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촉, 오 삼국시대 이후 화폐 부족 때문에 불경기가 심각해지자 화폐는 점점 더 사장되고 그 결과 불경기가 더욱 가속화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그래서 포백이나 곡물이 화폐를 대체하는 역할을 하고, 사회는 일변하여 자연경제로 되돌아가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것은 한편으로 보면 기교를 부리지 않는 자연의 섭리, 하늘의 구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농업의 중요성이 재인식되고 농업이나 양잠을 위해 지력(地力)의 개발이 요구되어 널리 개간이 행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p. 216. - P216

보통 서양 중세에 관해서는 이른바 민족 대이동을 중세의 개막으로 삼는데, 그것은 로마제국 말기에 라인강, 다뉴브강에 연한 장성선(長城線)을 넘어 내지로 이주한 게르만 민족이 군벌로서 발전해 내지를 교란시켰을 때, 또다시 새로운 게르만 민족의 이동이 일어나 라인강의 수비를 넘어 내지로 들어가 도처에 독립 왕국을 건설한 것이었다. 중국에서도 완전히 이와 유사한 현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후한은 건국 초기부터 북방 민족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광무제가 군웅을 평정할 즈음에 오환족의 기마병, 이른바 돌기의 무력에 크게 의지했다. 천하 통일 후 한의 국력이 강성해지는 시기에 흉노의 남선우가 북선우와 싸워 이기지 못하고 한에 들어와 살기를 요청하므로, 광무제는 그 8부의 부락을 산서성 북부의 병주 땅에 거주하게 했다. 그들은 한의 군헌과는 별개의 계통을 이루어 선우 아래에 통솔되며 한의 감독을 받고 있었는데 전쟁 때마다 징집되어 군역에 종사했다.
후한 말 동탁이 대군을 일으켜 입경할 때 그 부하에 서방과 북방의 이민족이 많았다. 이어서 원소가 지금의 하북성 기주 땅에 웅거했을 때도 그 근린의 이민족을 자신의 군에 편입시켰다. 조조는 동탁의 군을 인계받은 여포를 죽이고 원소를 격파해 기주를 평정했으므로 그때마다 적군을 수용, 개편한 결과 그의 군 안에는 자연히 이민족 출신의 전사가 많았다. 그 군대가 병호(兵戶)라고 불리며 보통 농민 이하의 반 노예적 대우를 받게 된 데는 이러한 점에도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조조가 원소의 조카 고간을 토벌해 병주를 평정했을 때 남성우의 흉노 부락도 역시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아직 충분히 중국화되어 있지 않은 용맹한 흉노족에 대해 조조는 분할통치의 술책을 썼다. 그는 흉노 무리를 5부로 나누고 각각의 부락에 부수(部帥)를 두어 지배하게 하고, 그 위에 흉노의 중랑장이란 관리를 파견해 감독했다. 바꿔 말하면 위는 이민족 출신자를 군대에 많이 수용해 사역시키고 그 군대의 힘으로 이민족을 통치했던 것이다. p. 224. - P224

전기의 당나라는 북주로부터 시작해 수가 이어받은 무천진 군벌 정권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수도, 당도 한인 출신이라고 일컫지만 실은 그 전의 북주 우문씨와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이민족 기질을 농후하게 받은 이른바 한(漢)과 호(胡)의 혼합 혈통이었으며, 혹은 이민족 그 자체는 아니었는지 의심하는 말조차 있다.
예컨대 수 양제가 부친의 첩과 사통하고, 당 고종이 부친의 첩인 무씨를 황후로 세운 따위 일은 이를 순수한 중국적 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사람 눈을 경악케 하는 불륜 행위인데, 북방 유목 민족 간에서는 극히 보통으로 행해지는 습속에 지나지 않는다. p. 263. - P263

송나라 시대가 되면 상업이 활발해짐에 따라 지금(地金) 화폐 외에 유가증권이 화폐의 용도를 갖게 되었다. 처음 사천성 지방에서 부호들이 사적으로 교자(交子)라는 현금보관증을 발행해 그것을 가진 자에게는 누구를 불문하고 초면에 지불에 응했다. 최초에는 맡긴 금액만큼의 교자밖에 발행하지 못했으므로 교자는 세인들에게 절대적 신뢰를 받고 지폐처럼 민간에 유통되었다.
이에 자신을 얻은 교자포(交子舖)는 한도 이상의 교자를 발행해 세간에 내놓았으며, 이로써 얻은 현금을 유용해 투기를 시도하고 이중의 이익을 얻으려 했다. 이 투기 사업이 실패하면 자기가 발행한 몫은 물론 손님에게서 의뢰받은 몫의 교자에 대해서도 현금을 태환할 수가 없어 결국 어음을 부도낸 결과가 되고, 사람들의 환불 요구에 직면해 파산하는 자도 생겨 공황을 아기하게 되었다.
그래서 정부는 민간 자본가의 교자 발행을 정지시키고 정부의 책임으로 스스로 교자를 발행하기 시작했다(1023). 이것이 세계 최초의 지폐인데, 이 경우에 정부의 교자 운영의 방법을 보면 그 발행고는 결코 준비금의 범위를 지킨 것은 아니고 다액의 한도 이상의 발생을 감행하고 있었다. p. 301. - P301

주자학이 자주 비난을 불러온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하면, 그것은 첫째 몹시 관념론적이라는 것, 둘째로 그 관념론을 바로 실행 가능한 듯이 믿어 타인에게 강요하는 데 있었던 것 같다.
만일 관념론이란 점을 말한다면 주자학에만 한정되지 않고 송대의 학문은 모두 관념론이다. 하지만 왕안석 학파는 한편으로는 객관을 중시하므로 실제적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거시서 현실과 지나치게 타협한다는 비난도 생기기 시작한다. 그런데 주자학파는 떄로는 그것이 선종(禪宗)에 가까워 유교의 형태를 취한 불교라 할 수 있을 만큼 주관적이고 또 독단적이라는 결점이 확실히 있었다.
주자의 학문의 근본은 주돈이의 <태극도설>에 기초하는데, 이것은 원래 도가(道家)의 손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되는 태극도에 대한 설명이며, 주자는 또다시 여기에다 해석을 붙였다. 이는 우주의 생성을 논하지만 물리학도, 천문학도, 생물학도 아니다. 억지로 말하자면 선험적인 우주론인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인성론이 도출된다. 당시 학문에서는 무엇이든 그것으로써 설명이 잘 되면 그것은 진리였던 것이다.
주자의 우주론에 있어 정신적 원리인 리(理)와 물질적 원리인 기(氣)의 이원론에서는, 궁극적으로는 운동이 없는 절대 정지(靜止)라는 태극의 장에 이르면 기는 리에 내포된다는 점이 특색이었다. 마찬가지로 인성론에서도 천연의 성(性)인 양심과 기질의 성인 욕망이 대립되면서도 역시 절대 정지인 경(敬)의 장에서는 기질의 성은 천연의 성에 내포되며, 그런 까닭에 성선설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자학의 태도가 현실의 정치와 외교에 적용되면 거기에 현상의 분석을 소홀히 하고 공론(空論)이 폭주할 위험이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다. p. 364. - P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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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시대 왕안석는 일찍이 인종 때 천자에게 상서를 올려 정치 개혁의 필요함을 주장했는데, 이 만언서(萬言書)는 천하의 명문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는 이 상서에서 현재의 중국이 밖으로는 이민족의 모멸을 받고 안으로 재정 궁핍으로 인민까지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묻고, 그것은 정치에 올바른 법이 시행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또 그에 의하면 정치가 합당하지 못한 것은 인재를 얻지 못하는 인사의 문제이며, 그 인재 결핍의 원인은 교육이 나쁘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만일 모든 것이 인간의 문제라면 인간의 힘으로 재건하지 못할 리가 없으며 더욱이 성패는 천자의 열의 여하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신종은 왕안석의 의견에 크게 찬성하고 또 그 인물에 심취해 밤낮으로 그와 정치를 논의한 끝에 과감히 여러 정치적인 개혁에 착수했던 것이다.



왕안석은 시인인 동시에 철학자였다. 하지만 그의 철학은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논리 사상은 아니며 한 번 보고 사물의 진상을 해석적으로 파악하는 직관주의 철학이다. 그는 이념에 구속된 이론을 싫어해, 그것이 리(理)에 엄폐된 것, 이론 때문에 진실을 놓친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므로 그의 정치 개혁은 먼 장래에 공허한 영상을 그리며 그것에 끌려드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현실을 직시해 거기에 있는 왜곡을 밝혀내고 불합리를 바로잡아 합리화의 궤도에 올린다는 방식이었다. 



그는 유교 경전 중에서 주공이 제정한 정부 기구를 기록했다고 일컬어지는 <주례>에 새로운 주석을 가했는데, 그것은 손이 닿지 않는 이상향을 먼 과거에 묘사한 것은 아니고 고대의 정치 원리는 언제라도 실제로 행하고자 하면 행할 수 있는 모범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의 정치는 이상주의가 아니라 합리주의자였다.



왕안석의 신법에 의해 그때까지 적자가 계속되던 국가 재정은 호전되어 오히려 잉여가 생기게 되었다. 재정이 너무 건전해져 정부의 창고에 금전과 미곡이 산적하게 되자 다음에는 경기를 정체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물론 이것은 하층민을 괴롭힌 것은 아니다. 적어도 실업자가 적었던 것은 신종 시대 지방에 비밀결사의 반란이 거의 보고되지 않았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문제는 종래의 방임 정책에 의해 묘미를 누려왔던 자산가 계급이다. 신법에는 어딘가 사회주의적 성질이 있고 정부의 통제가 엄했으므로 투기적인 돈벌이를 기도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한 사태가 자산가들에게는 심각한 불경기와 같은 느낌을 갖게 한 것이다.”<중국통사>


















송나라 인종시대 왕안석(AD 1021~1081)은 최고위직에 임명되자 곧 정부는 모든 백성의 후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일반 원리로 정했다. 그에 의하면 ‘국가는 노동자 계층을 돕고 노동자가 부자들에게 몸이 부서지도록 시달리는 일을 막으려는 목표를 갖고 상업과 산업, 농업을 완전히 장악해야 한다.' 그는 아득한 옛날부터 정부가 백성들에게 강요해 왔고 농번기에는 들에서 백성들을 빼내 온 경우가 많았던 부역을 폐지하며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면서도 홍수를 막기 위한 대규모 토목 공사를 시행했다. 농부들을 노예로 만들어 놓았던 대금업자에게서 그들을 구해 내고는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자금을 당시로서는 낮은 이율로 빌려주었다. 실업자에게는 나중에 자기 땅의 소산물로 정부에 갚는다는 조건으로 경작과 정착에 필요한 다른 도움을 무상으로 지원했다. 모든 지역에 노동 임금과 생필품 가격을 규제할 관리를 임명하고 상업을 국유화했다. 정부가 지역 산물을 구매하여 일부는 지역의 미래 수요를 위해 저장해 놓고 나머지는 전국에 퍼져 있는 국가 저장소로 운반해 판매했다. 예산 체계를 확립해 예산 위원회가 비용을 계획하고 산정했으며, 예산을 매우 엄격하게 집행했다. 이에 따라 이전에는 정부 자금이 흘러가는 길목마다 숨어 있던 은밀한 큰 주머니로 들어가던 막대한 금액을 절약했다. 노인과 실업자, 극빈자에게 연금을 제공했다. 교육 제도와 과거 체계를 개혁했다.


 

이 고상한 실험은 실패했다. 첫째 유토피아적인 면보다는 실제적인 면이 더 많았던 특정 요소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세금은 부자 소득에서 나오는 것이었으나 확대된 국가 경비에 필요한 자금 일부는 농작물의 일부를 거둬 얻는 것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곡 부자와 합세하여 세금이 너무 많다고 불평했다. 사람들은 언제나 국가가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비용을 지불하는 일보다 기능을 확장하는 일을 더 좋아하기 마련이다.



나아가 왕안석은 상비군을 백성들의 자원 낭비로 보고 규모를 축소하고 남자가 한 명 이상인 모든 가족이 전시에는 병사를 제공할 책임을 보편적으로 감당하게 했다. 그는 가축을 잘 보살피고 군사용으로 필요할 때는 정부가 이용한다는 조건으로 많은 가족에게 말과 사료를 제공했다. 하지만 침략과 반란 때문에 전쟁이 일러나는 횟수가 늘어나자 이런 조치는 왕안석 인기에 급속한 종말을 안겨 주었다. 아울러 왕안석은 자신 조치를 집행할 정직한 사람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패가 관료 사회 전체에 퍼졌으므로 중국 역시 그 이후 많은 나라처럼 사적인 착취와 공적인 부정행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오래된 난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왕안석의 친형제와 역사가 사마광이 이끄는 보수주의자들은 그 실험은 애초부터 불합리했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인간의 부패성과 무능력함 때문에 정부의 산업 통제는 비현실적이며, 최선의 정부 형태는 서비스와 상품을 생산하려는 인간의 타고난 경제적 충동에 의존하는 자유방임형 정부라고 주장했다. 부자들은 자기 재산에 대한 높은 세금과 정부의 상업 독점에 자극받아 왕안석 조치의 신뢰성을 떨어트리고 집행을 방해하며 좋지 않은 평판 속에서 종식시키려는 일에 자원을 쏟아부었다. 이 반대 운동은 조직을 잘 갖춰 황제에게 압력을 행사했다. 홍수와 가뭄이 계속 이어지는 상황에서 하늘에 불길한 혜성까지 나타나자 천자는 왕안석을 관직에서 파면한 후 그의 조치들을 취소시키고자 적대자들을 요직에 앉혔다. 모든 것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갔다.”<문명 이야기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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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가 어떻게 다른 제자백가의 학파를 압도하고 승리를 얻었는가? 유교는 역시 학문 그 자체에 우세해질 수 있는 특징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유교의 으뜸가는 강점은 그것이 역사학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장은 무위자연을 존중해 인위(人爲)를 배척하므로 역사학이 없다. 묵자의 학술은 <서경>이 있을 뿐 <춘추>가 없다. 말하자면 고대사가 있고 중세사 이하는 없다. 전국시대 종횡가의 학술은 근세사만 있고 고대사가 없다.
그런데 유학은 옛날로는 하, 은, 주 삼대의 전성기가 있고, 내려와 <춘추>가 그것을 이어받으니 <춘추>의 종말은 공자의 시대이며 그 이하는 맹자, 순자 등의 학자가 계승해 현대사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일관된 역사 체계를 갖고 있는 것은 유교뿐이다. 바꿔 말하면 유교만이 중국이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할지를 가르치는 게 가능했던 것이다. p. 175. - P175

한나라 건국 초기 이래 대체로 평화가 계속되었고 조정도 절약에 힘쓴 결과 한무제 무렵에는 조정의 재정에 여유가 생기고 창고에는 해묵은 쌀이 넘치며 동전이 쌓여 녹이 스는 형편이었다. 이처럼 재물이 사장되면 그것이 세상을 불경기에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키면 소비가 활발해지고 유통계로부터 숨겨져 모습을 감추고 있던 화폐나 물자가 세상에 나와 경제가 활황으로 끓어오르며, 그것이 또 생산을 자극하고 고용을 왕성하게 해서 실업자를 구제하게도 된다. 그래서 한무제는 흉노와의 전면전을 시작했다. pp. 177-178.
한나라 국고도 해를 이은 전쟁으로 지출이 급격히 증가해 그토록 풍부함을 자랑하던 재정도 바닥을 드러냈고 곧 궁핍을 고하게 되었다. 한편 전쟁은 자산가에게 일확천금의 기회를 주었고, 특히 제철업자는 무기 제조를 통해 큰 이익을 얻었다. 그래서 한무제는 악화되는 재정을 회복시키는 한편 괘씸한 대상공업자를 억누른다는 명목으로 당시의 대표적 상품인 소금과 철을 정부에서 전매하게 했다.
소금과 철의 전매 이익만으로는 어려운 재정을 되살리기가 불가능해지자 한무제는 상품의 통과세란 명목으로 배와 수레에 세금을 매기고 술도 전매품 안에 포함시키며, 다시 제후들에게 헌금을 시켜 그 황금이 만일 품질이 나쁘면 그 영토를 몰수하는 등 갖은 수단을 다해 재정 수입의 증가를 꾀했다.
그 밖에 주목해야 할 것은 균수법을 시행해 물가 변동을 막고자 했고 또 처음으로 은을 화폐로 사용하려고 시도했다. 이들 신정책은 대개 실패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후세에 송의 왕인석은 균수법의 재생을 꾀한 적이 있고 은을 화폐로 쓰는 것은 그 후 차츰 유행해서 명대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본위화폐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pp. 182-183.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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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시대 황금이 차츰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그 원인은 무제 때 서역과의 교통과 무역이 열리고, 이 방면을 통해 중국 내지의 황금이 교역에 의해 유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문명의 선진국과 후진국이 접촉할 때 선진국의 공예 제품이 후진국으로 수입되고, 이것과 교환해 후진국의 화폐가 선진국을 행해 유출된다.
중국과 서역을 비교할 때 뭐라 해도 서역은 오랜 문명을 가진 선진 지역이다. 물론 중국에도 비단과 같은 특산품이 있었지만 이것은 오히려 일차 생산품에 가깝다. 이에 대해 서역으로부터 수정과 유리 같은 고도의 기술에 의한 유리 제품이 수입되었다. 물론 교통이 불편한 시대이니 황금이 유출되었다 해도 한 해의 수량을 보면 미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 무렵은 경제 또한 저변이 알아서 몇 십 년, 몇 백 년 동안 같은 경향이 계속되면 그것이 가져오는 효과는 무시할 수 없다. 중국의 고대 사회는 일변해 오늘날의 수입초과국과 같은 불경기의 바람이 거세게 불게 되었던 것이다. pp. 56-57. - P56

중국 춘추시대 도시국가 사회에는 노예가 존재했는데, 남자를 신(臣)이라 부르고 여자를 첩(妾)이라 했다. 특히 군주는 많은 신첩을 소유했고, 군주권이 점점 커짐에 따라 그 수가 더욱 증대했다. 그런데 군주를 도와 정치에 참여하는 관료들은 처음에 군주에게 봉사하는 노예에 비견되면서 발달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후세에 관료 집단의 통솔자를 재상(宰相)이라고 부르지만, 재(宰)란 요리 담당이고 상(相)이란 주인의 기거를 도와 시중드는 자로서 모두가 노예의 임무이다. 또 역사 사실이 보여주는 바로도 제 환공의 폐업을 도운 재상 관중은 일단 환공을 적대했다가 포로가 된 자이므로 사형수로서 사면받은 노예이다. 또 진(秦)의 목공을 보좌한 백리해는 자신을 양 다섯 마리의 대가로 팔았다고 하니 이 또한 노예이다. 훨씬 더 고대의 설화에 나오는 부열은 노예 노동을 하고 있던 처지에서 은의 천자가 발탁해 등용했다고 하는데, 그 성인 부(傅)는 아이 돌보는 역으로서 이것도 노예의 일이었다.
이로써 보면 먼저 군주의 측근에 노예 무리가 있고, 그중 유능한 자가 정치 고문이 되어 군주를 돕고 군주의 총애를 받아 지위가 높아지고 권력이 강대해지자 몸은 노예이지만 세상에서도 존경심을 갖고 대우하는 지위를 갖게 된다. 그러면 자진해서 그런 무리에 투신하는 자도 나타나 그것이 관료군을 형성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래서 이 관료들은 군주에 대해 스스로 신(臣)이라고 자칭했다. 군신의 관계가 여기에서 성립된 것이니, 그것은 원래 군주와 인민 간의 관계와는 다른 것이었다. pp. 113-114. - P113

진나라 이후 한과 초는 큰 전투 70회, 작은 전투 40회로 천하 인민의 간과 뇌가 땅에 가득하고 부자(父子)가 벌판에 해골을 드러내는 것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으며 곡소리는 끊이지 않고 부상자는 일어날 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간신히 항우는 멸할 수 있었지만 인민은 생업을 잃고 일터가 없는 데다 대기근이 일어나 쌀 한 석(石)의 가격이 5천 전(錢)으로 오르니 인민이 서로 잡아먹어 인구가 반감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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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주원장이 숙청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몽골 이상으로 싫어했던 강남의 유력자들입니다. 만 명 단위의 처형은 대부분 강남 사람들을 상대로 이뤄졌습니다.
명은 역대 중국 왕조 중에서 유일하게 강남 지역에서 흥기한 왕조입니다. 강남은 경제가 발전하여 화북에 비해 지주나 유력자가 많았고, 주원장은 이러한 세력을 잘 활용해 위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런 강남을 왜 탄압했을가요?
주원장이 염두에 둔 것은 남북의 경제 격차 해소입니다. 원 말기의 혼란으로 정부에서 발행한 지폐가 휴지조각이 되자 그 영향은 생산력이 낮은 화북에서 더욱 심각했습니다. 화북과 강남은 12세기 전반에 금과 남송이 대립한 이후 오랫동안 분리 상태에 있었습니다. 몽골 정권 또한 강남의 경제력으로 회복을 지탱하는 정치 체제를 취했기에 남북의 통치는 일률적이지 않았고 달리 행해졌습니다. 그 결과 화북은 강남보다는 오히려 유목민 정권과의 연계가 깊어졌습니다. 강남에서 흥한 명이 자신의 정권을 ‘중화’라고 표방하려면 이 분리된 화북과 강남을 하나로 묶어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외이를 몰아내는 것만으로는 남북을 통합할 수 없었습니다. 남북 통합에는 양자 사이에 있는 막대한 경제적 격차를 해소해야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격차를 해소할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어느 한 쪽을 다른 한 쪽 수준에 맞추면 됩니다. 이상적으로야 경제력이 낮은 쪽을 높은 쪽 수준으로 끌어올려서 합치시키는 것이지만, 낮은 쪽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일단 불가능합니다. 높은 쪽을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려 맞추는 것은 쉽지는 않아도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주원장이 단행한 것이 ‘현물주의’를 중국 전역에 적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현물주의’란, 화폐를 배제하고 재정 활동을 수행하는 것을 망합니다. 경제에서 후진적인 화북에서 그때 나타났던 현물거래, 물물교환 현상을 항구화, 제도화한 것입니다. 이 정책을 전국적으로 실시해 세금은 현물로 징수하고, 정부는 모은 현물을 그대로 소비했습니다.
현물주의를 단행하면 왜 강남의 경제력을 빼앗는 결과가 될까요. 답은 현물주의에 근거하여 재정 운영을 실시하려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필요할지 생각하면 나옵니다. 물자와 노동력을 직접 확실하게 징수하려면 과세 대상을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과세 대상자가 몇 명이고, 그 사람들이 얼마만큼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지 조사하고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조사하고 작성한 것이 ‘어린도책’과 ‘부역황책’이라고 불리는 두 종류의 장부였습니다. pp. 225-226.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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