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과 상처 - 김훈 기행산문집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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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의 만남에 가기 전 이 책을 사서 사인을 받을까 망설이다가 그냥 갔다. 강연에서 "인간을 관찰하기 전에 풍경으로 본다"는 말에 구입했는데, 작가에게 하고 싶은 말은 딱 한마디다. 
"김훈 작가님, 이제 이런 문장을 쓰지 않으니 정말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식의 문장을 썼다면 나는 그의 팬이 되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이태준의 '문장강화'에서 말하는 화려체와 만연체의 문장이라면 감이 잡히려나. 게다가 한자어의 과잉도 책 읽기를 힘들게 한 요인중 하나였다. 헤밍웨이는 짧은 문장의 작가다. 김훈의 글도 지금은 짧은 문장이지만 이 책은 1994년 초판이고 작가 스스로도 완성이 아닌 흔적이라 했다. 2009년 개정판에 쓴 작가 후기는, 김훈을 사랑하는 독자에게 참 다행한 일이다.^^ 

   
  오래 전에 쓴 글이다. 여기에 묶인 글을 쓰던 시절에 나는 언어를 물감처럼 주물러서 내 사유의 무늬를 그리려 했다. 화가가 팔레트 위에서 없었던 색을 빚어내듯이 나는 이미지와 사유가 서로 스며서 태어나는 새로운 언어를 도모하였다.( 중략) 나는 이제 이런 문장을 쓰지 않는다. 나는 삶의 일상성과 구체성을 추수하듯이 챙기는 글을 쓰려 한다.  
   

책을 읽는 내내, 나랑 7년째 독서회 활동을 같이 하는 *숙이가 생각났다. 그녀는 거미가 똥꼬에서 거미줄을 뽑아내듯 화려한 문장을 줄줄줄 엮어낸다. 수식에 수식을 더하여 2중 3중의 복문이라 읽고 나면,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되돌아가 다시 읽어야 하는데, 김훈의 '풍경과 상처'에 실린 글들이 그랬다. 이걸 읽어내는데 일주일이나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확 남는 문장은 떠오르지 않아 밑줄 그어진 곳을 찾아야 했다.    

그는 서문에서 "나에게, 풍경은 상처를 경유해서만 해석되고 인지된다. (중략) 그러므로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게는 '풍경은 추억이다' 그래서 내가 가본 곳을 먼저 골라 읽었다. 다산초당, 소쇄원, 강진, 담양.수북, 한강, 질마재, 파주.문산, 소래.부안, 섬진강.구례.하동, 운주사는 가본 곳이고, 전군가도/사이판, 을숙도, 경주 남산, 울진 월송정.망양정, 북한산, 남해 금산. 행주산성, 동해/후포, 서해/오이도, 서해/대부도, 울진 성류굴은 가보지 못했다.

기행산문집이지만 그가 본 풍경의 아름다움을 풀어낸 글이 아니다. 상처를 통한 풍경보기로 그의 사유가 집약된 글이다. 소설과 다르게 산문집은 작가의 속살을 만지듯 작가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지만, 이 책은 김훈을 알아내기도 어렵고 그의 사유에 접근하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내가 제대로 읽고 있는지, 그가 뭘 얘기하는지 몰라 되짚어 읽기를 반복했다. 여튼 쉽지 않았지만 다산과 정약전, 조광조와 소쇄원의 양산보, 삼전도 굴욕으로 숨어 들어간 윤선도의 보길도, 미당의 질마재, 운주사의 보살들, 구석기 움집의 추억으로 남은 한옥의 부엌에 대한 글은 알아 들을만했다. 

글 속에서 만나는 황지우, 김명인, 소월, 이성복, 미당, 천상병, 정현종 시인에 대한 글은 비교적 알아 듣기 수월했다. 한때 정현종 시인을 좋아했는데 천양희 시인을 아프게 했던 그의 이력을 알곤 마음에서 내쳤던 시인이다. 여기 '신바람'이라는 시에서 '미친놈처럼 헤매는'이라는 싯구를 보면서도 '그가 딴 여자에 미쳐 돌아가던 때였을까'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천상병 시인은 천재를 바보로 만든 잔인한 정치에 희생됐지만, 부인 목순옥 여사의 극진한 보살핌은 남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삶이기에 조금 위로가 된다. 신경숙의 문체에 대한 글은 거론된 '풍금이 있던 자리, 배드민턴 치는 여자'를 읽지 않아서 알아 듣지 못했다.

그는 산문집 '바다의 기별'에서도 '고향이라는 어휘가 물고 늘어지는 정한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서는 아주 표독스럽게 표현했다가 철회하는데,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글이라 옮긴다.^^

   
 

나는 고향에 관한 사람들의 그리움 섞인 이야기나 문학과 유행가 속에 나오는 고향 이야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들을 경멸한다. 증오한다라고 쓰려다가 경멸한다라고 썼다. 내 고향은 서울 종로구 청운동이다. 그 먼지 나는 거리에서 나는 자랐다.(중략) 나는 전원이나 농촌을 고향으로 가진 사람들이 제 고향의 논두렁 밭두렁, 바다나 산이나 시냇물, 언덕 정자 나무들을 육친화하듯이, 내 '고향'의 도시 구조물들이나 내 유년의 이웃들을 육친화할 수는 없었다.(109쪽) 

고향에 집착하는 인간을 경멸한다는, 내 서두의 헛된 진술을 나는 이제 파기한다. 나는 속으로 운다. 나는 다시 쓰겠다. 나는 고향일 수 없는 고향에 마음 쓸리우면서 새롭게 고향을 세우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내 고향 서울 종로구는 자동차와 먼지뿐이다.(118쪽)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이제 고향이 아닌 곳에서 고향을 만들어가야 하리라. 나도 고향이 아닌 빛고을에서 20년을 살다보니, 이젠 내고향보다 더 정든 '진짜 고향'이 되었다. 빛고을의 풍경 또한 내겐 상처가 아닌 지워지지 않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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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09-11-29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김훈님이 만연체를 쓰셨다니 충격입니다. 작가도 진화하는 게 맞나봐요. 저도 문장을 두 번 읽어야 하는 작가의 책을 제일 싫어하는데. 저도 모르게 제가 만연체를 즐겨 쓰고 있더라구요. 고쳐야 할 점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발전도 할 수 있다는 얘기겠지요?

순오기 2009-11-30 00:01   좋아요 0 | URL
하여간 한 문장이 겁나게 깁니다~~ 그래서 무슨 말인가 알아내려면 되짚어 읽어야 했지요.^^

조선인 2009-11-30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바로 '풍경과 상처' 때문에 김훈 작가를 읽게 됐는데, 마노아님도 순오기님도 마음에 안 드셨다니 좀 아쉽네요.

순오기 2009-11-30 17:00   좋아요 0 | URL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겠죠.^^
마노아님이 어디에 나오나요?ㅋㅋ

마노아 2009-12-01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내가 읽은 책과 세상' 읽을 때 문장에 허걱했어요. 김훈에게 반했던 그 짧고도 강렬한 문체가 아니라 너무 긴 호흡에 어려운 한자어에, 지쳐나가 떨어지더라구요. 그해에 첫 책이어서 일년 독서가 힘들었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순오기 2009-12-01 00:50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이 여기 있었군요.ㅋㅋ
김훈 같은 대가도 초창기엔 저런 문장을 썼구나, 읽기는 힘들었어도 좀 위로되지 않나요?ㅋㅋ

Tomek 2009-12-04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자전거 여행』읽었을 때 쓰러졌습니다. 이거 분명 기행문이라고 했는데 왜 맛집 얘기나 지역 이야기는 없고 밥상 머리에서 냉이국을 먹으면서 국물과 된장과 봄나물의 상관관계를 얘기하고 인간도 피부에 엽록소가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는 것인지... 읽기 과정은 힘들었지만, 힘들게 읽고 나니, 제가 그동안 책을 대했던 자세가 바뀌더군요. 이젠 이런 템포의 글을 쓰지 않으니 조금(아주최큼) 아쉽습니다. ^.^;

순오기 2009-12-05 00:49   좋아요 0 | URL
자전거 여행은 두세 개만 골라 읽고 제대로 안 읽어서 몰라요.
하하~ 이런 글을 안써서 님은 아주최큼 아쉽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