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한국 문화연구 영역에서 좋은 논문이 나왔다. 그 주인공은 김수정 선생이 쓴 <수용자연구의 해독모델과 존 피스크에 대한 재평가 : 수용자연구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열린 논쟁을 위하여>이다. <언론과 사회>2010년 봄호에 실린, 이 논문은 지금 문화연구자에게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알려주는 지침서라고 감히 생각한다.  (김수정 선생은 현대 문화연구자의 선구자격이라고 할 수 있는, 특히 본 논문의 중심 테마인 능동적 수용자론의 형성에 주요 지침이 되는 데이비드 몰리의 연구를 이론적으로 다시 파악하여 발표한, 몰리에게 큰 인상을 남긴 연구자이다. -참고로 몰리의 책을 보면, 김수정 선생에 대한 언급이 나와 있다. 문화연구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한 번 찾아보시길.)

사실 1990년대 중반부터, 문화연구가 국내에 활황을 이루면서, 과연 '한국의 문화연구는 있는가?'란 문제가 제기되었다.(이는 조한혜정, 김영민 선생 등이 강조했던, '이론의 식민화 과정과 글쓰기'와 결부된 것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한국의 문화연구자인 원용진 선생은 '술이부작'이란 표현까지 써 가면서, 해외 이론의 습득에만 능하고, 그것을 제대로 활용/구성/반박/재창조하지 못하는 연구 풍토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런 비판적 수사들 또한 한때 활황을 이루면서, 내가 '문화연구자들의 성찰게임'이라고 부르는 문화연구 내부의 비판적 아티클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결국 이들은 '태도 지적적/지향적 중심의 아티클'을 썼기 때문에, 확실한 현실 분석이 없었다. 고로 인상 비평에 머무른 윤리적 태도의 정립으로 마무리 될 운명에 처한 논문들이 누적되어 갔다.  

참고로 문화연구 영역은 워낙 다양해서 구분하기가 어렵다. 문화연구자들은 스스로에 대한 학문 분과 영역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많은데, 일례로 '문화연구(Cultural Studies)'인가?' 문화에 대한 연구(studies on cultural)'인가의 구분도 고민한다. (이러한 구분에 대한 언급은 국내 학자로는 문화연구 내 신진학자로 명명되는 이영주 선생의 논문, 그리고 해외에서는 대표적인 문화연구 지식인 크리스 바커의 책 등에 소개된다.) 그래서 언론학을 중심으로 한 연구자들은, '미디어/문화연구'라는 학문 분과 명칭을 단독적으로 쓰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명칭 자체가 때로는 미디어의 범주를 어디까지 볼 것인가를 또 고민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이기형 선생 같은 경우, 마샬 맥루언이 <미디어의 이해>에서 보여준 것처럼, '범미디어주의'를 표하며, 도시공간 연구로 연구 테마를 확장시키고 있다. 주로 신문,방송,뉴 미디어와 같은 우리가 쉽게 '미디어'라고 부르는 영역에 대한 저항이기도 한 이기형 선생의 연구 방식은, 국내 문화연구의 또 다른 고민이자 미래이기도 하다. 그런 맥락에서 강준만 선생이 예전부터 보여준 그 노력의 결실, 최근 '간판'을 미디어로 간주하고 연구하며, 논문으로 발표하는 그 색깔 있는 주제 선택과 문제 의식은 바로 지금 우리에게 내려진 또 다른 연구적 도전이자 밝은 미래이기도 하다.- 바깥 사람들에게(이 표현이 참 불편하지만, 학계의 보수성과 급진성을 동시에 사유하기 위해 쓰겠다) 아니, 간판을 미디어로 보지 않을 이유가 있나?라고 반문이 들어올 수 있으나, 실제로 학문 영역은 꼼꼼하게 따지고, 논문으로서 이게 될까 성공할까 망할까의 여부를 단칼에 잘라버리거나, 기존의 것을 따라가라는 식으로 정해버릴 때가 많다. 그래서 젊은 연구자들에게는 이런 연구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기도 한다. 

이런 외부적 이야기는 여기서 중단하겠다. 다시 김수정 선생의 논문 이야기로 돌아오자. 김수정 선생의 주장은 아마 내가 예전에 빵가게재습격님과 나누었던 고민과 비슷한 것이다. 즉, 빵가게재습격님은 내가 이론을 고민하고 공부한다는 것에서 지나치게 정치성/비판성을 강박적으로 이어붙이려는 것이 아니냐는 소중한 지적을 해주셨다. 사실 이런 유연하고 올바른 지적이 있음에도, 그것을 심적으로 잘 받아들이지 않았던 시간은 길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기존의 정치 사회 현실에 대한 모순들이 점증해가면서, 발생하는 내 스스로의 당위성을 이론을 공부하면서, 그 이론에 다 '전가'하려는 것은 아니었나. 이런 반성을 지적 을 통해 견고히 하게 된 것이다. 즉, 이론은 또 한 번 소비되고, 재구성/재창조될 공간,시간이 사라지게 되었다. 어리석은 공부를 한 것이다. 이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김수정 선생은 인상적인 언급을 한다. 

   
  필자는 텍스트나 수용자의 해독을 더 부정적(negative)으로 평가하는 것이 더 비판적이거나 정치적인 것이라고 믿지 않으며,동시에 긍정적(affirmative)평가가 꼭 대중추수주의적(populist)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40쪽)  
   

 

이 주장을 논리적으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주장을 논리적으로 풀어보는 것이 김수정 선생의 논문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스튜어트 홀은 현대 문화연구의 창시자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해독의 세 가지 모델을 제시하면서, 텍스트와 수용자의 관계를 정립하려는 데 노력했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공부하면서, 문화주의 경향에 경도되어 있던 문화연구 내 구조주의의 역할을 강조했고,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접하면서, 영국의 대처리즘을 문화정치학적으로 비판하는 사유를 시도하는 등, 다양한 전술과 활동을 진행해왔다.' 

 

즉, 스튜어트 홀이나 존 피스크 같이, 수용자 이론에 중심 토대가 되었던 학자들의 이론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결과, 국내 연구자들은 기존 텍스트를 부정적으로,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능동적이며, 그것에 찬동하는 사람들은 거의 수동적으로 몰아가는 경향을 선보였다는 것.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렇다.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읽는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정치적으로 진보적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당연하지만, 간과되어 왔다. 고로, 국내 문화연구는 지나치게 옳은 정치적 시민의식의 상을 간주하고, 능동적수용자론을 그 상에 끼워맞춘 꼴은 아니었을까? 김수정 선생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고로, 텍스트를 능동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비판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차분한 재점검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참고로, 이 논문의 성과는 스튜어트 홀이 말한 '반대적 해독'과 존 피스크가 말한 '저항적 해독'의 개념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김수정 선생의 이런 지적이 나오기 이전까지 국내 연구는 이 개념을 혼용해서 쓴 것이 사실이다. 특히, 정치적으로 진보적 스탠스를 갖추고, 비판 사회이론을 강조하는 흐름 안에서, 이 '비판'이라는 단어에 지나친 경직성, 규범을 무의식적으로 강요한 나머지,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읽는다는 것이 반드시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항을 표출하는 것인가?라는 문제는 그냥 무시된 것이다. 김수정 선생은 스튜어트 홀은 텍스트에 대한 반대적 의미를 고민해보는 '양식'에 더 집중한 연구자였고, 존 피스크는, 텍스트에 대한 그 반대의 해석(내용)과 그 내용이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맺는 관계에 더 고민한 연구자였다고 구분하여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존 피스크는 우리에게 '기호학적 민주주의'로 잘 알려진 대표적인 문화연구자이다. 특히, 대중문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텔레비전 등의 매체 문화 연구를 통해 '즐거움'과 해독이라는 중요한 해석의 모델을 연구했다. 그는 저항과 즐거움이란 테마로 인하여, 일부 연구자들로부터 너무 능동자들의 능력을 과대포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피스크에 대한 새로운 기념적 학술 연구가 시도되면서,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김수정 선생의 논문도 이 지점에 있다. 김수정 선생은 국내 연구자들이 존 피스크의 수용자 모델 이론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고, 오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또, 김수정 선생은, '능동적 수용자','능동적 수용자'우리가 이렇게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우리가 지나치게 수동적 수용자의 측면은 가볍게 보거나, 안일하게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라고 질문한다. 그러면서 그는 수동적 수용자에 대한 면밀한 고려 없이, 능동적 수용자에 대한 언급을 바로 앞세웠다가는, 수용자가 텍스트를 접하는 그 복잡한 과정에서 오는 해독의 교섭 상태를 지나쳐버린다고 설명한다. 탁월한 지적이다. 

김수정 선생의 논문은 특히 진보적인 사유를 하는 사람들이 갖는 아포리아. 현실 세계의 비판적 사유를 위해, 하나의 이론을 공부할 때, 그 이론의 당연성을 너무 믿은 나머지, 제대로 검토하지 않는 풍토를 꼬집을 수 있는 간접적 매개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이런 지적과 언급은 자주 /쉽게 나올 수 있지만, 생각보다 그렇게 또 활발하지 않다는 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이론에 대한 열정을 재점검하게 만든다.  

김수정 선생이 지적한대로, 한때 한국 문화연구 계를 휩쓸었던 수용자 연구가 좀 시든 감이 없지 않다. 그것에 대한 이론적 논의는 아예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문화연구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논쟁을 위한 꼼꼼한 이론적 검토이다. 괜히 '급진'이니, '비판적'이니 라는 수사를 앞에 붙여 놓고, 문화연구 이래선 안 된다라며, 그 주장을 감싼 화려한 정치 철학 이론을 갖다 붙이는 시각은, 내가 늘 주장하는 '선도부장'역할 그 이상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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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11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어려운 공부를 하시는군요?
남편이가 요즘 이 비슷한 공부를 하고 있어서....신기하게 쳐다보고 있는 중인데...ㅋㅋ.

얼그레이효과 2010-05-11 14:52   좋아요 0 | URL
오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