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예뻤을 때
공선옥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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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서 가장 예뻤을 때는 언제고, 그때 나는 무엇을 했나? 삶을 뒤돌아보며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한 독서였다.   

80년 5월, 광주 사태로 불리던 그 시대를 겪은 고등학생 진만이, 승규, 만영이, 태용이, 승희, 정신이, 수경이, 경애, 그리고 화자인 해금이까지 '아홉 송이 수선화'들과 그네 가족들의 이야기다. 딸 다섯 중 네째인 해금은 공부를 잘하거나 인물이 빼어나지 도 않고 특별한 재주도 없는 평범한 아이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교편을 잡았던 아버지는 학교를 박차고 나와 학원 강사를 전전하다 텃밭을 가꾸는 농부로 돌아가고, 엄마는 다섯 딸들의 유난스런 일에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범했다. 그저 평범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살던 해금이와 친구들은 광주의 5월을 겪으며 인생이 꼬인다.
 

5.18이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그네들의 삶은 슬픔과 아픔이었다. 80년 5월 기독병원으로 헌혈하러 가던 경애가 총탄에 맞아 죽었다. 엄청난 일이 벌어졌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사는 사람들이 이상해서 도저히 숨 쉴 수 없이 가슴이 아프던 수경이는 목욕탕에서 손목을 그었다.   

 "세상 사람들은 왜 아무렇지 않지? 아무렇지 않은 것이 나는 너무 이상해.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혹시 말이야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물에 뭐든지 빨리 잊어먹게 하는 약이 섞여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누군가 공기 중에 누가 죽었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살아가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약품을 살포한 것은 아닐까? 나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밥먹고 웃고 결혼하고 사랑하고 애 낳고 그러는 게 이상해..... "(76쪽) 

"미안해. 수경아. 미안해. 화내서 미안하고, 웃어서 미안하고, 밥 잘 먹고, 잠 잘 자서 미안해....."

"왜, 왜. 니가 미안한 건데?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사람이 미안하다고 하는 건데? 진짜 미안해야 할 사람들은 가만있는데에. 왜, 왜 그러는 건데에. 내가 말했잖아, 난 단지 이상할 뿐이라고. 이상하고 이상해서 숨쉬기가 힘들 뿐이야. 나도 숨을 크게 쉬며 살고 싶은데 그게 잘 되지 않아. 숨을 크게 쉬려면 가슴이 너무 아파. 여기 이 가슴 한가운데가 터져버릴 것만 같단 말야."(77쪽)

 
80년 5월을 겪은 아홉 송이 수선화들은 가장 예뻐야 할 20대를 아프고 힘들게 견뎠다. 엄청난 폭력에 침묵하는 세상과 사람들을 견딜 수 없어 저수지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한 수경이, 아버지가 새여자를 들이자 승희는 가출하고, 승희 하숙집에서 딸을 기다리던 엄마는 뇌출혈로 싸늘한 죽엄이 됐다. 승희는 아빠도 없는 아이를 낳았고, 승희를 좋아했던 진만이는 방황한다. 만영이는 승희의 아들 승춘이를 돌보며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번다. 정신은 대학을 다니다가 노동자로 위장취업을 하고, 해금이는 대학에 떨어지고 학원에 다니다가 고모의 의상실에서 일을 배운다. 작은아버지 제재소에서 만난 환이와 수줍은 연애를 시작하지만 가난한 연인들은 밤새 골목길을 걸을 뿐이다.  

 
5월 도청의 마지막 밤 항전파와 투항파로 갈린 환의 형들은 원수처럼 싸우고,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절망한 환은 손목을 긋는다. 환은 목숨을 건지지만 다시는 웃지 않고 해금의 손을 잡지도 않는다. 해금은 환을 떠나 서울의 정신에게 가서 방직공장에 취직하지만, 인간을 짐승처럼 대하는 사업장에서 비로소 인간의 존엄을 외친다. 서울대에 간 승규는 정보원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군대로 끌려가 의문사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정신과 해금은 만신창이가 되어 고향으로 내려 온다. 진만은 방황을 끝내고 은행에 취직했고, 승희와 함께 살고 싶은 만영은 여전히 방황한다.  

 
처절하게 아름다운 그네들의 청춘은 아픈 만큼 성숙한 인간애를 보여준다. 80년 5월을 관통한 젊은 그들은 꽃도 피우지 못하고 죄의식과 상처로 얼룩진 청춘을 보냈다. 그 나이에는 자신만 생각하고 이기적으로 살기 쉬운데, 그네들은 세상을 염려하고 친구를 돌보며 고단한 삶을 견뎠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죄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80년 5월 광주의  트라우마를 간직한 채 밥을 벌어야 하는 현실을 감당해야 했다.
 

어머니독서회 중에 가장 나이 많은 예순 여섯 살 왕언니는 스무 살에 결혼해 사남매를 낳아 키우며, 그해 오월엔 신역(광주역) 앞 광주고속 옆에서 공구점을 운영했단다. 그해 오월, 공수부대의 방망이에 맞아 머리가 깨지고 온몸에 피범벅이 된 학생들이 도망쳐오면 샷터를 내리고 그들을 감춰야 했다며 진저리를 쳤다. 세상 사람들은 얼마나 참혹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지금은 다들 잊은 듯이 살고 있다고 말하는 왕언니의 눈가엔 물기가 배어나왔다. 우리도 울컥 눈시울이 뜨거웠던 시간... 가장 예뻤을 나이에 참혹한 현장을 겪었던 그들의 아픔을 없었던 것으로 여기지는 말자. 그해 광주의 5월을, 우리 잊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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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6-08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쉽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질 겁니다.현충일도 안중근 의사 탄생일이 아니냐고 하는 세상이니까요ㅜ.ㅜ

순오기 2011-06-08 09:05   좋아요 0 | URL
그래도 기억해주는 소수가 있다는 걸로 위로를 삼아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