. 쉽게 말해서 ‘채식주의자’되기는 곧 당신을 순수한 선언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이 사회를 살아낼 만한 경제적 자격이 있는가라는 여부를 판단하는 시험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채식주의자는 한편으로 ‘대단한’ 취급을 받는 이로 치부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대단한 취급이 진정한 찬사인지, 아니면 당신이 이 자본주의적 삶을 지켜나갈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비아냥거림이 섞인 의문인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육식주의자'라는 언급이 더 이상하다는 것에서 오는 '채식'주의자의 이질감과 함께)
그런 면에서 『고기, 먹을수록 죽는다』는 ‘별종의 채식주의자’들이 건네는 ‘순수한’ 에세이가 아니라, 채식주의자라는 주체 되기를 통해 자신들이 겪어낸 이 사회의  자본주의적 시선을 향한 셀프 르포르타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채식 자본주의'라는 신조어도 얼마 안 있으면 등장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 신조어 앞에 어떤 것에 더 방점을 찍을 것인가? 혹은 그것을 요구받게 될까? 둘의 공생을 도모할 수 있을까?  

 

아직은 덜 여문 생각. 생각은 각자의 몫으로.

 

 
 
여강여호 2011-05-02 18:02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책들 소개 잘 보았습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육식의 종말>이라는 책이 생각나는군요.
저도 판단이 쉽지가 않네요...좀 더 내공을 쌓은 후에...ㅎㅎ..

얼그레이효과 2011-05-03 12:18   URL
여강여호님 반갑습니다.^^ 판단이 쉽지가 않다는 견해부터, 바로 여강여호님 고민의 훌륭한 성과가 나타날 기분이 드는데요!

비로그인 2011-05-03 03:06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을 읽는 방법'을 앞으로도 계속 써주시면 안 될까요? 저 같은 사람에겐 아주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암튼 고맙게 잘 봤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1-05-03 12:19   URL
후와님 오랜만입니다.^^ 힘이 닿는데까지, 질리지 않을때까지 한 번 이런 컨셉으로 계속 나가보죠 뭐! 저도 후와님의 글 통해 많은 도움 얻고 있습니다. 감수성의 팽창이라고 할까요*_*

노이에자이트 2011-05-03 17:10   댓글달기 | URL
오염시킬 수 있는 면허증이라는 기든스의 발상이 눈에 들어옵니다.선진국과 후발국의 이런 갈등은 늘 논란과 쟁점의 장이 되더군요.너희는 다 재미 봐놓고 우리가 해보려고 하니까 왜 나쁜 놈 만드느냐는 항변에 뭐라 뾰족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는달까요...장하준의 사다리 걷어차기 논리와 비슷하기도 하고요.

노이에자이트 2011-05-03 17:14   댓글달기 | URL
이효리의 채식주의 선언은 따로 글을 써주셔도 좋겠습니다.예전에 개고기 민족주의자들의 논리가 '왜 개만 불쌍하냐.돼지 소는 먹으면서'였는데 채식주의자들에겐 '식물도 죽여서 먹는 거야'하는 공격이 들어오더군요.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채식주의를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인정해주는 분위기도 아니고 그냥 또라이로 보는 사람이 많죠.

얼그레이효과 2011-05-04 10:31   댓글달기 | URL
@노이에자이트님 반갑습니다.^^ 관련 논의들을 최근에야 좀 읽고 찾아봤는데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더군요. '오염시킬 수 있는 면허증' 흥미로운 표현만큼이나 씁쓸한 현실이 더 복잡하게 얽혀있어 안타깝습니다. 이효리글은 조금 더 치밀하게 접근해서 다음에 한 번 더 꺼내보겠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5-04 16:39   URL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