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애도가 방방곡곡에 선포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애도는 정녕 '죽음'을 위한 것인가. 외려 이 애도는 '삶'을 건드리는 것이 아닐까. 애도를 삶이란 단어와 이어 붙이려는 것은 단순히 '음모'라는 흥미로운 게임의 언어를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 삼는 것은 태도다. 국가라는 녀석의 태도.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유를 쓰고 싶다. 평소에는 코빼기도 안 비치던 친구 녀석. 경조사로 바글바글한 때를 틈타, 상처 주는 말들, '오바스러운' 칭찬을 늘어놓는 말들을 하는 녀석이 있다. "야, 이거 나한테 다 맡겨, 이런 건 또 내가 전문이잖니?","야, 뭐하니, 얘 울잖아. 좀 잘하지 그랬냐, 아이그."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야, 너 쟤 알아?", "웃기는 녀석이네. 평소에는 그렇게 연락해도 안 보이더니, 지가 뭐라고 참 나.." 그러나 그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신이 나 알아서 완장을 만들어 차고 이런저런 지시를 내린다.


'애도부장'으로서의 국가. 국가는 양 팔에 애도와 선도라는 완장을 차고 나타나, 죽음을 이상한 방식으로 추모하게 만든다. 외려 크리넥스 한 통을 다 쓰고 싶을 정도로 펑펑 울고 싶은 사람들을 멀리 쫓아 버렸다. 남은 건, 죽음을 진정으로 애도하라고 강요하는 자의 지휘, 그리고 그 죽음의 뒤에 뭔가 구린 게 있다는 뒤숭숭한 뒷담화의 실천가들. 죽음 그리고 그 죽음으로 뒤덮어야 마땅하다는 명령으로 채워진 요상한 시간. 이 시간 속에서 우리의 믿음직한 애도부장은 궁시렁궁시렁 대는 자들에게는 "어허, 어디..이런 엄숙한 자리에서..그런 망발을.."이라며, 분위기를 잡는다. 혹은 좋은 일이 있어 같이 축하해주는 왁자지껄한 광경이 있는 옆집 분위기가 거슬려 "저기요. 지금 이 분위기에 그런 웃음이 나와요"라며, 시비를 건다. 옆집은 당황스럽다. 웃고 싶은데, 내 맘대로 못 웃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애도부장이 잘 있는 사람들의 '선도부장' 노릇까지 하니, 안 그래도 튀어나온 입이 더 나올 것 같다. 그래서 나의 입에 갑자기 쑥 튀어 나온 한 마디. "시체들이 살아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것은 '음모'를 위한 것이 아니다. 국가의 태도에 대한 비뚤어진 반항심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이 반항심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약간 허용해주길 바라는 상상.(유가족에게는 미안하지만) 정말 시체가 살아나, "나 너 정말 아꼈던 것 알지?"라며 침 냄새나는 눈물을 흘리는 녀석 앞에 딱 나타나길. 그랬을 때 녀석이 느끼는 당혹감. 그 녀석의 뒤에는 살아있는 시체를 반기는 자들의 환호.


그러나, 지금 이 밤에 그들의 환호는 금지된 상상이다. 오직 허락된 것은 침묵. 애도라는 선한 이름으로, 영웅이라는 믿음직한 표현으로 설레발치는 녀석의 '왁자지껄한 울음'만이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수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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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0-04-28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적인 것'으로서의 '국가'라고 더이상 볼 수 없을 듯해요. '국가'를 사칭한 사익추구 세력들이죠...

얼그레이효과 2010-04-28 07:47   좋아요 0 | URL
적확한 표현이십니다. 로쟈님. 맞아요, 정말 '그들만의'국가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2010-04-28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장례식이 있던 저녁, 라디오에서 나오는 '영웅', '헌신', '그토록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국가' 등의 언술로 외려 그 죽음들이 함부로-한 번 더- 살해되는 것이 못 참겠더군요. 그래서 들리든가 말든가 외쳤죠. 그 죽음은 헌신이 아닌 '희생'이며, 그들이 죽어가며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건 바로 삶일거라구요!!

얼그레이효과 2010-04-29 12:59   좋아요 0 | URL
지키고 싶어했던 건 삶. 와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