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인간
알도 팔라체스키 지음, 박상진 옮김 / 문예출판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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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가벼운 사람, 연기 인간의 이야기는 굴뚝 위에서 33년을 살다 인간의 삶에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어느 날 갑자기 매일 들리던 목소리의 주인공들, 페라! 레테! 라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장화 한 켤레가 놓여 있어 그것을 신고 인간이 사는 마을로 내려오게 된 연기 인간을 본 사람들의 관심은 지대했다. 잿빛 연기의 형상으로 군중 속에 놓여진 그는 속절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간신히 답변하며 정제되지 않은 호기심이란 물살에 거세게 쓸려갔다. 그는 본인의 존재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지만, 타인들에 의해 그의 존재는 정의내려졌다. '페렐라'란 이름을 얻었고 그의 특별함에 왕은 법전 편찬위원회의 3번째 위원이라는 직함을 내린다. 그의 영광이 계속될 것 같은 나날, 모든 국민에게 칭송받는 페렐라에게 모두가 등을 돌리는 한 사건이 벌어진다. 결국 그는 높은 탑의 감옥에 갇히는 벌을 받게 되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33년을 머문 굴뚝을 떠난 연기인간이 인간의 삶에 들어왔을 때, 그 특별함은 부여된 것이었다. 다름에 대한 호기심과 부러움 그 어딘가에 머무는 군중들이 연기인간에게 부여한 것! 그는 군중이란 파도에 쓸려 솟아올랐다가 바다 깊은 곳으로 내쳐졌을 뿐이다. 처음에는 환한 얼굴로 그에게 존경을 표하던 사람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욕지거리와 침, 오물을 던지며 그를 조롱한다. 문득 이 고전문학이 1911년에 쓰여졌단 사실이 떠올랐다. 100년도 전의 소설이지만 군중의 광기는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그 어떤 논리적 사고는 사라지고 인간의 잔혹함만 남은 이야기를 많이 접하고는 한다. 씁쓸한 기분이다.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가벼운 연기 인간과 비교하여 한없이 가볍다. '가볍다'라는 정의를 다시 하고 싶다. '진정으로 가벼운 이는 누구인가?' 그들 하나하나의 언행은 눈쌀이 찌푸려질 정도지만 군중이란 이름으로 존중받으며 힘을 얻는다. 가벼움에 하나를 더 보탠다면 폭력이다. 다름을 이유로 가해지는 숱한 폭력, 모든 문제가 피해자로 귀결되는 잔혹함에 인간 사회에 무력함을 느끼기도 한다. 잣대와 고통이 없는 드넓은 하늘로 연기인간이 날아올랐기를.

*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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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플롯 - 문학에서 발견하는 무한한 좌표들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6
황모과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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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이야기가 나를 구한다는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가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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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약국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에세이 1
김희선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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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약국」을 읽으며 '약사인 동시에 작가라니 역시 재능은 몰빵인가?'란 질투어린 선망을 해보았다. 얼마 남지 않은 장작을 화로에 태우듯이 매일 밤 조금씩 아껴가며 읽었다. 그렇게 읽는 동안 따뜻한 온기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따스한 시선과 특별한 상상력이 만난 문장에 피식 웃다가도 목이 메이며 눈물이 차올라 한 동안 고개를 숙이지 못하는 순간들이 반복되었다.

어린 아이들에게만 주어진다고 생각했던 상상력이 어른이 되어서는 한없이 집요하고 확장되며 유쾌하게 작용할 수 있단 것은 참 다행이다. 우리에게는 이런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짐에도 현실성 운운하지 않고 느슨하게 끈을 풀어보는 시간 말이다. 글을 읽다보면 저자가 마치 '너는 어떠니? 그런 적 없었어?' 물어주는 것 같다. 그리고 생각해본다. 내게 잘 말린 호프는 무엇인지. 16년을 함께한 나의 강아지에게서 내가 받은 무수한 사랑을. 마지막으로 나의 이야기는 어디까지 이어질까 고민하며 생각에 잠긴다.

세상엔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불가능한 작별 인사"가 있다고. 만약 진정한 작별 인사가 가능하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삼천 배쯤은 가벼워질 거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고,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이루지 못한 인사들은 점점 더 쌓여만 간다. 그리고 어느 날, 난 발밑을 보고 알았어. 내가 밟고 선 땅이 바로 그 인사들의 무게라는 것을. 그 무게가 나를 지탱해주고 나는 거기에 기대어 심연같은 지상을 날아오르며 건너가는 거지. 무거워질수록 자꾸만 가벼워지며.

책과 동물, 사람에게는 역시 따뜻한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김희선 에세이는 그 따뜻함의 결정체이다. 밤이란 단어가 주는 서정적인 느낌도 한 몫을 한다. 빛을 밝히는 밤의 약국 그 이야기를 통해 아직 잠들지 못한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진정 바란다.


*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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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마음 사전 - 가장 향기로운 속삭임의 세계
오데사 비게이 지음, 김아림 옮김 / 윌북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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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말에 의미부여를 하여 상대에게 꽃 선물을 주고받던 시절이 떠올랐다. 숱한 꽃말은 물론 사람들이 가져다 붙여놓은 것이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마음에 담아 해석하는 것을 기꺼워한다. 꽃이 가진 색감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각각의 꽃들에 붙여진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어찌 모른체하겠는가. 「꽃의 마음 사전」은 그런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하다. 총 50가지의 꽃을 선정해 연구한 결과는 그 내용을 보면 얼마나 성실히 집필했는지 알 수 있다.

꽃말은 꽃의 언어로, 꽃과 꽃의 배열을 통해 암호화된 메시지를 전하는 일종의 관습이었다. (중략) 꽃에 관한 아름답고 낭만적인 이야기는 시간이 흘러서도 우리 곁에 남아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꽃에 어떤 의미가 깃들기도 했지만 때론 꽃들이 직접 이야기를 전하기도 한다.

50가지의 꽃 중 가장 좋아하는 동백의 이야기를 먼저 들여다보았다. 최근 제주여행을 하면서 붉은 동백꽃에 흠뻑 도취되었는데 그 붉은 색감이 여타의 꽃들과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또한, 붉은 색감과는 반대로 향이 없는 것도 매력적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동백 편을 읽는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빨간 동백꽃만 있는 줄 알았는데 하얀색이 있었다. 심지어 하얀 동백꽃에도 역사가 있었고 상징이 되기도 했다.

무엇이든 제대로 알게 되면 더 빠져들게 된다. 내게 「꽃의 마음 사전」은 꽃에 대한 나의 마음을 여실히 흔들어놓았다. 봄이 오며 길거리 곳곳에는 색색의 꽃들이 자신의 미모를 뽐내고 있다. 아름다운 꽃을 보는 건 거리를 지나는 행인으로서 가지는 특권이다. 「꽃의 마음 사전」을 통해 벚꽃의 아름다움과 수선화의 자기애, 목련의 인내 등 각각의 꽃들이 가진 이야기를 덧대여 더 풍성한 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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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기쁨 - 흐릿한 어둠 속에서 인생의 빛을 발견하는 태도에 관하여
프랭크 브루니 지음, 홍정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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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되는 문장들로 치유받는 기분이 이런걸까. 업무적으로 장애인을 자주 접하는 직장생활 덕분에 나는 다른 이들보다는 조금 더 그들이 겪는 일상생활에 대해 알고 있고 올바른 지원방법 역시 배워왔다. 특히 중도장애(비장애인으로 살아가다가 질병이나 사고로 장애를 얻게되는 것)인 분들은 처음 장애를 업고나서 여러 어려움과 싸워 나가야한다. 보통은 여러 번 좌절하며 결국은 나아가는 삶을 살게 되지만 그 실상을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상실의 기쁨」의 저자는 흔하지 않은 질병으로 시력을 잃어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글로 담았다.

우리는 우리가 향한 곳을 반드시 봐야 할 필요는 없다. 목적지가 보이지 않아도 괜찮고 그 길을 가는 동안 지나치는 모든 것을 보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전방 1미터 정도만 볼 수 있으면 된다.

상실과 기쁨이란 단어는 함께 묶여 있기에는 모순적이다. 어느 누가 상실을 기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주 철학적인 문장이 될 것이다. 상실의 과정을 거치며 기쁨을 알게되기까지는 숱한 시간이 흐를 것이고 그 사이에서 누군가를 탓하거나 책망하는걸 그만두고 오직 현재 할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대단하다. 엄두도 내지 못할 것 같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와 관계했던 여러 장애인분들 중 자신의 삶을 비관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분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각자 자신이 현재 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들을 찾아 선택했다. 그 과정에서 지지와 독려를 하는 것이 나의 몫이었지만 오히려 배울 때가 많았다.

산다는건 상실에 익숙해지는 것이란 말이 기억난다. 시각이나 청력, 신체의 상실만큼 괴로운 것도 없겠지만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어떤 상실을 마주할 때 그 힘듦과 괴로움이 온통 나에게 향한다고 느끼고는 한다. 하지만 그 또한 삶의 과정일 뿐이다.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그 상실을 마주할 때는 분명 괴롭겠지만 또 살게 된다는 이야기가 좋다. 그러니 너무 먼 미래를 보지 말고 전방 1미터 정도만 볼 수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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