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소통법
강준만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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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이란 단어를 넌지시 쳐다보고 있으면, 이것은 어떤 '요구'를 기본적으로 가정하는 것 같다. 소통이 너무 잘 되어서 '소통'이란 단어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소통'이 너무 안 되기 때문에, 그 단어를 필요로 하는 상황 혹은 요구하는 시간. 그렇다. 소통은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갈급한 무엇이었다. 그것은 넘치지 않았으며, 그렇기때문에 늘 결핍의 무엇으로 자리잡은 채,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그것은 실천의 단어였으며, 현실의 단어였다. 워낙 '이상적'인 단어의 지위에 올랐기때문에,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는 만큼이나, 실제로 그것을 구현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은 그리고 우리는 적어도 '사회'라는 것을 생각하는 자아가 있는 스스로에게 '소통'이란 것을 어느 한 구석에 놓아둔다.  

긴 상황 혹은 맥락을 설명하지 않더라도, 요즘만큼 '소통'이란 단어가 불편한 적은 없을 듯하다. 그 분의 노력이기도 하지만, 이건 내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책이 그리고 이 책뿐만 아니라, 강준만이 여러 책에서도 늘 강조하는 '진영'을 넘어선 이상적 가치. 그것을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 제대로 실천하기가 어렵다. 강준만의 책을 좋아하는 당신이라면, 그가 얼마나 '뭉쳐 있음'을 싫어하는지 알 것이다. 이 '뭉쳐 있음'은 물론 연대와는 다르다. 연대는 '뭉쳐 있음'이 아닌, '묶여 있음'이며, 그 '묶여 있음'은 언제든지 풀릴 수 있는 '느슨한 자율성'을 기본 조건으로 갖는다.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자면, 우리는 '진영을 위한 소통'이 아닌, '진리를 위한 소통'을 해야 한다. 이 소통의 방식은 역사를 통해 줄곧 강조되었던 것이었지만, 그리고 사람들은 정치인에게 늘 이것을 주문하지만, 사실 이러한 주문이 매번 빗나가는 것은, 현실정치에 대한 지나친 환멸로 자기 위안을 삼으려는 대중들의 문제 때문이기도하다.   

보론에서 강준만이 넌지시 내비치지만, 고인의 죽음과 그 죽음으로 인한 어떤 원한의 심정들이 그 자체로만 그쳐버린다면, 그 죽음을 통해 진정 우리가 그를 애도한다는 것의 의미는, 단순한 현실 정치에 대한 망각 차원에만 머무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의 정치를 망각할 것이 아니라,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그 극복을 위한 노력을 더 이상 (이택광의 표현을 빌려)' 먹고사니즘'의 가치에서만 판별할 수는 없다.  

소통이 왜 지금 불편한 심경으로 다가온 단어가 되었는가. 그것은 소통이 주는 이상적 색채가 우리들의 뇌리에서 떠나가고, '소통'이란 단어를 에워싼 그 수많은 '허언'들에게 우리 스스로가 많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소통한다는  것에서 소통의 비극을 먼저 상상하게 된 우리들의 내면은 이미 '정치의 불통화'를 예상하고 목도하며, 또, 더 나아가 '불통의 정치학'이라는 안타까운 광경으로 채워져있다는 점. 그것을 우린 무시할 수 없을 듯 하다. 불통의 정치학은 즉, 소통에 대한 냉소로 다가온, '탈정치적' 방식일 수 있다. 내가 참여하고 개입해야 할 정치적 사건, 정치적 현상에 대해 '통하려 하지 않는 것', 그것을 자신의 정치적 최후의 보루이자, 일종의 '참여'라고 자족하는 상태 또한 우리는 머나먼 나라의 일로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강준만은 이 책을 통해 '집단과 진영'의 '뭉쳐있음'을 깨고, '지위재'의 오만한 불통을 고치며, 더 나아가 '급진적 보수', '보수적 급진'이라는 중간파의 태도를 인정할 것을 촉구한다. 강준만의 책이 그렇듯, 이 책은 강준만이 늘 강조해왔던 주제들의 '동어반복'일 수 있다. 많이 낯익고, 자주 겹친다. 이것은 과연 그의 멈추어 있음인가. 아니면 그만큼 우리 사회가 그의 예전 주장의 한 톨이라도 바뀌지 않았기때문에, 그가 하는 지금 이 말이,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그의 지적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다만,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소통의 열정은 왠지 처음부터 점검해봐야 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강준만의 책 중에서 가장 '윤리적'인 저서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이 어르신의 일관된 비평적 시선에서 어느덧 '한 원로의 비평'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을 정도의 어떤 준엄함도 느껴진다. 그가 내 청소년기에 주던 '짜릿한 자극'의 소통도 이제 조금 둔감하게 느껴지는 것 보니, 내가 이 '자극적인 사회'와 잘 소통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강준만의 글-세계와 잘 소통하고 있는 건지. 애매하다. 그 애매함의 여백때문에 소통은 또 '요구된다'. 뭔가 초심을 잃었을 때, 가장 쉽게 생각하고 있었던 무엇이 잘 안 잡힐때, 마음의 사전처럼 복기하면서 읽으면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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