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 내가 고민했던 주제를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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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도되어야 할 문화연구 
  

얼그레이효과 혹은 김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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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이후, 많은 이들이 불쾌한 심정을 드러냈다. 자연스레 이 불쾌함은 문학을 한다는 사람들, 소위 내가 '문학 내부자'라고 지칭하는 이들의 많은 공격을 받았고, 이 공격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 쉽게 생각해서, 실컷 문학을 하겠다고, 문학에 일념을 바치겠다고 하는 이들이 많은 가운데, 그것도 일본 비평가가 - 사실 '일본'이라는 국가에 스며든 이 전통적이며 은밀한 적대의 자연화는 강하게 존재한다. 그것이 단지 지성의 시장이라는 외피를 둘러싼다고 해도 말이다. 이러한 포장 벗기기에 대한 지적은 한국의 문학평론가들도 일부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다 - '감히!' 내가 충분히 즐기지도 못한 문학에 애도를 표하고 있는 작태는, 제법 배가 아팠을 것이라는 건방진 추측을 해본다. 그러나, 문학을 심층적으로 알지 못하는 나로선 - 적어도 '문학 초보자'로서 고급반에 입문하려는 관심이 있는 나에게- 이런 '선언'이 갖는 환기 효과는 상식적인 수준에서라도, 이 사회를 지탱해오고 있는 존재들에 대한 위기의식을 그 존재를 사유하는 자들이 어떤 전략을 가지고 바라보는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소중한 위기의 광경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나는 이 위기의 광경에서 어떤 말을 끄집어내려 하는가. 거창한 기대감을 충족시켜 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과잉된 인정투쟁을 통해 지식 장의 주변부에 머물며 옹알이를 꾸준히 해대고 있는 문화연구라는 진부한 탕아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2


문화연구는 대체 무엇인가? 문화연구자들은 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이러한 질문은 흥미롭지만 구슬프게도 여전히 문화연구를 한다는 사람들 곁에 유령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문화연구자들은 다른 이들에게 "나! 문화 연구하는 사람이야!"라는 수줍은 고백을 한 채, 거기서 위안과 자괴감이라는 양가감정을 동시에 갖는다. 외국의 어떤 문화연구자는 문화연구의 왕성한 학제적 움직임을 상찬하려는 의도에서, 문화연구가 여러 군데에 부딪히는 파도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이 '유훈'같은 말에는 '겸양된 과시'가 숨어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문화연구는 여전히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듯한 외로운 섬과 같은 존재다. 그래서 문화연구자들은 제발 나를 좀 봐 달라고 애원한다. 그러한 애원의 대표적인 전략 중 하나는, 자신이 접촉하고 있는 장르에 대한 소개와 이 장르를 문화연구라는 양념을 발라, 어떻게 다른 요리로 업그레이드시킬 것인가에 대한 매뉴얼 만들기다. 문화연구자들이 정성스레 쓴 논문들을 보면, 선거에 당선되기 위해 만든 공약을 소개하는 느낌이 강하다. - 그러나 이 공언은 곧 허언에 처할 운명에 있다 - 그들은 늘 자신의 처지를 봐달라고 소개한다. 이런 식으로!


"여러분, 이제 문화연구는 문학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왔습니다. 이 연구는 한국에서 거의 최초로 이루어진 문화연구 안에서 문학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고민입니다 / 여러분, 이제 문화연구는 세상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야 할 때입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미디어 ․ 문화연구'라는 제도적 명명에 갇혀, 미디어에 국한된 연구에 몰입해야 하나요. 우리는 이제 미디어의 범위를 확장시켜 이 도시를 연구하고, 88만원세대 담론을 보다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 여러분, 이제 우리는 다문화주의라는 관점 안에서 우리 안의 소수자들을 연구 안에 데리고 와야 할 때입니다. 그것이 바로 문화연구의 본질입니다. / 여러분, 문화연구의 본질로 돌아갑시다. 문화연구가 애초에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우리는 '신좌파적' 사유의 오리지널리티를 다시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약이 지어놓은 식당에 들어가보면, 정작 맛이 없다. 심지어 그 식당에는 음식이 없기까지 하다. 이것은 왜? 일단 좀 쉬운 수준에서 보자면, 문화연구자들의 초대는 (인터넷 관용어구로 표현하자면) '떡밥이 상한 경우'가 많다. 즉, 문화연구자들은 늘 자신을 사회 현상에 대해 적극적이며 친근한 사회적 존재자로서 상정하지만, 그러한 상정이 주는 안이한 환영은 그들이 얼마나 사회로부터 멀리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들은 늘 푸코 흉내를 내며 진리에 의문을 품고, 사명감을 가진 기자 흉내를 내며 세상을 구원할 것처럼 글을 쓰고 발언을 하지만, 거기엔 진리에 대한 끈질긴 사유는 없다. 다만, 진리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다는 과정의 날인만이 살짝 찍혀 있을 뿐이다. 슬라보예 지젝이 말한 대로 '대용품 철학'으로 간주된 문화연구가 갖는 난점, 즉 자신들이 드러내고 싶은 진실이 숨어 있는 공간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적대'를 너무 안이하고 과장되게 '적대'하는 사유는, 자신의 안일한 탐구의 태도를 감추려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리하여 문화연구자들은 '신자유주의'라는 대상을 적대의 우상으로 삼는다. 그들은 그것을 붕괴하기 위해, 일단 '신자유주의적'이라는 수사를 깔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것이 주는 친연성은 그들에게 문화연구를 하고 있다는 적절한 위안을 줄 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이런 비판을 왜 하게 되는지를 스스로에게 지겹게 질문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질문은 문화연구가 도대체 신자유주의에 어떻게 대항할 수 있는 거야? 문화연구는 대체 뭐 이리 영향력이 없어?라는 일정한 냉소주의를 친구로 사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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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가 냉소주의와 맺는 친연성은 아이러니하게도 문화연구를 좌파와 진보라는 영역에 당연하게 동일시하려는 데서 나타난다. 왜 '아이러니하게도'라는 말을 쓰는가. 그것은 앞에서도 약간 언질을 주었지만, 좌파와 진보라는 레떼르 아래, 문화연구를 하는 '나'가 사회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으며, 문제화되고 있는 현상에 대한 건실한 비판자로서, 그 위치를 충분히 담당하고 있다는 인식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반문의 한 입장으로, 문화연구의 원로들을 떠올리며, 이 원로들이 다져놓은 정치적 이념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이념 제시를 고수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기원 회귀의 전략'은, 고작해야 자신을 문화연구라는 장 안에서 혁명적 기운을 제시할 수 있을 만한 기대주라는 외피를 부여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부르디외가 무섭게 깔아 놓은 사회학적 사고를 알고 있지 않은가. 기원 회귀를 주창하는 자들이 내세우는 장 내 도전자들의 전략은, 사실상 장 자체의 패러다임을 바꾸려고 하진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지분'을 달라고 하는 것 외엔 다름 아니다. 상징화된 권력자들을 더욱 권력자로 만들면서 말이다. 지금 와서 '신좌파적 사고'를 회복하자고 하는 / -소위 《문화과학》 을 열심히 챙기는 어느 학자의 말을 상기해본다 - 문화연구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이들의 주장엔, 과연 문화연구에 본질이라는 것이 있는가라는 문제적 사유가 삭제되어 있다. 문화연구자들은 사실상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을 찾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문화연구자들은 진리를 자신의 친구로 여긴다. 자신은 곧 문화연구를 함으로써 이미 진리는 자기의 것으로 기정사실화되어 있으며, 이러한 망각은, 곧 가장 뜨거운 인본주의적인 외피를 쓴 연구로, 인간을 소외시키는 비극을 초래한다. 이미 있다고 가정된 그 진리에 대한 선점 의식은, 사실상 문화연구에게 '정치적 올바름'이란 기이한?) 선물을 주었다.


4


"정치적으로 올바른 문화 연구는 진리(관여된 주체적 입장)와 지식을 혼동함으로써 - 그 둘 사이를 갈라놓는 간극을 부인하거나 지식을 진리 아래 직접 복속시킴으로써(예컨대 양자 물리학이나 생물학 같은 지식 분야가 지닌 고유한 개념 구조에 대한 적절한 숙지도 없이 사회 비평적인 안목만 가지고 이런 특수 과학을 성급하게 폄하해버린다)- 어떤 문제에 접근하는 진지한 태도를 결여하고 있는 데다가 오만하기까지 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특수한 분과 학문적 숙련성의 결여라는, 흔히 지적되는 문화연구의 문제점이다. 가령 문학 이론가가 제대로 된 철학적 지식도 갖추지 않은 채, 헤겔 철학을 남근-로고스-중심주의라고 험담하는 글을 쓴다거나 영화나 뭐 그런 다른 영역들에 대해서도 섣부르게 덤비는 것 등등의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 여기서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적절한 지식도 없이 모든 것에 판단을 내리려 드는, 일종의 그릇된 보편주의적 비평 능력이다. 전통적인 철학적 보편주의에 온갖 비난을 퍼부었던 문화 연구가 실은 자신을 일종의 대용품 철학으로 내세우고 있는 꼴이다. 문화 연구의 막연한 관심들이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띤 보편 개념으로 변용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령 탈식민주의 연구에서 '식민화'라는 막연한 관념이 헤게모니를 쥔 개념으로 취급되기 시작하면 그것은 이내 보편적 패러다임으로 격상되며 급기야는 양성 간의 관계에서 남성이 여성을 식민화한다거나 상층 계급이 하층 계급을 식민화한다는 식의 이야기들이 줄을 잇게 되는 것이다. "(Žižek, 2001/2008,p.341~342)


자, 지금까지 내 사고와 접촉한, 이미 잘 알려진 지젝의 문화연구에 대한 독설이 여기 있다. 지젝은 문화연구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지젝은 문화연구자들이 뭘 해보려고 하는 것은 알겠는데, 늘 어설프다는 것을 본문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듯하다. 건방지게 이 인용문에서라도 지젝의 머릿속을 해부해보면, 그는 '개념 구조에 대한 적절한 숙지도 없이', '적절한 지식도 없이', '막연한 관심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문화연구자들의 자세를 문제삼는다. 하지만 어디 이런 문제적 자세가 문화연구자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겠는가. 지적 태만은 비단 문화연구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좀 더 차분하게 바라보면 '문화연구적 태만'이라는 개념은 충분히 만들어질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문화연구적 태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것은 소위 '문화연구적 정신'이(라는 것이 있다면) 인도주의로 귀결되는 과정에서 안일하게 포섭되는 이론적 전유의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 사회에서 무수하게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은 문화연구자들은 기본적으로 많은 이야기들을 학계의 동료들과 혹은 학계 밖 지인들과 나누면서, 그 중에서 소재를 골라잡는다. - 뭐, 자신이 잘 가는 인터넷커뮤니티에 논란이 일고 있는 사안을 주목하거나, 자신이 잘 보는 특정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고르는 경우도 있지만, 소재를 찾기 위한 담화에 이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으니, 생략하기로 하자 - 문화연구자들은 제도권의 유행어, "야! 그것 참 재미있겠다!"라는 흥미를 유발하는 듯한 소재를 골라잡은 뒤, 이제 논문으로 벼려낼 궁리를 한다. 여기서 문제는 문화연구가 시도하는 비평적 기획을 논문이란 틀로 실천하는 것이 적절한가? 즉 1990년대 후반 한국 지식계에 반짝 등장했던 '논문중심주의'같은 비판 담론이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연구 논문이란 틀 속에서 문화연구자들이 사회 문제에 개입할 때, 그것을 문제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다.  

 

이것은 다른 한편에서 문제적이다. 이전에 A라는 문제에 대해 열광적인 성토를 논문 속에 뿜어내던 한 문화연구자가 B라는 사회적 문제에 접근할 때 그 분노 섞인 정치적 올바름은, 현상에 어설픈 연민을 지식으로 재현/연기한다. A라는 문제에서 B라는 문제로 전환할 때, 문화연구자들은 자신들의 고민이 전환되고 있는 것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다. 이것은 문화연구자들이 한 문제에서 다른 문제로 자신들의 학문적 관심을 옮기는 것을 힐난하는 게 아니다. 이는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을 찾는 진리의 친구인 문화연구자들에게 타자는 그들의 지적 분노의 대상이지, 비평의 대상으로는 정작 자리잡고 있지 않다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다. 문화연구자들은 그리하여 '연민적 타자'라는 정치적 올바름의 대상을 잘 모셔놓은 채, 성실하게 그 타자에게 제공할 지적 무릎담요를 찾거나 만든다. 이 지적 무릎담요를 찾거나 만드는 과정, 즉 문화연구자들이 타자가 있는 어느 현상에서 그 타자를 감싸기 위해 취하는 이론적 전유가 왜 인도주의로 가야하는가에 대한 물음. 문화연구자들은 그것을 금기시할 것이 아니라, 당연한 성찰적 의문으로 드러내야 한다. 이러한 의문을 은폐한다면, 최근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란 개념이 아주 당연하다는듯이, 다중, 마이너리티, 소수자, 이주노동자들에 접착되고 있음을 우려하는 김 항의 주장은, "왜 네가 이론을 소개했다고 해서, 너만 그 이론을 독점하려는 것이냐! 인문주의자들, '사회인문학'이니, '실천인문학'이니 하더니만, 아직도 그 전통적인 인문학적 습성(?)이라곤"같은 엇나간 비난에 매도당하기 쉽다.



5


"문화 연구에 대하여 우리는 벤야민의 오래된 질문을 다시 한번 던져볼 필요가 있다. 즉 그들이 권력과 어떤 명시적 관계를 갖는가가 아니라 지배적인 권력관계 안에서 그들 자신은 어떤 자리에 놓여 있는가라고 물어야 하는 것이다. 문화 연구가 지배적 권력 관계를 폭로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권력관계에 동참하고 있는 자신의 사회적 존재 양태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비판적이고 자기-성찰적인 척하기만 할 뿐인 그런 담론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푸코가 '억압하고'/ 금지하는 사법 권력과 대비시켜 무언가를 생산하는 '생명-권력'이라고 불렀던 개념을 문화 연구에 적용해본다면 생산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성을 규제하는 '억압적' 담론들이 실은 성의 번창과 완전히 상보적인 관계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 연구라는 분야도 오늘날의 전 지구적 지배 관계를 위협하기는커녕 그러한 지배 관계의 틀에 꼭 들어맞는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가부장적인/자기동일성에 집착하는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비판이 그런 것들을 전복하기 위한 의지라기보다는 그에 대한 모호한 매혹에 빠져있음을 무심코 드러내는 것이라면 어떨까?"(Žižek, 2001/2008,p.344)


이 엇나간 비난을 촉진하는 것은 지젝이 언급한 문장, 문화연구가 지배적 권력 관계를 폭로한다는 것을 자임하면서 동시에 망각하는, 권력관계에 대한 동참에 대한 의문을 문화연구자들이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로 문화연구자들은 자연스럽게 신자유주의의 이상적인 비판자로, 진보주의적 사상을 체화한 이론가로 인식된다. 그러면서 문화연구에 사라지는 것은 논쟁이다. 고로 증가하는 것은 같은 테두리 안에서 땅따먹기다. 이 땅따먹기는 자유로움 속에서 느슨한 어떤 문화연구적 규범을 알고 있는 이들의 공약 제시의 남발이다. 그러나 이런 문화연구자들의 자기 문제에 대한 공약은 스스로를 군소정당의 대표로 남게 할 공산이 크다. 그러한 위기를 알고 있는 자들은 이제 매우 무감각해진 '성찰 게임'을 즐기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그들은 문화연구에 대한 '반-문화연구적'인 영역은 비평의 대상으로 고려하지 않은 채, '문화연구자'라는 동인들에게 문화연구를 반복적으로 강의하는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강의의 풍경을 과감하게 버릴 필요가 있다. 공부는 스스로 하게 놓아두자. 다만 그 공부한 것을 서로 공개하며 다툴 필요가 있음은 지금 문화연구에 절실하다. 논쟁하지 않은 채, 소개만 하는 문화연구 안에서, 그들이 삼고 있는 위안이란, "자네, 참 흥미로운 연구 주제를 잡았군"같은 진부한 인사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문화연구라는 제도 안에서 허용된, 이 방대한 지식을 충분히 접촉할 권리를 잡은 시간을 사유하기다. 이 시간을, 이 시간의 권리를 마땅히 사용하기 위해 '문화연구 사전'같은 안일한 작업이나 하는 학자의 주장을 순진하게 따르며, 그 사전 속에 소개된 용어를 순순히 암기하는 멍청한 짓은 집어치우고, 그 용어 자체가 왜 문화연구와 만나야 하는지, 그리고 그 용어를 둘러싼 인식론은 무엇인지 우리는 좀 더 괴로운 싸움을 펼쳐야 한다. 그 싸움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작 '정치적 상상력'같은 진부한 수사 아래, 날마다 유입되는 새로운 가면을 쓴 이론의 등장에 기립박수를 치며, "자네, 이 이론 아나?"같은 호들갑스러운 연기를 또 해야 할지 모른다. 이 연기는 충분히 / 마땅히 애도되어야 한다. 애도는 곧 극복을 위한 과정이기 때문에. - 끝 -


[참고] 주로 슬라보예 지젝(2001),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한보희 옮김(2008), 새물결, 291~349쪽을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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