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하이카라 여성을 데리고 사누: 여학생과 연애 살림지식총서 151
김미지 지음 / 살림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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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릴린 멜롬의 <유방의 역사>라든지, 한스 페터 뒤르의 <에로틱한 가슴>과 같은 책을 읽을 때면, 늘 국가의 이중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이중성은 정확히 누구에게 나타나는가? 일반화시키기는 어렵지만, 여성은 국가의 이중성에 의해 역사적으로 많은 피해를 받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넓게 나아갈 필요도 없다. 박정희 시대, 전두환 시대, 우리가 휘황찬란하게 여기고 있는 '경제적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국가가 은폐하고 있는 역사적 진실은 분명히 더 드러내야 할 부분이 많을 것이다. 남성 또한 그렇지만, 한국의 여성은 역사적으로 '동원'의 존재였으며, 그러한 존재를 뛰어 넘어, 여성의 능동성과 적극성을 모색하려는 작업이 이 순간 강해지고 있음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책 제목에서 바로 연상되는 것처럼, 이 책은 1920~30년대 한국 사회 내에서 학교를 다니며, 교육을 받았던 여성들을 국가가 당시 사회가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개괄한 책이다.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서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 암묵적으로 혹은 직접 드러날 정도로 '높은 교육을 받은 여성'에 대한 인식은 이중적인 것 같다. 그것이 이제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이면, 상당히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주위에서 많이 본다. 높은 학벌을 가진 남성 - 남편이 될 사람보다 좋은 학벌을 가진 여성이라는 구도가 있다고 친다면, 우리가 드라마에서 너무나 지겹도록 봤다시피, 여성은 '문제화'된다. 고집이 강할 것이다? 성격이 드셀 것이다? 등등등. 여성이 진정으로 그동안 갈고 닦았던 '능력'은 일순간, 하나의 '성격'으로 치환되고, 그 능력을 통해 사회에 나가서 말하려고 하는 진심은 다분히 논외거리로 치부된다. 바로 그 현실이 바로 오늘날의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바로, 역사가 필요한 것은 이 시점이다. 이것은 역사적 인식을 통해 과거의 형상을 되새기면서, 그 당시 사회가 갖고 있는 시대상의 면면들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그 면면과 오늘날의 풍경들을 비교하면서, 우리 스스로 어떤 자세를 갖는 것을 말한다.  

당시 이런 고등교육을 받는 여성들을 부정적인 스테레오타입의 범주 안에 넣은 대표적인 사람들은 바로 남성 지식인들이었다. 이것은 사실 이 시기의 일만은 아니었다. 예로 들어 우리에게 '현모양처'의 대표로 불려지고 있는 신사임당의 경우를 본다면, 신사임당은 당시 상당한 그림 실력을 갖고 있던 화가였다. 그러나, 신사임당의 이러한 뛰어난 실력이 점점 그러한 그림을 즐겨보는 양반들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 거리고, '녀자'가 더욱이 집에서 살림살이를 하며, 남편을 내조해야 할 처지에 있는 '녀자'가 어떻게 뛰어난 남자 화가의 실력과 대등한가를 두고, 설왕설래를 벌이면서, 당시의 조선 지식인들은 신사임당의 그림들을 평가절하하려고 애썼다. 그 중심 인물 중 한 명이 '송시열'이다. 송시열로 대변되는 남성 지식인들의 신사임당 그림 실력에 대한 평가 절하는, 결국 그녀의 뛰어난 산수도를 논외로 간주하고,  '아녀자'가 충분히 취미삼아 그릴 수 있는 '조충도'의 존재를 강조함으로써, 그녀를 제한적 담론 안에서, 가정이라는 담론 안에서만 머물게 했다. 

이러한 메카니즘을 바로 이 책에 견주어본다면, 여성은 '하나의 대상화'로써, 언론과 지식인의 비난거리가 되었다. 책의 표지가 분명하게 보여주듯이, 국가는 여성의 배움을 용인하면서도, 그 용인의 시선을 '우려'의 시선과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국가는 바로 사회에 이러한 이중적 시선을 넌지시 던져주면서, 여성의 배움을 둘러싼 의미들을 옥죄인다.  

이 책 하나를 통해, '하이카라 여성'을 사회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책들을 자주 접하다보면, 국가와 여성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를 간주하고 작동시키는 일정한 복잡다단한 메커니즘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학문은 그러한 메카니즘을 발견하고, 만들어내고 전복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의 '사건'과 '현상'에 일정한 의의를 주려는 노력을 벌인다. 고로 나는 이러한 책이 작은 '상식'의 선에서만 머무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 책의 얇은 외형이 마치 "아, 옛날에 이런 일도 있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든다면, 큰 오산이다. 작고 얇은 책에서, 꽤 따갑고 무시무시한 메시지가 숨어 있다. 그것을 발견하고, 더 찾아보려는 노력은 독자의 몫이다. 저자 또한 그것을 '과거에 대한 상식'으로만 머무르지 말고, '오늘날의 문제화'로 삼길 바라는 듯하다.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당시 여성들이 교육받았던 학교에 대한 별명이다. 이 별명이 오늘날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여대'에 대한 인식과 겹쳐있는지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일 것 같아, 책 속 내용을 일부 발췌해 본다. (인식과 겹쳐있는지를 비교해보는 것은 단순히 우리 입의 도마위에 오르는 소재로서의 인식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과연 하나의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의 틀을, 역사적 의식 속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당시 우스개 소리로 부르던 여학교 별명들이 있다. 경성정신여학교는 정신병학교, 동덕여학교는 똥똥학교(영문명 Dong-Duk에서) 학교라는 별칭으로도 불렸고, 배화여학교는 배워학교 즉 견습학교, 이화여학교는 외화(외화 = 사치) 학교라 하기도 했다. 특히 이화학당과 이화여전은 '로맨스 제작소', 유행의 원천지'로 유명하다는 말과 함께, '조선의 씨크걸의 집합지'라고 소개되고 있다. (<여학교 통신>, [신여성], 1933.6).

나는 이후 다른 글을 통해 한국 사회의 '여대'에 대한 인식을 정리해 볼 생각이다. 이 책은 일정한 도움을 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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