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나와 성향이 가장 먼 사람이다. 예측 가능한 계획 안에서, 안전이 주는 안정을 중시하는 나와는 정반대에 서 있는 인물. 

이 전에 필리핀 여행을 한 적이 있다. 필리핀 공항에서 갑작스러운 결항이 발표됐다. 해는 지고, 숙소는 정해지지 않았다. 어설픈 필리핀식 영어로 “공항에서 밤을 보내도 되나요?”라고 묻고, 어렵다는 대답을 간신히 알아듣고, 결국 공항 밖으로 나왔을 땐 어두워져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다시는 해외여행을 하고 싶지 않다 생각했다. 
이 경험을 전했을 때, 누군가는 말했다. “그게 바로 여행의 묘미죠.” 같은 사건이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불편과 불확실은 내게 위협이었지만, 그에게는 가능성이었다. 
며칠 전 본 인터뷰에서 심채경 박사가 ‘마찰이 없음을 가정하는 물리학 문제가 어렵다고 말하자, 김상욱 박사는 그 조건이야말로 물리학의 정수라고 답했다. 같은 현상을 두고도 이렇게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어쩌면 나에게는 혼란이었던 그 밤이, 누군가에게는 자유의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주인공 이기윤과의 공통점은 내 생활에도 존재한다.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이기윤은 몸이 다친 사람을 만난다면, 나는 교실에서 마음이 다친 아이들을 지켜본다. 마음이 다친 아이들을 위해 나는 이기윤처럼 심장마사지나 심폐소생술 등 물리적 조치를 할 수 없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교사가 없는 교실에서 아이들 관계에 작용하는 역학에는 섣불리 개입할 수 없으며, 대체로 의도를 갖고 시도하는 대처는 어그러지거나 갈등을 심화시킨다.
교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티 나지 않는 선에서 배치를 바꾸거나 환경을 고민하는 정도이다. 다친 마음의 모양도 다양하다. 단시간에 크게 상처를 입기도 하고, 장시간 작은 불안을 느끼기도 하며, 학폭이나 큰 사건으로 규정되지는 않더라도 미묘한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유형화하기 어려울 만큼 세세하고, 각 마음은 모두 다르다.

한 번은, 크고 작은 일이 쉴 새 없이 생기는 교실에서 담임으로 지내는 내가, 날뛰는 파도 앞에서 ‘바다는 잔잔해야 하는데’라며 노심초사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바다의 본질이 파도라면, 삶의 본질은 다양성과 사건이다. 아이들 사이에서 아무 일도 없기를, 상처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바다에 파도가 없기를 바라는 것과 닮았다. 나는 가르치는 일이 좋고, 보석 같은 아이들—또는 아이들의 보석 같은 면—을 곁에서 바라보는 일이 좋다. 그렇다면 일상에서 생기는 사건과 상처를 어느 정도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이기윤처럼 자극을 찾아 나설 수는 없더라도, 그런 사람과 그런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이 이야기가 신선했던 이유는, 흔히 보기 어려운 캐릭터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사이코패스 가해자나 폭력의 피해자가 주인공인 서사는 흔하지만, 다양한 자극을 찾아 다니는 ‘평범한’ 인간—아드레날린 중독을 일상의 방식으로 변형해 살아내는 인물—은 드물다. 응급실의 급박한 순간에 그가 내밀하게 느끼는 만족 또한 흥미롭다.

공모전 심사를 하는 분에게서 심사자들은 수백 편의 비슷한 주인공과 비슷한 주제의 작품을 읽게 되니 새로운 관점과 인물이 담긴 작품에 주목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기준에 비춰도 이 소설은 돋보인다. 

새로운 캐릭터를 ‘관찰’하지 않고 곧장 ‘주인공’으로 삼아 밀어붙인 작가의 역량이 크다고 느꼈다. 언젠가 나도, 나와 다른 인물—나와 거리가 있는 인물—을 서술자로 세워 글을 쓸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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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으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는 인물의 모습과, 그 일상적인 흐름 속에서 스며 나오는 슬픔의 깊이가 느껴진다.

딸의 결혼식을 준비하는 엄마의 행동은 한편으로는 무모하지만, 동시에 그 무모함조차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런 엄마의 행동 앞에서 난감해하면서도 아픈 엄마를 바라보는 딸의 시선이 그려진다.

그때 자기도 모르게 수정은 울컥하고 울었다. 나중에 이날을 기억할 때 엄마가 도는 저 모습이 기억날 거란 걸 수정보다 수정의 눈물기관이 먼저 깨달은 것 같았다. 아, 어떡해. 장갑으로 얼른 눈가를 훔쳤다. 하지만 나쁘지 않잖아, 수정은 생각했다. 엄마의 강인함도, 엄마가 맨날 부리던 억지도 이상하게 저 사락사락함으로 가억날 것만 같으니까.

“결혼식이자 장례식이었다. 근사한 장례식이었다.”라는 문장은 삶과 죽음, 이별과 축하의 경계를 절묘하게 포착하며, 작품이 지닌 균형감각과 정서의 조화를 잘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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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프티 피플 (리마스터판) - 2017년 제5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정세랑 지음 / 창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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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매체에 흔히 전시되는 슬픔이 아니라, 현실에서 경험되는 슬픔이 담겨 있다.
그 점에 끌려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있다. 우리 일상에 슬픔이 찾아올 때 우리가 겪는 것은 감정의 홍수나 극적인 드라마가 아니라, 평범한 얼굴을 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등장하는 50명의 인물 중에서도 특히 배윤나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에 마음이 오래 머물렀다.
윤나의 서사를 이루는 사소하고 구체적인 묘사에서 ‘윤나’를 향한 작가의 애정을 느낄 수 있다. 개정판에 새로 쓴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내 판단이 어느 정도 맞는 거 같다.

26명의 학생들과 함께하는 담임 교사로서, 나는 매일 작은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삶의 장면들을 가까이에서 바라본다.
정세랑 작가처럼 ‘26명의 소설’을 쓴다는 마음으로, 학생들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따뜻한 시선으로 인물과 사건의 디테일을 발견해 가고 싶다.

작품 속 인물 최애선의 말을 빌려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다.
“아가야, 웃으렴. 겁내지 말고. 팔매질을 하렴. 운동회 날 박을 터뜨리려 애를 쓰는 아이들처럼. 싸우렴. 다치지 말고. 구멍에 빠지지 말고.”
이 문장은 삶을 견디는 방식에 대한 작가의 응원처럼 들린다.
이런 시선과 응원이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정세랑 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닮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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