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주방 정리도 미루고 설핏 잠들었는데~
학교에 간 아들 녀석이 돌아왔다. '앞으로 더 자유가 없어진다고 해서 학교를 관뒀다고...'

하도 기가 막혀서 꺽꺽 우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울음소리 뿐 아니라 정말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컥~~ 가슴이 너무 아파서 딱 죽을 거 같은데... 
띠롱띠롱 문자 알림 핸드폰 음이 들렸다. 

"엄마, 나 본적이 뭐야?"
아들넘한테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학교에서 주민증 만들어준다고 어젯밤 물어보더니만 적어가지 않았는지...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답하러 알라딘 로그인하는데 전화가 걸려와서 불러줬다. 

토욜 저녁 시아버지 생신 축하 모임으로 증도에 갔다가, 일욜 등교하지 않고 땡땡이 쳤다. 그래서 담당선생님께 전화로만 알렸는데... 불성실하면 짤린다고 한 아들녀석 말에 신경이 쓰였는지, 아니면 삼식이 남편한테 은근 스트레스가 쌓였는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정말 죽을 거 같았다.  

 
어쩌면 어제 오후 눈물 질질 짜면서 본 <붉은 밤을 날아서> 때문인지도...  

1981년 5월 18일 과테말라 도스 비아스, 마치 80년 5월 광주를 보는 것 같다.
군인들이 마을 주민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우는데, 엄마가 안겨 준 네 살 먹은 여동생 안젤리나를 데리고 숲으로 도망친 산티아고는 열두 살이다. 


숲으로 도망친 산티아고 크루소는 총에 맞아 죽어가는 삼촌의 마지막 말을 듣는다.

과테말라를 떠나야 해. 최대한 멀리 가서 오늘 밤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라. 오늘 밤 벌어진 일을 목격한 것만으로도 너는 이미 어른이다. 그들의 만행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남쪽으로 가서 카유코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가거라.(12쪽)

이름에서 로빈슨 크루소가 연상되는 소년은, 삼촌이 만들어 둔 카유코(돛이 달린 항해용 카약)를 타고, 엔리케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과테말라를 떠난다.  

네겐 여권이나 이민 서류가 없어. 그 말인즉슨, 네가 과테말라를 떠나는 행위 자체가 불법이라는 얘기다. 그러니 어떤 나라든 불법으로 통과할 수밖에. 그래서 미국에 도착할 때까지는 어떤 해안가에도 들러서 쉬어 가지 말라는 거다.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야.(96쪽)

총도 없으니 만일 군선이나 해적선이 따라붙으면 반드시 안젤리나부터 숨겨 놓고 머리를 잘 써야 한다. 일단 스페인어를 쓰지 마라. 못 알아듣는 척해. 웃으면서 켁치어로 말하거라. 마냥 좋고 아무 일도 없다는 척해야 해.(98쪽)

난 이미 늙었다. 앞으로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어도 기회가 많지 않지. 하지만 너희는 아직 어려. 그러니 더욱 조심하거라. 아무도 믿어서는 안 돼. (99쪽)

이제 내가 알고 있는 건 모두 알려 준 것 같구나. 그래도 많이 부족할게다. 이제부터는 바다가 네 선생이다. 바다에게 잘 배우렴. 너는 인내심이 많고 사려 깊은 아이니까 분명 미국까지 무사히 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래, 만일 이 계획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너라면 반드시 성공할 거야.
부에나 수에르테(건투를 빈다)!(100쪽) 

열두 살 소년은 어린 동생에게 '살아남기 놀이' 하자며 험난한 여정에 오른다. 어린 남매의 고군분투에 눈물이 흐르고, 날마다 조금씩 죽어가듯 덮치는 외로움과 두려움에 같이 울었다. 

집에 가고 싶고, 엄마와 아빠랑 아니타 언니랑 롤란도, 아르투로 오빠도 보고 싶다는 동생에게, 사탕으로도 이 말이 주는 상처를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진실을 말한다.

"안젤리나, 군인들이 우리 가족을 모두 죽였어. 아주 나쁜 일이 일어났어. 오빠도 너처럼 무섭단다. 나도 배고프고 너무 더워, 다치기도 했고 너무 지쳤지. 하지만 불평하고 포기하면 우리는 죽고 말 거야. 안젤리나, 죽고 싶지는 않지?"
"하지만 아프단 말이야."
"어디가 제일 아픈데?"
"여기가 제일 아파."
안젤리나가 심장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그래, 나도 거기가 제일 아파." (227~228쪽)

너무나 가슴이 아파 눈이 퉁퉁 붓도록 꺽꺽 울었는데, 찰나의 꿈속에서 바로 숨쉴 수 없이 가슴 아픈 순간을 경험하다니... 산티아고와 안젤리나의 고통에 동참하는 체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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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21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그래서 결국은 꿈이었던거죠? 아침부터 깜짝 놀랐잖아욧! ㅜㅜ
마음 가다듬고 하루 잘 보내시고, 오늘은 저녁에 슬픈 책 보지말고, 간식도 조금 먹고 주무세요. ㅎㅎ (잘때 배부르면 무서운 꿈 꾼다잖아요)
어쨌거나 사실이 아니어서 너무 다행이에요. 처음 읽고선 진짜 놀랐었어요..

순오기 2010-06-21 10:22   좋아요 0 | URL
꿈이었지만, 가슴 통증은 진짜였어요~~~~ ^^

비로그인 2010-06-21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얘기는 가슴저며서 못 읽겠어요~ㅠㅠ

순오기 2010-06-21 10:23   좋아요 0 | URL
가슴 저리지만...그래도 23일간의 여정이 성공했으니 보셔도 괜찮아요.^^

하늘바람 2010-06-21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이셨던 거예요?
아공
마음이 힘드신가봐요

순오기 2010-06-21 10:32   좋아요 0 | URL
요즘 스트레스 지수가 오르나 봐요.ㅋㅋ
그래도 이번 주말에 친정에 가니까 좀 풀리지 않을까 생각해요.^^

전호인 2010-06-21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에 기가 빠지신 겁니다.
기운이 쇄하면 가위(가우)가 눌리고 헛소리를 하게 되거든요.
(어르신들께서 잠결에 헛소리하는 것이 다 그런 경우입니다. 그럴땐..)
결국 가위가 눌리신 거니까 영양섭취 잘 하시고, 넘 무리하덜 마시고 쉬엄쉬엄 가세요.(제 말 허투루 듣지마셈-버럭-알쪄?)
연세(ㅋㅋ)생각도 하셔야지용.
오기님이 쓰러지며 알라딘이 무너지거든요.
혼자라고 생각지 마시고 건강관리도 하시면서 즐기세염. ^*^

순오기 2010-06-22 01:50   좋아요 0 | URL
하하~~ 순오기는 쓰러지지 않아요, 불끈!!
오늘은 모임날이라 맛난 것도 먹고 종일 아무생각 없이 놀았어요.^^

마노아 2010-06-21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소개 3줄 읽었을 때부터 벌써 눈물이 나요. 고작 열 두 살 아이에게 너무 큰 시련이에요.
증도 다녀온 이야기도 다시 풀어주신 거죠? 그 전에 좀 쉬세요. 스트레스 많이 쌓인 것 같아요ㅠ.ㅠ

순오기 2010-06-22 01:52   좋아요 0 | URL
최근에 이렇게 울면서 책을 읽은 건 이거 뿐이에요.
아파요 많이~ 하지만 23일의 사투끝에 플로리다에 도착하니까 괜찮아요.^^
증도는 작년 새해 페이퍼로 대신해요,
형제들은 그 전날부터 모여 2박했는데 우리는 밤늦게 가서 저녁먹고 잠자고 당음날 오전에 돌아왔어요.ㅋㅋ

카스피 2010-06-21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갑자기 옛 생각이 새록 새록나네요.다혈질 선생님이 계셨는데 아마 단체 기합을 받다가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온 적이 있습니다.왜 있잖아요,너무 힘들면 오히려 피식 피식 웃음이 나오는거 말이에요.
그러자 갑자기 선생님이 왜 웃냐고 선생님을 무시하냐뭐,너 퇴학이니 당장 나가라고 해서 "네"하고 그냥 집으로 온적이 있지요.선생님도 당황하셨는지 집에 전화걸어서 얼릉 다시 학교로 보내라고...ㅎㅎ 뭐 이런 헤프닝이었지요^^

순오기 2010-06-22 01:55   좋아요 0 | URL
하하 카스피님, 나도 중1때 만날 학교 가기 싫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홧김에 그럼 내일부터 가지마~~ 그래서 나도 다음날 학교 안갔어요.ㅋㅋ
그 후 절대로 학교 가지 말라는 얘기는 안하셨지요. 그런데 나는 우리 아들 초등 2학년떄 정말 학교를 안 보냈어요~ 너도 학교 안가면 어떤지 직접 경험해봐라, 했던거죠. 그리고 가출도 하고 싶다면 나가라고 했더니, 집나가면 개고생이라고 안 나간대요.ㅋㅋ

L.SHIN 2010-06-21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꿈이었군요.. 꿈과 책 내용, 오기님의 마음이 절묘하게 어울러진 좋은 글이었습니다.

순오기 2010-06-22 01:56   좋아요 0 | URL
제 마음이 전해졌나요?
책과 꿈과 제가 한 마음이었던 거 같아요.^^

BRINY 2010-06-21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기는 일요일도 등교하는거였군요. 그러고보니, 광주 할아버지댁에 갔을 때 일요일 저녁에 거리를 가득 매운 교복입은 학생들 본 기억이 납니다. 저는 놀토도 출근이지만, 그래도 일요일은 쉬어야죠...

순오기 2010-06-22 01:57   좋아요 0 | URL
한달에 한번, 네째 일요일만 쉬어요.ㅜㅜ
선생님들도 고생이시고 젊은 혈기의 아이들을 잡아둔다는 것도 비인간적이에요.ㅜㅜ 진보교육감 체제가 되면 좀 변화가 생길까요?

같은하늘 2010-06-21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오기언니 깜짝 놀랐습니다. 근데 일요일도 학교를 간답니까?
책의 내용이 가슴아프게 와 닿는군요.ㅜㅜ

순오기 2010-06-22 01:58   좋아요 0 | URL
광주가 5년 연속 수능성적 전국 1등이라고 자랑하면서 애들을 잡아요, 잡아!ㅜㅜ
책 내용은 아프고 슬프지만 희망적이라 괜찮아요.

마녀고양이 2010-06-21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공,, 꿈이 사나우셨군요?
저두 피자 잔뜩 먹고 잔 낮잠에서 내내 꿈자리 사나웠어염. ㅠㅠ

"살아남기 놀이"라........ ㅠㅠ, 저런 것을 할 용기가 제겐 없을듯 해요.
측은하기도 존경스럽기도 한.....

순오기 2010-06-22 01:59   좋아요 0 | URL
꿈은 아주 찰나였어요.^^
피자 페이퍼 읽었어요~ 잘했어요, 그럴때도 있어야죠.ㅋㅋ

살아남기 놀이는 어린 동생을 충격주지 않으려는 오빠의 지혜가 돋보이지요.^^

프레이야 2010-06-21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속에서 통곡을 하고 울던 기억이 납니다.
소리는 나오지 않고 심장은 터질 듯 아프고.
현실에서 뭔가 울화가 치밀 때 저는 그렇던데요.
아무튼 좋은 기운 쫙쫙 !!!!!

순오기 2010-06-22 02:00   좋아요 0 | URL
정말 아무 소리도 안 나오고 가슴이 콱 막히는... 처음이었어요.ㅜㅜ
사노라면, 울화가 치미는 일도 있지요.^^

세실 2010-06-21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이라서 정말 다행입니다^*^

순오기 2010-06-22 02:00   좋아요 0 | URL
예~ 정말 꿈이라서 다행이지요.ㅋㅋ

행복희망꿈 2010-06-21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간 저도 당황했네요.
꿈이라니 안심이네요.

순오기 2010-06-22 02:01   좋아요 0 | URL
헤헤~ 제가 다들 놀라게 했네요.ㅜㅜ
아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심야에 귀가했으니 이상 무!!^^

희망찬샘 2010-06-22 0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을 읽고서야 상황을 이해했다는...^^ 열공 아드님께 좋은 일 가득한 한 해 되길 빌어요.

순오기 2010-06-22 18:30   좋아요 0 | URL
^^

뽀송이 2010-06-22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멋진 페퍼라니,,,저도 울컥!!
우리나라 고등학생들 참 안쓰러워요.ㅠ.ㅠ
요즘 애덜이 어른이 되면 입시지옥에 치를 떨었던 고등학교로는 안돌아가고 싶을 거라더군요. 고3인 큰애반 애덜이,,,
참,,, 우리나라 교육제도에 가슴이 답답합니다.ㅠ.ㅠ
그나저나~ 순오기님 멋진 아드님은 잘 하고 있죠? 님~ 건강하셔요^^

순오기 2010-06-23 03:00   좋아요 0 | URL
울컥~~~하지만 그래도 행복한 결말이라 맘이 놓였어요.
고딩 아드님들은 잠드셨나요?
울아들은 공부하느라 날새본 적은 없으면서
축구 본다기에 자면 깨워준다 했는데도
잠이 안 온다고 방금 나왔어요.ㅜㅜ
이런 기를 모아 16강 진출 확정, 되겠죠?^^

꿈꾸는섬 2010-06-22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깜짝 놀랐어요. 허걱~~~그런데 꿈...다행이에요. 가슴 한번 쓸어내렸어요.

순오기 2010-06-23 03:00   좋아요 0 | URL
놀라게 해서 죄송하지마...가슴을 쓸어내렸으니 괜찮지요?^^

소나무집 2010-06-23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속의 말이지만
자유가 더 없어진다고 해서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아들의 말에 짠해지네요.

순오기 2010-06-23 19:36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요즘 고딩들은 정말 짠하지요.ㅜㅜ

자하(紫霞) 2010-06-23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게는 이름이 없다.가 왜 갑자기 생각나는걸까요?^^;

순오기 2010-06-23 20:58   좋아요 0 | URL
제목으로 검색했더니 위화 소설이군요.
위화는 정말 대단한 작가에요.
이 작품도 기회되면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