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의 우산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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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래 전 황정은 작가의 소설집 아무도 아닌의 리뷰를 쓰면서 나는 그의 소설세계를 내 나름대로 분류한 적이 있었다(https://blog.aladin.co.kr/716616164/9018361). 땅에 발을 딛기 시작한 두 번째 경향에 대한 나의 견해는 동일하지만, 디디의 우산에서 이 경향은 변화를 맞은 것으로 보인다. “각각의 패턴으로 맞물려(35) 있는 고유한 개인을 하찮게 만들어버리는 세계의 엄혹함 때문일까. 소설에서 세계는 재구성이라는 체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것은 세계-현실의 압도적인 힘이 소설로 틈입해 온 결과이기도 하고, 무자비하고 적나라한 세계(특히, ‘한국이라는 세계)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는 작가의 결단이기도 하다. 그동안 책에서 빠져 있던 작품 해설과 작가의 말이 들어갔다는 점, 두 작품에 담긴 최근 한국 사회의 편린들을 보고 있으면 최근 몇 년 동안의 한국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게 많았던 작가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디디의 우산과 단편 웃는 남자의 뒤를 잇는 ddd를 잃고 난 뒤 d가 살아가는/버텨가는 모습을 다룬다. 이웅평 대위의 귀순, 세운(世運)상가, 광화문 촛불시위 등 다양한 이야기를 지배하는 분위기는 환멸이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현실에 대한 환멸과 좌절.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이웅평 대위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것을 아시나요? 이웅평 대위가 전투기를 몰고 남한으로 넘어온 이유가 환멸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북측에서 해변을 산책하다가 남쪽에서 생산된 라면 봉지를 주웠는데 이런 안내문이 적혀 있었대요. 불량품은 판매처에서 교환이나 환불을 해드립니다. 그것을 읽고 남쪽에 라면을 쌓아놓고 파는 장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기가 속한 체제에 깊은 환멸을 느끼게 된 나머지 귀순을 결심했다고 하네요. 그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가 부러웠습니다. 두 손으로 조종간을 붙들고 목적지를 향해 전투기를 몰아갔을 그 새끼가 너무 부럽다…… 남쪽의 가요를 방송하는 라디오 채널에 주파수를 맞춰두고 음악이 흐르는 전투기에 실려 북측과 남측의 경계를 향해 날아가던 순간, 그 아득한 허공을 날던 순간의 그가 말입니다. 죽음과는 얇은 금속판 한겹만을 남겨둔 채 체공하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히 환멸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어요. 그는 그것을 가지게 된 거죠. 탈출의 경험을.

내게는 그것이 없어.

나는 내 환멸로부터 탈출하여 향해 갈 곳도 없는데요. (113-114쪽)


전쟁은 완전하게 중단된 적이 없는 것 같(28)은 이 세계는 세운(世運) 그 자체인 인간 개개인이 아니라 상권과 자본만을 되살리려 할 뿐, 인간을 하찮음에 가두고 자신의 부재만을 기다리게 할 따름이다. ‘혁명이라고 말했던 dd세계의 잡음이 거센 물살처럼 그 뒷모습들을 쓸어버(45)렸고, d처럼 애인(愛人)을 잃(144)고 하찮음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격벽에 가두었다. 탈출의 가능성, ‘바깥을 상상할 가능성마저 차단해버리는 격벽. 저항하려 하였으나 저 차벽이 만들어낸 흐름을 충실하게 따라 찌꺼기처럼 여기 도착(133)하게 만들어버리는 세계. “혁명을 거의 가능하지 않도록 하는 혁명(133)을 구축해버린 세계. '애인'을 잃었기에, 그래서 함께 연대할 사람이 없기에 d는 이러한 세계에서 권태, 환멸, 한 조각의 정나미도 남지 않은 삶(138)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한 조각의 불빛 같은 희망을 남기는 것은 마지막을 매듭짓는 진공관의 이미지 때문이다. 이는 소설의 맨 처음, ddd가 함께 본 번개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ddd를 만나게 했던 번개의 뜨거움과 흐르는 빛과 신호로 채워진 진공관(眞空管)의 뜨거움. 세계는 공간(空間)을 만들어 수많은 목소리들의 흐름을 막으려 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하찮음에 저항하는 고유한 개인들의 뜨거움은 피부를 뚫고 들어온 가시처럼 집요하게 남아(145) 환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아갈 것이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그것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가 제시하는 답이기도 하다. 탈출이 불가능하다면 여기서 날 수밖에, 여기서 마찰하는 수밖에 없어.”(292)


d가 한국 사회의 혁명 직전의 세계를 다룬다면,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혁명 중과 직후의 세계까지를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은 1996년부터 이어져 온 세계의 탄압, 특히 소수자를 향한 탄압이 혁명 이후까지 진행형임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책과 신문 기사의 인용이 이어지는 이 작품은 단상처럼 보이기도, 에세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반복되어 호명되는 롤랑 바르트의 문장이 작품의 기저에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산다는 것은 말하는 것입니다. () 산다는 것은 ()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던 문장들로부터 삶의 형태들을 받는 것입니다.˝(242,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아니야 언니.

라고 김소리는 말했지.

사람들은 그런 걸 상상할 정도로 남을 열심히 생각하지는 않아.


그것을 알/생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263)


그것을 알 필요가 없다.

나는 그 태도를 묵자墨字의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267)


우리는 그것을 말할 필요가 없었다.

묵자의 상태가 상식이라서 그걸 부를 필요도 없어, 그것이 너무 당연해 우리는 그것을 지칭조차 하지 않는다. (274)


이 작품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세계의 태도는 점자(點字)와 반대되는 묵자(墨字)의 세계관, 즉 상식(common sense)의 태도이다. 동성애, 여성 문제와 같은 화제를 대하는 다수의 태도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닌 상식, 즉 감()에서 나온 것이며 그것은 생각을 하지 않는 상태에 가깝다(265)는 것이다. 상투어를 말할 때 드러나는 말하기, 생각하기, 공감하기의 무능성(220). 한나 아렌트의 말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상투어가 곧 이 세계가 우리에게 휘두르는 이라는 것일 테다.


그렇지. 툴을 쥔 인간은 툴의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찌된 영문인지, 툴을 쥐지 못한 인간 역시 툴의 방식으로…… (189-190)


1996년부터 시작된 봉쇄라는 툴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벽으로 형태를 완성시켰고, “물리적으로 고립시키고, 폭력이라는 틀을 씌운다.”(188)는 툴의 원리는 툴을 가지지 못한 시민들에게까지 작용해 강박에 가까운 평화적 시위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302)을 낳는다. 시민들의 꾸준한 저항과 승리의 역사로 기록될 촛불 혁명에도 묵자라는 이름의 툴은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착한 시민이라는 자부(302), “惡女 OUT”(304)이라는 팻말로 여전히 존재한다. 툴과 권위와 상투가 휘두르는 폭력이 1996년의 모습 그대로 여전히 존재하는데, “우리는 지난 계절 내내 새로운 문장을 써왔고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 문장은 이제 완성되었다(314)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는때라는 건 도래할 수 있는 것인가. 롤랑 바르트의 말을 다시 받자면, 산다는 것이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던 문장들로부터 삶의 형태를 받는것이기에, 이토록 상투적이어서 폭력적인, 지금껏 우리가 이어받아온 삶의 형태와 단절하고 새로운 문장을 끊임없이 써야하는 것이 아닐까. 강지희 평론가의 해설을 빌려 말하면,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혁명의 감격이 날카롭게 단절되는 지점들, 혁명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겨진 부스러기 같은 존재들(328)이 손쉽게 지워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세계와 마찰한 기록이자, 그들까지 끌어안고 새로운 문장을 쓰려는 작가의 노력이다. 상식과 묵자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공격하는 혐오와 폭력을 막아주는 우산과 같이.


서수경과 나는 그 침묵 속에서 함께 침묵하는 동안 평화적 시위를 원하는 사람들의 갈망에서 상처를 보았다. 누군가 다치는 광경을 우리는 너무 보았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누구도 다치게 하지 말라, 우리는 이미 너무 겪었다고. (309쪽)


열세번째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159)고 쓴 김소영의 이야기는 12장으로 끝난다. 누구도 죽지 않는 이야기, “누구에게도 소용되지 않아, 더는 말할 필요가 없는(316-317) 열세번째 이야기는 가능할까. 여전히 혁명은 미완성이기에, 여전히 묵자의 세계가 고유한 개인의 존재를 지우고 있기에, 혐오가 상식의 탈을 쓰고 존재들을 지우고 밀어내고 있기에,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는이야기가 아닌 모든 것을 말할 필요가 있는이야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지난 격변의 시기를 거쳐 온 우리의 증언이자, “사유라기보다는 굳은 믿음에 가깝고 몸에 밴 습관에(265) 가까운 상식-묵자를 휘둘러왔던 자신에 대한 반성이고, 여전히 달라지지 않는 세계에 부딪치며 우리가 일으키는 마찰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d의 마지막 문장은 세계가 비-존재로 만들어왔던 존재들이 이어갈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처럼 들린다. 무척 뜨거우니, 조심을 하라고.”(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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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토피아 - 실패한 낙원의 귀환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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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하는 현대에 향수라는 유행병을 쫓는 현대인에 대한 바우만의 질책. 대부분의 논지는 그의 전작에서 찾을 수 있지만, 여전히 새겨들을 수밖에 없는 현실. 대화라는 막연한 결론은 도피하는 것이 ‘무사유’일 뿐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주어를 종종 찾을 수 없어 매끄럽지 않은 문장이 읽기의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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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2019-10-06 0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말하는 홉스, 부족, 불평등으로의 회귀는 마지막 챕터인 ‘자궁으로의 회귀’와 연결되는 듯하다. 멀리서 브로더의 글에서 등장한 자궁은 열반의 표본으로, 모든 것이 불확실한 현재에서 도피해 아무런 자극이 없는 세계다. 나에겐 이러한 경향성이 한나 아렌트가 말한 ‘무사유’로의 지향으로 읽혔다. “대화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연설로 글을 매조지는 것이 막연한 결론으로 읽히는 듯하면서도, 그것이 가장 기초적이고 긴급한 시작으로 여겨지는 것은 여전히 곳곳에 만연한 ‘보지 않음’, ‘생각하지 않음’의 태도들 때문이다.
 










2~3년 만에 계간 문학동네를 구입했는데 오래 전에 읽었던 「감정의 윤리학을 위한 서설 1」의 후속편이 여기에 수록되어 있었다는 것은 우연일까. 동정(sympathy)과 공감(empathy)에 관한 그 글에서도 참고할 만한 부분이 많았는데(첨언하면 나는 신형철이 동정과 공감의 정의에 주된 참고점으로 삼은 『투게더』의 번역어, 공감과 감정이입이 좀더 적절한 번역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번 후속(「정치적 수치심의 발명─감정의 윤리학을 위한 서설 2」)에서는 전편에서 내가 궁금해하며 몇 권의 책을 추가하게 했던 죄책감(guilt)수치심(shame)에 대한 논의가 있어 반가웠다. 나도 「양의 미래」를 읽고 나름의 해석을 남기기도 하였으나, 내가 주목하지 못했던 그의 세밀한 해석('수치심'에 관한 논의)에서 참고를 얻었고, 프리모 레비의 같은 책을 읽었음에도 나와 다른 깊은 독서의 과정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유익한 독서였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다만 '기생충'을 다룬 챕터는 사족이라고 생각되는데, 신형철 스스로 이 글을 자신의 "공부의 결과"로 명명하고 있으므로 이런 결점의 지적을 벗어난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신형철이 윤리적 주체를 정의하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참조하는 것은 레비나스의 논의이고, 수치심과 죄책감에 대한 논의에서 가장 주로 참고하는 것은 프리모 레비다. 그는 아감벤의 논의를 비판하고 따라잡아야 할 이유를 상실하는데, 아감벤은 수치심을 존재론의 문제로 인식하며 수치심을 모두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고 읽었기 때문이다. 아감벤의 주장이 이렇게 쉽게 허물어질 수 있는 것이었는지에 대한 의문, 프리모 레비와 테렌스 데 프레(『생존자』의 저자)가 차이를 갖게 된 지점에 대한 의문은 책장에 꽂힌 그의 책을 읽고 나서야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끝난 듯 보이지만 여전히 끝나지 않은 다양한 '수치심'의 문제들과 직면하기 위해서라도, 이 글을 참고로 한 나만의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말은 신형철이 인용한 수많은 책들, 그 중에서도 내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과 씨름할 때가 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이먼 크리츨리를 따라 ‘윤리적 경험‘의 구조와 ‘윤리적 주체‘의 탄생 과정을 이해해보는 일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그는 윤리적 경험을 ‘요구(demand)‘와 ‘승인(approval)‘이라는 두 계기로 분할한다. 윤리적 경험이란 내가 어떤 요구를 경험하고 그 요구를 승인할 것을 요청받는 일이라는 것. ˝윤리적 경험의 본질적 특징은 요구를 받는 주체가 그 요구를 긍정하고, 그 요구가 선한 것이라고 여기는 데 찬성하며, 자신을 그 선에 묶고 자신의 주체성을 그 선과의 관련 속에서 형성한다는 데 있다.˝(17쪽) 요구와 승인 중에 무엇이 먼저 오는가? 요구가 먼저 와야 그에 대해 (불)승인을 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보면 요구가 먼저다. 그러나 어떤 요구는 그것을 승인하려 하는 자아에게만 하나의 요구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둘은 동시적이라고 해야 한다. 이를 ‘윤리적 경험의 선순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같은 쪽). (512)

잘 알려져 있듯이 『전체성과 무한』(1961)으로 대표되는 초기 레비나스 모델의 핵심은 ‘타인의 얼굴‘ 앞에서 우리가 무(능)력하다는 점을 긍정하는 것이다. 나를 굴복시키는 합리적 논증이나 물리적 강제가 주어져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저항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식/지배를 빠져나가는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레비나스가 놀랍게도 ˝타자는 내가 죽이고자 할 수 있는[죽이고 싶은] 유일한 존재˝라고 말하는 이유는 타자가 결코 죽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폭력적 한정을 벗어나고야 만다는 의미에서 타자는 ‘무한‘이다. ˝살해보다 더 강한 이 무한은 이미 타인의 얼굴 속에서 우리에게 저항한다. (…) 아무런 저항도 없는 것의 저항이, 윤리적 저항이 있다.˝(293~294쪽) 그러나 ‘타자는 죽여지지 않는다‘(타자의 무한성)를 인정하는 데서 더 나아가 ‘타자를 죽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타자에 대한 책임)를 떠맡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레비나스의 전진이다. (513)

레비나스의 이와 같은 모델은 도덕법칙에 대한 복종을 주장하는 칸트적 의무론에다가 종교적 색채를 덧입힌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읽힐 여지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당연히 둘은 다르다. 그 차이는 자율성(autonomy)과 타율성(heteronomy)의 차이이기도 하다. 칸트의 경우 자유가 전제되지 않으면 윤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오직 ‘자율적으로‘ 하는 복종만이 윤리적이기 때문 이다. 반면 레비나스의 모델을 떠받치는 구조에서 핵심적인 것은 윤리적 주체를 ‘타율적으로‘ 결정하는 과도한 요구에 대한 경험이다(크리츨리, 57쪽). 타자의 요구는 나의 ‘생존권‘을 위협하기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체는 자신이 요구받은 것과 같은 것을 타자에게 요구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레비나스 모델에서 주체와 타자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비대칭적‘이 라고 말해진다. 이와 같은 입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되어온 것은 그럴 만한 일이다. 과연 이것은 작동될 수 있는 모델인가? 주체의 자기희생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지나치게 잔혹하거나 혹은 이상적인 모델이 아닌가? (514)

레비나스적 주체는 누구도 충분히 승인할 수는 없을 그런 요구에 직면해 있는 주체다. 바우만이 레비나스를 가리켜 ˝[자신이] 충분히 도덕적이지 않다는 혐의에 의해 언제나 괴로워하는 자아˝라고 논평한 대로다. 이때의 요구는 거의 외상적(traumatic)이다. 그 요구가 주체의 밖에서 오고 이질적 근원에서 오며 주체 내부에 깊은 각인을 남긴다는 점에서 말이다. ˝윤리적 주체는 본질적으로 외상적이고 타율적인 요구에 대한 승인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중요하게도 그 주체는 이러한 요구에 의해 분리된(divided) 주체다. 그 주체는 그 자신과, 그가 부응할 수 없는 요구 사이에서, 구성적으로 분열된(split) 주체이다.˝(크리츨리, 62쪽) 크리츨리는 이처럼 윤리적 요구에 의해 분리/분열된 주체를 ‘분인(分人, dividual)‘이라고 명명한다(11쪽).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렇게 덧붙인다. ˝주체가 주체로 되는 것은 바로 그 분열 덕분이다. 윤리적 주체는 분열된 주체다.˝(62~63쪽) 이 글의 도입부에서 우리는 어떻게 윤리적 행위가 동기화될 수 있는지를 물었다. 현재 주어져 있는 잠정적이고 이상한 대답은 이것이다. 윤리적 경험 속에서 행위로의 동기화에 실패한 주체가 윤리적 주체다. (514-515)

죄책감과 수치심의 관계에 대해서는 헬렌 루이스의 결정적인 연구 이래로 다음과 같은 구별이 널리 통용되기 시작했다. 죄책감이 특정한 ‘행위(behavior)‘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라면(˝나는 나쁜 행위를 했다˝), 수치심은 그런 행위를 한 ‘자기(self)‘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나는 나쁜 사람이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논리적 순서를 도출해낼 수 있다. 내가 특정한 행위를 해서 죄책감을 느끼게 되면, 그런 행위를 한 자신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517-518)

그런데 이 소설이 두 개의 사건을 구별 없이 모두 ‘수치심‘에 관한 것으로 명명하고 있는 것은 그 둘이 그만큼 밀접하게 얽혀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옷가게에서의 수치심(수치심 1[순전한 모욕감으로서의 수치심])이 서점에서의 수치심(수치심 2[죄책감에서 이어지는 수치심])을 낳은 것이라고 말이다. ‘학생‘이 아니라 ‘아가씨‘로 살아야 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불안정한 삶이 ‘나‘로 하여금 위험에 빠진 타인의 호소에 응답할 수 없게 했다는 것이다. (518)

「양의 미래」는 오늘날 불확실한(precarious) 사회의 불확실한 존재들, 즉 프레카리아트(precariat)들이 ‘생존과 윤리‘라는 불행한 양자택일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그들을 도덕적 자기 모멸감, 즉 수치심에 빠뜨린다는 것을 조용히 고발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선택함으로써(사실상 선택하기를 강요당함으로써)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말았다고 느끼는 것, 즉 자신의 ‘행위‘에 대한 죄책감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수치심으로 전이되는 메커니즘이 여기에 있다. 앞에서 분인에 대해 말했지만, 요구와 승인 사이에서 분열되는 것만이 분인을 낳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통해 남는 수치심 속에서도 주체는 분열된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수치심은 ‘관찰하는 나‘와 ‘관찰되는 나‘의 분열 상황이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519)

레비는 자문한다. ˝다른 사람 대신에 살아남았기 때문에 부끄러운가?˝(95쪽) 그는 수용소에서 자신이 행한 어떤 행위들에 대해서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지만,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에 수치심을 느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살아남기 위해 타인에게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위해를 가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자리를 뺏고 대신 살아남았다는 의혹과 추궁을 박멸할 수는 없었다. ˝너는 다른 사람의 자리를 빼앗은 것일 수도, 그러니까 사실상 죽인 것일 수도 있다.˝(97쪽) 생각해보니 최고의 사람들이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는, ˝최악의 사람들, 즉 적자(適者)들˝(같은 쪽)이 살아남은 것이라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었다. 당신은 증언을 하도록 선택되어 살아남은 것이라는 위로를 받기도 했지만, 레비는 자신의 증언 행위가 오히려 생존이라는 특권의 알리바이가 되어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요컨대 이것은 행위를 적시할 수 없는 죄책감, 흔히 ‘생존자의 죄책감(survivor‘s guilt)‘이라 불리는 바로 그것이다. (521)

아감벤은 ˝죄책감을 느낄 수 있어야만 우리는 인간일 수 있다. 객관적으로 보아 죄가 없을 때에도 인간은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라고 말한 바 있는 브루노 베텔하임까지 아우르며 이것이 ‘집단적 죄책감‘이라 불릴 만한 현상임을 지적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윤리적 가치도 가질 수 없다고 기각한다. 집단적 죄책감은 ˝개인적으로 한 일이나 할 수 없었던 일이 아니라 그가 처한 조건에 내재하는 종류의 죄를 주장하는 것˝(142쪽)인데 이와 같은 ˝추상적이고 집단적인 죄˝(143쪽)에 대해 말하는 것은 오히려 개인의 구체적인 죄를 얼버무리고 덮어버리는 데 효과적으로 이용돼왔기 때문에 수상쩍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522)

아감벤은 생존자의 죄책감을 기만적인 것이라고 거칠게 비판한 후 이어 그 자신의 수치심 이론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그의 출발점은 레비나스다. 레비나스는 수치심이 도덕규범을 위반할 때 발생하는 감정이라고 보는 상식적 관점을 기각하고 그 대신 그것을 ˝근원적 벌거벗음(basic nudity)˝의 문제라고 파악한다. ˝수치심이 드러내는 것은 우리가 바로 자기 자신에게 못박혀 있다는 사실이고, 자신으로부터 숨기 위해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일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며, 자아가 자기 자신에게 영구히 묶인 채로 현존한다는 것이다.˝(64쪽)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숨으려 하지만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역시 그렇다는 것˝(같은 쪽)인데, 그럴 수 없을 때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이 요점이다. 아감벤은 이런 레비나스의 이론을 심화시키겠다면서 여러 저자를 두루 참조하여 수치심을 윤리학이 아닌 존재론의 문제로 바꿔나간다. 주체가 도망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떠맡을 수도 없는 자신의 어떤 내밀함(intimacy)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나를 주체로 만드는 것이면서 동시에 내 주체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주체화이기도 하고 탈주체화이기도 한 이중 운동˝(아감벤, 159쪽)이 수치심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523-524)

아감벤은 결국 레비로부터 먼 곳까지 가서 ˝그렇기 때문에 주체성은 궁극적으로 부끄러움[수치심]인 것˝(168쪽)이라고까지 말하는데, 나는 여기에 이르러서는 그를 따라잡을 수 없게 됐을 뿐만 아니라 실은 따라잡아야 할 이유를 잃어버렸다. 그의 말대로 수치심이 주체성 그 자체라면, 내게 그것은 더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집단적 죄책감을 비판하면서 아감벤이 구사한 논리 그대로 수치심이 모두의 것일 때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수치심에 대한 아감벤의 관점을 ‘존재론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수치심을 ‘주체의 타자와의 관계‘가 아니라 ‘주체의 자신과의 관계‘라는 층위로 바꿔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저히 거부하려 해도 할 수 없는 타자에 대한 책임감으로서의,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정치적 행위로 나갈 수 있게 해주는 윤리적 자원으로서의 수치심이 아니라면, 그것이 왜 중요하단 말인가. 아감벤은 죄책감으로부터 수치심을 분리해내면서 수치심의 상호주관성을 약화시켰다. 그것 역시 수치심일 수 있겠으나 적어도 레비가 느낀 고통과는 무관해 보인다. (524)

이 ‘세상에 대한 수치심‘을 앞서 다룬 ‘생존자의 죄책감(수치심)‘과는 다른 것으로 구별해낼 필요가 있다. 나보다 훌륭한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내가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는 다른 것이다. ˝타인들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그리고 자신들이 거기에 연루됐다는 생각 때문에˝ 느끼는 수치심이라는 설명에ㅍ주목해야 한다. 세상에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내가 직접적으로 잘못한것은 없다. 그러나 그 일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고(즉 ‘연루‘되었다고) 느낀다. 그래서 나도, 아니 내가,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고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수치심이다. 이것은 ‘죄책감→수치심‘이라는 발생 구조에서 죄책감의 항목이 비어 있는 수치심이다. 죄책감 없는 수치심, 이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정말로 죄책감 없이도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가? (525)

‘생존자의 죄책감‘은 ‘그가 죽은 대신에 내가 살아 있다‘라고 느끼는 감정이다. 생존자는 자신이 살아남은 것은 결국 살아남기를 선택한 결과라고 생각하며 바로 그 선택의 주체인 자신에 대해 수치심을 느낀다. 그래서 이것은 죄책감이 전제된 수치심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죄‘에는 ‘대신에‘의 계기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경우는 ‘그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아 있다‘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로서의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대성(solidarity among men as humans)‘의 문제다. 인류의 어떤 삶/죽음도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가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그 인류의 범주에 나는 자동적으로 포함되기 때문에(연대성) 스스로 목숨을 바치기라도 하지 않는 한 나에겐 그 범죄자의 범주에서 빠져나올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527)

에런라이크는 ‘우리‘가 느껴야 할 것이 죄책감이 아니라 수치심이라고 분명하게 못을 박는다. 국가와 법이 사람들의 수치심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한 사회의 도덕성을 제고하려 시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누스바움이 예외적으로 ˝건설적인 수치심˝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대목이 바로 이곳이기도 하다. 에런라이크는 워킹 푸어들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먼저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에 워킹 푸어가 생겨난다는 점을 입증했다. 학위와 자격증을 내려놓고 현장에 뛰어들면 누구도 그 임금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누스바움은 이 책이 그런 방식으로 독자에게 ˝공통의 인간성에 대한 인식˝ 혹은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일반적인 취약성˝(389쪽)을 인식하게 한다는 점을 정확히 지적한다. 그러므로 이 경우의 수치심이란 ˝자신들이 노동 계급 사람들보다 뛰어나며, 그들 자신과 가난한 노동자들은 공통성이 적다고 생각하는 (과거의) 경향에 대한 수치심˝(같은 쪽)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수치심에 대해서는 에릭슨을 활용해 다음과 같이 바꿔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유아가 자율적이지 못한 스스로를 발견할 때 수치심을 느낀다고 했듯이, 성인은 자신이 누군가의 희생에 의존하고 있는(‘의존성‘을 갖는) 타율적인 존재임을 인정해야만 할 때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고 말이다. (529)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며 가장 놀라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에 대해서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계급사회 안에는 하향적 수치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놀라운 것은 이 놀라운 사실에 누구도 놀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명쾌하게 알려주지 않았던가. 하층계급 덕분에 살아가고 있는 것은 오히려 상층계급이다. 반지하 냄새만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고용인들 없이는 변기 하나 고칠수 없고 ‘짜파구리‘ 하나 끓일 수 없는 무능력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누구도 전적으로 자율적이지 않다. 노동이 분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도 타인의 전문적 노동력 없이는 생존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돈이 그 사실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돈만 있으면 못할 게 없지만 돈만 없어지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기생충‘이라는 제목은 충분히 더 음미돼야 할 것 같다. 이 제목은 과격하게 느껴진다. 중간/하층 계급의 생존을 염려하는 영화인 처지에 마치 그들을 비하하는 것처럼 보이는 제목을 택한 것은 이것이 전적으로 반어적인 제목이 아니라면 용납되기 어려운 선택이다. 그러길 강행했으니 거기에는 의도가 없을 수 없다. 타율적 인간으로서 수치심을 느낄 때 우리 모두는 사실상 서로에게 기생충이라는 뜻이리라. (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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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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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가의 색깔이 묻어나는 현실성과 핍진성이 이야기를 추동하는 힘이지만, 그 때문에 더 나아가지 못하는 상상력. 기저에 흐르는 가치에 전부 동의할 수 없어도 읽게 만드는 것은 이야기의 힘과 치밀함 때문. 위스망스와 주인공의 겹침이 낳는 체념과 환멸은 인상적이나 결말엔 다소 의문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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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도시들 이탈로 칼비노 전집 9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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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기억으로 넘쳐흐르는 이러한 파도에 스펀지처럼 흠뻑 젖었다가 팽창합니다. 자이라의 현재를 묘사할 때는 그 속에 과거를 모두 포함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시는 자신의 과거를 말하지 않습니다. 도시의 과거는 마치 손에 그어진 손금들처럼 거리 모퉁이에, 창살에, 계단 난간에, 피뢰침 안테나에, 깃대에 쓰여 있으며 그 자체로 긁히고 잘리고 조각나고 소용돌이치는 모든 단편들에 담겨 있습니다. (<도시와 기억 3>,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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