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의 그림자 속에서
알비다스 슐레피카스 지음, 서진석 옮김 / 양철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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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잔인함은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다. 이득을 취하려는 이의 잔악한 표정 뒤에는 절규와 절망으로 점철된 사람들이 존재한다. 「늑대의 그림자 속에서」는 2차대전에서 승리한 러시아(구 소련) 군대가 독일 동프로이센(옛 독일 동북부 지방)을 장악하면서 추위와 기아에 내몰린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가족을 위해 혹은 살아남기 위해 리투아니아 국경을 넘나들던 그 작고 여린 이들을 '늑대의 아이들'이라 한다.

사람들은 짐승들과도 같다. 눈이 마주치면 기다리지 않고 바로 공격하려 든다. 그들은 개나 늑대와도 같다. 절대로 눈을 보아서는 안 된다. 최악의 경우 눈에 두려움이 반짝하면 공격하라는 신호와도 같은 것이다. 아무도 자비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빵을 빼앗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저자인 알비다스 슐레피카스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오랜 조사를 했다. 잊혀진 땅 동프로이센에서 리투아니아로 넘어간 '늑대의 아이들'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일인들조차 잘 모르는 상황에서 저자는 더욱 더 집필 의지를 다졌다고 한다. 전쟁을 잘 알지 못한다. 세계 곳곳에서 전쟁은 일어나고 우리 역사에서도 끊임없이 벌어진 일이지만 직접 경험한 적이 없기에 그 암흑을 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전쟁이 사람의 얼굴을 어떻게 일그러트리는지, 말랑한 마음들을 허락없이 산산조각 부셔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무관심이 이렇게 세상을 지배하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자기 자신이 냉담해지게 놔둘 수는 없다.

남편들은 모두 전장에 출전했고 남은 건 여자들과 아이들 뿐인 독일 동프로이센에 러시아 군인들이 들어온다. 너무나 쉽게 보금자리와 재산을 약탈당하고 내몰린다. 바람이 매서운 겨울, 추위와 굶주림은 일상이 되었고 어떻게든 살기 위해 쥐를 잡고 군인들의 조롱과 멸시 속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구해온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아이들은 국경을 넘기도 한다. 아이들은 가족과 떨어져 죽음을 맞이하거나 혼자 남겨져 고아가 된다.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이들의 처지는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다.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한 소설이다. 실제 역사는 믿기 힘든 더욱 참혹한 일들이 자행되었을 것이다.

"그런 날이 반드시 올 거예요. 서로 웃고 떠들고 밖은 꽃들이 만발하고, 이 끔찍한 시간이 지나면 우린 다시 웃게 될 거예요. 언니 웃음소리 말이예요. 언니의 멋진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려서 강 건너편에서도 들릴 거예요."

늑대의 아이인 '레나테' 역시 가족과 헤어지고 국경을 넘어 리투아니아에 간다. 겨울 숲을 헤쳐 민가를 발견하면 구걸을 하고 군인들을 피해 도망가는 일상이 반복된다. 위험 천만한 시대이지만 독일 아이에게 선의를 베푸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악의를 담은 누군가에게 고발당해 다시 모든 것을 잃는다. '죽음을 불러오는 아이. 불행 그 자체인 존재' 로 불리며 말이다. 폭력과 죽음, 온갖 만행에 노출된 아이들의 이야기에 애가 탔다. 여전히 전쟁은 잘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전쟁은 인간의 생애 벌어져서는 안 될 참상이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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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마음
임이랑 지음 / 허밍버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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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이랑 작가에게 홀로 내적 친밀감을 가지고 있다. 한참 식물에 관심을 가질 때 작가의 책 몇 권을 읽은 적이 있었다.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쓴 글은 언제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인지 저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마음에 드는 제목의 산문집을 만나 저자의 이름을 확인했더니 기억하고 있던 이름이었다. 바로 '임이랑' 작가! 그가 전하는 밤의 글이 궁금했다.

'매사에 객관적인 사람' 같은 건 없다.

매사에 객관적인 건 애초에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짧은 문장들이 계속 서성인다. 오래 전 혹은 현재 진행 중인 감정들을 글 속에서 만났다. 깨닫기도 전에 지웠던 지난 감정들이 떠올라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대체로 반가웠다. 연필을 들고 공감가는 글에 밑줄을 치다가 내 생각을 얹을 때면 못내 표현하지 못했던 지난 날들이 담담하게 생각났다. 감정이란 속절없이 흘러가서 미처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 달하고는 하는데 이를 잘 제어할 수 있기를 언제나 희망했던 것 같다. 파도같던 감정은 언제나 강했고 쉬이 잠잠해지기 어려웠지만.

수없이 많은 밤을 쌓아 올린 평안도 순간의 불안 앞에선 불구덩이 안에 던져진 종잇조각처럼 순식간에 불타 사라진다. 정신이 망상과 싸우는 동안 몸이 백기를 흔들고 만다. '몸이 정신에게 지는 건 이렇게 초라한 마음이 되는 거구나'하며 슬퍼진다. 나약한 내가 강인하려는 나를 훼방 놓는다.

평소 부유했던 생각들이 글로 정리된 것을 보는 건 언제나 벅찬 일이다. 「밤의 마음」의 글을 조금 더 빨리 만났으면 어땠을까. 컴컴하고 실체없는 불안에 둘러싸였던 어느 시절에 이 책을 만났다면 내게도 단단한 위로가 되어 주었을텐데. 어린 시절의 내게 잠 못 드는 밤들 사이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밤의 마음」을 선물하고 싶은 깊은 밤이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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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의 살림 일력 365 - 일상을 돌보는 다정한 시간
정이숙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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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살림을 꾸려나가기 시작하면서 반복되는 일상의 단정함이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이 깨끗하길 바라는 이유는 그 곳에 머무는 가족들의 편안한 쉼을 위해서’라는 저자의 글처럼 소중한 이들이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귀가한 집에서 따뜻하고 안락함을 느끼기를 바란다. 사랑하기에 기꺼이 잘 해내고 싶은 마음, 그래서 수고로움을 감내하는 것이 살림이란 말에 공감한다.

머무는 공간을 가꾸는 일은 비단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잘 정돈된 침구와 제자리에 놓인 물건들, 제철음식으로 해먹는 건강한 한 끼 식사는 나 자신을 아껴주는 일이다. 단정하고 다정한 하루를 만드는건 결국 자신의 몫이니까.

절대 소소하지 않은 저자의 살림 팁을 매일 한 장씩 넘기다보면 어느 순간 나의 일상이 더 없이 다정해질 것만 같다. 12월은 저자가 소개해준 제철 식재료인 매생이를 이용해서 매생이 굴떡국에 도전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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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3-11-30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생이굴국 정말 맛있죠. 저도 매년 겨울엔 매생이 굴국 먹었어요. 이번 겨울에도 먹어야겠네요.
 
덕후 일기 - 시간 죽이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에세이 2
송승언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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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란 이미지는 어느 순간 180도로 달라진 듯 하다. 한 분야에 몰두하여 전문가 이상의 지식을 갖춘 사람들로 조금은 괴짜같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놀라운 지식과 경험을 자랑하는 덕후, 나는 늘 몰입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애정하는 아이돌 한 명쯤은 있을 청소년기에도 딱히 흥미가 없었고 꾸준히 오래 하는 취미생활도 없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몰두하는 사람이 멋있고 대단해 보인다.

저자의 ‘시간 죽이기-덕후생활’에 공감하는 것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 쓴 방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물론 저자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 주로 게임과 영상물을 본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흥미를 금방 잃어서 오래 시간을 죽이지는 못한다. 이런 점은 죄책감이 작용하는 탓도 있는데 시간 떼우기용의 게임이나 영상관람이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을 읽으며 쓸모없음의 관점을 조금 비틀어본다면 삶에 활력을 주고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싶다.

약간의 우울감으로 힘든 요즘 내 마음을 앗아갈 수 있는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느낀다. 아주 익숙한 것이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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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T 사피엔스 - 인공지능을 가장 잘 활용하는 신인류의 탄생 내 인생에 지혜를 더하는 시간, 인생명강 시리즈 14
홍기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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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을 가장 잘 활용한 신인류의 탄생이란 부제목이 눈에 띈다. IT 문외한이라도 세상 돌아가는데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블록체인, 비트코인, 메타버스, NFT, 챗GPT 등의 인공지능 기술에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IT처럼 직관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기술을 이해하기는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는 문장에 모르는 단어가 또 여러 개 등장하기 때문이다. 「GPT 사피엔스」는 난해한 기술적 설명보다는 IT기술이 사회적 맥락에서 어떤 영향력을 가지며 삶의 변화를 가져다주는지를 중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결국 엄청난 기술이더라도 사회적 소용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란 글에 공감하며 신기술에 대한 접근 방법에 대해 고민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서 그게 우리한테 무조건 도움이 될까? 그렇지 않다. 발전한 기술을 활용할 수 있어야 우리 삶에 도움이 된다. 전문가나 기업 혹은 투자자들은 막연히 "기술이 발전하니까 우리는 돈을 벌 거야. 이런 엄청난 기술을 갖고 있으니까."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기술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고민 없이는 인류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처음 챗GPT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 영향으로 소액 매수한 IT주가가 상승하는 덕을 보았다. 방대한 양의 정보를 논리정연하게 요약하여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인공지능이라니 짧은 시간 내 적확한 정보를 찾아내는데 유용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그 이면에는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도 존재하지만 말이다. 열광 속에 출현했다 사그라든 블록체인 기술과 같이 새로운 기술의 출현을 과장하여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술은 세상을 변화시키지만 유용한 도구로서 인간의 삶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현명함이 요구되는 것은 지금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기술의 발전은 분명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지만, 동시에 기술의 발전으로 새로운 직업이 창출되기도 한다. 이런 기술의 중립성을 우리 인간이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어떻게 인간을 위한 방향으로 이끌 것인지가 언제나 중요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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