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괴물은 정말 싫어! 작은도서관 31
문선이 글.그림 / 푸른책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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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괴물이라고 생각하는 초등생들의 마음을 딱 알아주는 동화다.
저학년 아이들에게 하루에 한 챕터씩 읽어줬는데, 15분이 넘어가도 싫증내지 않고 집중해서 들었다.
들으면서도 자기들 마음과 같은 대목이 나오면 "맞아요!" 하면서 추임새를 넣었다.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초등학교는 중간고사 없이 기말고사만 봤다.
하지만 요즘엔 중간. 기말 시험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학력을 평가하는 일제고사도 본다.
성적이 나쁘면 학교 망신이라며 예비시험도 치고
엄마들은 그에 앞서 한 발 먼저 가르치려 난리를 떨어 아이들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오죽하면 "시험 괴물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라고 외치겠는가!


"아직 어려서 안쓰러워요. 겨우 초등학생인데 너무 힘들지 않을까요?"
"그렇게 다 봐주다간 저만치 앞서간 아이들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게 돼요.
그때 땅 치고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 없다니까요." (14쪽)


도대체 이제 겨우 초등학생한테 늦었다는 게 말이 되는가?
남들이 하니까 우리 아이만 가만두면 뒤떨어질까봐 불안하고 초조한 엄마들의 돈지랄(?)에 아이들은 녹초가 된다. 
많이 배운 엄마일수록 더 많이 가르치려고 드니 정말 아이를 공부하는 기계로 보고,
엄마의 조종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초등생이 밥 먹을 시간도 없이 학원을 전전하고 있으니 책 읽을 시간은 있겠는가....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다.     

"김서현, 100점! 서현이는 이번에도 날 실망시키지 않았구나. 잘했어."
"68점, 넌 공부랑 원수졌냐, 공부 좀 해라. 공부해. 공부해 남주냐?" (20~21쪽)

시험을 잘 본 서현이와 점수가 낮은 준석이에게 하시는 선생님의 말씀은 옳지 않다.
'격려'란 잘 못한 아이에게 오히려 더 필요하다. 그리고 요즘은 '공부해서 남 주라'고 가르쳐야 한다.
그러잖아도 제 잘난 맛에 이기적인 아이들이 공부해서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될까봐 무섭다.
공부해서 저혼자 잘 먹고 잘 사는게 아니라 남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야 한다.
 
문선이 작가는 직접 그림까지 그려, 글과 그림으로 아이들 마음을 잘 표현했다.
학교 선생님이라 아이들 마음을 잘 알아주는 것 같은데, 선생님의 역할은 좀 부정적이다.
아마도 작가가 경험한 초등 선생님들의 안 좋은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생각됐다.
아이들한테 책을 읽어주면서 "여러분 선생님도 이래요?"하고 물었더니, 다행히 아니라고 답했다. 
오늘도 엄마들 모임에서 "어린 아이들한테 함부로 말하는 선생님에 대한 성토가 줄줄이 나왔다.
대체로 교사 경력이 많은 선생님들이 그렇다는데 의견이 일치했다.
요즘 젊은 선생님들은 아이한테 함부로 하지 않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시험을 잘 봐야 한다는 엄마의 잔소리가 괴로운 준석이, 방과후에 남아서 공부하는 70점 이하의 아이들은 괴롭다.
시험 괴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준석이는 우연히 주운 시계 때문에 환타지를 맛본다. 
환타지 세계의 경험으로 시험 문제를 해결하는 설정은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아이들에게 이런 상상의 자유도 없다면 숨통이 막혀 살 수가 없을 것이다. ㅠㅠ

 


공부를 잘하면 잘 할수록 하나라도 틀릴까봐 전전긍긍하는 서현이. 
엄마는 서현이가 한개만 틀려도 이라크로 보내버린다고 했단다.
이라크는 전쟁중이라 죽을까봐 걱정이 된 서현이는 급기야 컨닝까지 하고. 아,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 걸까?  
시험괴물 때문에 괴로운 아이들 심리를 잘 그려냈지만, 어른의 시각으로 묘사된 것은 살짝 걸렸다. 
예를 들면 아래의 표현은 어른들의 묘사고, 아이들 정서에 맞는 표현을 찾아야 될 거 같다. 

오늘은 학교에 가는 발걸음이 맷돌처럼 무거운 게 꼭 전쟁터로 가는 것 같습니다.(18쪽)
정말 이런 날은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같이 학교에 가기 싫습니다.(19쪽)
"엄마가 알면 날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당장 이라크로 보낼 거라고. 엄마가 그랬어.
한 개라도 틀리면 이라크로 보내 버린다고. 전쟁터에 가면 나 죽을지도 모르잖아."(74쪽)

오히려, 1학년 아이가 쓴
"하느님, 부처님, 산신령님! 살려주세요.' 이런 마음으로 학교에 간다" 
라는 표현이 아이들 감성에는 더 적절한 거 같다.

 


준석이는 점수가 나쁜 친구들에게만 비밀을 알려주고 함께 모여 공부를 했는데,
놀랍게도 준석이 반 아이들은 모두 시험을 잘 봤다.
100점 받은 아이들이 수두룩, 대체 어찌된 일일까? 
준석이와 친구들은 그래도 의리와 우정을 아는 녀석들이라, 시험괴물을 만든 어른들보다 낫다.^^ 

 


이 책을 읽고 아이들이 공감 백배라면, 엄마들은 살짝 반성의 시간을 갖게 되는 책이다.
아이들한테 시험 잘보게 공부만 하라고 닥달하는 엄마가 되지도 말고,
엄마는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했다고 뻥치지도 말자.ㅋㅋ
아이들 스스로 공부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계기도 만들어주고, 
아이가 무얼 좋아하고 어떤 소질이 있는지 찾아내도록 지켜보는 엄마로 거듭나야 할 거 같다.  

대체로 시험 성적이 좋은 아이들은 시험을 괴물로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면 부모들의 칭찬과 격려, 그리고 두둑한 포상이 주어지기 때문에... 
성적이 좋으면 모든 게 용서된다는 말이 있다.
과연 부정한 방법을 써서라도 시험 성적을 잘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이 책은 아이들이 시험 괴물을 이겨낼 방법을 스스로 깨닫게 한다.  

시간투시기를 함부로 이용했다는 죄 때문에 시간 경찰과 같이 미래의 감옥으로 간 3학년 2반 친구들은 어떻게 됐을까?
책이 끝나고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동화로 1.2학년 어린이도 재밌게 읽었다.

우리나라 교육정책은 시험 괴물이 없는 세상을 만들수는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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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0(금) 광주대, 유은실 작가 강연회
우리 동네 미자 씨 낮은산 작은숲 12
유은실 지음, 장경혜 그림 / 낮은산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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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돈많고 잘난 사람도 많지만, 그들에게 인간적인 따뜻함을 발견하거나 뭉클한 감동을 받기는 어렵다. 어쩌면 잘난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쓰는 낱말의 개념조차 다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유유상종,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을 확인시키듯 사람들은 대부분 끼리끼리 논다. 잘난 사람들의 세계에선 그들만의 언어와 개념으로 소통될테니 불편함도 없을 것이다.  

유은실 작가는 잘난 사람을 제쳐두고, 실패하고 찌질한 인생의 미자씨를 주연으로 발탁했다. 우리의 미자 씨는 빚만 잔뜩 지고 마을에 들어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아가씨지만 아줌마로 불린다. 마을 사람 누구도 미자 씨를 도와주거나 잔치에 부르지도 않는다. 그러나 넉살 좋은 미자 씨는 제발로 와서 음식을 잔뜩 먹고 간다. 가끔은 동네 아이들 아이스크림이랑 과자도 뺏어 먹는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이랑 돈을 몽땅 잃어버린 뒤부터, 먹고 싶은 걸 참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미자 씨도 밤이 되면 하루를 돌아보며 슬픔에 잠기거나 훌쩍훌쩍 우는 보통 사람이다. 미자 씨가 가진 게 없다고 해서 감정조차 없는 건 아니다.

주연을 빛나게 할 조연으론, 부모의 이혼으로 큰집에 얹혀 사는 5학년 성지를 내세웠다. 성지는 미자 씨를 주연답게 할 탁월한 조연이다. 동네 사람들은 아쉬우면 미자 씨를 불러 일을 시키지만 뒤에선 흉을 보는, 보통 사람인 우리네와 별반 다르지 않다. 성지 역시 미자 씨를 귀찮아하며 불퉁거리고 투덕투덕 싸우지만, 자기보다 더 외롭고 가난한 미자 씨가 있어 가끔은 위안을 받는다.   

<우리 동네 미자 씨>는 세 개의 단편이 하나로 꿰어지는 연작 형식의 동화집이다. 좋은 일을 하고 사우나에서 쓰는 치약을 60개나 얻은 <미자 씨의 선물 상자> 아픈 미자씨를 위해 부식차 아저씨가 준 <동태 두 마리> 늙어 농사일도 못하게 돼 딸네로 살러가는 순례 할머니가 주고 간 <낡아 빠진 여우 목도리>까지, 세 개의 이야기는 우리 동네 미자 씨의 인생을 영화처럼 펼쳐낸다. 미자 씨와 성지의 대화는 짠하면서도 웃음을 짓게 되고, 실실 웃다가도 가슴이 촉촉해지는 잔잔한 감동이 있다.  

작가 후기에 '내 안에 미자 씨가 있다'고 고백한 유은실 작가처럼, 우리 안에도 순수하고 외로운 미자 씨가 있으면 좋겠다. 가진 것이 없어도 슬프지 않은 미자 씨, 보통보다 못해도 보통이라고 생각할 줄 아는 미자 씨,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가슴이 콩닥거리는 미자 씨, 좋아하는 사람이 이미 임자 있는 몸이라 엉엉 울어버리는 미자 씨의 그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있으면 좋겠다.  

빙충맞은 미자 씨의 리얼리티를 100% 살린 장경혜의 삽화와 유은실 작가의 내공이 느껴지는 우리 동네 미자 씨가 참 좋다. 어린이와 같이 어른들이 읽어야 할 동화집이다. 지금 외로운 당신, 우리 동네 미자 씨랑 친구 하실래요? 살며시 손 내밀어 이 책을 건네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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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사이 2010-12-10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면서 저도 내 안에 있는 미자씨를 만나게 될까요?
오늘, 유은실 작가님의 강연회에 참석하시는 건가요? ^^

순오기 2010-12-13 18:50   좋아요 0 | URL
우리 모두 내 안에 미자씨를 갖고 있는 듯...
강연 끝나고 뒤풀이까지 참여했어요.^^

같은하늘 2010-12-13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은실 작가 강연회는 다녀오셨나요?
사람 사는 이야기가 담긴 이 책 봐야겠어요.

순오기 2010-12-13 18:50   좋아요 0 | URL
가슴 아픈 이야기도 있었지만 강연회는 참 좋았어요~ ^^
 
여기는 곰배령, 꽃비가 내립니다 - 세쌍둥이와 함께 보낸 설피밭 17년
이하영 지음 / 효형출판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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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인제군 점봉산 자락, 한 해의 절반이 겨울인 곳 곰배령, 젊은 나이에 17개월의 세쌍둥이를 데리고 백두대간의 산자락에 통나무 집을 짓고 들어가 17년을 산 이하영씨의 에세이다. 도시의 욕망을 모두 떨쳐버리고 조용히 산골에 묻혀 사는 생활이 쉽지 않을 거 같은데, 저자는 참 열심히 즐기면서 살았다. 펜션을 지어 민박을 하고, 벌을 키워 꿀을 따고 설피밭에 온갖 채소를 심고 약초도 캐는 만능 아줌마다. 세쌍둥이만으로도 일에 치이련만 자청해서 몸이 고될 정도의 일을 하는 걸 보고 놀랐다.  


세 쌍둥이네가 산골에 들어갈 때 빈손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다. 1994년 평당 몇 천원이던 땅을 2만원이 넘는 가격으로 4200평을 샀으니 큰돈이다. 통나무집을 지으면서도 친정에서 유산을 받아 보탰다고 나오지만, 사는 동안 경제적인 여유는 없는 걸로 짐작된다. 우리도 1991년에 남평에 시골집을 사려고 돌아봤는데, 이미 몇 번의 전매를 거쳐 값이 오를대로 올라 우리 능력으론 어림 없었다. 더구나 시골생활을 꿈꾸지 않는 나는 별관심이 없었고, 아버님은 내 표정에서 눈치를 챘는지 "민주 에미 여기다 두면 안 산다고 가버리겠다."는 말로 남편의 욕망을 가볍게 제압했다.^^


세쌍둥이는 자연과 더불어 예쁘게 자라며 사는 법을 배웠고, 이것 저것 자청해서 엄마를 돕는 바른 아이들이다. 유치원이나 학원은 다녀본 적도 없고 학교만 다니지만, '어려서 제대로 놀아봐야 커서도 제대로 살게 된다'고 믿는 엄마의 말처럼 잘 자랐다. 김장을 준비하면서도 아이들을 깨워 새벽에 유성을 보러 가는 멋진 엄마, 이것저것 배우는 엄마를 보며 '불가능이 없어 뭐든 해보는 엄마가 좋다' 아이들이 참 행복해 보인다. 해야만 하는 일도 하고, 하고 싶은 일도 하고 사는 자신을 스스로 만족해 하는 엄마가 멋있다. 나이든 어른들과 자연에게서 배우는 삶의 지혜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감동적이다.      

 

"설렁설렁 두 번 김을 맨 밭의 작물은 먹게 되지만, 꼼꼼하게 한 번 김을 맨 밭 작물은 못 먹는다."  
  함께 콩을 심어주시던 같은 마을 수환이 할머니 말씀을 되새긴다. 밭에 나와 김을 매어보니 그 말씀을 비로소 알아듣겠다. 작물이 들은 밭에 김을 매주는 것은 오로지 풀을 없애기 위함이 아니었다. 작물에 햇볕이 들게 하기 위해 어는 만큼씩 풀을 치워주려는 것이다. 풀 속에 갇힌 작물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설렁설렁 큰 그늘을 없애주며 나는 신바람이 나기 시작한다. 작물이 풀보다 키가 크면 그뿐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작물을 햇볕 속에 길어 올리는 내 손길이 경쾌한 춤사위를 짓는다.(60쪽)
 

 

나랑 동년배 같은데 이대출신이라 그런가(^^) 글을 참 잘 썼다. 과장하거나 꾸미지 않은 소박한 문장이 술술 읽히면서도 곰배령을 아름답고 맛깔나게 그려내, 나도 그곳에서 살았으면 싶은 마음이 절로 들게 한다. 이웃들과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듯 잔잔하고, 때론 수선스럽게 수다를 떠는 것 같은 문장이다.    
  

내 유년기의 경험으로 농촌생활은 고단한 현실로 각인됐을 뿐이다. 한가하고 여유로울 짬이 없이 눈뜨면 밭에 나가 일하고 해가 져야 돌아오는 부모님을 보며 자랐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는 농번기면 아이들도 놀 시간이 없었다. 콩밭을 매고 보리를 베었으며 타작마당에 튄 콩 한알도 쥐들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주워야 했다. 더구나 누에를 키웠던 우리집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뽕밭으로 달려가 뽕잎을 따오는게 우리들의 일상이었다. 농사는 보통 부지런하지 않으면 소출이 달랐으니, 농촌 사람들이 게으름을 부리는 일은 용납되지 않았다. 이런 경험으로 꿈속에서라도 농사짓고 사는 삶을 꿈꾸지 않았다. 곰배령 산골이라고 다르지 않은 것이 무언가를 가꾸고 키우는 생활은 부지런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도시와 같은 욕망을 욕망하지 않으며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사는 그녀의 삶이 아름다운 이유이기도 하다.  


농산물을 특별히 맛있게 키워내는 복녀씨, 김장을 같이 담그는 이웃들, 꽃과 나무와 약초나 동물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없는 이웃들에게 배우는 지식과 지혜도 놀랍다. 가족 뿐 아니라 민박을 든 손님들을 위해 채소와 나물을 채취하여 손수 밑반찬을 장만하는 모습은 생활인의 향기가 느껴졌다. 곰배령 사람들의 따뜻한 인정과 서로 돕는 모습은 사람으로서 갖춰야 기본적인 모습인데도 감동하는 건 도시의 삶이 그런 모습과 멀기 때문이리라. 아이들이 너무나 좋아한 설피축제는 그야말로 도시인이 맛볼 수 없는 환타지였다.  

하염없이 눈이 내린다는 이 고장은 어느 집이나 식구 수대로 설피라 불리는 덧신을 마련해 두어야 긴 겨울 동안 이웃 마실이라도 다닐 수 있다 해서 '설피밭'이라 이름 지어졌단다. 설피밭. 문득 들어서는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이 지명이 산세나 유래, 전설이나 신화가 아닌 오로지 생존의 한 부분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230쪽) 


곰배령에서의 삶을 아름답게 그려냈지만 그녀라고 행복하기만 했을까, 도시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도 절절히 배어 있다. 초반에 통나무 집을 짓던 남편은 이후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헤어진 듯. 자신의 사생활보다는 곰배령의 자연 예찬과 이웃들 이야기가 주를 이루기에 어디에도 남편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맏이로서 혼자가 된 자신을 보이기 싫어 친정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녀는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즐길 줄 안다. 자기의 시간을 가질 수 없었던 바쁜 삶에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쪼갠다. 새벽에 산길을 올라 자연과 교감을 나누며 숲에 취하는 그녀는 인생을 즐길 줄 알았다. 너무 심취한 나머지 그대로 사라지고 싶은 유혹도 느끼지만,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인이었다. 몹시 추운 겨울이면 '봄이 오면 미련없이 떠나리라' 마음속으로 수없이 이삿짐을 싸고 또 쌌지만, 햇살이 따뜻해지면 그 마음은 아침 안개처럼 홀연히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나밖에 모르던 가슴이 조금씩 열리고 아름답고 장엄한 계절의 순환, 봄을 눈물로 맞이하면서 설피밭의 겨울은 그녀의 영혼에도 나이테를 새겨주었다. 봄이 되면 자기의 몸을 데리고 들에 나가 꽃에게처럼 잎새에게처럼 봄 햇살을 가득 부어주곤 했다는 그녀의 삶이 경외롭다.  


꽃은 참 예쁘다. 예쁘지 않은 꽃은 이 세상에 없다.(219쪽) 눈 속에서 피어나는 복수초를 시작으로 철따라 자태를 뽐내던 나무들과 꽃들은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는 한 마디로 족하다. '사느라 무척 바빴던 나, 사느라 주야로 동동거리던 나, 사느라 정신없었던 나, 사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던 나'의 고단함을 위로해주고 사랑해주며, 인정해줄 사람도 바로 나 자신이라는 깨달음은 그녀의 삶에 평화의 강이 흐르고 꽃비가 내리니 아름다운 인생이다!!
 

에세이는 한 번 읽으면 다시 보지 않아서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너무나 좋아서 선물도 하고 내 책도 구입했다. 곁에 두고 그녀의 삶을 엿보고 싶은 책이다. 언젠가 곰배령 설피마을도 찾아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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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하늘 2010-08-10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만에 알라딘서재에 접속하는지 몰라요.^^ 요즘 아이들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끊임 없이 올라오는 리뷰와 수 많은 글들을 언제 다 볼 수 있을까요? ㅎㅎㅎ
오기 언니의 2관왕도 축하드리옵니다~~~

순오기 2010-08-10 22:54   좋아요 0 | URL
밀린 글은 다 읽기 어렵죠~ 대충 건너뛰어요.^^
2관왕은 꽤 많더라고요.

stella.K 2010-08-11 10:46   좋아요 0 | URL
저는 1관왕이어요.ㅜ

양철나무꾼 2010-08-10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분 얘기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본 적 있어요.
남편과 이혼하고 세쌍둥이를 혼자 키운다죠~

이 분의 삶을 보면서 참 지난하다 싶어서,
울음을 억누르려고 침을 꼭꼭 눌러 삼켜가며 봤었습니다.

참 좋네요~

순오기 2010-08-10 22:55   좋아요 0 | URL
다큐에 나왔다는데 못 봤어요.
세 쌍둥이가 잘 자랐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 있으니 괜찮은 인생이다 싶어요.

라로 2010-08-11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책 저도 사봐야겠어요!!*.*

2010-08-11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꾸는섬 2010-08-11 0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기자기 예쁜 이야기에요. 근데 세쌍둥이 키우기 정말 힘들것 같아요.
캡쳐하신 글들도 참 좋네요.^^

순오기 2010-08-11 21:42   좋아요 0 | URL
세 쌍둥이 키우는 거 정말 하루가 짧을 거 같은데
이분은 다른 일도 엄청 많이 하며 살았어요~

hnine 2010-08-11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서평단 도서로 받아서 읽었던 책이어요. 다 읽고는 우리 아파트 윗층 애기 엄마 읽으라고 줬는데...^^
이 분 홈페이지에도 몇번 들어가봤는데 홍천, 한번 가보기가 만만치 않은 곳이라서요.
책에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단한 삶이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세월이 아주 잘 정제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순오기 2010-08-11 21:44   좋아요 0 | URL
자기 삶을 되돌아보는 글쓰기는 위로, 혹은 치유의 글쓰기가 됐을 거 같아요.
다 드러내지 않은 속을 생각하며 짠하기도 하고 감동도 되고...

bookJourney 2010-08-11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렇게 맑게 웃기까지 참 고단했을텐데~ 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정말 다부진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도 하구요. ^^
순오기님 이야기를 글로 쓰셔도 참 맛깔나는 글이 나올 것 같은데요~ ^^*

순오기 2010-08-11 21:46   좋아요 0 | URL
그렇죠? 웃는 얼굴 이면을 생각하면 참 고단한 삶이었겠다 싶더라고요.
이 분은 쉰이 돼서 책 냈는데, 난 회갑에나 써 볼까...ㅋㅋ

BRINY 2010-08-11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큐에서 본 기억이 나요. 남평도 땅값이 비싸군요. 그냥 평범한 시골마을 같던데...

순오기 2010-08-11 21:47   좋아요 0 | URL
다큐를 본 분들이 많은가 봐요.
남평 아세요? 드들강 근처였는데~ ^^

프레이야 2010-09-09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곰배령곰배령... 이름도 참 예쁘네요. 기대만땅이에요.^^

순오기 2010-09-09 19:25   좋아요 0 | URL
오~ 프레이야님 댓글이 떠서 당장 달려왔어요.
이 책을 너무너무 좋게 읽어서 혹시 당선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만행구만리 2010-10-11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1살에 처음 가본 설피밭. 그땐 정말 전기도.집들도 없던 바람골이었는데요~~ 지금은 많이 변한걸로 알고 있습니다^^ 십 수년전 조그마한 땅을 구하러 들러 봤을땐 이미 많은 인구가 생겼더군요. 늘~ 꿈꾸는 설피밭 생활, 이제 나이 50 이되서는 그냥 그리움 으로만 가득 하답니다^^ 올 가을엔 꼭 작은 사진기 하나들고 찾아 가야죠~~ 건강 하세요~~
 
최규석 신간 <울기엔 좀 애매한> 대박 기원 이벤트!
울기엔 좀 애매한 사계절 만화가 열전 1
최규석 글.그림 / 사계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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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기엔 좀 애매한>예약 주문으로 저자의 모습을 닮은 사인본을 받았어요.

맨 뒤의 작업 노트를 보고 만화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게 됐어요. 대략의 이야기를 정하고 콘티를 짜고...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학생들 하교 시간에 맞춰 길거리를 배회하며 그들의 복장과 언어를 스캔하고... 수채화로 그리고 싶어 밤잠을 설쳐가며 연습을 했다는데, 100% 손으로 그리고 채색하는 수고가 장난 아니겠어요.

컴퓨터로 작업한 왼쪽의 <대한민국 원주민>과 비교하니 훨씬 부드럽고 입체감에서 차이가 느껴져요. 작업 노트의 연습작보다 엄청 좋아 보여요, 잘 나왔으니 걱정 안해도 될 거 같아요.^^

이 책은 제목처럼 울기에도 좀 애매한 현실이지만, 웃음 코드가 많이 등장하지요. 주인공 강원빈 모자의 요 풍경은 꼭 따라 해보고 싶어요. 우리 아들녀석도 내년에는 고3이 되니까요.ㅋㅋ

지애비를 꼭 닮았다는 만화를 좋아하는 아들을, 미술학원에 보내려고 결심하는 엄마 마음에 감정이입이 됐어요. 착한사람을 위해서 일하는 건 힘들지 않다는 파키스탄 아즘은 '꽃미남'이 아닌 '곧미남' 모자를 쓰고 있지요.ㅋㅋ

처음엔 보온병을 갖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두번째 볼때 눈치채고 아들한테 말했더니
"엄마, 왜 보온병을 갖고 다니겠어? 미술도구잖아!"
하면서 어이없어 했어요. 미술학원도 안 보내본 아줌마가 어찌 알겠어요.ㅋㅋ

기현쌤은 나만 갈궈, 기현 내과...아마도 만화가 '변기현'의 이름이겠죠? 어쩌면 변기현 만화엔 규석외과나 꼴통모과가 등장할지도... 내연의 관계자 외 출입금지, 벌금 백만원.^^
010-2335~ '어, 작가 핸드폰이잖아!' 얼른 저장된 번호 확인했더니 맞더군요.ㅋㅋ

꽃미남 원빈과는 전혀 다른 우리의 주인공 강원빈,
'그냥 사람'이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특성을 설명하는 이 그림은 미술학원 원장쌤인데, 독자는 또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며 웃지요.ㅋㅋ 개그본능에 시달린다(?)는 작가의 웃음코드가 여기저기 감춰져 있어 숨은 그림 찾듯 재미있어요.

악의 화신인양 막 대하는 태섭쌤, 하지만 독설과는 다른 찐한 사랑을 품은 멋쟁이랍니다. 헤어스타일도 변화무쌍한 꽃보다 남자, 작가의 분신 같아요.ㅋㅋ

이혼하고 김밥집을 하며 원빈을 키운 어머니, 이 사진은 눈물코드로 읽혀집니다. 이 그림이 여러번 나오는데 참으로 울기엔 애매한 상황이 벌어지지요.

억울하고 분해서 화를 내야 되는데 '돈도 재능'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원빈, 술집에서 알바하는 은지도 아픔이지요. 돈 있는 자들은 무엇이든 돈으로 다 해결하는데, 생존을 위해 알바를 해야 하는 이네들의 현실이 싸~아 합니다.

완전 필이 꽃힌 그림, 등장인물 중에 유일하게 잘생긴 류은수의 망연자실... 무엇이 그리 힘들까요?

"한달 동안 초코파이만 먹어 봤어요?"
"참치캔 헹군 물에 라면 스프 넣고 끓여 먹어 봤냐?"
"평생 쏠로인 거랑 사귀다 차인 거랑 어떤게 더 비참하냐?"
누가 더 찌질하게 살았는지 내기하듯, 잘 살다 망한 거랑 원래 가난한 거랑 뭐가 더 불쌍하냐는 질문에 뭐라고 답해야 할까요? 하여간 잘 나가는 사람이 없는 찌질한 인생들이지요.

'어떻게든' 되겠지... 대학에 합격하고도 등록금이 없어 포기한 은수, 고단한 현실에 사랑도 피곤하다. 두 곳에서 알바하는 아들의 돈을 빼 써야 했던 엄마의 심정은 또 오죽했을까... 꿈이 없어 다행이라는 은수의 동생, 꿈조차 가질 수 없는 현실의 막막함이라니!!

윈빈과 꼭 닳은 아버지, 고객평가 낮게 나오면 월급을 깎인다고...서비스 오면 꼭 이런 부탁을 하더군요. 이렇게 일해도 자식 등록금 절반도 낼 수 없다니, 남의 일 같지 않아 안타까워요.

유일하게 부잣집 딸인 지현, 친구들의 비난에 눈물 흘리며 뛰쳐 나와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이런 위로와 따뜻함이 좋아요.
원빈과 은수와 친구들의 삶은, 울기엔 좀 애매한 상황들에 사회를 보는 날카로운 시선이 곳곳에 담겨 있어요.

울고 싶은 사람이 어디 십대뿐이겠습니까마는, 맘 놓고 울수도 없이 애매하게 만드는 사회와 어른들에게 어떻게 할까요? 돈 있는 사람만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어 가는 놈들에게 욕이라도 퍼붓든지...
김용철 변호사 강연회에서 김상봉 교수님이 말씀하시길,
"지금 이대로는 어떤 답도 나오지 않는다, 젊은이들이 스펙을 쌓아도 취업할 곳이 없으니 사회를 바꾸기 위해 행동하라"고 하더군요. 사회를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면 희망을 가져도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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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08-09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요번에 시골 내려가서 아버님,어머님 일할 때 쓰는 모자 보고 배꼽을 잡고 웃었어요~
농약회사나 비료회사에서 사은품으로 나눠준것 같은데,
남자 스포츠캡엔 '일꾼',여자 햇볕가리는 챙 넓은 모자엔 '새색시'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저도 '곧미남'모자,류은수의 '망연자실'참 좋았어요~
님의 리뷰로 다시 보니...새로운 걸요~^^

순오기 2010-08-10 00:19   좋아요 0 | URL
처음엔 내용 보고, 두번째는 그림에 집중하니까 별별게 다 보이더군요.ㅋㅋ
곧미남 모자가 수능 보는 날 엿주는 그림에서 '젊은이' 모자로 바뀌었어요.^^
결정적인 장면을 다 공개하기가 그래서 몇개는 뺐어요.ㅋㅋ

꿈꾸는섬 2010-08-09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역시 순오기님~~
포토리뷰로 올리니 더 좋긴 하네요.
요샌 어째 이리 게을러졌는지 모르겠어요.ㅠ.ㅠ

순오기 2010-08-10 00:20   좋아요 0 | URL
이거 편집하느라고 시간이 엄청 걸렸어요.ㅋㅋ
그러다보니 감상보다는 내용 소개에 치중한...

희망찬샘 2010-08-10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같이 올라오면 보는 사람은 좋은데, 작업하기는 힘들더라구요. 그래도 순오기님은 언제나 힘들어도 서비스 정신(?!)이 투철하세요. 순오기님 서재는 알찬 정보로 가득가득^^ 멋진 공간입니다.

순오기 2010-08-10 16:58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냥 찍어 올리는게 아니라 요렇게 편집까지 하려면 시간 엄청 걸려요. 그놈의 투철한 서비스 정신 때문에~ㅋㅋㅋ

같은하늘 2010-08-13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섭쌤은 딱~~ 작가의 모습이예요.ㅎㅎㅎ

순오기 2010-08-13 20:42   좋아요 0 | URL
그쵸~ 태섭쌤은 최규석!ㅋㅋ
 
프라하의 소녀시대 지식여행자 1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내게 '프라하'는 까를 다리의 로맨스나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이 떠오르는 지명이다. 거기에 '소녀시대'가 붙었으니 당연히 프라하 소녀들의 로맨스 쯤으로 짐작했었다. 그러나 이 책은 프라하의 연인이나 까를 다리의 로맨스와는 거리가 멀다. 당시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였지만, 로맨스 보다 찐한 소녀들의 우정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펼쳐진다. 프라하 소녀들의 발랄과 순수한 호기심에 동감하며, 아득하게 멀어진 나의 소녀시대를 추억하는 부작용이 따른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닌 논픽션으로, 2002년 제 33회 '오이 소이치 논픽션상'을 받았다. 요네하라 마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다른 책보다 먼저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마리의 소녀시대 성장 배경과 체험 뿐 아니라 당시 동유럽 정세와 공산주의의 부침을 알려주는 세계사 공부도 시켜줘, 반공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졌던 내 유년기 학습효과-공산주의자는 뿔난 도깨비 쯤으로 생각했던-를 비워내는 역할도 했다. 공산주의자들도 우리네와 다르지 않은 성정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발견했으니까.^^


  내가 엄마의 태중에 있던 1960년 1월, 요네하라 마리는 프라하 소비에트 학교에서 소녀시대를 시작한다. 아버지가 일본 공산당 대표로 <평화와 사회주의 제문제> 편집위원으로 프라하로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마리는 체코 학교가 아닌 외국 공산당 간부 자녀 전용 러시아 학교에 다녔다. 처음엔 마리도 러시아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1964년 11월까지 5년의 공부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갈 땐 완벽한 러시아어를 구사했단다. 그 덕분에 훗날 동시통역가로 눈부신 활약을 했고.  


<프라하의 친구들, 리차(앞줄 맨 오른쪽) 아냐(뒷줄 맨 오른쪽)
야스나(뒷줄 왼쪽 두번째) 요네하라 마리(앞줄 왼쪽 두번째)>
  

  프라하 소비에트 학교에서 만났던 세 친구- 그리스인 리차, 루마니아인 아냐, 유고슬라비아인 야스나와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따뜻한 인간애를 풀어놓았다. 소녀시대를 함께 지낸 친구들의 우정과 추억을 진술하는 마리는 참 행복해 보였다. 동유럽 공산세력의 몰락을 접하며 친구들의 안부가 걱정된 마리는 1995년 11월, 추억의 노트를 들고 불원천리 프라하를 찾는다. 간간이 편지를 주고 받다 단절되고, 헤어진지 30년만에 친구를 찾아 나선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마흔이 넘으면 어린시절 친구를 찾게 된다. 마흔은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키우느라 정신없는 세월을 보내다 아이들로부터 한 숨 돌리는 때이기도 하다. 우리도 마흔이 넘어 초등 친구를 찾아 동창회와 반창회로 모였고,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들까지 만나게 됐다.   


  우리의 꿈이 자라고 추억이 어린 고향과 서울에서 번갈아 만났고, 인천, 논산, 광주, 수원, 대전 등을 돌며 희미한 옛사랑을 떠올리는 유년의 추억여행은 즐거웠다. 마리도 인생의 연륜이 깊어진 나이에 뜨거운 포옹과 감격으로 친구를 다시 만났다. 마리의 추억여행은 마치 내 친구를 만나는 것 같은 감정이입으로 눈시울이 뜨거웠다. 나도 초등 단짝 금봉이를 30년 만에 만나고, 둘만의 오붓한 만남을 위해 2002년 부산으로 찾아갔었다. 영도 바닷가 그녀의 아파트에서 밤새워 추억을 얘기하다, 바다에서 불쑥 솟아오르던 찬란한 태양을 맞이하던 아침은 참으로 황홀했으니 리차가 자랑하던 그리스 바다가 부럽지 않았다.^^     

그건 말야. 정말 쨍하고 깨질 듯이 파래. 단 한 점의 구름도 없는 새파란 하늘이. 또 새파란 바다에 비쳐서 한도 끝도 없이 펼쳐지는 거야. 파도는 방금 빨아 넌 냅킨처럼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고, 정말이지 마리한테도 보여주고 싶어.(44쪽)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 시절 사진과 추억의 노트(일본에 돌아갈 날이 잡힌 한 달 전부터 추억의 노트를 만들어 반에 돌렸다. 반 친구들은 거기에 각자의 메시지를 써 주었다)  

  1974년 4월 중학교 2학년, 충청도 시골에서 인천으로 전학한 내게도 마리의 '추억 노트'에 버금가는 편지 꾸러미가 있다. K군 P군의 핑크빛 연서를 비롯해 빛바랜 친구들의 편지는 마르지 않는 추억의 보물창고다. 2001년 아이러브스쿨에 동아리방을 개설하고 저녁마다 출석해 친구들과 소통하던 때, 빛바랜 편지를 개봉해 전국을 들썩이게 했던 또 하나의 추억이 있다. 편지 공개 덕분에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에서 만난 후 소식이 끊겼던, 뉴저지에 사는 중학교 단짝 친구를 찾아 인터넷의 위력을 실감했었고, LA에 사는 머슴아 친구가 10년 후에나 공개하라며 호주 여행길에 보낸 엽서도 담겨 있다. 이제 곧 개봉해도 되는 10년이 다 돼간다.^^ 이런 에피소드 덕분에 마리의 추억 노트에 공감하고, 그녀의 추억 이야기에 완전 몰입해 같이 울고 웃었다.
 

  그리스인 리차는 소녀들의 성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빠꼼이였고, 수학을 못해 피타고라스와 유클리드를 선조로 둔 그리스인 후예가 맞냐는 조롱을 받아도, 위대한 문명에서 태어난 것도 골치 아프다며 쿨하다. 나도 수학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리차의 몸무게 에피소드는 정말 배꼽을 잡게 했다.^^  리차는 특혜가 아니라 자기 실력으로 의과대학을 나와 독일 나우하임에서 이주노동자들의 건강을 돌보는 의사가 되었다. 그리스 출신의 노동자 2세와 결혼해 다운증후군 큰아들과 작은 아들을 키우지만, 다운증후군 아들은 보통 애들보다 몇 배 더 행복하게 해주는 천사라고 말한다. 그리스 하늘을 그리워하면서도 돌아가지 못함을 그리스 본국 방송을 보는 것으로 대신하는 듯. 미체스 오빠가 불러온 가족의 불행은 그동안 수많은 여자들을 울려서 그 벌을 받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쿨한 리차는 휴머니즘이 살아 있는 예전 그대로였다.  


  루마니아인 아냐는 차우셰스쿠 정권의 고위직에 있는 아버지 덕에 특권을 누리며 유별난 애국심을 가진 양 행동했지만, 그녀는 능수능란한 거짓말쟁이였다. 특혜를 당연시 여기는 공산당 고위직들의 행태는, 우리나라에서도 면면이 이어져온 지도자들의 행태와 다르지 않다. 그들의 공산주의 사상은 삶과 동떨어져 있었다. 이런 특혜를 거부하고 가난함을 택한 아냐의 오빠가 정직하고 인간적이고다. 영국인에서 공부하고 영국인과 결혼해 런던에 살면서, 러시아어를 다 잊고 유창한 영어를 쓰는 아냐의 루마니아 사랑은 속절없다. 자신의 삶을 위해 스스로 거짓을 택하는 아냐는, 속좁은 민족주의가 세계를 불행하게 한다고 말한다. 마리는 그런 아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마음의 방을 넓힌다.   


  일본의 판화가 호쿠사이를 숭배하며 그림에 재주 있고 공부 잘하고, 발표도 완벽했던 유고슬라비아의 야스나는 마리가 가장 사랑한 친구였다. 외교관의 정석대로 행동하는 아버지와 자유로운 어머니에게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다. 아버지가 중학교를 졸업한 어린 나이에 파르티잔이 되게 한 보그다노비치 선생님의 이야는, 진정으로 학생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감동이다. 야스나를 만나기까지의 과정은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소박하고 심성 고운 야스나는 능통한 언어실력으로 공무원이 되었지만, 유고슬라비아 무슬림이란 이유로 따돌림을 당한 아픔에 소리없이 온몸으로 우는 야스나를 꼭 안아줄 뿐이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공기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야스나, 아버지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마지막 대통령이었지만, 그들은 어떤 특혜를 누리지 않았다. 아냐네 가족의 귀족같은 생활과 완전히 대비되는 모습이다. 야스나의 아버지는 공습의 위험속에서도 조국을 떠나지 않은 진정한 지도자였다.   

(1995년 11월, 추억의 노트를 들고 프라하 시절 친구들을 찾아나서다)


  동유럽 이데올로기의 부침에 따라 자신의 삶을 뜻대로 운행할 수 없었던 프라하의 소녀들. 시대적 흐름이나 역사적 사건이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헤아려보는 마리와 친구들의 이야기는, 하얀 도시 베오그라드의 폭격을 진술하며 막을 내린다. 14세기 발칸 연합군이 오스만투르크군에 패할 때 '하얀 도시'라 이름 붙인 터키 병사들과 달리, '하얀 도시'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지 않은 미국과 나토 군의 폭격기는 1993년 3월, 베오그라드시에 폭격을 퍼부었다.      

급격히 내려간 기온 때문에 강의 수온과 차이가 있어, 강의 수면에서는 우유빛 안개가 피어 올랐다. 하얀 안개에 휩싸인 도시는 때마침 밝아온 태양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그 아름다움에 터키 병사들은 전의를 잃고 그날의 습격은 중지되었다. 이리하여 이 도시는 '하얀 도시'라 불리게 되었다.(178쪽)

 
  고향을 떠나 봐야 애향심이 생기고, 나라를 떠나 봐야 애국심이 생긴다고 한다. 요하네라 마리가 첫머리에 적은 글과 같은 마인드가 우리에겐 부족하다. 툭하면 GNP와 OECD 순위를 들먹이지만, 세계인과 더불어 사는 세상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 같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존중하고, 이주 노동자와 외국인 신부들을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는 부끄러운 자화상은 바꿔야 할 때다. 마리 여사가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통해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다른 나라와 문화를 이해하려고 애를 쓰고 존중하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때의 내셔널리즘 체험은 내게 이런 걸 가르쳐주었다. 다른 나라, 다른 문화, 다른 나라 사람을 접하고서야 사람은 자기를 자기답게 하고, 타인과 다른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려고 애를 쓴다는 사실.  


*2006년 5월 25일, 56세에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난 요네하라 마리를 기억하고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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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7-27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못 읽어본 책인데요....
그런데 언니두 등록하고 추가 수정하셨어요? 저두 시간이 모자라서 등록 우선하구, 이제야 추가 수정 완료를... 아하하.

순오기 2010-07-27 21:32   좋아요 0 | URL
제가 워낙 게으름의 극치에 이르는 사람이라 항상 마감날 마감시간에 동동 거리죠.ㅋㅋ
그전에는 어떻게 써야 하나~ 생각이 안 나서요.ㅠㅠ

라로 2010-07-27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도 마리여사의매력에 빠지신거?????ㅎㅎㅎ

순오기 2010-07-27 21:33   좋아요 0 | URL
미식견문록하고 요거만 읽었지만, 나는 이 책이 더 좋았어요.^^
대단한 책은 한 두개씩 읽고 있는 중인데...워낙 두꺼워서 언제 다 볼려나?ㅋㅋ

양철나무꾼 2010-07-27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리홀릭,마리 폐인이 여럿 등장했는 걸요~^^

순오기 2010-07-27 21:33   좋아요 0 | URL
하하~ 달랑 두 권만 읽고 마리 홀릭이나 폐인이라기엔 민망하지만
마리 여사 정말 대단한 분이에요!^^

글샘 2010-07-27 0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마리여사 폐인 원조였던 저에게는 이번 리뷰대회가 더이상 좋을 수 없답니다.
이미 올린 리뷰를 다시 올리진 않았지만, 남의 리뷰를 읽는 일도 마리 여사 책 읽는 이상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
순오기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역시 사람은 자꾸 다른 나라 다녀 봐야, 객관적 시선을 가질 수 있는 모양이에요.

순오기 2010-07-27 21:35   좋아요 0 | URL
글샘님은 마리 폐인 원조셨군요.^^
저는 이제야 마리여사에게 주목하는 후발주자에요.
다른 나라를 많이 다녀보긴 어려우니 책으로 대신합니다.ㅋㅋ

건조기후 2010-07-27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책 너무 재밌고 좋았어요. 혼자 업돼서 바로 냉큼ㅋ 리뷰도 썼는데 결국 쓰다 말아서 임시저장만 돼있다는..ㅎ 시간되는대로 마저 쓰고 올려야겠어요.
저도 공기가 되고 싶다던 야스나의 말이 정말 먹먹했어요. 자기가 보스니아 무슬림인지 전혀 자각도 없는 소녀의 삶이 바로 그 이유때문에 위협당해야 한다는 것.. 정말 너무 슬프고 어리석은 일이에요.

순오기 2010-07-27 21:38   좋아요 0 | URL
헉~ 왜 임시저장만 하셨어요? 어여~ 올려보세요!^^
시대의 흐름에 희생되는 세대들이 있지요.
우리나라는 58년 개띠들이 박지만 때문에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죠.^^
공기가 되고 싶은 야스나...참 가슴이 아팠어요.ㅠㅠ

루체오페르 2010-07-27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데올로기 안에서의 사람의 인생역정...여러 생각이 듭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순오기 2010-07-27 21:39   좋아요 0 | URL
인생역정에 이데올로기 만큼 큰 영향을 끼치는 것도 드물겠죠.
읽으면서 참 좋았는데 리뷰를 쓰는 일은 역시 어려워서, 느낀만큼 풀어내지 못했네요.ㅜㅜ

마노아 2010-07-27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네하라 마리의 책을 많이 읽지 못했지만 이 책이 가장 좋았어요. 뭉클하기도 했고 씁쓸하기도 했고요. 참 다재다능한 분이었는데 너무 일찍 세상을 뜨셨어요.ㅜ.ㅜ

순오기 2010-07-27 22:14   좋아요 0 | URL
아~ 마노아님도 이 책 좋았군요.
나는 미식견문록과 요것만 봤으니 다른 책과 비교할 순 없어서...
그러게요, 좀 더 살았다면 독자에게도 좋았을텐데...

자하(紫霞) 2010-07-28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의 리뷰를 보니 이 책 관심이 생기네요~
어린 시절 친구들과의 추억은 기억 저편에 저장되어있어요.
가끔 들쳐 볼 수 있게 말이죠~ㅎㅎ

순오기 2010-07-28 15:30   좋아요 0 | URL
기억 저편에 저장된 어린시절 친구들과의 추억을 풀어보세요.
혼자만 들추지 말고...^^

비로그인 2010-07-28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닷!

순오기 2010-07-28 15:30   좋아요 0 | URL
마가님, 이거닷!ㅋㅋ
요네하라 마리 보세요,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