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 주디스 버틀러, 가야트리 스피박의 대담
가야트리 스피박 외 지음, 주해연 옮김 / 산책자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국가'를 볼 수 있을까. 우리는 불가피하게 '국가'를 소환해야 할 것 같다. 국가는 '국가'에 살고 있다는 우리에게 그것을 '인식'으로 혹은 '존재'로 여기게 한다. 국가가 '인식'이라면, 그것은 국가 안에 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느끼는 심리적 위안 혹은 불편함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가 '존재'라면, 그것은 사실 '인식'과 동떨어질 수 없는 범위 가운데, '나'가 처한 현실의 조각들을 몸소 체험하고, 그 체험을 통해 '국가'를 '깨닫는'것을 말한다.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쥬디스 버틀러와 가야트리차 스피박의 대담은 국가를 인문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정치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문화학적으로 소환하면서, 국가를 하나의 '모습'으로, 하나의 '생각'으로 다시 이야기해볼 것을 간,직접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쥬디스 버틀러는 '언어'를 통해 국가를 재정의한다. state는 국가라는 뜻과, 상태라는 뜻을 둘 다 갖고 있는데, 버틀러는 이 두 뜻을 같이 가지고 가면서, 국가를 '상태'로 규정한다. 국가가 '상태'일 때, 국가는 일정한 모습을 띈다고 할 수 있다. 국가는 건강한가? 국가는 아픈가? 국가는 씩씩한가? 국가는 우울한가? 우리는 매일 뉴스를 보면서, 사실 국가의 상태를 목도하고, 점검하고 있다. 국가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은 그러나, 주권과 자유라는 가치 속에서 그것의 색다른 모습이 있다는 것 또한 알게 한다. 우리는 오늘날 주권과 주권의 충돌을 통해 더 나은 주권이 그것보다 더 낫지 않다고 하는 주권들을 말살하는 장면들을 자주 체험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질문할 것이다. 어는 것이 더 '나은' 주권인가? 우리는 이것을 국가가 할 일이라는 이유로, 혹은 일상의 애매모호한 기준으로 인해, 그냥 거기에 맡겨놓고 사는 것이 대부분이다. 국가를 향해 처절하게 투쟁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재미있는 구경거리' 혹은 '내 알 바 아니요'주의로 쉽게 간주하는 것은 자신만큼은 우월한 주권의 편에 있다는 큰 오만함과 착각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을 버틀러와 스피박은 도전적으로 묻는다. 버틀러와 스피박은 한나 아렌트와 조르조 아감벤 등이 주장한 정치철학적 관점을 비판적으로 읽어내면서, 과연 이 시대에 민족- 국가는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따져본다.  

다 알다시피, 주권이라는 것이 성립되면서, 그 주권이 모든 주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주권을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일상 속에서도 체험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세계의 차원에서 더욱 심각하다. 전쟁을 통해, 평화와 가까이 했던 사람들이 소유하던 풍경은 어느새 권력의 우열 관계 속에서 빼앗기게 되었다. 그것을 다시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러나 점점 또 다른 주권자들의 목소리에 의해 타자화되고, 그 타자화의 효과는 결국 인간을 둘러싼 '평등 의식'이라는 것을 '텍스트' 이상의 가치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배운' 평등으로서 평등을 충분히 학습했다고 자위하지만, 그러한 의식이 배움 이상의 것으로 나아가게 하진 않는다. 배운 평등이 아닌, '생각하는 '평등이 필요한 이 시기에, 이 책이 논의하고 있는 '벌거벗은 삶'을 사는 사람들을 위한 희망 공간을 마련하는 학문의 의지는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지식시장에서 이런 책들이 나올 때마다, 가장 앞장서서 이 이론의 실천성을 박제화시키는 것은 바로 이론을 다루고 있는 학계 사람들이라는 점이 안타까운 아이러니다. 자신의 지성을 내세워, 그것을 자신의 방식대로 소비한 뒤, 그것의 소비를 일종의 자기 자랑으로 내세우는 지식 노동자들의 행위는 사실상 '성실한'것이 아니라, 얄팍한 이론 수입에 능한 지식상인의 '재주'인 것이다.  

 나는 이 책이 또 다른 '성실성'을 추구할 수 있는 매개가 되길 원한다. 그 성실성은 바로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세계 속 장면들과의 끊임없는 부딪힘이다. 이 책에 나온 해외 불법 이주자들의 저항은 사실 '해외토픽'이라는 소소한 흥미거리가 아니다. 그 흥미거리로서의 인식을 뛰어 넘어,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삶의 풍경에 스며들어, '스며듦의 사유'를 전개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하였을때, 버틀러가 지적한 '상태'로서의 국가는 상당히 흥미롭고 적절한 개념인 듯하다.  

우리가 국가를 '상태'로 생각했을 때, 국가가 갖고 있는 모순들은 더욱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국가의 건강성을 보장하는 이 정부의 획일화된 언어는, 결국 그 언어의 힘 속에서 또 다른 건강하지 않음을 가려버린다. 그러한 건강하지 않음 속에서 '국민'들은 삶의 공기가 탁함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게 만드는 국가의 '자세'는 그것에 저항하는 국민의 '행위'를 너무나도 안이하게 '반(反)'이라는 언어로 규정해버린다. 더욱 문제인 것은 그러한 국가와 개인 간의 관계 가운데, 삶을 살아가는 자신의 권리를 그냥 놓아두는 것 자체만으로, 자신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그 권리 자체를 여전히 잘 지키고 있다는 대중의 인식이다. 권리라는 것은 행사함으로써, 그 모순과 발전을 함께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권리'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 '권리를 위한 권리'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본 책의 메시지는 그래서 소중하다.  이런 맥락에서 주권과 주권이 충돌하고, 이 충돌의 과정이 결국 한 국가 안의 사람들 간의 이질성을 자연스럽게 생산한다. 내가 갖고 있는 주권은 더 나은 주권이며, 더 나은 주권은 '당신'이 가진 주권은 별로 생각할 가치가 없으며, 이로써 당신이 삶을 살 '자격'마저 어쩔 수 없는 강함과 약함의 운명 속에서 생각되어야 한다는 것의 굴레에 빠진다.  

이 운명의 갈등은 나는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자, 더 나은 사회로 가기 위한 통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그러한 통로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그 통로가 더욱 견실하려면, 우리는 '동등한' 게임의 규칙을 세울 필요가 있다. 그러나, 국가와 국가, 국가와 개인, 개인과 개인의 관계 속에서 이 '동등한' 게임의 규칙을 고수하려는 사람, 심지어 만드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다. 오직 자신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격'이 있다는 것에만 혈안이 된 사람들의 목소리가 자본의 힘과 결부되어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한나 아렌트가 주장했던 것처럼,,결국 인간이 인간의 평화를 위해 만들어 놓았던 규칙,,질서..법의 생산.,.그리고 그러한 제도의 증가가..인간의 행위 자체를 옥죄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딜레마를 어찌할 것인가. 정치를, 경제를 욕할 것인가? 그것은 너무 안이한 문제 해결 의식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행위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준엄한 자기 비판 의식이 없다면, 결국 우리는 '~탓'의 정치를 일상 속에서 순응적으로 체험하는 사람으로만 남겨질 것이다. 그리고 그 '~탓'의 정치는 그 어떤 해결의 실마리도 가져다주지 못한 채, 또 다른 이들의 생각을, 문제의식을 '구경거리'로만 간주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국가를 '상태'로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를 '~탓'으로 돌려, 국가 자체를 문제화하는 것을 넘어, 인간인 '나'의 상태와 함께 점검해야 한다. 그랬을 때, 우리는 얼마나 국가와 개인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국가가 인간에게, 인간이 국가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었는지를, 그리고 있는지를, 그리고 있을지를 복기, 분석, 예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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