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나도, 이 글을 쓰면서 그 지겨운 '문화연구의 성찰게임'에 다시 발을 담그는 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우연히 본 한 소논문이 나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한국언론정보학회 '비판언론학 20년의 성찰과 전망'세미나에서 나온 <현존하는 적대,부재하는 이론 : 미디어문화연구의 비판적성찰>이란 글인데, 나는 미디어문화연구자들이 그동안 미디어문화연구의 위기를 진단하는 성찰과 논쟁을 보고, 이를 '미디어문화연구의 성찰게임'이라고 부르고 있다. 내가 '성찰게임'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이 성찰이 문화연구에 더 나은 진전을 가져다주기보다는, 뭔가 그러한 성찰을 제기하는 연구자의 과잉된 욕심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욕심은 결국 미디어문화연구의 진보라는 큰 목적을 뒤로 제낀 채, 연구자 개인의 무오류성과 미디어문화연구라는 필드 안에서 선구자적인 성찰적 위치에 자리 서서,문화연구의 오류를 발가벗기겠다는 과욕의 수사만이 넘치다는 걸 예전부터 느껴왔다. 

문화연구가 맥을 못추고 있는 현실은, 정작 문화연구의 성찰게임에 알맹이가 없다는 것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문화연구를 비판적으로 돌아보자고 하는 이들도 지극히 제한적인 점도 문제다. 전규찬,원용진,이영주,박성일 등등등 문화연구의 성찰게임에 맛을 들인 자들이 보이는 전술은 좌파,우파라는 정치적 스탠스와 적절한 긴장감을 조성하지 못한 채, 그들만의 계몽을 수행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진보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이 바로 삶의 정치라는, 그 지겨운 비판이 계속되고 있는 지금, 그런 진보를 자처하고 있는 문화연구자들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 속한 학문 사회 내 삶의 정치를 제대로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이 벌이고 있는 착각은, 자신들의 성찰, 사실상 문화연구가 왜 이 모양이 되었냐라고 한탄하는 그들의 성찰이 당위 >현실이라는 입장에서 지나치게 주도권을 잡으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 고로 그들은 마치 앤서니 기든스가 '설득'이라는 말을 상당히 모호하고 교묘하게 자신의 대안으로 내세워, 수사를 실체적 대안으로 포장한 것처럼, 그들은 성찰과 논쟁이라는 말, 그것에서 오는 구체적인 경합 지점을 전혀 마련하지 못한 채, 그들의 강령을 전달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문화연구가 정치성이 약하다, 미국의 실용적인 포스트모던한 문화연구 때문이다, 문화연구에 한국이 있는가, 문화연구가 소수자의 정치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문화연구는 이론을 너무 실용적으로 소비한다 등등등 문화연구에 대한 비판과 옹알이는 사실상 새롭게 더 제시되는 문제점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점의 순환'을 체현하고 있다. 그러한 순환이 계속되는 이유는, 바로 이 논문이 드러내는 문제점이다. 이들은 문화연구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돌아보고, 이를 다시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을 거치는데, 이들은 여기서 지젝을 건드린다. 지젝이 문화연구를 비판하는 견해를 가져와서, 한국의 문화연구를 비판적으로 바라봤던 자들의 의견을 결합시키는 작업을 시도하는데, 나는 사실 이런 시도가 불만이다. 이것은 사실상 문화연구자들이 지겹게 문화연구에 대해 쓴소리를 해대는 것, 문화연구의 그 탐욕스로운 이론의 습득,소비,이식과정, 특히 나름 유행이되고 인기가 있는 지식에 대한 열정적 섭식을 또 한 번 저지르는 것이 아닌가. 

그런 측면에서 오히려 문화연구를 정공법적으로 비판하는 게 필요하다. 홀,윌리엄즈,그로스버그와 싸우며 문화연구를 보다 키울수는 없는 것인가. 결국 문화연구를 진정성있게 비판한다는 그들도, 가장 '트렌디하게'비판하는 굴레에 들어가고 만다. 문화연구에 대한 비판적 지점을 문화연구 내부에서 찾자. 즉, 역사적인 작업을 통해, 문화연구적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정면으로 돌파하자. 그러나 이 논문의 저자들은 정작 문화연구를 비판하는 자들이 우회의 길을 걷고 있다면서,오히려 자신들이 문화연구의 이론적 다양성을 무기 삼아, 이른바 권력적 외부 형태의 지식(지젝,무페)을 무기로 하여, 그렇게 문화연구를 비판하고 있으니, 이것만한 모순이 없다. (차라리, 제임스 커런과 몰리 간의 논쟁이 훨씬 문화연구에 더 유익한 시간을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 연구 방법의 오류 -기호학과 텍스트 과잉 이라는 챕터는 더욱 가관이다. 이것은 흡사 구조주의와 문화주의에 대한 문화연구적 개관의 시기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는데, 논문의 저자들은 한국적 문화연구를 비판적으로 돌아본다면서,되려 한국적 문화연구에서 기호학과 텍스트 분석에 제대로 천착한 논문들이 최근까지의 경향인가를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묻고 싶을 만큼 괴리적이다. 오히려 한국의 문화연구는 텍스트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망각하고, 그것을 컨텍스트의 분석으로 은폐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 이들은 구조주의가 전통적으로 받아왔던 비판, 역사적 시각의 망각 운운하며, 자신들의 강령을 전파하고 있는데, 이것은 너무나 오늘날 문화연구의 한국적 현실과 괴리적이다. 한국적 문화연구에서 지금 젊은 연구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한 상태에서 비롯된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컨텍스트와의 긴장감 설정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문화연구는 마치 '반텍스트'적이며, 심지어 문화연구를 한다는 사람들도, 문화연구를 컨텍스트 연구로 환원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문화연구의 성찰게임에 내가 점점 기대를 가지지 않는 이유는, 문화연구의 성찰을 강령화하려는 움직임이다. 이들은 감정과 논리를 혼돈하고 있다. 그래서 더 과장된 수사와 우회의 전략이 성찰을 뒤덮고, 문화연구적 본질에 대한 정공법적 탐색을 또 다른 이데올로기에 헌납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연구의 성찰게임은 좀 다른 형태로 전개될 필요가 있다. 다시 호가트를 불러내고, 몰리를 불러내며, 헵디지를 불러내야 한다. 왜 성찰을 한다면서, 계속해서 문화연구의 내부자를 소외시키고, 문화연구의 외부자로 내부의 문제를 덮으려 하는가. 오히려 이것은 문화연구에 신념을 가진 성찰적 주체들이 문화연구를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또다른 절망의 반영인가. 우리가 들일 노력의 시간은 지젝의 문화연구 비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쌓아야 할 비판적 자성의 시간은, 버밍엄문화연구소이며, 스튜어트 홀이며, 레이먼드 윌리엄즈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왜 이 당연한 성찰의 지점을 망각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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