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살아 있는 자의 의무 - 지그문트 바우만 인터뷰 궁리 공동선 총서 2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인디고 연구소 기획 / 궁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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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독서 모임에서 다루기로 했던 책은 바우만의 사회학의 쓸모였다(내가 하자고 했다..). 바우만의 책을 바로 읽자고 하기에는 읽기 난감한 문장들이 마음에 걸려서 보다 쉬울 거라 생각되는 대담집을 제안한 것이었다. 그렇게 모임을 준비하다가 설 연휴에 사회학의 쓸모를 다 읽고, 내용을 보충해야겠다 싶어서 집어든 책이 이 책이었는데, 책을 반 정도 읽고 나서 이 책을 같이 읽자고 했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바우만을 모르는 독자들에게 좀더 쉬운 접근통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사상가의 사상에 접근할 때 가장 좋은(혹은 쉬운) 입문서는 사상가의 인터뷰라고 흔히 말한다. 인터뷰어의 자질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사상가가 정립한 자신의 사상을 말로 풀어내는 방식이기 때문에 접근이 용이하다고 말하는 것일 테다. 희망, 살아 있는 자의 의무는 바우만이 접근하고 있는 광범위한 문제들을 두루 질문하고, 바우만의 답변이 그의 책 중 무엇에 기반하고 있는지도 역주로 언급해준다는 측면에서 좋은 입문서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워낙 자주 대담을 가졌던 학자여서 사회학의 쓸모와 많이 겹치는 부분도 있으나, 이 경우에도 이쪽의 답변이 훨씬 자세하다. 바우만의 책을 몇 권 읽어본 독자에게는 바우만 사상의 지도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자, 바우만 사상의 중핵을 이루는 책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런 맥락에서 바우만의 유토피아는 빅터 터너의 의례의 과정에 쓰인 제약 없는 무차별적 공동체 코뮤니타스communitas를 닮았다. 코뮤니타스는 구조와 질서를 요구하는 소시에타스societas에 상반되는 것으로서, 인간의 자유, 자주성, 실험 정신, 변신 등을 가져오는 친밀한 공존의 원천을 뜻한다. 바우만은 스스로 적극적 유토피아라고 명명한 이 개념에 대한 이해를 위해, 몇 년간 사회주의의 비호 아래에서 그러한 유토피아를 향한 희망을 모색했다.

- 미켈 야콥슨, 유토피아를 찾아서(257, 강조는 원문)

 

야콥슨은 코뮤니타스라고 말했지만, 바우만은 자신이 지향하는 공동체를 정서의 공동체(39)라고 말한다. 이는 정치와 권력이 분리된 공위의 시대에 우리가 모색할 수 있는 연대의 방안이자, “인간 유대의 연약화를 막기 위한 대안이다. ‘유토피아주의라는 말이 특정한 절대적 공간을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은 없다TINA는 비관을 배격하고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인간의 상상력을 긍정하는 것이라면, 바우만은 유토피아주의자다. 그는 유토피아를 상상하고 이를 실현하려는 인간의 창조성을 적극적으로 긍정한다. 아랍의 봄, 이스라엘의 여름에서 그가 본 것은 변화에 대한 인간의 열망이요, 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연대의 힘에 중독된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함께 있음의 경험에 순식간에 중독된 것입니다. 그렇죠. 바로 연대의 힘에 말입니다. 이미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변화의 의미는 곧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겠죠. 이를 달성하는 데는 큰 노력이 들지 않았습니다. ‘혼자solitary를 뜻하는 이 고약한 단어에서 철자 하나를 바꾸어 연대solidary로 변화를 꾀하는 정도의 노력 정도라고 할까요? 이 연대는 요구가 관철되는 그 순간까지 지속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연대는 특정한 대의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대의를 갖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나와 너와 광장에 있는 우리 모두가 목적을 갖는 것이고, 곧 삶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137, 강조는 원문)

 

바우만의 사상 중에 가장 중요한 키워드를 찾는다면 액체 또는 유동성(liquidity)일 텐데, 이때 중요한 점은 현대 사회의 유동성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이 양가적(ambivalent)이라는 점이다. ‘액체근대가 도래한 현대 사회를 분석하는 그의 눈은 냉철하고 비판적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주장이 과거의 고체 근대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한때 나는 이렇게 오해했었다). 키스 테스터는 바우만 사상의 핵심을 아이러니라고 규정했는데, 이는 바우만이 인간을 예측 불가능성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기계론적 인간관에 대항하는 아이러니의 인간관을 내세웠고, 이러한 관점은 자유로 이어진다. 액체성이 고체성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산물(187)이라고 말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현대 사회의 유동성과 불확실성, 소비주의를 분석하는 작업은 우리가 사회를 바라보는 통념을 깨고 세계의 양가성을 바라보게 하려는 작업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전 지구적으로 혼란스러운 공위의 시대에서 새로운 전환을 꿈꾸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해체될 틈을 허용하지 않는 견고한 사물에 대한 두려움, 허락된 시간보다 오래 머무르려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손과 발을 꽁꽁 묶어버리는 것들, 혹은 아름다운 순간을 붙잡아 그 속에 영원히 머무르려는 욕망의 과오를 저지른 포스터스 박사와 같이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등을 사르트르는 우리가 끈적끈적한 점성의 물건을 만지는 것에 대한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거부감으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를 사회적 징후로 볼 경우, 그러한 두려움은 액체 근대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인간 역사의 주요한 동력이 된다고 지적합니다. 사실 그러한 공포의 징후들은 임박한 근대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이자, 완전히 새로운 역사적 국면을 알리는 분수령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89-190)

 

그는 어떤 통계적인 수치를 가지고 현대 사회를 분석하지 않는다. 소비주의를 분석할 때에도 그가 주목하는 것은 소비주의가 끼치는 경제적 영향이 아니라 이를 통해 벌어지는 윤리의 붕괴다. 사회학의 쓸모에서 자신의 작업을 사회학적 해석학이라고 명명한 것처럼, 바우만은 연구 대상을 알고리즘 법칙을 구성하는 유한수finite number로 환원하는 것을 거부(사회학의 쓸모, 100)한다. 그가 인간의 윤리성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이유, 반복적으로 레비나스의 논의를 언급하는 이유, “오직 윤리적 주체로 설 때에만 인간성은 완성될 수 있(198)다고 말하는 이유다. 접촉보다 접속이 압도적인 현대 사회에서 그가 프랜즌을 인용하며 SNS를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이러한 장치들이 인간 사이의 관계를 소멸시키고 윤리마저 실종시키는 역할을 하는 까닭이다.

 

인터뷰 말미에서 바우만은 좋은 사회란 자신이 속한 사회가 결코 현재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201)이라고 정의한다. 현대 사회를 비관적으로 분석한 수많은 저서를 냈음에도 자신은 비관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대안적인 세계가 가능하다는 자신의 믿음 때문이다. 때 이른 죽음이 아님에도 그의 부재를 슬퍼하는 것은, 오늘날 이토록 희망을 소리 높여 말하는 사람이 그 말고는 보이지 않아서다. 여전히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몫은 남겨진 그의 저서를, 그가 남긴 병 속의 메시지를 건져서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이면에 숨겨진 폭력에 항의하며 정서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일 거라고 믿는다.

 

+) 지금까지 읽은 바우만의 책은 대여섯 권 정도인데, 이중에서 바우만 사상의 핵심은 『액체근대』라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를 '유동성'이라는 비유를 통해 바라본 바우만의 분석은 이 책에서 가장 빛난다. 이 대담을 읽으면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 책은 『사회주의, 생동하는 유토피아』(1976→2010)였다. 2부에 글과 인터뷰를 실은 많은 사람들이 중요한 책으로 지목한 까닭이다. 이렇게 읽어야 할 바우만의 책도 하나씩 늘어난다..


희망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조상들이 훌륭한 라틴어 격언으로 대답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숨 쉬는 한, 나는 희망한다Dum spiro spero.”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이 문장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이것이 바로 제가 미래에 대해 갖는 입장입니다. 저는 강연에서 “당신은 왜 그렇게 비관적인가?”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요. 이 라틴어 격언이 저의 대답입니다. 키케로도 이 말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저는 낙관주의자도 비관주의자도 아닙니다. 제 스스로가 정의하길, 낙관주의자는 지금 이곳의 세계가 도달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비관주의자는 ‘누가 정답을 알겠어. 그래도 아마 저 사람 말이 맞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죠.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불완전한 것이죠. 저는 여기에 제3의 부류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희망하는 자들’이 그것입니다. 지금과는 다른 대안적인 세계가 가능하다고 희망하는 자들이죠. 저는 새로운 세계가 불가능해지는 지점은 오직 우리가 희망하기를 멈출 때뿐이라고 생각합니다.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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