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문화연구캠프>에 발표했던 글을 옮겨본다.

 진열만 되는 근심거리, 구경하는 고백, 안전한 성찰에 저항하며 
   

  이 글은 고백을 현실 권력의 테크놀로지로써 바라본 푸코의 ‘원 사유’에 입각하여, 고백의 계보학적   시선을 점화하고자 한다. 푸코와 그의 생각에 직, 간접적으로 동의 / 상관했던 이들의 생각을 재구성   해보면, 고백은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종교에서 종교적인 것으로 산포되고 있었다. 종교 권력, 기   업 권력, 언론 권력, 교육 권력, 사법 권력 등 현실 권력에서 작동하는 고백이라는 권력의 테크놀로   지들은 개인을 사회 속에서 ‘이야기되어지는 입’으로 만들고, 우리는 그것을 사건 속에서 맞닥뜨린    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과연 사건을 어떻게 사유할 수 있을까. 사건은 우리에게 대체로 성찰      을 요구한다. 호몰로기아, 즉 고백이 가졌던 종교적 언어의 체계는 고백을 통해 잘못을 시인하고, 그   시인 속에서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성찰성의 개입을 촉구해왔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성찰마저 우   리의 것이 아닌, 그리고 선의 영역이 아닌 것이 된다면? 성찰이 현실 권력의 테크놀로지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소비되는 하나의 상품이 되어버렸다면? 우리 시대는 정녕 성찰을 하지 않는 이에 대한 무   한한 분노를 용인하기보다는, 이제 의례화된 성찰의 언어들에 대한 문제제기를 촉구해야 하지 않을   까. 이러한 메타적 성찰 과정 속에서 필자는 쥬디스 버틀러가 제시한 ‘취약성’이라는 개념이 촉발시   키는 공동체적 사유를 제안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너와 나의 취약성을 인식하고 그 취약성을    빌미로 자유를 조건짓고자하는 권력자들의 편견에 맞서는 ‘취약성들의 시간’임을. 
  

   1. ‘고백의 제왕’을 맞이하며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그의 고백에 이끌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에게 탐닉할 때 느껴지는 집중력으로 매번 곽의 이야기를 경청했던 것은, 바로 우리였으니까 말이다. 이제 와서 고백하거니와, 나 역시 곽을 멀리하면서도 곽에게 이끌렸던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동아리 밖에서 곽을 만나 곽과 술을 마시고 곽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니 어쩌면 즐겼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나는 곽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이야기를 지껄였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이야기이기도 했고, 누군가에 대한 흠모나 적의이기도 했으며, 타인이 가진 허점에 대한 비루한 관심이기도 했다. 곽의 이야기는 건조하면서도 감상적이었고 잔인하면서도 달콤했는데, 그럴수록 나의 고백 역시 더욱 노골적이 되어갔다. 곽의 침묵이 나의 고백을 부추길 때, 나는 쾌감에 몸을 떨며 내밀한 모든 것을 곽에게 고백했던 것이다.”

- 이장욱, 『고백의 제왕』



소설 속에서 주인공 ‘곽’은 친구들로부터 ‘고백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별다른 사연이 없을 것 같은 얼굴을 가졌지만, 막상 진실 게임을 하게 되면 예상치 못한 고백으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는 그였기 때문이다. 곽의 고백 속에 드러나는 사연의 강도는 갈수록 세어지고, 친구들은 곽을 욕하면서도 그에게 남모를 매력을 느끼게 된다. ‘고백의 제왕’이 비단 소설 속 인물로만 존재하지는 않는 것 같다. 우리는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텔레비전에서 수많은 고백의 제왕들을 만난다. 우리는 곽을 욕하면서도 그의 고백을 계속 듣고 싶어 하는 친구들처럼, 토크쇼와 리얼리티 TV에 출연한 인물들이 오늘은 또 어떤 내밀한 이야기들을 들고 올 것인지를 기대한다.

 “서양에서 인간은 고백의 짐승이 되었다”(Foucault,1976/2004,p.81)는 푸코의 주장은 비단 서양에 국한된 것은 아닌 게 되어버린 듯하다. 이야기에 굶주린 현대인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 슬픈 이야기, 감동적인 이야기, 잔인한 이야기, 무서운 이야기, 거짓말 같은 진짜 이야기, 진짜 같은 거짓 이야기들은 ‘이야기 - 상품’ 이 되어 우리의 눈과 귀를 기다린다. 그 중에서 속된 말로 ‘먹히는’ 상품은 고백이다. 고백은 섹스나 자위행위를 정말 이런 식으로 해봤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자신의 성생활을 노출하는 패션잡지 기자들의 끼니를 보장해주거나, 시시껄렁하고 진부한 설교를 일삼던 목사들을 스타로 만들어주는 데 일조한다. 심리학자나 정신분석학자들은 연구실의 먼지 대신 스튜디오의 먼지를 마신 채, "당신의 인생에 낀 먼지를 이런 식으로 털어보세요!"라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소파에 누워 있는 주부들에게 ‘요법의 정치’를 설파한다. “오른쪽 주머니는 항상 십일조 주머니로 하라”, “잠자리를 들기 전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하라”는 록펠러의 신앙 지침과 함께, 부자가 되라는 상징으로 1달러짜리 지폐를 필자의 컴퓨터 모니터 앞에 두고 간 어머니의 취미가, ‘20대 여성이 자신의 실패를 딛고 노력한 끝에 맛있는 닭꼬치를 만들어 사장이 되었다’는 류의 성공담을 서점에서 정독하거나, <아침마당>에 출연한 기독교 출신 의사의 신앙 고백에 "아멘!"하고 ‘은혜를 받는 것’임을 상기해보면, 고백은 단지 수다스러운 광경 속 신변잡담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고백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우리 시대의 ‘치료 윤리’와 결부되어 있다.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여전히 말에 상처를 받으면서도, 또 그 말로 상처가 치유되길 원한다. ‘언어의 시장’이 매일 마다 열린 채, 각자가 갖고 온 이야기의 상품은 보다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펼쳐진다. 전문가라는 꼬리표로 치장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진단 분류표를 가지고 와서, 상처 받은 이들이 전화나 술자리에서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 그 이야기를 들어준 지인들보다 더 낫지 않은 제언으로 더 나은 효과가 발휘된 것 같은 환영을 선사한다. 사실 언론학, 사회학, 문화연구 등에서 이러한 현상에 대한 연구들은 종종 있어 왔다. 연구자들은 친밀성과 내밀성, 사적 영역의 공적 영역 침범 증대라는 표제를 내걸거나 그것을 결론으로 선취한 채, 이를 ‘중세 고해실로의 퇴보’(Hartley,1992,p.3;Couldry,2003/2007,p.179에서 재인용), ‘공개고백성사의 시대’(천선영,2008), ‘텔레비전의 사사화와 치료 윤리’(김응숙,2004), ‘자기계발의 사회학’(전상진,2008) 등으로 진단했다.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시선이 고백에 관한 푸코의 견해를, 미디어의 사사화와 치료 윤리라는 틀에 국한시켜 분석한 나머지, 정작 우리의 일상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종교 권력, 사법 권력, 교육 권력, 기업 권력, 언론 권력 등 푸코가 강조한 현실 권력의 테크놀로지로써 작동하는 고백의 동학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과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모색하는 데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고로 이 글은 고백을 해방의 기제가 아닌 현실 권력의 통치 방식으로 바라보았던 푸코의 '원-사유'를 복권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고백에 관한 푸코의 '원-사유'를 강조함으로써 필자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첫째, 과연 우리가 고백과 치유의 기제가 반영된 미디어 속 의례를, 생활세계를 살아가는 행위자 개인이 더 나은 삶의 조건들을 위해 성찰하는 것으로 간주했을 때, 우리는 그러한 개인들의 고백에 지나친 긍정성을 기대한 나머지, 고백의 과정을 부조리한 생활세계의 해방으로 환원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둘째, '요법의 정치'와 '본보기의 정치'라는 도식을 통해 개인의 고백을 도모하는 치유의 의례 그 자체에만 집중한다면,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고백과 치유의 의례가 규정하는 '도덕의 정치'를 바탕으로 생활세계를 통치하려는, 현실 권력의 은밀한 규율 기술을 삶의 안전망 안에 포섭시켜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로써, 삶의 안전망이라는 틀 안에서 고백을 통해 추동되는 성찰의 기운은, 삶의 안전망 안에 배제되는 것에 두려운 개인들이 사회로부터 "참 잘했어요"라는 도장을 받기 위해 쓰는 자기 검열적 반성문으로 퇴색되고 있지는 않는가.  

셋째, 결국 지금 우리 시대는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될 정치적 권리와 의무를 촉구하는 사건들을 타자의 것으로 치부한 채, 그러한 사건들에 소외/희생된 타자의 고백에 필요한 지속적 성찰을, 일시적 분노로 맞바꾸며 살고 있지 않은가. 또, 그러한 분노를 성찰로 쉽게 간주하고, 정작 개입은 망설이면서 "그 사건의 의미를 알았다"라는 수준에만 그치는 구경하는 성찰자의 위치에만 만족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지금 성찰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무분별한 분노를 무조건 용인하기보다는, 오히려 관습화된 성찰로 생활세계의 안위를 도모할 수 있다고 믿는 이 기운에 제동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이런 맥락 아래 고백과 그러한 고백이 강조하는 수행성을 기반으로 한 성찰의 위치를 진리의 영역에 가두는 것을 경계하는, 고백의 계보학적 시선을 점화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러한 경계를 통해 작금의 성찰 문화에 내재된 문제점을 점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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