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자와 순응론자. 이 거친 표현은 사실 내가 지어낸 것이 아니다. 일찍이 움베르토 에코가 <매스컴과 미학>이란 책에서 선보인, 그 당시로는 '논란'이 된 표현이다. 그는 대중문화에 관해,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하는 '퇴행하는 부르주아지'의 시선을 갖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퇴행하는 부르주아지는 도덕에 관해 엄격하며, '포르노크라시'에 관해서 청소년들을 '쯧쯧거리는 태도'로 보는 데 익숙한 사람들을 총칭하는 것이었다. (더욱 더 큰 문제는 그들이 그런 태도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이 분석은 지금도 유효한 것 같다) 

에코는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시대를 논하면서, 매스커뮤니케이션을 고매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세상 밖의 일로 치부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이 책에서, 매스 커뮤니케이션을 논한다는 것은, 바로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대중문화의 '존폐'를 이야기하는 것이 비생산적임을 지적하며, 차라리 더 유익한 것은, 이러한 '매스컬쳐'가 주는 양상을 현실적으로 분석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찾아보는 게 더 유익하리라는 진단을 내렸다.  

 

대중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지금, 에코의 이 말은 조금은 진부한 훈수일 수 있으나, 에코가 이러한 언급을 한 시기를 점쳐보면, 에코의 이 말은 일종의 '예언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 책이 나온 시기가 1964년도 였고, 한국의 경우 1960년대 대중문화에 대한 이론들을 조금씩 공부한 사람들이 '대중사회 논쟁'이라는 테마를 갖고, 한국은 과연 대중사회인가? 한국에 대중문화라는 것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대학 내 토론이 있기도 한 상황이었다.(조금 더 자세한 상황을 알고 싶다면, 한국 언론학사에서 빠질 수 없는 학자 중 하나인 ,  초창기 대중문화 이론에 대한 학문적 성격을 심어보려 노력한, '강현두 선생'의 저작들을 챙겨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지금 읽어보면 딱딱한 내용이 많지만, 그가 집필하고 번역한 책의 서문에 언급된 대중문화에 대한 시각은, 한국의 지식인들이 그 당시  한국 사회 내 대중문화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참고할 수 있는 힌트가 된다.) 다만, 이 토론에서 대부분 넘쳐나는 것은, 결국 도덕과 결부된 / 종속된 문화론이었다. 국가라는 요인 또한 동떨어질 수 없었다. 또, 주로 외국에서 벌어지는 문화 논쟁에 관한 요약을 '이식'한 데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소위 한국의 대중문화를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문화적 전환(cultural turn)'이라고 하는 시기 구분이 있는데, 대부분 지금처럼 편하게 대중문화를 인식하고, 문화라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된 때를 1990년대로 잡고 있다. 그리고 이런 시대 구분의 인식은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나는 참고로 이런 시기 구분을 깨보려는 연구를 하는 중이다.) 

다들 알겠지만, 90년대 이전, 한국의 1980년대만 해도, 특히 신문에서는 에코나 부르디외가 싫어하는 도덕적 엄격주의자들의 문화 비평이 많았다.(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한국만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문화를 '도덕'과 일치시키며, 문화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기보다는, 인상 비평 류의 머무른 훈계조로 문화를 향유하려는 자들의 '태도'를 지적하는 데 골몰했다. 

어찌보면, 이런 실천적 비평은 문화연구자 그래엄 터너가 명명한 '문화와 문명'류의 스크루티니학파, 리비스와 그의 아류들, 그리고 한편으로는 에코가 유사 맑스주의가 불렀던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공명하는 것이 있었다. 에코는 이들의 공명 지점을 알고 있었던 듯 했다. '계몽의 변증법'과 '교양과 무질서'는 내가 보기엔 '실천 비평'이라는 테마 안에서 만나는데, 그 안에서 대중들은 늘 문화를 즐긴다는 것에 죄의식을 가져야 했다.(이들,즉 문화에 대한 엄격주의자들은 문화적 실천에 대한 훈수를 두고, 새로운 실천을 추구하거나, 혹은 그 실천을 폐기처분할 것을 제안하는데, 양 시선이 만나는 어떤 공유점이 있다는 것이 내가 공부하면서 정리한 생각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 또한 '비판이론'이란 좋은 의의가 담긴 사유를 시도했지만, 그들이 리비스학파의 보수적 문화관과 함께 공유한 것은 문화를 즐기는 시민들에 대한 일종의 '선도부장'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김어준 식으로 말하자면 '죄의식 마케팅'?이라고 할까?)    

여기에 내가 더 심화시켜 보고 싶은 부분은 '선도부장론'이라고 부르고 싶은 지적 현상에 대한 것이다. '선도부장론'은 문화와 도덕, 그리고 경제에 대한 측면을 아우른다. 그리고 이 아우름 속에 정치라는 중요한 비평의 목적이 있다. 에코가 말하는 '종말론적 지식인'의 모습. 그리고 그 모습을 가장 대표적으로 접할 수 있는 비평의 언어를 한국 사회에 투영해보면, 왼쪽이나 오른쪽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계속 에코가 <매스컴과 미학>에서 한 언급을 되짚어보면, 종말론적 지식인들의 수사에는 늘 '대중'이란 말이 깊은 분석의 지시대상이 아니라, 자신들의 도덕적 감정을 앞세워 싸잡아 비난하기 위해 가장 쉬운 대상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분석의 시각은 '문화산업'을 통해 대중의 수동성을 걱정한 아도르노 아저씨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이런 종말론적 수사에 자리잡은 걱정의 언어들은, 좌파 특유의 레파토리로 오늘날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제  한국 사회의 진보는 성찰과 비난의 대상, 그 모호함 속에 갖혀버리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진보는 망할 것이다라는 류의 지적들. 그래서 이러한 '태도를 지적하는 데만 골몰하는 지식인'들의 칼럼이 지난 촛불 이후에 엄청나게 많이 늘어났고, 또 이것이 관성화되면서, 내겐 이런 물음이 남았다. (한윤형 군의 표현처럼), 어떻게 진보하란 말인가? 

누구는 대중이 우매하다라는 생각을 버리라며, 대중의 우월함을 찬양한다, 그리고 진보진영에게 그 우월함을 각성의 언어로 깨달아, 탁웡한 언어를 챙기라고 요구한다. 또 누구는 진보의 성찰성을 촉구한다, 그러면서 진보의 성찰적 언어와 그 대안적 결과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보여주지 않은 채, 그동안 진보진영이 해 온 무능한 부분이 이러하다,저러하다라는 류의 것으로만 머문다. 나는 이러한 '비평의 흐름'들이 빈번해졌던 약 촛불 이후 지난 1년 반 간의 흐름을 보면서, 진보진영에게 대안이 없다라고 비난하는 대중의 모습과 지식인들의 모습이 무엇이 다른가라고 느껴 왔다. 그러면서, 그들은 진보의 종말을 암시하는 듯한, 묵시록적 발언으로 정작 현실 정치에 성찰성이라는 개념을 포장하여, 겁을 주고 나무라기에 바빴던 것은 아닐까. 

나는 강준만이 자신의 책 속에서 언급하듯이, 시민들에게 무조건 정치 현실을 비난하기에 바쁜 그 태도를 자제하라고 한 것을 하나의 비유로 삼고 싶다. 즉, 지식인들도, 진보 진영을 향해 성찰적 언어를 포장한 대안 없는 비판을 넘어서야 함을 말하고 싶은 거다. (그런 면에서 나는 최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본 서영표 선생의 글이 마음에 들었다. ) 

진보진영을 걱정하는 지식인들의 '정신차리라'는  언어 속에서, 그들은 지금의 정치 현실을 '뜨거운 냉소'로 일관하는 순응론자들에게 '그래, 바로 이거야'라는 일말의 카타르시스를 줄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비평의 유효기간은 스크롤바를 다 내리면 끝이다.  (그런 점에서 시사인의 고종석 씨 최근 칼럼은 좀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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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0-05-10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권자를 곤혹스럽게 하는 보수 정당·진보 정당>, 인가요?

얼그레이효과 2010-05-10 23:37   좋아요 0 | URL
네 빵가게님. 칼럼 내, 현상에 대한 지적은 저도 고종석씨 견해에 동의하는데, 제가 나름 '스포츠중계형'비평이라고 부르는, 그 태도가 제겐 좀 안일해보였거든요. 최근 진보진영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의 글을 보면, 진보진영의 형편을 중계하기 바쁘거나, 노력을 아예 안 하는 것처럼 간주하는 식으로 싸잡아 보는 부분이 있어, 아쉬운 측면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누적되어 좀 이런 잡글을 적게 되었습니다.

빵가게재습격 2010-05-11 01:00   좋아요 0 | URL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