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이 되면서 내 일상은 또다른 변곡점을 맞았고, 덕분에 항상성을 유지하던 일상은 롤러코스터에 올랐다. 해가 뜨기 전에 집에서 나와 해가 진 후 집에 들어오는 일상, 그리고 잠깐도 눈 돌릴 틈이 없는 일상, 책 한 장도 넘길 수 없이 흘러간 일상. 감히 말하자면 지난 1년보다 몇 배는 힘들고 고되었던 2주였다. 보통 이렇게 바쁘면 아무런 생각도 없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바쁜 와중에도 어딘가 텅 비어 있는 기분, 허전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이 글의 부제는 '때늦은 애도'이다. 나에게 그동안 애도의 시간마저 없었음을 한탄하면서..


현자들이 점점 세상을 뜨고 있었다. 에코도 죽었고, 존 버거도 죽었고, 바우만도 죽었다. 평균 연령보다 높은 생을 누리다 죽었으니 급작스러운 부고는 아니겠으나, 그렇다고 이것을 호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기엔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이 너무나 강렬하게 그들의 목소리를 원한다. 하지만 그들은 떠났고, 남은 자들에게는 그들의 책만이 남았다.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남은 자들의 몫이다.






























존 버거의 죽음은 새해 들어 처음으로 듣게 된 부고였다. 더욱 안타까웠던 것은 내가 여태 그의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집에 있는 책은 『다른 방식으로 보기』 하나뿐이다. 그의 부고 소식을 듣고 겨우 짬을 내어 작년 EIDF 출품작 <존 버거의 사계>를 보았다. 제목만 보면 존 버거와 보내는 사계절 이야기 같지만, 각각의 계절이 다루는 내용은 너무도 이질적이다. 이 다큐는 존 버거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편린 몇 조각만을 던져준다. 김현우 피디는 "연출자는 사상가로서 존 버거의 생각을 90분 안에 친절하게 설명하는 방식을 택하는 대신, 얼핏 혼란스럽지만 그의 활동을 형식적으로도 대변하는 구성을 택"했다고 썼다. 여태 미뤄두기만 했던 독서를 다큐로 달래며, 나는 『제7의 인간』이라는 책을 리스트에 추가했다. 8호부터 작가-번역가 시리즈를 싣고 있는 악스트는(굳이 설명하면 두 개의 글인데, 번역가가 본 작가, 편집자가 본 번역가 순이다), 이번 호에서 존 버거에 대한 김현우 피디의 글과 함께 존 버거의 「자화상」을 실었다. 밀린 악스트를 얼른 다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애도하는 마음으로 그의 책을 정리해본다. 일단 가지고 있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부터..




























바우만의 죽음이 나에게는 더 크게 다가왔는데, 그것은 이미 그의 책을 몇 권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맨 처음으로 읽었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이 나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아서, 그와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액체근대』를 읽으며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실감했고, 그의 책을 열심히 찾아서 사기 시작했다. 『액체근대』의 문제의식은 2000년에 발표된 책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현재도 유효하다고 나는 생각하며, 그가 21세기에 가장 의미있게 다루어져야 할 사회학자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나온 책들이 줄곧 대담집이어서 그가 직접 저술한 책이 나왔으면 하고 내심 바랐는데, 결국 그 희망은 허망한 것이 되었다.


바우만의 책이 국내에 나온 양도 꽤 많고 독자층이 적지 않은데도, 국내 학계에서는 그리 크게 연구되지 않는 모양이다. 부고 소식을 듣고 내가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를 검색해 보았을 때, 서평을 제외하면 그를 다룬 논문은 열 편이 채 되지 않았다. 혹자는 바우만의 책이 체계를 따르지 않아서 학자들이 외면하는 것 같다고 했는데, 문화비평가 또는 사회비평가 정도로 다루어지는 듯하다. 하지만 그의 사상이 가장 절실한 시기는 바로 지금이 아닐까.


바우만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준 책은 『현대성과 홀로코스트』이다. 이 책을 발표했을 때 바우만은 60대였다...(그래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인가) 임지현 교수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테제를 한 걸음 더 밀고 나아간 홀로코스트에 대한 '악(惡)의 합리성' 테제"라고 평했는데, 내가 읽게 될 바우만의 다섯 번째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네 번째 책은 사놓고 여태 읽고 있지 않은 『사회학의 쓸모』이다..


바우만의 책에서 줄곧 강조되는 결론은 비판적 회의주의인데, 이런 대안을 두고 구체적이지 않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나는 지금처럼 비판적 회의주의가 절실했던 시기를 만난 적이 없다... 사유의 부재를 자랑처럼 늘어놓는 시대에 비판적 회의주의만큼 구체적인 대안이 있을까. 그런 점에서도 가장 절실한 생각을 내놓았던 한 현자의 죽음은 마음을 아프게 한다. 결국 이들의 죽음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끝없는 회의가 남는 자들의 몫이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 내가 처음 『액체근대』를 읽고 남긴 별점은 네 개였는데, 이것은 내가 그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괄호를 닫지 않은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처음엔 번역만의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한 바우만의 문체이다. 대담집도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바우만의 문체는 긴 만연체를 자랑하고 삽입절도 많이 쓰인다. 특히 삽입절은 한국에 익숙하지 않은 문체여서 바우만 읽기를 주저하게 되는 요인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천천히 곱씹으며 읽으면 다 읽히는 문장이고, 그 고행만 잘 참고 넘기면 현대 사회에 대한 가장 비판적인 통찰을 남긴 바우만과 마주할 수 있다..



사회학을 하는 길에서 `참여`와 `중립`을 선택할 여지는 없다. 참여하지 않는 사회학은 아예 불가능하다. 대놓고 밝히는 자유주의적 입장에서부터 철두철미한 공동체주의적 입장까지 오늘날 통용되는 수많은 사회학 상표들 한가운데서 도덕적 중립 입장을 취하려 한다면 이는 헛된 노력이다. 사회학자들은 자신들의 글이 지닌 `세계관`의 효과나, 인간의 개별적 혹은 연대의 행동에 그 세계관이 미치는 여파를 부정하거나 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모든 다른 인간들이 나날이 직면하고 있는 선택의 책임을 저버리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사회학이 하는 일은 그러한 선택들이 진정 자유로운지, 인류가 지속되는 동안 그 자유가 유지되는지, 더욱 더 자유로워지는지 잘 살펴보는 일이다. (『액체근대』, 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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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18 17: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말로 번역된 바우만의 글이 읽기 어려워서 학자들 입장에서는 연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바우만이 책에서 언급한 핵심 개념이나 용어를 통일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듯 합니다.

아무 2017-01-18 17:45   좋아요 0 | URL
liquid modernity만 해도 제각각이긴 하죠. 액체근대, 유동하는 근대/현대 등.. 일단 modernity가 우리나라에서 근대/현대로 둘 다 번역되는데, 그 차이가 많이 크다 보니... 바우만이나 존 버거의 평전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벤야민 평전도 여태 안 나오고 있는 현실이지만ㅠㅠ
 
아무도 아닌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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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름대로 황정은 소설을 분류하면 크게 둘로 나뉜다. 첫 번째는 땅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부유하거나(대니 드비토) 땅 밑으로 추락하는 존재들(낙하하다)을 그린 작품으로,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의 그림자, 파씨의 입문이 여기에 속한다(예외가 있어서 단정하기는 어렵다. 마더소년같은 작품들도 그렇고, 파씨의 입문에서도 일탈하는 몇몇 단편들이 있는 까닭이다). 이 존재들은 땅이라는 직선과 삼각형을 이루며 위/아래로 떠돈다(“세 개의 점이 하나의 직선 위에 있지 않고 면을 이루는 평면은 하나 존재하고 유일하다.”).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기점으로 황정은 작가의 작품세계가 땅에 발을 딛기 시작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이는 비로소 작가가 현실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신호가 아니다. 부유하던 존재들이 땅이라는 직선에 잠식당하기 시작해 작품세계 역시 변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번에 나온 신작 아무도 아닌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는 단편집이다.

 

아무도 아닌에서 자주 마주하는 질문 중 하나는 피해자가 되지 않기를 선택한 화자들의 죄책감이다. 진짜 가해자는 얼마나 치밀한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이미 당해버린 피해자와 한사코 그 무리에 합류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만 존재한다. 프리모 레비식으로 말하면 구조된 자의 죄책감이다. 그들(그들은 결국 우리다)모두를 당혹스럽고 서글프게 만든 것은 내가 아니라고(상류엔 맹금류, 88) 항변하지만, 이런 항변의 강도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세계의 폭력에 비-존재가 되어버린 존재들을 방관한 비정한 목격자. / 보호가 필요한 소녀를 보호해주지 않은 어른.”(양의 미래, 56)이 되었다는 반증이다. 작가는 이렇게 쓴다. “네 탓이라고 누군가 노려볼 때 그게 왜 내 탓이냐고 항변하고 싶은데 생각하고 보면 내 탓인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삶. 멀쩡하게 사는 것 같다가도 불규칙한 주기로 돌아오는 혜성 같은 그런 심정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삶.”(*)

 

작가가 생각하는 폭력의 근원 또는 가해자는 상류의 자리로 종종 나타나는데, 거기에는 맹금류, 또는 아래에서 시끄럽다고 하든 말든 무라무라무라(누가, 130)라고 떠드는 자들이 있다. 피해자가 되기 싫어서, 즉 비-존재가 되기 싫어서 우리는 상행(上行)을 꿈꾸지만, 상류로 가는 길에는 월식이 시작되고 길조차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이 드리운다. 우리를 둘러싼 벽이 내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흉(웃는 남자, 173)하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세계는 가급적 단순한 것이 되(웃는 남자, 166)라고, “조금 더 들어가보자(누구도 가본 적 없는, 154)는 생각도 하지 말고 챙기라는 것들만 챙기며 살라고 요구한다. 똥물을 먹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이, 그 물을 먹지 않을 수 없는 제희의 가족, 진주, 도도의 옆에서 쓰러진 노인은 비-존재가 되어 직선에 파묻힌다. “패턴의 연속, 연속, 연속(웃는 남자, 184)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상을 향해 분노의 화살을 똑바로 겨누고 있을까. 벽 너머에 터널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처럼, 세계는 우리의 분노를 엉뚱한 곳으로 돌려버릴 만큼 영악하다. 심지어 우리를 한통속으로 만들어버리는 데도 능수능란하다. 누가에서 가 겨우 이사를 온 집의 이전 세입자인 노인을 보며 정당하게 세를 내고 이 집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노인을 내쫓았다는 기분(127)을 느끼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소음에 고통스러워하며 스스로 계급적 인간임을 인식하는 가 하는 일은 금융권에서 연체금을 독촉하는 상담원이고, 윗집의 소음에 분노하여 취하는 의 행동은 또다른 소음이 된다. 피해자가 되지 않은 화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나지막이 생각하는 것뿐이다. “안됐다······ 거기까지. 그 너머는 벼랑이니까.”(129)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리처드 세넷의 논의(투게더)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동정은 나는 네가 무엇을 느끼는지 알고 있다, 지금 나는 너다라고 말하는 것이고, 공감은 나는 너와 다르다, 그러나 나는 너에게 주의깊은 관심을 쏟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혹은 동정은 같아지면서 멈추는것이고 공감은 다른 채로 나아가는것이다.” 이후 신형철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sym-pathy그 감정과 함께 있음이어서 ()’, 같아져 있음’(상태)이고, em-pathy그 감정 속으로 들어감이어서 ()’, 함께 하려 함’(실천)이다.”(**) 동정(sympathy)과 공감(empathy)에 대한 상투적인 정의에 따르면 안됐다는 동정이지만, 신형철의 정리대로라면 이는 동정도 공감도 아니다. “안됐다는 상대가 나와 다름을 전제로 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상상력을 발휘해 타인과 나를 동일시하려는 노력도, 함께 하려는 실천도 없다. 그러니 우리는 가라앉은 자를 찾고자 자신을 던지는 이들에게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는데 내가 왜 누군가를 신경써야 해? 진주요, 아줌마 딸, 그애가 누군데요? 아무도 아니고요, 나한텐 아무도 아니라고요.”(양의 미래, 59)라며 씨르르, 하고 우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세계가 우리에게 생존의 윤리만을 들이밀었기에 발생한 태도이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의 잘못은 동정하기 위해 공감하려 노력하지 않은 것에, 구조된 자로서 아파하지 않은 데 있다.

 

그렇다면 이 엄혹한 세계에서 쓴다는 것은, 아무런 쓸모도 없어 보이는 쓰기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작가가 찾은 답은 명실에 있다. “수면 위로 드러난 이름 아래 차갑게 잠겨 있는 이름들(99), 그 일각(一角)을 드러내는 것. 그래서 명실은 실리를 기억하기 위해 쓰기를 택했다. 그녀가 가진 것은 파편들이고 메아리들일 뿐이지만, 그 작은 불빛들이 막막한 어둠 속에서 수평선을 만드는 것(109)이다. 그래서 명실은 쓰려고 한다. 실리가 미처 끝내지 못한 작업을.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이때필요한 것은 기억과 호명이요, “그 아름다운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리가 생전에 책을 냈더라면 그녀의 책도 한 권이나 어쩌면 몇 권쯤은 있었을 것이다. 실리가 이름을 적어 선물했을 테니까. 아마도 그 책의 첫 페이지엔 명실아, 하고 적혔을 것이다. 다른 것 없이 명실아. 언제고 자신의 책을 낸다면 첫 번째 증정본엔 그렇게 적을 거라고 실리는 말하곤 했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고맙다거나 사랑한다거나 말하지 않고, 명실아. 그녀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대답했고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92)


이 단편집에서 다른 작품과 가장 다른 톤을 가진 작품은 누가복경일 텐데, 나는 복경을 읽으면서 황정은 소설이 다소 무서워졌다는 생각을 했다. 매장을 찾는 고객들에게 항상 웃늠을 지어야 하는 화자는 누군가의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진술하고 있다. 이야기 도중 불쑥 튀어나오는 반말이 주는 날카로운 감정의 기복도 그렇지만, “도게자에 대한 이야기는 읽으면서 정말 섬뜩했다. 이후 그녀는 자존감을 가질 틈도 주지 않는 이 세계에 대고 존귀하다는 것은 존나 귀하다는 의미냐고 묻는다. 이 소설은 소파를 찢지 않았다며 항변하는 그녀의 진술이기도, 살기 위해 똥물을 먹어야 했던 비-존재들의 분노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엄혹한 세계를 고발하고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더욱 엄정(嚴整)하게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악에 받쳐 뜨거운 화자의 목소리와 달리, 이 소설은 나에게 매우 차갑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서론에서 이렇게 쓴다. “사유하지 않음, 즉 무분별하며 혼란에 빠져 하찮고 공허한 진리들을 반복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뚜렷한 특징이라 생각된다.” 우리에게 사유의 중단을 요구하고 생존만이 진리라고 말하는 세계의 폭력. 이 안에서 가라앉은 자, 또는 가라앉고 있는 자에 대한 아픔을 느끼는 것이 존재의 비-존재화를 막기 위한 시작이다. 그래서 황정은 소설의 화자들이 느끼는 죄책감은 소중하다. 아렌트는 인간의 어떤 다른 능력도 사유만큼 약하지는 않다고 썼지만, 그 약한 사유가 어둠 속에서 수평선을 만든다. 그들과 내가 다르지 않음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호명함으로써 기억하는 것, 그것이 동정을 향한 공감의 시작이다.


*  황정은, ‘작가노트’, 2014 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34-35.

** 신형철, 감정의 윤리학을 위한 서설 1, 문학동네201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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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1-01 0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광화문에서 시청쪽으로 올라오니 자정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랑곳없이 군가 같은 걸 틀어놓고 태극기를 흔들며 ˝무라무라무라˝ 하는 맹금류 어르신들이 있더군요. 촛불을 든 사람들과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들의 대비가 너무 기괴했습니다. 제게 극악스러운 표정으로 태극기를 흔들던 노인을 보며, 저는 당혹스럽고 서글프고...조금 비참한 심정이었습니다.
무수한 평행선들....

아무 2017-01-01 11:55   좋아요 1 | URL
맹금류라기보단 어떻게든 상류에 닿으려 발버둥치는 사람처럼 보이는데요.. 맹금류는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무서운 부분도 있고.. 어떻게 사유하는지, 무엇을 사유하는지도 중요하지만, Agalma님이 말씀하신 장면을 생각하니 일단 정지된 사유를 시작하는 게 더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들은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겠지만, 당신들이 믿고 기댔던 가치들은 이제 생명을 다 했다고, 이제 끝장이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네요. 그들은 또 듣지 않겠지만..

AgalmA 2017-01-01 12:38   좋아요 1 | URL
성질이 사납고 육식을 뜯는 맹금류와 그들이 비슷해보인다 싶어 본문과 연결해 ˝맹금류˝라 표현했는데 그것은 다분히 외형만의 연결이었고, 맹금류의 서식 속성에 대한 아무님의 말씀 듣고 보니 너무 간단히 연결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적 고맙습니다.
아무님이 쓰신 ˝정지된 사유˝라는 표현은 좀더 정교하게 말씀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태극기를 흔들고 있는 그들이야말로 정지된 맹목 상태에 빠져 있으니까요. 그들은 사유가 없다 라고 배제하는 전제를 두더라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민주 정부 때는 사유하는 인간들의 힘이 긍정적으로 나타날 수 있었던 거 같다고요. 지금의 전세계적인 우경화 조짐을 보면 이런 상황은 계속 순환되어 나타나겠죠. 그래서 역사의 반복이란 말도 끊임없이 나오는 걸 테고요. 인간은 변화무쌍할 수도 있지만 또한 단순하며 변질하기 쉬워요...

아무 2017-01-01 13:13   좋아요 1 | URL
Agalma님이 그들을 보고 맹금류를 떠올리신 것도 저는 의미있는 연결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은 맹금류가 되고 싶어 발버둥치는 사람들일 테니.. 구조된 자의 나쁜 예라고 생각합니다. 운이 좋아 가라앉지 않았을 뿐인데, 가라앉지 않은 걸 세계의 덕으로 돌리는 사람들..
말씀을 듣고보니 그들을 ˝정지된 사유˝의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쉬운 배제라는 생각이 들어 반성하게 됐어요. 사유의 긍정적인 힘으로 얻은 민주화라는 성취가 무너지는 건 너무나 쉽다는 생각도 하게 되고.. 말씀처럼 인간은 쉽게 변하죠. 그래서 지금의 우경화 조짐이 심상치 않게 보이고.. 전 요즘 행동이 너무 절실해서 사유가 다시 홀대받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이럴수록 필요한 건 좀더 깊은 사유와 그걸 정교하게 표현할 수 있는 세밀한 언어겠죠..

2017-02-08 1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27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마 전 알라딘에서 알려주는 독서 통계를 보았는데, 올해 산 책이 작년보다 2배가 넘는 양이었다는 사실에 놀랐다(처음으로 세 자리 수가 되었다). 통계를 쭉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세 가지였는데, '이래서 올해 내 삶이 피폐했나..'하는 생각과 '이래서 내 방이 요지경인가..'하는 생각, 그리고 '이 많은 책 중에 내가 읽은 건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이었다. 북플 독서통계는 지금까지 내가 산 책 중 읽은 것이 1/4이라고 말해준다.. 아무튼 이런 수치들을 보면서 알라딘에서 매겨주는 올해의 책 말고, 왜 올해 내가 산 책 이렇게 많았나를 생각하면서 결산을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내가 매기는 올해의 책들은 당연히 올해 나온 책이 아닌 올해 내가 읽은 책이다. 원래는 내일이나 모레쯤 정리하려고 했으나, 내일과 모레 모두 나는 아침 일찍 상경해야 하고, 지금 읽고 있는 책 중 올해 안에 끝까지 다 읽을 가능성이 있는 책이 없어서 시간이 잠시 남은 지금 정리를 해 놓는다..

 

1. 올해의 문학

 















올해 읽은 소설 중에는 작년에 읽은 스토너처럼 깊이 몰입하는 감동을 준 작품도, 제발트처럼 이건 뭘까..’라는 생각을 들게 할 만큼 충격적으로 신선한 작품도 없었다. 그렇다고 올해 읽은 소설이 다 평작이었던 것은 아니고, 역시 걸작이라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구나라며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 소설도 많았다. 그 중에서 가장 굉장하다고 느꼈던 장미의 이름을 올해의 문학에 올린다. 아는 만큼 더 많이 보이는 소설이어서, 더 많이 보고자 중세의 미학을 샀지만 책장에 꽂혀 읽힐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한 권을 더 뽑자면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고를 수 있겠다. 읽으면서 정밀하게 짜여 있는 소설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나보코프가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쓰는지 제대로 알고 썼구나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문득 끊임없이 회자되는 단어의 힘이 항상 긍정적인 영향만 끼치는 건 아니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평소에도 시집을 많이 읽지는 않는 편이고, 시를 읽는 속도도 다른 책보다 워낙 느려서 올해 완독한 시집은 이성복 시인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뿐이다. 최근에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에 「그날」이 언급되었을 때 반가우면서도 쓸쓸한 마음이 교차했다. 「그날」도 좋아하는 시지만, 요즘 들어 「그날」만큼 자주 떠올리는 시는 「1959년」이다. 일부분만 인용하면 이렇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우리는 봄이 아닌 倫理와 사이비 學說과

싸우고 있었다 오지 않는 봄이어야 했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監獄으로 자진해 갔다

















괜히 아쉬운 마음에 올해 산 시집 중 두 권을 더 올려본다. 아직 펼치지도 못했으나 올해 나와줘서 고마운 시집들이다. 특히 나는 최승자 시인의 빈 배처럼 텅 비어에 마음이 간다. 외로움의 폭력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이 내 감정에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2. 올해의 비-문학

 














비문학이라는 명칭을 좋아하지 않아서 분야별로 올해의 책을 고르고 싶었지만, 소설의 비중을 줄이고 다른 분야의 책들을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올해의 목표는 또다시 좌절되었다. 안타깝게도 전체를 통칭해서 한 권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내년에는 더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인상깊게 남았던 책으로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고른다. 프리모 레비의 책들이 항상 그렇지만, 특히 이 책은 읽는 내내 그 안으로 침잠하는 느낌을 받았다. 올해 영화 <사울의 아들>에 대한 글을 적을 때도 언급했지만, 여전히 홀로코스트는 내가 사로잡혀 있는 주제 중 하나다. 그때와 지금은 얼마나 다른지, 여전히 파시즘의 논리가 곳곳에서 재현되고 있지 않은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고, 심지어 대놓고 드러내는 자들도 존재한다. 우리는 가해자가 아니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독일인들의 편지를 보면 우리도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서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작년 문학동네 계간지를 훑어보다가,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다루어지는 죄책감(guilt)와 수치심(shame)에 대한 논의를 조르조 아감벤이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에서 다루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감벤의 책은 호모 사케르를 사놓고 아직 읽지 않은 상태라 다른 책을 사는 것도 미뤄두고 있었는데, 내년부터 바로 아감벤 읽기를 시작하라는 신호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쉽게 선정에선 밀렸지만,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역시 많은 자극을 주었던 책이었다. 밑줄을 하도 많이 그어서 따로 타이핑도 해두었는데, 그 분량이 너무 방대하기도 하고(다 적으니 27쪽이 나왔다. 돋움체 9포인트), 책 역시 얇은 분량에 담긴 사상의 깊이가 나를 압도해서 정리하는 것은 미루어 둔 상태다. 아직 이해가 덜 되었다는 판단도 미룸에 한몫을 했다. 하지만 그의 진단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상태다. 책을 읽으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이 아수라와 같은 세계에서 놀아나지 않기 위한 방법은 두 눈을 똑바로 뜨는 것뿐이다.

 

3. 올해의 표지

 















원래 올리려던 책은 김엄지 작가의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였으나, 최근에 읽은 서브텍스트 읽기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책 크기도 들고 다니기 편하고, 심플한 디자인에 각 철자들이 실처럼 엮여 있는 모습이 텍스트의 어원과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내용도 아주 어려운 편은 아니라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는 겉으로 보기엔 최근의 산뜻한 표지 디자인 트렌드를 따라가는 평범한 표지처럼 보이지만, 표지의 촉감이 특이해서 올해의 표지에 같이 올렸다. 궁금하신 분은 도서관에 가서 한 번 만져보시길..

 

4. 올해의 입문서

 















언제나 궁금한 것은 많은데 혼자 찾아가며 배우는 처지라, 이런저런 입문서들을 읽을 기회가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 스테퍼니 스탈의 빨래하는 페미니즘을 올해의 입문서로 골랐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전에 한국 사회에 강하게 몰아쳤던 화두가 페미니즘일 텐데, 올해 출간된 책들을 보면 실천적인 페미니즘 저서는 많이 나왔지만 이론적 페미니즘을 다룬 저서가 많이 나오지 않아 안타까웠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실천력도 거의 밑바닥인 사회이긴 하지만, 한국 사회의 붕괴를 불러온 수많은 원인 중 하나는 꼰대로 대변되는 경험 중심주의와 이론의 홀대라고 나는 생각한다. 실천적 페미니즘의 열풍이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자신을 한 번 더 돌아보게 했지만, 여기서 끝난다면 모든 것이 하나의 일화로 편입되고 진정한 변화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페미니즘이 부딪쳐야 할(혹은 지금도 부딪치고 있는) 싸움에 필요한 것은 세밀한 이론의 칼이다. 이론 쪽에서도 정희진과 같은 국내 여성학자들이 노력하고 있지만, 이러한 이론의 소개가 주디스 버틀러 하나로만 집약되는 것에도 나는 불만을 가지고 있다.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을 비판한 마사 누스바움 등의 견해도 언급되는 과정이 있어야 이론이 더 정교화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론의 소개서뿐만 아니라 이론의 원전들, 이를테면 빨래하는 페미니즘에 나오는 여성학 저서들이 활발하게 출간되고, 그에 대한 논의도 생산적으로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급진적인 변화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힘이 계속 지속되는 것이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으나 올리지 못한 것이 아쉬워서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도 올려놓는다. 굉장히 쉽게 설명하려는 노력이 곳곳에 보이지만 블랑쇼의 사상에 다가가는 것이 녹록치 않아서, 짧은 분량인데도 매우 천천히 읽고 있다(한 달 동안 읽고 있는 듯). 내년의 기대작 정도로 정리해야 할까? 어찌됐든 내년에 나는 블랑쇼와 어떻게든 마주하고 파고들어야 한다. 이 책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매력의 본질을 찾기 위해서.

 

5. 올해의 발견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데 나만 몰랐던 올해의 발견은 이승우 작가의 소설들이다. 원래는 이름도 모르는 작가였지만, 몇 편의 소설을 읽으면서 만만치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문장이 주는 단단한 힘이나 사유의 치열한 싸움은 오늘날 한국의 젊은 작가에게서 찾기 어려운 자질이 되었다. 사람들이 흔히 생의 이면을 최고로 꼽지만, 나는 지금까지 읽은 세 권의 장편 중 에리직톤의 초상이 제일 좋았다. 처음에 발표된 1부에서 끝났다면 나의 평가는 더 박했을 것이다그의 소설에 담긴 정신적 가치나 사상에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어떤 식으로든 깔려있다과 지상의 노래까지 읽어보고 싶었으나 역시 다른 책에 치였다내년엔 더 읽을 수 있겠지..


읽으면서 종종 이 사람은 기독교적인 이청준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이 사람의 소설에 반한 데에 다 이유가 있었구나라고 느꼈다. 이청준 작가는 내가 지금껏 읽었던 한국문학 중 가장 존경하는 작가이므로. 그나마 많이 읽은 분야가 한국문학인데, 그 가운데 내가 항상 최고로 꼽는 장편은 이청준 작가의 『당신들의 천국』이다. 지금까지 세 번 정도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과거의 내 독해를 수정하면서 읽었다. 네 번째 독서가 언제일지는 알 수 없으나, 그때에도 나는 세 번째 독해를 수정하게 될까.

 


북플 독서통계를 보고 대충 계산을 해보니 내가 올해 읽은 책은 5-60권 정도다(악스트를 포함한 수치여서 별로 신뢰할 수는 없다). 정리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이다. 여전히 알아야 할 것은 많고, 탐구해야 할 주제도 많고, 시간은 모자란다. 내년에 이해타산적인 공부를 마치고 내가 원하는 무용성의 공부를 시작할 수 있을지는 1월이 되어봐야 알 수 있으므로, 내년에도 공부에 치여서 틈틈이 도둑질하듯 책을 읽을지, 아니면 좀더 여유를 가지고 책을 읽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칠흑의 시대에 필요한 건 더 넓고 깊은 이해이고, 이를 위해 내가 정한 첫 번째 목표는 최근에 구입한 서양철학사를 정독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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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2-28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과 북플이 알아서 통계를 내기 시작한 이후부터 저는 연말 결산을 주제로 하는 글은 안 쓰게 되더라고요. 예전에 읽은 책들에 관해 한 번으로 몰아 쓰는 게 귀찮아서 연말 결산을 중요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

아무 2016-12-28 20:29   좋아요 0 | URL
저도 평소에는 이런 결산을 잘 안하는데, 책을 구입한 수치가 작년하고 너무 차이가 나서 이번에 읽은 책 목록을 보면서 정리해봤어요. 아마 올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ㅎㅎ

cyrus 2016-12-28 20:34   좋아요 0 | URL
제가 감히 예상해봅니다만 내년 연말에 이런 글을 읽을 것 같습니다. ㅎㅎㅎ

아무 2016-12-28 20:41   좋아요 0 | URL
내년 제 책 구매량을 예언하신 것 같은데... ㅎㅎ 개인적으로는 올해만큼만 샀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책 구매량이 늘면 항상 식비를 줄이더라구요...^^;;

AgalmA 2016-12-28 2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보코프에 대한 소감 저도 그랬는데ㅎㅎ 롤리타 읽고 그 느낌을 확인차 <절망>을 읽었는데 역시나 그 느낌이 여전하더라는^^;
다시 또 확인차 <재능> 을 읽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니, 내가 왜 이런 확인작업을 해야 해 약간 성질도 나면서ㅎㅎ;(읽을 책이 얼마나 밀려 있는데!)

서양철학사.... 자주 느끼는 거지만 책 읽는 노선이 아무님이랑 저랑 자주 겹쳐요^^ 그래서 이웃친구인가ㅎ;;

아무 2016-12-29 00:06   좋아요 1 | URL
요사이 나보코프 책에 대한 리뷰를 연이어 쓰신 걸 저도 주목하고 있었죠ㅎㅎ 정말 치밀한 작가구나.. 하는 생각이 롤리타를 다 읽고 나니까 들더라구요. <절망>이나 <재능>도 Agalma님 리뷰 보고 읽어보고 싶었는데 제가 지난 주부터 책 구입 금지령을 제게 내렸습니다..^^;;

꼬리를 무는 호기심따라 책을 찾다보니 흐름을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철학사를 봐야겠다 싶더라구요. 제가 월초에 책 정리를 하면서 스무권 정도를 팔았는데, 판 돈으로 저 책들을 샀어요 ㅎㅎ 새해 독서의 시작은 철학사로..;;

AgalmA 2016-12-29 00:18   좋아요 1 | URL
저도 책 읽다보면 철학사 줄기나 흐름을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갈증이 늘 느껴지더라고요. 띄엄띄엄 이 책 저 책으로 읽을 게 아니라.
우리 새해 시작을 책 에베레스트 등정으로 하는 거 아닙니까ㅎㅎ; 무사히 귀환합시다/

아무 2016-12-29 00:26   좋아요 0 | URL
구입하신 책으로 보았을 때 제가 오를 산이 조-금 낮은 것 같은데요 ㅎㅎ.. 그럼 포스의 기운이 함께 하시길.. (레아 공주의 명복을 빌며..ㅠㅠ)

AgalmA 2016-12-29 00:30   좋아요 1 | URL
일정 함량을 갖춘 철학사라면 무슨 책이든 쉬운 건 없는 거 같은데요;;

크리스마스에 사망한 조지 마이클 명복도ㅜㅜ... 정신 없이 바빠서 명복 페이퍼도 깜빡했네요ㅠㅠ

아무 2016-12-29 00:33   좋아요 1 | URL
방금 검색해봤는데 분량은 제가 더 두껍네요;; 방심했다가 큰일날뻔..

조지 마이클도 그렇고 캐리 피셔도 그렇고.. 유난히 올해 부고 소식을 많이 듣게 되네요ㅠㅠ 한해의 마지막이 이렇게..ㅜ

북프리쿠키 2016-12-29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리타 저도 최고의 문학중에 손꼽아요^^;

아무 2016-12-29 09:20   좋아요 1 | URL
저도 그렇습니다^^ 원래는 롤리타 한 권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다 읽고 나니 만만치 않은 작가라 다른 책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ㅎㅎ 새해엔 꼭 시간내서 찾아보려구요^^;;
 

다난한 하루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서울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성동구에서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이해타산적인 공부를 하고, 6시가 지나서야 상암동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지도 앱은 이름도 생경한 디지털미디어시티역까지 한 시간이 걸린다고 알려주었으나, 실제로 걸린 시간은 30분이었다(그리고 30분 동안 길을 잃었다). 하염없이 걷고 또 걷다 서점에 도착했고, 좁은 공간이었음에도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긴 시간은 아니었다. 30분이 조금 넘는 당신의 이야기와,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사람들의 질문들. 질문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작가의 삶을 꿈꾸는 이들이었고, 나는 질문하지 않았다. 사람 많은 곳에서 나서는 걸 어려워하는 성격 때문이기도 하고, 끊임없는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들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해진 시간이 끝나고 당신의 싸인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은 많았다. 나는 줄이 줄어들기를 기다리며 주변에 앉아있는 사람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주로 들었다, 라고 말하는 게 맞겠다). 그 중 한 사람은 백의 그림자를 읽었을 때는 인물들이 찢어지게 가난했어도 요즘 한국소설답지 않게 징징대지 않아서 신선했는데, 이번 작품에는 징징거리는 작품들이 많아서 좀 그랬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는 않았지만 징징, 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 사람이 생각했던 징징, 이라는 말이 내가 생각했던 징징, 이라는 말과 같은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난 3년 동안 당신의 글들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은 징징, 과 같은 단어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징징, 이라는 말이 이 작은 연서를 쓰도록 마음먹게 했다.

 

길 위에서’, 라는 말이 더 맞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그 많은 소설 속의 화자들에게 징징, 거릴 수 있는 삶은 없었다. 냉혹한 조건들은 이미 삶의 전제가 되어 있다. 그리고 화자들이 마주하는 생의 갈림길 위에 나는 자꾸 나를 위치시킨다. 내가 제희의 어머니라면, 내가 서점 앞에서 그 소녀를 보았더라면, 내가 도도라면, 내가 앨리시어라면... 그리고 내가 '나'라면. 거기에서 묻게 되는 질문은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할까이다. 바스러져 가는 존재들을 위해 해야 하는 것에 대한 질문. 하지만 그 길 위로 나를 안내했던 당신은 더 이상 없다. 잃어버린 길 위에서 답을 찾는 건 온전히 내 몫이다.



한 시간 정도를 기다려 싸인을 받았다. 처음 만난 것도 아니었는데 괜히 쑥스럽고 긴장이 돼서, 눈도 못 마주치고 싸인하는 손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단 한 사람 그대라는 말이 작은 울림을 주었던 까닭은, 그 말이 아무도 아닌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서다. ‘단 한 사람 그대라는 단독성이 아무도 아닌아무것도 아닌을 구별해주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나는 아무도 아닌을 종종 그 누구도 아닌으로 바꾸어 부르고 싶어진다.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닌이라고 생각하는 게 싫어서.

 

한 시간 반 동안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리고 다시 한 시간 동안 당신을 보면서 여전히 예민하고 민감한 사람이구나, 그래서 지난 몇 년 동안 나보다 훨씬 많이 아팠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작년 봄에 만났을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고마웠다. 옹기전을 용산과 겹쳐서 읽고, 웃는 남자를 세월호와 겹쳐서 읽는 것은 편협한 독서이지만, 지난 시간 동안 세계가 우리에게 가했던 모든 일들이 당신의 문장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읽을 때마다 느낀다. 그래서 항상 고맙고, 그 자리에 언제나 있어 주었으면 싶다.

 

아무런 친분이 없음에도 당신, 이라고 호명하는 것은, ‘와 같은 말이 주는 분리(또는 격리)의 느낌이 싫어서 그렇고, 당신의 글을 볼 때마다 내가 내 앞에서 나를 비추는 거울을 보는 것 같아 그렇다. 나를 비추는 라는 거울 말고 또다른 거울. 그 거울은 내 앞에 서 있는 것이지 처럼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두 번째 책에 싸인을 할 때 나는 내 쑥스러움을 넘어 폭력에 대한 세 번째 이야기에 대해 물었다. 당신은 지금 현실에 너무나 폭력적인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어 계속 밀리고 있다고 대답했다. 아마 그런 이유일 것이다라고 짐작했던 말이었다. 내년에도 나는 마냥 기다리고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냥기다리는 것이 기다려지는 것은, “수면 위로 드러난 이름 아래 차갑게 잠겨 있는 이름들을 당신이 호명해주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싸인을 다 받고 인사를 할 때 나의 눈과 당신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당신의 눈은 여전히 깊었고 맑았다. 소설과 작가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 말했던 그 사람과 달리, 나는 당신의 글과 당신 자신이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를 생각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서재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제대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감상의 언어, 파토스의 언어를 최대한 아끼겠다고 다짐했었다. 설령 내가 책을 읽고 느낀 감상이 감정의 몰아침이어도, 그것을 어떻게든 이성의 언어로 붙잡는 것이 결함 많은 언어로 사고할 수밖에 없는 나의 다짐이었다. 언어의 한계를 실감하면서 부딪치는 것이야말로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숙명이라고, 그런 엄정함이 나의 존재론적 깊이를 파고들게 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를 사로잡았던 상념들은 감정의 언어로밖에 쓸 수 없는 무엇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다짐을 허물고 이렇게 연서를 쓴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당신과의 만남이 준 감정에 젖어서.

 

서점을 나와 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또 길을 잃고 헤맸다. 집으로 가는 막-지하철은 이미 지나고 없었고, 신논현까지 빙빙 돌아가 좌석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 안에서 당신의 필체를 다시 보면서 생각했다. 올해의 마지막은 아무도 아닌의 리뷰로 갈무리해야겠다고. 읽고 있던 두세 권의 책을 한쪽에 밀어두고 읽는다. 대부분 재독(再讀)이지만, 다시 읽으면서 새롭게 보이는 당신의 문장과 세계관을 생각하면서, 나는 밑줄을 긋는 것으로 당신의 아픔에 최대한의 위로를 보낸다. 그리고 생각한다. 언젠가 나만의 황정은론을 쓰겠다는 목표의 실현이 조금은 앞당겨져야 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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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2-24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님은 황정은론 정말 잘 쓰실 분이시라는! 이 연서 보고 있는데 제가 다 감격스럽네요. 짝짝짝)))

아무 2016-12-24 19:3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조금 부끄럽기도 하네요^^;; ... 항상 생각만 하고 있는 것 중 하나인데, 쓰려면 좀더 더듬어 보아야 할 길들이 있어서.. 몇몇 단편들은 아직 저에게 안개 자욱한 길이라서요;; 그 외에도 쓸 때 참고해야겠다 싶은 책들도 찾아봐야 하고... 내년부턴 조금씩 시작할 수 있을지도ㅎㅎ

2016-12-24 1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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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에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나이를 먹는다는 건 싫어지는 게 하나씩 늘어나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나이도 별로 먹지 않았으면서). 예전에는 그냥 넘길 수 있었던 것들이 견딜 수 없어지는 날들이 많아졌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통화하는 사람, 버스 옆자리에서 끊임없이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낯선 사람,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듯이 말하는 사람, 경험해보지 않았으면 말을 말라는 경험 제일주의, 자신의 말이 어떤 영향과 책임을 갖는지 생각도 안하고 말하는 사람, 기타 등등. 작년까지는 왜 저럴까 하고 넘기면 그만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견디기 힘든 짜증이 일고, 마음이 누군가 돌을 던진 연못처럼 출렁인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들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삶에서 이런 것까지 참아가며 살아야 하나...’ 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관념론자가 아니고, “그저 우리 몸만 있을 뿐(58)이라고 믿고, 그렇기에 살아감/죽어감(결국 둘은 하나다)의 순간이 조금이라도 더 만족스럽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 순간이 쉽게 오진 않겠지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서시


윤동주는 왜 살아가는 것이라 하지 않고 죽어가는 것이라 했을까. “죽는 날까지와 맞추기 위해서일 수도 있지만, “죽어가는 것이라고 쓰는 것이 생명에 대한 경외의 표시였으리라 나는 생각한다. 에브리맨역시 한 남자의 삶의 기록이지만, 겉으로 보기에 의 삶이 경이롭고 존경받을 만한 삶은 아니었다. 이 소설에서 빛나는 것은 여성 편력으로 점철된 의 청장년 시기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몸과 투쟁하며 버텨나가는 의 노년이다. 그래서 더욱 나는 이 소설을 의 삶의 기록이 아닌 죽어감의 기록이라고 부르고 싶다. “한때는 나도 완전한 인간(135)이었다고 믿었지만, 대학살 속에서 완전함 따위는 없었음을 깨달아가는, 그래서 결국 뼈에서만 위로를 찾을 수 있는 죽어감의 과정.

 

최근 읽고 있던 모리스 블랑쇼에 대한 책에는 그의 소설 죽음의 선고를 다룬 부분이 있었다. 소설 속 J가 죽어가는 과정을 서술한 부분을 보며 나는 가 매년 병원에 입원하며 겪었던 투쟁,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사그러드는 과정들이 생각났다. 책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경험은 세계의 부재를 겪는 공포스러운 체험이다. 나의 모든 능력이 사라져 의미 부재에 직면하는 두려운 체험이다.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면서 자신이 자취를 감출 때까지 공포를 겪어야 한다. 죽어가면서 사람은 행동의 세계에서 내쫓긴 실존을 드러낸다. 이 실존 속에서는 내 앎의 근원이었던 진정한 죽음이라는 개념이, 죽어가고 있다는 무한한 수동성으로 바뀐다. 여기에서 죽는 자는 죽어간다는 불가능성과 마주한다. , 세계를 의미 있는 무엇인가로 바꾸는 일의 불가능성과 맞닥뜨리는 것이다. (101)

- 울리히 하세·윌리엄 라지,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하이데거는 죽음을 자기 힘으로 존재하고, 이성적이며, 자의식을 갖고 있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생각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를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고 칭했다. “우리의 모든 가능성이 끝장나는 가능성이라는 뜻으로, 그렇기에 자신의 죽음만이 인간을 개별적인 존재로 설 수 있는 가능성을 드러내도록 한다는 것이다. 블랑쇼는 하이데거의 말을 뒤집어 가능성의 불가능성이라고 말한다. 죽어간다는 불가능성과 맞닥뜨릴 때 나는 익명적이고 비인칭적인 존재가 되어 내 삶이 무의미 속에서 사라지게 한다고 그는 말한다. 죽어감 앞에서 인간은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모든 수동성보다 더욱 수동적인 수동성을 경험한다. 블랑쇼에겐 이런 죽어감의 경험을 겪도록 해주는 것이 문학이고, 서로가 서로를 암시하는 사유에서 블랑쇼는 죽음과 문학의 경험을 공동체와 연결시킨다. 공동체에 대한 블랑쇼의 사유를 섣불리 말하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가 마지막 수술을 앞두고 형 하위와의 관계마저 끊어졌음을 깨닫는 장면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는 부모의 무덤을 찾아갔던 것이 아닐까. 공동체를 이루고 싶어서. 그것이 만 남은 부모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가 본 것은 잠들어 있는 나이 든 여자의 높은 돋을새김 윤곽이었다. 그가 본 것은 돌이었다. 그 무겁고, 무덤 같고, 돌 같은 무게는 말하고 있었다.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그 이상이 아니다. (124)


평범한 삶이었다. 죽기 전까지 모든 가정을 해체시켰다는 것을 제외하면 평범한 삶이었다. 모든 인간은 개별적인 존재이지만, “현실을 다시 만드는 건 불가능(13, 83)하다는 진실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초라한 진실 앞에서 우리는 모두 에브리맨이 된다. 그래서인지 보석상의 이름이 에브리맨이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다이아몬드란 건 그 아름다움과 품위의 가치를 넘어서서 무엇보다도 불멸(63)이라는 의 아버지의 말처럼, 보석-돌의 무게(영원성)에브리맨이라는 이름의 유한성은 서로 대립하는 이름이다. 이런 아이러니가 주는 쓸쓸함이란.

 

결국 죽어가는 것은 어떤 식으로도 형언할 수 없는 경험이다. 에브리맨가 노년이라는 대학살을 겪는 과정을 통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수동성 앞에서의 인간을 보여준다. 책을 마지막까지 읽은 뒤 보이는 것은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는 의 고독한 모습이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런 유한성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이루며 죽어갈 것인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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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2-18 2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님이 표현하신 ˝살아있는˝은 윤동주가 저 시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아닙니다. 노래하는, 걸어가는, 스치우는 것처럼 삶도 향하고 움직이기 때문에 멈춤 상태의 ‘살아있는‘이 아니라 ‘살아가는‘의 뜻으로 쓰려 했을테고, 잡힐 것 같지 않은 저 먼 별도 바람에조차 스치우는 존재이니 우리는 살아감에서 살아감(영원성)으로 가는 게 아니라 살아감에서 죽어감(소멸)로 가는 게 이치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죠.

보석의 영원성과 에브리맨의 유한성을 대비시키는 분석 좋네요^^

아무 2016-12-18 23:12   좋아요 1 | URL
댓글을 보고 제가 쓴 글을 다시 보니 제가 앞에서는 ‘살아감‘이라고 쓰고 뒤에서는 ‘살아있는‘이라고 썼네요. 손가락에 가해지는 관성의 힘이란..^^;;

말씀하신 부분에는 100% 동감합니다. 특히 멈춤이 아닌 움직임의 상태라는 것... 말미에 고은 시인의 ‘문의마을에 가서‘를 적으려 하다 내키지 않아서 말았는데, 생각해보니 시에서 죽어감의 이미지가 제게 또렷하게 보이지 않아서 그런 것 같네요.

말씀하신 보석은 글을 쓰려고 밑줄 친 부분들을 다시 훑다가 떠올라서 쓴 것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할 때가 아니라 정리하려고 글을 쓸 때 이해의 순간이 종종 오기도 해요. 그런 이해의 순간을 자주 만나기 위해서라도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ㅎㅎ..

AgalmA 2016-12-18 23:16   좋아요 1 | URL
아하...말이 엉켜버린 거군요. 수차례 훑어봐도 오픈하면 막상 그럴 때 있죠^^; 제가 너무 빨리 댓글을 달았나봄;; 아무님 이런 리뷰 정말 기다려와서 기쁜 마음에ㅎㅎ

리뷰가 고역이긴 한데 말씀처럼 그런 줄기들이 이어지는 걸 발견하는 기쁨이 숨은 보답이라^^

아무 2016-12-18 23:38   좋아요 1 | URL
리뷰를 쓰고 싶게 만드는 책들이 있어요. 어떤 책은 100자평으로 쓰고 싶은 책이 있고..ㅎㅎ 글자 수가 애정도를 담보하는 건 아니지만, 각잡고 리뷰를 쓰기로 마음먹은 다음엔 말씀처럼 고역의 시작이죠^^;

전 아마 다음날은 되어야 발견했을 거예요 ㅎㅎ 이틀 지나면 더이상 교정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덕분에 서시에 대한 Agalma님의 평도 읽게 되고 좋네요^^

2016-12-23 2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23 2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