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 들어가, 지도교수에게  처음 밝힌 포부는 앤서니 기든스의 <친밀성의 구조변동>과 같은 책을 꼭 한 권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성과 문학>이라는 학부 교양 시간에 처음 알게 된 이 책은  나의 마음을 계속 움직였고, 최근 '감정사회학'을 연구하면서, 조금씩 다시 읽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파트는 제6장 <공의존의 사회학적 의미>이다. 속된 말로 나는 이 파트에 '꽂혔다'고 할 수 있는데, 지금 돌아보면 다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이 파트에서 기든스가 언급한 인간 유형들을 실제로 만난 적이 있고, 나 또한 그런 경험을 했다. 그리고 최근 영화 <대혼란(Havoc)>을 보면서, 나는 '공의존'의 개념을 더 깊이 고민해보게 되었다.  과연 '공의존'이란 개념은 무엇인가? 

많은 치료서(therapeutic literature)에서 공의존 codependence이라는 말은 - 결코 여성들에게만 국한되는 용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 한때 '여성적 역할'일반이라고 불렸던 것을 기술하는 용어로 흔히 사용되고 있다. 공의존적 여성이란 타자를 돌보는 것을 스스로 필요로 하는 보호자(carers)이지만,그러나 무의식 수준에서는 부분적으로 혹은 거의 전적으로 자기의 헌신이 퇴짜맞기를 기대하는 그런 사람이다.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아이러니인가! 공의존적인 여성은 엽색가와의 관계에 빠져들기 십상이다. 그녀는 그를 '구해 줄' 준비가 되어 있고 어쩌면 그것을 열망하기까지 할 것이다. 145 - 146쪽 

이 부분만 읽으면, '공의존적 여성'이란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의 캐릭터를 정리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기든스가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 사회의 로맨스를 정리하는 차원은 아니다. 그가 '공의존'이란 개념을 통해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은 건 바로 다음 대목이 아닐까 한다. 

공의존적인 사람이란 존재론적으로 안전감을 유지하기 위해 그(녀)의 욕구를 정의(define)해주는 다른 한 사람 또는 일련의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공의존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헌신하지 않고는 자기확신(self-confidence)을 갖지 못한다. 공의존적 관계란 한 개인이 어떤 종류의 강박성에 지배되는 행동을 하는 파트너에게 심리적으로 묶여있는 관계이다. 148쪽 

 공의존적인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어떤 욕망이 있는지 모른다. 그 혹은 그녀가 추구하는 욕망이란, 결국 타인의 욕망을 닮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스타를 좋아하는 사춘기 여성들의 팬덤 문화로 환원될 수 있겠으나,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 차원도 아니다. 보다 미시적인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역동성, 우연성 등등이다. 특히 나는 영화 <대혼란>을 보면서, 자신에게 '일탈'의 캐릭터를 부여하는 '범생이'들을 공의존의 개념으로 분석하고 싶어졌다. 이 캐릭터는 언급하면 누구나, 아하!하는 캐릭터일 것이다. 당신이 조금만 섬세한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러한 유형의 사람을 학창 시절에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대혼란>은 그러한 캐릭터를 생각보다 잘 드러낸 영화 중 하나라고 보면 된다. 

  

(영화 내용에 대한 설명이 있다)

 <대혼란>의 주인공 앤 헤서웨이 그리고 그녀의 친구 비조 필립스는 백인 우월주의를 경멸하는 중산층 자녀이다. 영화는 이 두여성의 '일탈 게임'에 주목한다. 이들은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역겨움을 표시하는 그들만의 장치로써, 힙합 음악을 듣고, 친구들과 어울려 로스엔젤레스의 '동부 지역'에서 코카인을 사보기도 한다.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앤 헤서웨이는 자신의 일탈에 시동을 거세게 걸어 줄 남자 프레디 로드리게즈를 만난다. 이 남자를 만나자마자, 힙합 흉내를 내며 껄렁대는 자신의 백인 친구들과의 놀이는 재미가 없다. 프레디는 네가 정말 여기에 온다면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고 경계하지만, 이미 앤 헤서웨이의 마음은 이 동네에, 그리고 이들이 누리고 있는 문화에 흡수되기를 갈구하는 쪽에 더 치우쳐 있다. 급기야 앤 헤서웨이는 친구 비조 필립스와 함께 프레디 로드리게즈가 있는 '16번가'라는 무리들에 합류하려고 '그들이 사는 '동네를 찾는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과 전혀 다른 환경, 경찰들의 치안이 늘 이 동네를 '비상사태의 일상화'로 내몰지만, 그녀에게 그것은 자신의 삶에 부여된 '스릴'인 것이다.   

이미 스릴에 대한 갈망은 현실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섰다. 그런데, 이 '16번가'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조건이 있었다. 주사위 게임을 하여, 나온 숫자만큼 남자들과 섹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앤 헤서웨이는 망설이지만, 승낙하고 비조 필립스도 결정을 따른다. 하지만, 앤은 섹스 도중 자신보다 많은 숫자가 나온 비조의 아픔을 보고 그곳을 도망치게 된다. 학교에서 순식간에 소문이 퍼지고, 진상 조사에 들어간다. 앤과 비조의 백인 친구들은 흥분하여 총을 든 채 '16번가'를 찾아가게 되고, 앤과 비조는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모른다. 앤과 비조는 언제 그랬냐는듯이 순한 고양이가 되어 버린다. 진한 스모키 화장, 야한 옷차림, 누가 들으라고 하지라는 태도의 시끄러운 욕설이 채우던 영화 전반부와 달리, 창백하고 여린 두 여성의 모습이 영화 후반부를 채운다.  

앤과 비조의 '하위문화에 대한 잠입'은 앤서니 기든스가 '공의존적 인간'이라고 설명한 부분과 만나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 내가 그동안 만나본 사람들, 현재 친구로 있는 사람들. 소위 '날라리'라고 하는 유형의 이 사람들, 그들의 속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정말 사회가 간주하는 일탈적 문화를 열정적으로 추구하고 체험하며, 자신의 삶에 지속시킬 용기가 있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추구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빠져들게 되는 '일탈적 인간'에 대한 추앙에서 비롯된 '스릴' 그 자체의 만끽?. 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정말 자신이기를 스스로 정당화시키는 일종의 '가면 놀이?' '공의존'이란 개념은 후자에서 내가 표현한 '가면 놀이'의 측면을 드러내는 데 중요한 분석 장치로 다가온다.  이것은 기든스가 '허위적 정체성'이란 표현으로 기술한 인간의 유형을 지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공의존적인 사람은 카슬이 본대로, 핵심 정체성이 미발달되었거나, 또는 인식하지 못하는, 그리고 외적 자원에 대한 의존적 애착에 기반하여 허위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사람인 것이다. 152 
 공의존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욕구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데 익숙해져 있다. 152

 이 시선을 받아들인다면, 앤과 비조의 문화 체험에서 그들은 정말 그 문화의 깊은 곳까지 빠져든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게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 또래로부터 스스로가 다르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전략의 차원으로, 또 그런 '차이 전략'에 수반되는 '위험 게임'에 스스로를 던지면서, 스스로의 내면에 스며든 두려움을 덮어버리는 데 더 방점을 찍은 유형에 가깝다. <대혼란>이 나름 괜찮다고 생각하는 대목은, 영화가 이 두 여성의 일탈을 연결짓는 장소에 있는 '16번가'의 주인공 프레디 로드리게즈의 캐릭터를 나름 세심하게 다듬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면과 행위의 어긋남 속에서, 결국 앤과 비조에게 상처를 주는 남자이지만, 앤과 비조가 자신들의 문화 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 그는 앤과 비조, 너희들이 추구하고 싶은 게 정말 우리가 진정으로 체험하고 있는 그 문화의 깊숙한 곳인지 질문함으로써, 앤과 비조의 문화 체험을 일종의 '전략'으로 생각하고 있다.  

공의존적 개념을 복습한다는 차원에서 내가 상상해본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공의존적 인간을 통해 우리는 날라리라는 유형의 인간들(예로 들면 <비트>의 로미 같은)의 '사회적 전술'을 생각해볼지도. 하지만 이것은 그들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다.  사회적 차원에서 함께 고민해본 삶의 한 단면으로 이해해준다면 고맙겠다. (가족과의 관계, 거기서 연유된 아픔, 학교 문제, 친구들과의 관계 등등에서 쌓여진 사회성의 문제들) 

# ' '앨리와 지나' , 너 정말 너였니?

앨리와 지나라는 두 여성이 있었다. 지나는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조용하고 말이 없는 차분한 여성이었다. 앨리는 지나와는 상반된 캐릭터다. 욕도 잘하고,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어젯밤 만난 남자와의 섹스 경험담을 큰 목소리로 공개해도 전혀 남을 의식하지 않는다. 지나는 그런 앨리가 부럽다. 그리고 앨리와 매일 함께 생활하면서 앨리의 캐릭터를 닮아간다. 어느날 잭이라는 남자가 지나를 보고 반하게 된다. 잭은 지나의 모습에 호감을 갖는다. 얌전한 척 하지 않고 과감하고 섹시한 모습, 그리고 자신이 맡은 일은 영민하게 책임지고 끝내는 모습에 끌린 것이다. 지나와 잭은 사귀면서, 앨리 또한 그들 사이에 끼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잭은 지나의 과감한 모습에 두려움을 갖게 된다. 주변의 시선을 느끼게 되면서, 지나에게 자제할 것을 부탁한다. 사이가 틀어진다. 그리고 결국 둘은 헤어진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지나에게서 전화가 온다. 그런데 잭은 지나의 모습에 너무 놀란다. 자신이 알고 있던 지나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다소곳한 모습에 잭은 속으로 "너,정말 너였니?"라고 묻는다. 지나와 헤어진 후, 잭은 앨리를 우연히 만나 술자리를 갖게 된다. 자연스레 지나와의 이야기가 대화 소재로 나온다. 잭은 지난 번 만난 지나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잭은 너무나 놀랐다고, 예전에 알고 있던 지나가 아니라고 앨리에게 말한다.앨리는 웃는다. 그리고 잭에게 하나,둘 이야기를 꺼낸다. 지나와 사이가 안 좋다고. 앨리는 지나와 친해지면서, 그녀가 점점 자신을 따라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고백한다. 그것에 기분 나빴지만, 어느 정도겠지하고 그녀는 참았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새 지나는 앨리와 똑같은 캐릭터가 되고, 그때 잭은 지나를 알게 된 것이다. 앨리는 지나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잭은 앨리를 만나던 것이었을까? 지나를 만나던 것이었을까?  잭은 생각한다.지나는 앨리의 모습을 닮아가면서, 스스로가 가지지 못했던 '차이'를 두드러지게 체험할 수 있는 그 기회를 잡았다는 차원이 절박했는지 모른다고. 앨리는 나름의 '문화 매개자'가 된 것이다(여기서 문화매개자는 부르디외가 설명하는 것과 다르다)  지나의 '날라리'놀이는 그렇게 끝이 났다.

  당신은 인생을 살면서 이런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한편으론 자신의 모습에 비추어 그런 사람들의 삶을 동경한 적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 그런 기억이 있는 사람들에게 기든스의 '공의존의 사회학적 의미'는 당신의 그 순간을 뜻있게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줄지도. 그들이 추구하는 일탈, 방황. 과연 정말 그들의 것이었을까? 이것은 선과 악의 문제 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삶을 더 세밀하게 돌아볼 수 있는 작은 방 하나를 마련하는 것이다.    

 

 덧붙임)

(물론 똑같진 않지만) 앨리와 지나의 이야기를 영화로 체험했다고 기억한다면, 아마 당신이 바벳 슈로더 감독의 <위험한 독신녀>를 늦은 밤 여러번 봤기 때문일 것이다. 제니퍼 제이슨 리는 우리 시대의 '지나'로 나온다. (아, 추억의 이름이여..제니퍼 제이슨 리..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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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10-09-11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지나에게서 전화가 온다. 그런데 지나는 잭의 모습에 너무 놀란다"
요기서 "잭은 지나의 모습에 너무 놀란다" 이렇게 바뀌어야 되는거 아닌가요?

재미있게 봤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9-11 13:12   좋아요 1 | URL
앗. 그렇군요. 큭. 고쳤습니다. 세심히 봐주셔서 감솨요^^

pjy 2010-09-11 1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에 덧붙이신 영화는 저도 봤습니다^^
영화속의 등장인물이 심하게 공의존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저도 잠깐은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부러웠던 친구의 극단적인?면을 그대로 따라해보려고 했었던....'날라리'놀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서로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런게 자아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겠죠?

얼그레이효과 2010-09-12 15:16   좋아요 1 | URL
네 그렇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