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토피아 - 실패한 낙원의 귀환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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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하는 현대에 향수라는 유행병을 쫓는 현대인에 대한 바우만의 질책. 대부분의 논지는 그의 전작에서 찾을 수 있지만, 여전히 새겨들을 수밖에 없는 현실. 대화라는 막연한 결론은 도피하는 것이 ‘무사유’일 뿐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주어를 종종 찾을 수 없어 매끄럽지 않은 문장이 읽기의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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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2019-10-06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말하는 홉스, 부족, 불평등으로의 회귀는 마지막 챕터인 ‘자궁으로의 회귀’와 연결되는 듯하다. 멀리서 브로더의 글에서 등장한 자궁은 열반의 표본으로, 모든 것이 불확실한 현재에서 도피해 아무런 자극이 없는 세계다. 나에겐 이러한 경향성이 한나 아렌트가 말한 ‘무사유’로의 지향으로 읽혔다. “대화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연설로 글을 매조지는 것이 막연한 결론으로 읽히는 듯하면서도, 그것이 가장 기초적이고 긴급한 시작으로 여겨지는 것은 여전히 곳곳에 만연한 ‘보지 않음’, ‘생각하지 않음’의 태도들 때문이다.
 










2~3년 만에 계간 문학동네를 구입했는데 오래 전에 읽었던 「감정의 윤리학을 위한 서설 1」의 후속편이 여기에 수록되어 있었다는 것은 우연일까. 동정(sympathy)과 공감(empathy)에 관한 그 글에서도 참고할 만한 부분이 많았는데(첨언하면 나는 신형철이 동정과 공감의 정의에 주된 참고점으로 삼은 『투게더』의 번역어, 공감과 감정이입이 좀더 적절한 번역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번 후속(「정치적 수치심의 발명─감정의 윤리학을 위한 서설 2」)에서는 전편에서 내가 궁금해하며 몇 권의 책을 추가하게 했던 죄책감(guilt)수치심(shame)에 대한 논의가 있어 반가웠다. 나도 「양의 미래」를 읽고 나름의 해석을 남기기도 하였으나, 내가 주목하지 못했던 그의 세밀한 해석('수치심'에 관한 논의)에서 참고를 얻었고, 프리모 레비의 같은 책을 읽었음에도 나와 다른 깊은 독서의 과정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유익한 독서였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다만 '기생충'을 다룬 챕터는 사족이라고 생각되는데, 신형철 스스로 이 글을 자신의 "공부의 결과"로 명명하고 있으므로 이런 결점의 지적을 벗어난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신형철이 윤리적 주체를 정의하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참조하는 것은 레비나스의 논의이고, 수치심과 죄책감에 대한 논의에서 가장 주로 참고하는 것은 프리모 레비다. 그는 아감벤의 논의를 비판하고 따라잡아야 할 이유를 상실하는데, 아감벤은 수치심을 존재론의 문제로 인식하며 수치심을 모두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고 읽었기 때문이다. 아감벤의 주장이 이렇게 쉽게 허물어질 수 있는 것이었는지에 대한 의문, 프리모 레비와 테렌스 데 프레(『생존자』의 저자)가 차이를 갖게 된 지점에 대한 의문은 책장에 꽂힌 그의 책을 읽고 나서야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끝난 듯 보이지만 여전히 끝나지 않은 다양한 '수치심'의 문제들과 직면하기 위해서라도, 이 글을 참고로 한 나만의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말은 신형철이 인용한 수많은 책들, 그 중에서도 내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과 씨름할 때가 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이먼 크리츨리를 따라 ‘윤리적 경험‘의 구조와 ‘윤리적 주체‘의 탄생 과정을 이해해보는 일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그는 윤리적 경험을 ‘요구(demand)‘와 ‘승인(approval)‘이라는 두 계기로 분할한다. 윤리적 경험이란 내가 어떤 요구를 경험하고 그 요구를 승인할 것을 요청받는 일이라는 것. ˝윤리적 경험의 본질적 특징은 요구를 받는 주체가 그 요구를 긍정하고, 그 요구가 선한 것이라고 여기는 데 찬성하며, 자신을 그 선에 묶고 자신의 주체성을 그 선과의 관련 속에서 형성한다는 데 있다.˝(17쪽) 요구와 승인 중에 무엇이 먼저 오는가? 요구가 먼저 와야 그에 대해 (불)승인을 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보면 요구가 먼저다. 그러나 어떤 요구는 그것을 승인하려 하는 자아에게만 하나의 요구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둘은 동시적이라고 해야 한다. 이를 ‘윤리적 경험의 선순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같은 쪽). (512)

잘 알려져 있듯이 『전체성과 무한』(1961)으로 대표되는 초기 레비나스 모델의 핵심은 ‘타인의 얼굴‘ 앞에서 우리가 무(능)력하다는 점을 긍정하는 것이다. 나를 굴복시키는 합리적 논증이나 물리적 강제가 주어져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저항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식/지배를 빠져나가는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레비나스가 놀랍게도 ˝타자는 내가 죽이고자 할 수 있는[죽이고 싶은] 유일한 존재˝라고 말하는 이유는 타자가 결코 죽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폭력적 한정을 벗어나고야 만다는 의미에서 타자는 ‘무한‘이다. ˝살해보다 더 강한 이 무한은 이미 타인의 얼굴 속에서 우리에게 저항한다. (…) 아무런 저항도 없는 것의 저항이, 윤리적 저항이 있다.˝(293~294쪽) 그러나 ‘타자는 죽여지지 않는다‘(타자의 무한성)를 인정하는 데서 더 나아가 ‘타자를 죽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타자에 대한 책임)를 떠맡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레비나스의 전진이다. (513)

레비나스의 이와 같은 모델은 도덕법칙에 대한 복종을 주장하는 칸트적 의무론에다가 종교적 색채를 덧입힌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읽힐 여지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당연히 둘은 다르다. 그 차이는 자율성(autonomy)과 타율성(heteronomy)의 차이이기도 하다. 칸트의 경우 자유가 전제되지 않으면 윤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오직 ‘자율적으로‘ 하는 복종만이 윤리적이기 때문 이다. 반면 레비나스의 모델을 떠받치는 구조에서 핵심적인 것은 윤리적 주체를 ‘타율적으로‘ 결정하는 과도한 요구에 대한 경험이다(크리츨리, 57쪽). 타자의 요구는 나의 ‘생존권‘을 위협하기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체는 자신이 요구받은 것과 같은 것을 타자에게 요구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레비나스 모델에서 주체와 타자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비대칭적‘이 라고 말해진다. 이와 같은 입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되어온 것은 그럴 만한 일이다. 과연 이것은 작동될 수 있는 모델인가? 주체의 자기희생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지나치게 잔혹하거나 혹은 이상적인 모델이 아닌가? (514)

레비나스적 주체는 누구도 충분히 승인할 수는 없을 그런 요구에 직면해 있는 주체다. 바우만이 레비나스를 가리켜 ˝[자신이] 충분히 도덕적이지 않다는 혐의에 의해 언제나 괴로워하는 자아˝라고 논평한 대로다. 이때의 요구는 거의 외상적(traumatic)이다. 그 요구가 주체의 밖에서 오고 이질적 근원에서 오며 주체 내부에 깊은 각인을 남긴다는 점에서 말이다. ˝윤리적 주체는 본질적으로 외상적이고 타율적인 요구에 대한 승인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중요하게도 그 주체는 이러한 요구에 의해 분리된(divided) 주체다. 그 주체는 그 자신과, 그가 부응할 수 없는 요구 사이에서, 구성적으로 분열된(split) 주체이다.˝(크리츨리, 62쪽) 크리츨리는 이처럼 윤리적 요구에 의해 분리/분열된 주체를 ‘분인(分人, dividual)‘이라고 명명한다(11쪽).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렇게 덧붙인다. ˝주체가 주체로 되는 것은 바로 그 분열 덕분이다. 윤리적 주체는 분열된 주체다.˝(62~63쪽) 이 글의 도입부에서 우리는 어떻게 윤리적 행위가 동기화될 수 있는지를 물었다. 현재 주어져 있는 잠정적이고 이상한 대답은 이것이다. 윤리적 경험 속에서 행위로의 동기화에 실패한 주체가 윤리적 주체다. (514-515)

죄책감과 수치심의 관계에 대해서는 헬렌 루이스의 결정적인 연구 이래로 다음과 같은 구별이 널리 통용되기 시작했다. 죄책감이 특정한 ‘행위(behavior)‘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라면(˝나는 나쁜 행위를 했다˝), 수치심은 그런 행위를 한 ‘자기(self)‘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나는 나쁜 사람이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논리적 순서를 도출해낼 수 있다. 내가 특정한 행위를 해서 죄책감을 느끼게 되면, 그런 행위를 한 자신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517-518)

그런데 이 소설이 두 개의 사건을 구별 없이 모두 ‘수치심‘에 관한 것으로 명명하고 있는 것은 그 둘이 그만큼 밀접하게 얽혀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옷가게에서의 수치심(수치심 1[순전한 모욕감으로서의 수치심])이 서점에서의 수치심(수치심 2[죄책감에서 이어지는 수치심])을 낳은 것이라고 말이다. ‘학생‘이 아니라 ‘아가씨‘로 살아야 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불안정한 삶이 ‘나‘로 하여금 위험에 빠진 타인의 호소에 응답할 수 없게 했다는 것이다. (518)

「양의 미래」는 오늘날 불확실한(precarious) 사회의 불확실한 존재들, 즉 프레카리아트(precariat)들이 ‘생존과 윤리‘라는 불행한 양자택일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그들을 도덕적 자기 모멸감, 즉 수치심에 빠뜨린다는 것을 조용히 고발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선택함으로써(사실상 선택하기를 강요당함으로써)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말았다고 느끼는 것, 즉 자신의 ‘행위‘에 대한 죄책감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수치심으로 전이되는 메커니즘이 여기에 있다. 앞에서 분인에 대해 말했지만, 요구와 승인 사이에서 분열되는 것만이 분인을 낳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통해 남는 수치심 속에서도 주체는 분열된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수치심은 ‘관찰하는 나‘와 ‘관찰되는 나‘의 분열 상황이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519)

레비는 자문한다. ˝다른 사람 대신에 살아남았기 때문에 부끄러운가?˝(95쪽) 그는 수용소에서 자신이 행한 어떤 행위들에 대해서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지만,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에 수치심을 느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살아남기 위해 타인에게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위해를 가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자리를 뺏고 대신 살아남았다는 의혹과 추궁을 박멸할 수는 없었다. ˝너는 다른 사람의 자리를 빼앗은 것일 수도, 그러니까 사실상 죽인 것일 수도 있다.˝(97쪽) 생각해보니 최고의 사람들이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는, ˝최악의 사람들, 즉 적자(適者)들˝(같은 쪽)이 살아남은 것이라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었다. 당신은 증언을 하도록 선택되어 살아남은 것이라는 위로를 받기도 했지만, 레비는 자신의 증언 행위가 오히려 생존이라는 특권의 알리바이가 되어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요컨대 이것은 행위를 적시할 수 없는 죄책감, 흔히 ‘생존자의 죄책감(survivor‘s guilt)‘이라 불리는 바로 그것이다. (521)

아감벤은 ˝죄책감을 느낄 수 있어야만 우리는 인간일 수 있다. 객관적으로 보아 죄가 없을 때에도 인간은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라고 말한 바 있는 브루노 베텔하임까지 아우르며 이것이 ‘집단적 죄책감‘이라 불릴 만한 현상임을 지적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윤리적 가치도 가질 수 없다고 기각한다. 집단적 죄책감은 ˝개인적으로 한 일이나 할 수 없었던 일이 아니라 그가 처한 조건에 내재하는 종류의 죄를 주장하는 것˝(142쪽)인데 이와 같은 ˝추상적이고 집단적인 죄˝(143쪽)에 대해 말하는 것은 오히려 개인의 구체적인 죄를 얼버무리고 덮어버리는 데 효과적으로 이용돼왔기 때문에 수상쩍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522)

아감벤은 생존자의 죄책감을 기만적인 것이라고 거칠게 비판한 후 이어 그 자신의 수치심 이론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그의 출발점은 레비나스다. 레비나스는 수치심이 도덕규범을 위반할 때 발생하는 감정이라고 보는 상식적 관점을 기각하고 그 대신 그것을 ˝근원적 벌거벗음(basic nudity)˝의 문제라고 파악한다. ˝수치심이 드러내는 것은 우리가 바로 자기 자신에게 못박혀 있다는 사실이고, 자신으로부터 숨기 위해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일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며, 자아가 자기 자신에게 영구히 묶인 채로 현존한다는 것이다.˝(64쪽)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숨으려 하지만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역시 그렇다는 것˝(같은 쪽)인데, 그럴 수 없을 때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이 요점이다. 아감벤은 이런 레비나스의 이론을 심화시키겠다면서 여러 저자를 두루 참조하여 수치심을 윤리학이 아닌 존재론의 문제로 바꿔나간다. 주체가 도망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떠맡을 수도 없는 자신의 어떤 내밀함(intimacy)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나를 주체로 만드는 것이면서 동시에 내 주체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주체화이기도 하고 탈주체화이기도 한 이중 운동˝(아감벤, 159쪽)이 수치심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523-524)

아감벤은 결국 레비로부터 먼 곳까지 가서 ˝그렇기 때문에 주체성은 궁극적으로 부끄러움[수치심]인 것˝(168쪽)이라고까지 말하는데, 나는 여기에 이르러서는 그를 따라잡을 수 없게 됐을 뿐만 아니라 실은 따라잡아야 할 이유를 잃어버렸다. 그의 말대로 수치심이 주체성 그 자체라면, 내게 그것은 더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집단적 죄책감을 비판하면서 아감벤이 구사한 논리 그대로 수치심이 모두의 것일 때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수치심에 대한 아감벤의 관점을 ‘존재론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수치심을 ‘주체의 타자와의 관계‘가 아니라 ‘주체의 자신과의 관계‘라는 층위로 바꿔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저히 거부하려 해도 할 수 없는 타자에 대한 책임감으로서의,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정치적 행위로 나갈 수 있게 해주는 윤리적 자원으로서의 수치심이 아니라면, 그것이 왜 중요하단 말인가. 아감벤은 죄책감으로부터 수치심을 분리해내면서 수치심의 상호주관성을 약화시켰다. 그것 역시 수치심일 수 있겠으나 적어도 레비가 느낀 고통과는 무관해 보인다. (524)

이 ‘세상에 대한 수치심‘을 앞서 다룬 ‘생존자의 죄책감(수치심)‘과는 다른 것으로 구별해낼 필요가 있다. 나보다 훌륭한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내가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는 다른 것이다. ˝타인들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그리고 자신들이 거기에 연루됐다는 생각 때문에˝ 느끼는 수치심이라는 설명에ㅍ주목해야 한다. 세상에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내가 직접적으로 잘못한것은 없다. 그러나 그 일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고(즉 ‘연루‘되었다고) 느낀다. 그래서 나도, 아니 내가,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고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수치심이다. 이것은 ‘죄책감→수치심‘이라는 발생 구조에서 죄책감의 항목이 비어 있는 수치심이다. 죄책감 없는 수치심, 이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정말로 죄책감 없이도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가? (525)

‘생존자의 죄책감‘은 ‘그가 죽은 대신에 내가 살아 있다‘라고 느끼는 감정이다. 생존자는 자신이 살아남은 것은 결국 살아남기를 선택한 결과라고 생각하며 바로 그 선택의 주체인 자신에 대해 수치심을 느낀다. 그래서 이것은 죄책감이 전제된 수치심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죄‘에는 ‘대신에‘의 계기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경우는 ‘그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아 있다‘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로서의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대성(solidarity among men as humans)‘의 문제다. 인류의 어떤 삶/죽음도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가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그 인류의 범주에 나는 자동적으로 포함되기 때문에(연대성) 스스로 목숨을 바치기라도 하지 않는 한 나에겐 그 범죄자의 범주에서 빠져나올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527)

에런라이크는 ‘우리‘가 느껴야 할 것이 죄책감이 아니라 수치심이라고 분명하게 못을 박는다. 국가와 법이 사람들의 수치심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한 사회의 도덕성을 제고하려 시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누스바움이 예외적으로 ˝건설적인 수치심˝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대목이 바로 이곳이기도 하다. 에런라이크는 워킹 푸어들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먼저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에 워킹 푸어가 생겨난다는 점을 입증했다. 학위와 자격증을 내려놓고 현장에 뛰어들면 누구도 그 임금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누스바움은 이 책이 그런 방식으로 독자에게 ˝공통의 인간성에 대한 인식˝ 혹은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일반적인 취약성˝(389쪽)을 인식하게 한다는 점을 정확히 지적한다. 그러므로 이 경우의 수치심이란 ˝자신들이 노동 계급 사람들보다 뛰어나며, 그들 자신과 가난한 노동자들은 공통성이 적다고 생각하는 (과거의) 경향에 대한 수치심˝(같은 쪽)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수치심에 대해서는 에릭슨을 활용해 다음과 같이 바꿔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유아가 자율적이지 못한 스스로를 발견할 때 수치심을 느낀다고 했듯이, 성인은 자신이 누군가의 희생에 의존하고 있는(‘의존성‘을 갖는) 타율적인 존재임을 인정해야만 할 때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고 말이다. (529)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며 가장 놀라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에 대해서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계급사회 안에는 하향적 수치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놀라운 것은 이 놀라운 사실에 누구도 놀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명쾌하게 알려주지 않았던가. 하층계급 덕분에 살아가고 있는 것은 오히려 상층계급이다. 반지하 냄새만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고용인들 없이는 변기 하나 고칠수 없고 ‘짜파구리‘ 하나 끓일 수 없는 무능력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누구도 전적으로 자율적이지 않다. 노동이 분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도 타인의 전문적 노동력 없이는 생존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돈이 그 사실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돈만 있으면 못할 게 없지만 돈만 없어지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기생충‘이라는 제목은 충분히 더 음미돼야 할 것 같다. 이 제목은 과격하게 느껴진다. 중간/하층 계급의 생존을 염려하는 영화인 처지에 마치 그들을 비하하는 것처럼 보이는 제목을 택한 것은 이것이 전적으로 반어적인 제목이 아니라면 용납되기 어려운 선택이다. 그러길 강행했으니 거기에는 의도가 없을 수 없다. 타율적 인간으로서 수치심을 느낄 때 우리 모두는 사실상 서로에게 기생충이라는 뜻이리라. (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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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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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가의 색깔이 묻어나는 현실성과 핍진성이 이야기를 추동하는 힘이지만, 그 때문에 더 나아가지 못하는 상상력. 기저에 흐르는 가치에 전부 동의할 수 없어도 읽게 만드는 것은 이야기의 힘과 치밀함 때문. 위스망스와 주인공의 겹침이 낳는 체념과 환멸은 인상적이나 결말엔 다소 의문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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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도시들 이탈로 칼비노 전집 9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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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기억으로 넘쳐흐르는 이러한 파도에 스펀지처럼 흠뻑 젖었다가 팽창합니다. 자이라의 현재를 묘사할 때는 그 속에 과거를 모두 포함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시는 자신의 과거를 말하지 않습니다. 도시의 과거는 마치 손에 그어진 손금들처럼 거리 모퉁이에, 창살에, 계단 난간에, 피뢰침 안테나에, 깃대에 쓰여 있으며 그 자체로 긁히고 잘리고 조각나고 소용돌이치는 모든 단편들에 담겨 있습니다. (<도시와 기억 3>,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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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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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品格)’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으면 두 가지 뜻이 나온다. 첫째, “사람 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 둘째, “사물 따위에서 느껴지는 품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뜻풀이를 둘로 나눈 것은 단어가 사람에게 쓰일 때와 사물에 쓰일 때를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과 사물의 구분에 관계없이 내가 찾고자 하는 뜻은 두 번째에 가까운 듯하니 조금만 더 추적하자면, ‘품위(品位)’란 단어의 여섯 가지 뜻 중에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위엄이나 기품”, “사물이 지닌 고상하고 격이 높은 인상에 주목할 수 있다. ‘위엄(威嚴)’존경할 만한 위세가 있어 점잖고 엄숙함, ‘기품(氣品)’인격이나 작품 따위에서 드러나는 고상한 품격을 나타내는 말이니 품위의 두 가지 뜻은 일맥상통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품격이라는 단어에서 이렇게 멀리까지 온 것은, 선생의 글에 배음(背音)처럼 흐르는 품격이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규명하기 위한 나의 짧은 추적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 끝에 내가 다다른 생각을, 구태의연한 정의를 약간 비틀어 말하자면, 문체(style)가 곧 그 사람의 태도(attitude)를 가리킨다고 정리할 수도 있겠다.


훌륭한 에세이가 갖추어야 할 자질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황현산이라는 평론가의 에세이가 갖는 자질이란 평이하지만 엄정하게 골라낸 언어로 상념을 펼쳐내 독자를 어느새 그의 세계로 스며들게 하는 경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글은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사냥개의 솜씨도 아니고, “열정을 지닌 개인의 과격한 언어들(200)의 전위도 아니지만,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가는 문장들은 어느새 핵심에 이르러 과녁을 정확히 맞힌다. 여러 지면에 실렸던 글을 모은 만큼 다루고 있는 주제는 다양하지만, 읽다 보면 어느새 문장들은 문제의 중심에 닿아 있다. 하지만 그 문장들은 과시하는 창(槍)이 아니라 불현듯 꽂힌 비수에 가깝다. 힘을 주었다는 인위적인 시늉 없이 그 힘을 전달하는 문장의 내공이 글에서 풍기는 고고한 향기를 좌우한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나는 때로 새삼스러운 말들을 읽으면서도 그것을 우리에게 과거의 상처는 너무 악착스럽고, 미래에의 걱정은 갈수록 두터워질 뿐이다. 그래서 현재는 그만큼 줄어들고 눈앞의 삶을 깊이 있게 누리는 것이 용서되지 않는다.”(42)와 같이 표현하는 펜끝을 보며 감탄하는 것이다.


나도 지금을 살고 있는 또 하나의 사람인지라, 모든 글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나는 글을 읽으며 향수(鄕愁)나 보존에 지나치게 기운 견해들이 아닌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감수성의 필요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문장들을 보며 이성(理性)의 필요를 떠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눈을 돌리지 못하고 존중의 뜻을 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의 문장이 가진 고아(高雅)함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문장을 다루는 데서 느껴지는 그의 태도, 어떤 것도 허투루 보고 쓰지 않고자 하는 태도와도 관련된다. 진실을 꿰뚫으면서도 해석의 여지와 반성의 겨를을 누리는 새로운 문체의 개발(201)을 지향하는 그의 문장에 표하는 나의 존중은, 언어를 잘 골라서 문장으로 펼쳐내고 싶은 나의 바람이자 닮고 싶은 문장을 만난 나의 마음이기도 하다.


많은 부분에 밑줄을 치며 읽었지만 내 눈을 오래 사로잡았던 글들은 시의 소용에 대한 글과 문학과 문학적인 것을 이야기한 글이었다. 시적인 가사를 품은 노래와 시를 가름하는 기준, 문학과 문학적인 것을 가름하는 기준은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려는 고독한 시도들로 귀결된다. 문학은 문학적인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289)는 말이나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개척한다는 것이며,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과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이다.”(184)는 말들처럼, 중요한 것은 생각을 소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생산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일 테다. 물론 이러한 견해의 극단이 결국 이전의 오만한 견해들처럼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가를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의 글은 그 지점으로 넘어가지 않으려는 치열함과 겸손을 가졌다.


처음으로 돌아와서, 문장의 품격이란 글쓴이의 태도와 관련되는 것이며, 그러한 태도는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온다. 한 권의 책에서 그가 견지한 시선-태도란 사소한 것도 허투루 보지 않으려는 마음일 것이다. 글쓰기가 독창성과 사실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바로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사소한사정을 말한다는 것(176)이라는 말처럼, 사소함에서 다름을 보고 이를 확장시키는 노력이 품격의 한 부분일 것이다. 그런 시선을 가진 사람이 성장통이라는 단어가 젊은 날의 고뇌와 고투를 그 미숙함의 탓으로 돌려버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젊은 날의 삶은 다른 삶을 준비하기 위한 삶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한 삶이기도 하며,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삶이 거기 있기도(88) 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소함만 가진 문장은 고졸(古拙)함에 그치고, 이를 합당한 언어와 정직한 수사법으로표현하려는 노력이 함께할 때 문장은 고아함을 입는다. 결국 문체가 가리키는 글쓴이의 태도란 세계를 바라보는 자세와 언어를 다루는 자세를 아우르는 개념일 것이다. 이러한 자세에는 세계의 고통을 더욱 아프게 받아들이는 마음도 있을 거라고 믿으며, 기억과 예술의 윤리를, “인간 의식의 맨 밑바닥까지 진실을 추구하는 작업(84)으로서의 문학을 말했던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자꾸 아래의 문장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비극은 그다음에 올 것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죽음도 시신도 슬픔도 전혀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청소되어, 다른 비슷한 사연을 지닌 동네와 거리들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세련된 빌딩과 고층 아파트들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그 번들거리고 말쑥한 표정으로 치장”(진은영 시인, 용산 멜랑꼴리아)될 때 올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불타면, 사람이 어이없이 죽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것이다.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봐 저마다 몸서리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33)


부고를 들었던 날, 내가 받은 책 중 하나는 말과 시간의 깊이였다. 작고하기 며칠 전 오랜만에 나는 선생의 트위터를 훑다가 악의 꽃번역과 교정을 끝내고 주석을 달기만 하면 된다는 트윗을 보고 반가워하였으나, 반가움은 허망함으로 나를 반겼다. 사 놓고 묵혀둔 지 오래된 책을 이제서야 읽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남겨진 책들을 천천히 곱씹으며 내 고유의 문장의 품격을 찾고 싶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지탱하는 곧은 형식들은 차가운 바람 속에 남아 있다.”(241) 어른다운 어른, 존경이 아닌 존중받을 만한 어른도 찾기 힘든 이 시기에 전해온 부고는 안타깝기만 하다. 부디, 영면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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