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즐겁다 사계절 1318 문고 67
김이연 지음 / 사계절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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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년생 젊은 작가 김이연의 청소년 소설이다. 요즘 아이들의 언어습관이 배인 톡톡 튀는 문장이 흥미를 끌어당기고, 성장통을 앓는 청소년들의 문제와 게이에 대한 긍정적 이해가 동반된다.   


여중 3학년 이란은 친구 여유미를 따라 음악 수행평가를 위해 카페 파라다이스의 5인조 밴드 '영양실조' 공연에 갔다가, 얼결에 보컬을 맡게 된다. 리더이자 드러머인 도계서씨는, 우람한 체격에 환경단체에서 일하는 서른 다섯 살 아줌마, 기타에 어리버리한 이맹수 아저씨, 베이시스트 박복태는 고등학교 2학년으로 엄청 잘 생겨 여학생들에게 인기짱이지만 손가락으로 코를 파서 아무데나 튕기는 지저분한 인간. 키보드를 맡게 된 여유미는 멋부리기 좋아하고 서두르는 법없이 여유만만하다. 이란은 엄마가 안계시고 신문사 교열부에서 일하는 아빠와 두 살 위인 고딩오빠 락과 같이 산다. 등장인물의 면면을 살펴보면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풍겨 재밌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영양실조'라는 밴드 이름에 걸맞게 뭔가 부실한, 혹은 문제 투성이 사람들 이야기다. 누구나 한두 가지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런 부족함을 서로 채워가며 어울려 사는거지 뭐, 이런 생각도 잠시 엄마의 제삿날 오빠의 충격적인 고백 "저, 게이인 것 같아요."는 이란과 아빠를 완전 공황상태로 몰아넣는다. 왜 안 그렇겠는가?


얼마전에 종영된 드라마 '인생을 아름다워'의 게이 커플에 고운 시선을 보내는 나에게, 막내가 느닷없는 질문을 했었다.
"엄마, 만약에 오빠가 게이라면 어떡할거야?"
"흠, 그건 좀 생각해 봐야겠네. 내 아들이 게이라면 드라마의 태섭이 부모처럼 받아들이긴 쉽지 않을 거 같애."
라고 솔직히 말했는데, 책 속의 이락 아빠는 애써 무시하는 것으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들이 남자 친구와 어우러져 잠든 모습을 보곤 이성을 잃고 보통의 부모와 똑같은 행동을 힌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고 손찌검을 하고, 아들 이락은 집을 나간다.   


밴드활동을 하는 이란과 게이인 오빠 이락, 아내의 빈자리까지 홀로 감당하느라 다른데 눈돌릴 수 없는 아버지의 삶. 뚱뚱했던 초딩시절로 돌아가게 될까봐 지레 겁먹고 다이어트에 올인하는 여유미, 기획사에서의 안 좋은 기억으로 무조건 거부하는 복태, 먹고 살기 위해 땀흘려 보지 않은 맹수 아저씨 등 밴드 멤버들의 문제도 다양하다. 사람들은 모두 잘 살고 행복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이고 행복할 수 있는지 정답을 알지 못한다. 
 

청소년의 성장통은 다양하게 표출된다. 성정체성 문제로 고민하고 혹독한 시련을 견뎌야 하는 성적소수자, 뼈만 남은 듯한 몸매를 유지하도록 강요당하는 사회에서 다이어트는 청소년들의 주된 고민이다. 심한 다이어트로 건강을 해치고 심지어 정신과 치료까지 받아야 하는 아이들. 그 무엇도 꿈꾸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늘어가고,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걸 꿈꿔도 그 꿈을 빼앗아 버리는 현실에 그들은 탈출구가 필요하다. 이란은 밴드활동으로, 오빠는 게이로서의 즐거운 삶을 사는 것이다.   

"게이(Gay)는 '즐겁다'는 뜻이야. 그리고 나는 그저 그러고 싶은 뿐이야." 

라고 말하는 이락, 남의 일일때는 동의하지만, 내 자식이 그런 선택을 한다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 같다. 성적소수자의 커밍아웃이 늘어가는 현실을 반영하는 소설이지만, 언제나 내편이 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해야 할 가족의 고민은 깊어간다. 예전에 중학교 원어민 영어쌤을 홈스테이했는데, 그 친구가 게이였었다. 그때의 경험으로 우리 애들은 게이라면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며 말도 섞기 싫어했었다. 내 아들이 즐거운 게이로 살고 싶다면... Oh, No!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면, 소설의 주제를 받아들이지 못한 독서일까?^^


내가 발견한 최고의 장면, 이런 상담선생님이 있어서 다행이다. 이락은 이런 경험을 통해 게이들의 권리를 위해 싸워나갈 힘을 얻었으니까.  우리 청소년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위로가 아닐까...


"상담실이라면 이미 익숙해. 회유와 협박과 폭력이 난무하는 곳이지. 근데 이번에는 처음 보는 여자 선생님이 거기 계시는 거야. 아무튼 자리에 앉아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기다렸지. 이미 각오는 했거든. 근데 이 선생님 아무 말도 안하는 거야. 그냥 나를 보고 빙긋빙긋 웃기만 하더라고."  

"왜? 미친 거야?"
"설마 미쳤겠냐.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어. 그랬더니 나보고도 웃으래. 참 내. 어이가 없었지. 날 놀리는 건가. 이젠 별별 일이 다 있구나. 나도 모르게 어이없는 웃음이 픽 하고 새어 나왔어."

"하하하, 시키는 대로 했네."
"그런 셈인가, 어쨋든, 그랬더니 이제는 대놓고 껄껄껄 하고 웃는 거야. 아니 무슨 여자가 그렇게 목청은 큰지, 그걸 보니까 나도 모르게 같이 웃게 되더라고. 깔깔깔 하고 말이야. 그러고는 한참을 둘이 웃었어. 웃다 보니까 멈출 수가 없더라고. 나중에는 눈물이 찔끔 나고 복근까지 저릿저릿하더라."

"오빠 복근 사라진 지 좀 된 거 같던데."
"한 십 분을 그렇게 웃었나. 근데 선생님이 갑자기 나를 안는 거야. 처음엔 영문을 몰라서 버둥거렸어. 근데 조금 지나니까 참 좋더라. 따뜻했거든. 포근하고. 쓰라린 상처에 따끈한 물수건을 얹어 주는 느낌이랄까." 

"둘 다 미쳤구먼."
"그렇게 또 한참을 있었어. 그런데 이번엔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거야. 그냥 볼을 타고 하염없이 내리더라고. 되게 부끄러웠는데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어. 너무 뜨거웠어. 선생님은 그냥 한참 동안 그렇게 나를 내버려 두더라. 그렇게 가만히 있는데 어떤 응어리가 스르르 풀리는 것 같았어. 그냥 무조건적으로 이해받는 느낌이랄까." 

"선생님은 그다음에 무조건 괜찮다고만 말씀하셨어. 그냥 괜찮다고만. 그 얘기 듣는데 더 눈물이 나더라고. 선생님은 내가 혼자가 아니라고 했어......"(150~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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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05-11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우정이니 의리니 그런 말은 쓰지 않는다고, 그나마 표면적으로나마 그런 말이 대접 받는 곳은 조폭 세계 뿐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들으면서 '정말 그렇네' 깊이 공감했어요. '무조건'이라는 말도 그런것 같아요. 무조건 이해하고 무조건 사랑하고 무조건 괜챦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있다면.. 세상에 무슨 일이라도 다 해낼 수 있을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내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도, 막상 닥쳐보니 그게 맘처럼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 아니더라구요. 조건없는 사랑 이야기, 쓰고 싶어요.

순오기 2011-05-11 23:48   좋아요 0 | URL
조건 없이 '무조건, 무조건이야~'라고 할 수 있는 관계가 과연 있을까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편이 돼주는 사람 하나쯤은 꼭 있어야 한다는...

섬사이 2011-05-11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조건 괜찮다고 말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몰라요.
차라리 내 아이가 아니라면 얼마든지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내 아이라서 오히려 감정적이 되고, 조바심을 내고, 불안해지고...
저의 이 좁은 틀은 언제쯤에나 깨질까요. 에구.

순오기 2011-05-11 23:49   좋아요 0 | URL
그죠~~ 내식구 일이 아니라면 관대할 수 있지요.
다들 그런 틀에 갇혀 살다가 가끔은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도 하겠지요. 순간이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