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선택할 수 없는 문제일 뿐 아니라, 물질적 부(富)를 추구하는 행복은 절대적 빈곤보다 더 민감한 상대적 빈곤 문제를 일으킵니다. ‘오늘날 가장 궁핍하게 사는 사람조차 수백 년 전 왕보다 더 잘 사는 데 몇몇 사람이 엄청 잘 사는 게 뭐가 그리 대수로운가?’라고 생각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상대적으로 더 큰 빈곤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역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 듀런트(1885~1981)는 “가난은 부(富)에 의해 만들어지며, 부가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까지 우리는 가난이 가난인 줄 모른다”라고 말합니다.

















과거에 평범한 사람은 부자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잘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누구든 백만장자가 어떻게 삶을 사는지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은 부자들의 호화로운 삶을 비정상적일 정도로 크게 보도합니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에서 어마어마하게 돈이 많이 부자들의 집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부자들의 라이프스타일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자 ‘소셜 미디어로 생긴 불만’이라는 증상이 생겼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평생 절대 소유할 수 없는 모든 것을 괴로울 정도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든 다른 형태의 대중적 노출이든, ‘소셜 미디어로 생긴 불만’은 보통 사람이 소유한 것을 하찮게 보이도록 합니다. 비록 그 사람이 객관적인 기준에서 삶을 넉넉하게 누리고 있고, 인류 역사 전체 기준에서 극히 잘 사는 사람일지라고 그렇습니다. 

 















사회운동가 홍세화(1947~ )는 “성공한 자의 거머쥔 부를 동경하는 것은 ‘90퍼센트 사람들’이 덥석 문 당근이다. 그 가능성은 로또복권 당첨 확률에 불과하지만, 모두 성공 예감으로 뜀박질하도록 내몰아 기대하는 미래상으로만 자신을 일치시키고 오늘의 자신을 배반하도록 한다”라고 말하며, 그 이면을 깨달아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내 생각은 내가 주체적으로 형성한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이 나에게 갖도록 요구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간파해야 한다.” 
















그렇다면 상대적 빈곤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모든 사람을 가장 가난한 사람만큼 가난하게 만들어 간단히 평등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명백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은 원래대로 가난하지만, 나머지 모든 사람은 해를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평등을 추구하는 일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인정한다고 해서, 불평등을 그냥 받아들여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불평등이 용인될 수 있는 경우가 언제인가 하는 점입니다. 불평등은 결과적으로 아무도 더 나빠지지 않고, 더 나아지는 사람들이 있을 때에만 허용될 수 있습니다. 이는 정치철학자 존 롤스(1921~2002)가 ‘차등 원칙’(difference principle)이라고 부른 것과 유사합니다. 불평등은 가장 못사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경우에만 허용될 수 있다는 원칙입니다. 하지만 이 원칙이 이상적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사회에서 불평등이 더욱 민감하게 감지되고,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웃이 더욱 부유해지면, 자신이 더 못살게 되는 것이 아님에도 부의 차이를 점점 더 의식하게 되고 불만족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등과 불평등을 오로지 물질 관점에서만 보는 것은 끔찍한 실패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은 상대적입니다. 사람들은 자신 행복을 판단할 때, 자신 실제 상황을 과거 혹은 현재의 사회적 경험에 비추어 비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행복이 상대적이라면 국가가 객관적으로 경제를 개선하고 부양한다고 해서 반드시 국민이 행복해진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무슨 일이든 쉽게 적응하며, 행복은 객관적으로 충족되지 않기에 국가의 경제 정책이 국민 행복 증대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만족을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 인간의 행복은 객관적 조건보다 우리 자신의 기대에 더 크게 좌우된다. 여건이 극도로 좋아진 후에도 불만족스러운 상태가 된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자신 운명에 주관적으로 만족하도록 하고 사회 불만을 막고자 보편적 기본소득을 도입한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인간의 기본적 필요’가 무엇이든지간에, 일단 한 번 누구에게나 그것을 무료로 제공하면 사람들은 이를 당연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보편적 기본소득 덕분에 빈곤층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의료 서비스와 교육을 누린다 하더라도, 그들은 전 지구에 불평등이 만연한 것에 극도로 분노할 수 있다."


 

행복이라는 "목표를 진정으로 달성하려면 보편 기본소득은 다른 의미 있는 일과 더불어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일 이후(이외) 만족스런 삶을 사는 방법, 심지어 가난하고 직업이 없더라도 삶의 만족도를 높일 방법을 먼저 찾아야 한다. 보편 기본소득과 더불어 강력한 공동체와 의미 있는 삶의 추구를 결합해야 한다.“ 
















유발 하라리가 언급한 “심지어 가난하고 직업이 없더라도 삶의 만족도”를 높인 사회가 요즘 일본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 일본 젊은 층 대다수는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취직률은 저조하고, 저임금에 시달리고, 워킹푸어로 일하고, 현대판 홈리스라고 볼 수 있는 피시방에서 난민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젊은이들은 삶이 만족스럽다고 느끼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일본 20대 젊은 층이 느끼는 생활 만족도와 행복 지수는 78.3퍼센트까지 상승했습니다. 일본 중학생과 고등학생 95퍼센트가 자신은 행복하다고 답했습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꽤 높은 만족도입니다. 1980년 절정기를 맞았던 일본의 ‘입시 전쟁’이 상징하듯 ‘좋은 학교, 좋은 회사, 좋은 인생’이라는 중산층 꿈으로 일본 전체가 압도되던 시기는 지났습니다. 1990년대 이후 중산층 꿈이 무너짐과 동시에 기업의 정식 구성원이 되지 못한 젊은이가 증가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젊은 층의 삶에 대한 만족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요즘 일본 젊은이는 예전만큼 자동차를 구입하지 않습니다. 술도 많이 마시지 않습니다. 해외여행도 그리 즐기지 않습니다. 유학생 수도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선거 때 투표하러 가는 젊은이 수도 현저하게 줄고 있습니다. 사회 부조리를 바로잡으려는 대규모 시위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대신 태어난 지역에 애착을 느끼는 젊은이가 증가하고 있고, 대도시권으로 이동하는 인구수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2011)의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1985~ )는 그 원인을 이렇게 진단합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리 없다고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행복하다고 느낀다.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될 때, 지금 행복하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세속적 물질을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적 풍요 그 자체가 오히려 불행의 원인일지도 모릅니다. 해마다 소비자 구매 심리를 자극하는 더욱 매혹적인 상품이 나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물건을 소유하는 기쁨보다 물건을 갖지 못하는 비참함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1754년에 이미 루소가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세상 물질을 갖지 못한다면 불행하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세상 물질을 소유한다고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내면의 행복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해서 오지 않습니다. 외부에서 무언가 주어지는 행복은 지속시간이 짧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 원했던 승용차를 사더라도 만족감이 반년을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은 무슨 일이든 쉽게 적응합니다. 인간의 행복에는 설정점(set point)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생기더라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행복감은 기저수준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결국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행복을 계속 누릴 수는 없습니다. 마치 쳇바퀴 돌리는 다람쥐처럼 아주 잠깐만 바닥을 벗어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흔히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새로운 상황에 곧 적응하리라는 사실을 매번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노인들은 대게 건강 문제로 고통을 많이 겪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인이 젊은이보다 더 행복하다는 말을 들으면 매우 놀랍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만성 질병에 잘 적응하는 편입니다. 인간은 미래에 자신이 어떻게 느낄지 예측하는 데 매우 서툽니다. 우리는 자신 감정의 반응 강도와 지속시간 모두를 크게 과대평가합니다. 
















흔히 쾌락주의자로 잘못 알려진 철학자 에피쿠로스(BC 341~270)는 행복을 대부분 사람과는 다르게 규정했습니다. 우리는 긍정적인 정서 차원에서 행복을 떠올립니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부재 측면에서 행복을 규정했습니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렀습니다. ‘문제(~taraxia)가 없다(a~)’는 뜻입니다. 우리가 만족을 느낄 때는 어떤 것을 소유해서가 아니라 바로 불안이 없을 때입니다. 행복은 고통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를 뜻합니다. ‘다행’(多幸)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의미에서 쾌락은 인생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쾌락 뒤에는 필연적으로 불쾌감이 뒤따르며, 인간의 참된 목표인 고통의 부재로부터 멀어진다는 점이 그의 요지입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정주의자’였습니다. 불필요한 욕망을 필요한 욕망으로 착각하면 고통이 생깁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갈망에 비해 그 성취감은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쾌락으로 시작된 것이 고통으로 끝납니다. 에피쿠로스는 유일한 해결책이 욕망을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제안합니다. 

















부처(BC 560?~480?)는 우리 행복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괴로움이 되는 경우가 아주 많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한 사람의 번영은 보통 다른 사람의 궁핍이나 배제에 의존합니다. 나라가 부유해지면 항상 불평등이 불행을 초래하기 마련입니다. 작가 버나드 맨더빌(1670~1733)이 말한 것처럼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대다수 사람이 가난하고 불행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상주의’라고 부르는 이러한 논리는, 한 사람의 손실이 다른 사람에게 이득이 된다는 뜻입니다. 중상주의자가 해줄 수 있는 최고 조언은, 예컨대 임금은 낮출수록 좋다는 점입니다. 값싼 노동력은 경쟁 우위를 창출해 수출을 증진시키기 때문입니다. 맨더빌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노예가 허용되지 않는 자유 국가에서 가장 확실하게 부를 창출하는 것은 부지런히 일하는 빈곤층 다수”입니다. 

 















멘더빌이 이렇게 거리낌 없이 주장했던 이유는 빈곤층이 형편없는 사람들이라고 가정했기 때문입니다. “동료 노동자와의 경쟁에서 패한 노동자는 나태와 우둔이라는 죄를 뒤집어쓰고 빈곤이라는 형벌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영국 전 총리 마거릿 대처(1925~2013) 역시 빈곤을 ‘인격의 결함’이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 빈곤을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데, 가난한 사람은 그럴 의지가 부족하다고 비난한 것입니다.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나 언젠가는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현대사회에는 ‘긍정적으로 사고하라!’는 신앙이 있습니다. 이 같은 낙관주의에 사로잡힐 경우 우리 모두에게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게 됩니다. 나아가 내 자신 감정을 다치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냉담하게 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부처는 “괴로움의 현실이 우리 삶 전체에 완전히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고통을 느껴야 한다”고 말합니다. 불교는 삶의 목표로써 내면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보다 삶의 현실인 변화의 고통[生老病死]을 깨닫고 받아들여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행복을 가져오는 뭔가를 얻자마자 곧 그것을 잃을까봐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늘 욕망의 대상을 쫓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결국 그것 때문에 불행해질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부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고정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도 실제로는 순간순간 변화한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실체에 대한 믿음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욕망을 낳고 또 그 욕망은 고통을 가져온다. 만족스러운 순간은 거의 없고, 있다 하더라도 아주 짧은 순간일 뿐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영원히 좌절하는 것이다.” 
















철학자 스베냐 플라스푈러(1975~ )는 인간이 고통을 인식하고 이를 통해 성장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실패를 겪은 사람은 그것이 왜 실패했는지 생각하고, 무엇을 더 배워야 하는지 고민하여, 다시 일을 시작할 때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장애나 시스템 오류라고 생각해 주어진 한계를 극복하려고만 한다면, 인간은 자기 실존과의 중요한 연결 지점을 잃고 말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을 한계가 있는 존재로 인정할 때 자아를 갖게 된다. 인간이 그 한계와 고통을 경험하고 자신 인생과 사회가 대체 왜 이러한지 근거를 캐물어야 한다. 고통은 생각을 낳는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그 고통을 억지로 참는 사람은 성과(成果)의 강요에 굴복하고 마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2014)와 『호모 데우스』(2016)에서 행복은 달성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다스려야 할 마음 상태라고 말합니다. 행복을 갈망하지 않으면 현재 순간에서 만족을 찾을 수 있고, 스트레스와 불만을 피할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행복이 주관적 느낌이라고 믿기 쉽고, 자신이 행복한지 비참한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고 믿기 쉽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특정한 감정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행위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함정이다. 사람들의 기대가 충족되었느냐의 여부, 쾌락을 즐기는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질문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덧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데 있다.” 

 


행복을 갈구하면 쉬지 않고 그런 감각을 쫓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마침내 행복한 감정을 느낀다고 해도 그 감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과거의 행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행복을 갈구할수록 점점 더 스트레스와 불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BC 460?~380?)는 행복은 재산이나 물질적 재화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의 쾌락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짧고, 고통을 산출하고, 반복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적 행복은 쾌락의 절제와 삶의 균형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덜 욕구할수록 덜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행복 역시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만족의 느낌이 아니라 우리의 성숙된 삶 전체의 문제였습니다. 성숙된 삶은 교육을 받고 습관화를 통해서 달성할 수 있습니다. 즉 덕이 있는 행위를 하도록 훈련받고 또 이를 꾸준히 실천하여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위를 반복하여 우리 본성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우리는 정의로운 행위를 하여 정의로워지고, 절제 있는 행위를 하여 절제 있게 되고, 용감한 행위를 하여 용감해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같은 행위와 덕을 행복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 누구도 성인군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할 때마다, 다음에 선한 일을 할 가능성이 많은 인물로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건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인간 본성은 존재 유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성 자체가 사회에서 만들어가는 산물입니다. 인간 본성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늘 구성되는 과정에 있으며, 생성하는 존재로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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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그 어떠한 원대한 시대사상이 없더라고 ‘그냥’ 살수도 있습니다. 그냥 산다는 것이 잘못된 일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냥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어떠한 사상이 뿌리째 뽑아버릴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안에 깊숙이 심어져 있기에 그냥 산다는 일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국가가 전부라고 생각하여 국가를 위해 자신 인생 모든 것을 다 바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 시민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이 경험했던 전쟁터는 다음처럼 몹시 참혹했습니다. 



"어느 날 백병전이 시작됐어...... 뭐가 기억나느냐고? '오도독오도독' 소리. 그 소리가 기억나......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사방에서 오도독오도독하는데, 사람들 연골이 으스러지고 뼈마디가 뚝뚝 부러져나가는 소리였지. 그리고 짐승의 울음 같은 처절한 비명들...... 서로를 찔러 죽이고, 숨통을 끊어놓고, 뼈를 부러뜨렸어. 총검으로 입이고 눈이고 닥치는 대로 찔렀지...... 심장을 찌르고 배를 찌르고...... 독일군에게 잡혀간 우리 여성 간호병을 찾아냈지. 세상에, 눈알이 도려내지고 가슴이 잘려나가서는...... 놈들이 말뚝에 박아놓았더라고. 몸에 살을 에는 추위에 꽁꽁 얼어 새하얗고 머리는 완전히 백발이 되어 있었어. 그 아이는 겨우 열아홉 살이었어." 



러시아 시민들이 경험한 전쟁터는 이토록 참혹한데 그들은 기꺼이 스스로 지원에서 전장으로 갔습니다. 



“그저 전선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 그게 다였어. 어떻게 히틀러가 모스크바를 차지하도록 보고만 있겠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지!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내 또래 소녀들은 너나없이 모두 전선으로 가겠다고 나섰지. 우리는 우리만 애국심에 불타는 줄 알았어...... 우리만 특별한 경우라고...... 하지만 웬걸, 모병사무소에 갔더니 글쎄 우리 같은 여자애들이 한가득인 거야. 세상에, 얼마나 놀랐던지! 심장이 뛰고 피가 끓어오르더라고. 나는 선발이 안 될까봐 가슴을 졸였어." 



딸이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더라도 어머니는 반기지 않았습니다. "어머니한테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었는데도 어머니는 딸을 안쓰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딸이 전선에서 돌아온 일을 모욕으로 생각하셨지. 적과 싸우지 않는 것을.” 



전쟁은 이토록 끔찍한데 그들은 왜 기꺼이 그 지옥으로 갔을까요? 



"우린 어렸을 때부터 '조국은 우리의 모든 것이다. 우리는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어. 그래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전선으로 가기로 결정한 거야. 내가 안 가면 대체 누가 가겠어? 나는 반드시 가야 했지..... 나는 '전선으로 갈 거예요, 전선으로 보내줘요! 전선으로!'라고 날마다 '전선, 전선' 노래를 부르며 고집을 꺾지 않았어. 실은, 포스터 글귀들의 영향이 컸어. '모국이 그대들을 부른다!', '전선을 위해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 눈만 뜨면 사방에 보이는 게 그 글귀들이었으니까. 노래는 또 어떤 줄 알아? '일어나라, 위대한 나라여...... 일어나서 죽기까지 싸우라......“ 

 
















”우리의 가장 큰 소원은 죽는 것이었어요! 자신을 희생하는 것, 전부를 내주는 것이요! 콤소몰(소련의 공산주의 청년 정치조직) 선언에도 있어요. ‘나는 내 민족이 내 목숨을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말로만 하는 맹세가 아니었어요.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교육을 받으며 자랐어요. 군대가 행군하는 걸 보면 모두들 제자리에 멈춰 서서 경의를 표했죠. 승전 이후 군인들은 더 이상 평범한 존재가 아니었거든요.“ 
















상호주관인 시대사상은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형성될 수 있지만, 특정 권력의 선전과 선동으로 아주 단기간 내에 '세뇌'될 수 있습니다. 철학자 죄르지 루카치(1885~1971)는 선전과 선동이 인간을 '도취'시켜 비인간화하기에 이는 비윤리적이라고 말합니다. "도취는 하나의 기만이며 사기다. 감정이입을 핵심으로 삼는 일은 일상적인 삶을 격하시킨다. 니체의 '디오니스적 도취'는 감정이입 반응의 극단적 형태이며, 개인 인격을 균열시키고 불안정하게 만든다. 이는 세계와 인간관계를 공허하게 만든다. 선전과 선동은 인간을 기만하는 위장된 오만일 뿐이다.“



인간에게는 흔히 ‘반복 편견’(repetition bias)이라 부르는 이상한 오류가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자주 들으면 들을수록 그 이야기가 참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믿는 현상입니다. 반복은 마치 서서히 젖어들어 온 몸을 젖게 만드는 가랑비와 같습니다. 기업은 광고를 반복하고 정부 역시 홍보와 선전을 반복합니다. 그들은 같은 이야기를 자주 반복하면 이성을 압도할 수 있으며, 심지어 거짓말도 반복하면 점점 더 진실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뭔가를 자주 듣거나 보게 될수록 우리 뇌는 더 빨리 적응하여 그것을 진실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2018년 예일대학교 연구진은 사람들이 정보의 신뢰도와는 무관하게 같은 정보에 반복되어 노출되자 그 정보를 사실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였습니다. 아주 약간만 그럴듯해도 반복되기만 하면 사람들은 그걸 믿었습니다. 가령 이러한 제목이 붙은 기사를 살펴보죠. ‘트럼프의 군사 개혁안: 미국은 징병제로 돌아갈 것이다.’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분명 사실이 아닌 이런 기사 제목조차도, 같은 내용을 두 번 본 사람은 한번 본 사람에 비해 두 배나 많이 사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연구진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는 다람쥐 쳇바퀴처럼 가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우리를 반복 편견에 빠뜨리는 위험한 무기와도 같습니다. 사람들은 사실 확인을 통해 확인되었을 때조차, 심지어는 본인의 정치 성향과 상반되는 의견일 때조차도, 자주 노출된 가짜 정보를 사실이라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정보가 되풀이된다 해서 그것이 반드시 사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복은 우리가 무언가를 진실이라 믿게 만드는 미끼 노릇을 합니다. 안타깝게도 정부나 기업, 지도자들은 모두 오래도록 이 미끼를 잘 활용해왔습니다. 가령 히틀러(1889~1945)의 『나의 투쟁』(1927)을 읽어보죠. 히틀러는 성공적인 프로파간다를 위한 몇 개의 핵심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문장은 그 하나입니다. “몇 개의 간단한 생각을 지속적으로 반복할 것. 틀에 박힌 문구를 사용하고 객관성을 피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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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를 만드는 데 아담이 갈비뼈 하나를 내주었기에 여자는 남자보다 갈비뼈가 하나 더 많다는 기독교 전통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믿음은 1543년 해부학자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1514~1564)가 사람 갈비뼈 수를 직접 세어 그 믿음이 틀렸다는 사실을 보여주기까지 이어졌습니다. 



로마의 과학자이자 저술가였던 플리니우스(24?~79)는 세계 최초 백과사전인 『박물지』(77?)에서 여성 월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월경하는 여자에게 우유를 가까이 두면 상하게 된다. 그 여자가 만진 씨는 생명력을 상실하고, 접붙인 나무는 시들고, 정원의 식물은 바짝 말라버리며, 그녀가 앉았던 자리의 나무는 열매가 다 떨어져 버린다. 그녀 얼굴은 거울의 반짝임을 없애고, 철의 끝을 뭉툭하게 하고, 상아의 매끈한 표면도 거칠게 한다. 벌떼도 그녀가 바라보기만 해도 곧바로 죽어 버린다. 그녀의 배설물을 먹은 개는 미쳐서 발작을 일으키며, 그런 개에게 물리면 독성 때문에 치료가 불가능하다.”



분명 정말로 그러한지 간단하게 실험해 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과학혁명이 있기 전까지 아무도 1,500년 동안 지배해 온 이 믿음을 반박할 증거를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스위스는 오래되고 안정된 민주국가지만 스위스 여성은 1971년까지 투표권이 없었습니다. 뉴질랜드는 1893년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었고, 핀란드는 1929년에 인정되었습니다. 조금 늦게 프랑스와 이탈리아조차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여성에게 참정권을 확대한 바 있습니다. 그 후 몇 년 이내에 아르헨티나와 일본, 멕시코, 파키스탄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1971년까지 스위스는 방글라데시와 바레인, 요르단, 쿠웨이트, 사모아, 이라크와 함께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은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은 투표권을 얻는 데 자국 남성보다 평균 47년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1291년 남성 시민이 투표를 했던 스위스에서는, 여성을 포함한 보통투표가 이루어지기까지 700년이나 걸렸습니다. 



스위스 남성들은 왜 여성에게 선거권을 주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전 세계 남성들이 했던 똑같은 주장, 즉 여자들이 정치에 참여하면 여성답지 못하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스위스의 어느 여성 참정권 반대론자는 ‘너무 똑똑한 여자처럼 불쾌한 것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대부분 스위스 여성이 남편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고 그런 상태에 만족하기에 어차피 실제로 투표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이유도 많았습니다. 여성을 억지로 공적 영역으로 끌어내면 가정이 무너질 것이라든지, 스위스는 여성 참정권 없이도 100년 넘게 평화롭게 지내 왔고, 두 번의 세계대전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며, 엄청난 번영을 일구었으므로 망가지지 않은 것은 고치지 않는 것이 최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정치는 남자의 일이며, 국사를 여자에게 맡길 수는 없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부유하고 교육열도 높고 민주적인 스위스가 오랫동안 여성 참정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기는 믿음조차 시대나 사회마다 크게 다를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 대부분은 실제로 과거 어느 때 이식된 믿음입니다. 자신이 옳다는 신념은 곧 다른 누군가가 옳다는 신념과 같습니다. 철학자 몽테뉴(1533~1592)는 “사람들의 신념은 자국의 관습이나 부모의 양육 방식, 혹은 우연한 믿음 속으로 휩쓸려 형성된다”고 말하며, “태풍에 휩쓸리듯 판단이나 선택의 여지없이,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사고력이 형성되기 전인 어린 나이에 이미 그렇게 된다”고 덧붙입니다. 
















우리에게 현재 당연하거나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보이지만, 언젠가 모든 사람이 이를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할 일은 없을까요? 우리가 오늘날 가지고 있는 믿음 중 일부는 미래에 옳지 못한 믿음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현재의 믿음 중 무엇이 언젠가 옹호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회가 공유하는 생각은 너무나 강력하고, 좁기에 누가 세상을 분명하게 보고 행동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세상에 불변하는 객관적인 진리는 없습니다. 상호주관(inter-subjective)만이 존재합니다. 상호주관이란 진리이거나[眞] 옳다거나[善] 아름답다고[美] ‘당시 대다수 사람이 믿은 사실’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철학자 플라톤(BC 428?~327?)은 『국가』(BC360?)에서 예술 규칙에 따라 만들어진 항아리를 아름답다고 규정했습니다.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역시 미(美)란 적당한 비례와 밝기, 명료성은 물론 완전무결함의 결과라고 설명하며 플라톤의 관념을 확장했습니다. 따라서 미에 반대되는 추(醜)는 비례에 맞지 않는 것, 곧 아퀴나스가 ‘축소되어 욕되다’라고 규정한 거대한 머리와 아주 짧은 다리를 가진 사람 뿐 아니라, 다리가 하나 없거나 눈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을 묘사할 때도 쓰이는 개념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비례와 조화를 이루는 미란 무엇일까요? 미의 의미는 역사에서 계속 변화해 왔습니다. 한 세기 동안 비례가 맞다고 여겨지던 것이 다른 세기에 들어서 더 이상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이해할 때는 다른 사람과 상호 작용하면서 서로 공유한 경험이 바탕이 됩니다. 사회나 특정 집단 내 의미나 규범, 가치는 이러한 공유된 이해를 통해 형성됩니다. 우리는 다수 의견에 쉽게 순응하는 경향이 있기에 공유된 경험이나 환상에 손쉬운 먹잇감이 되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회에 큰 영향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남녀 사이에 일어나는 사랑의 감정도 ‘상호주관’일 수 있습니다. 유럽에선 18세기에 이르자 오직 남성 간에만 한정되던 두 영혼의 결합이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도 가능하다고 처음 주장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사랑에 빠진 남성이 여성을 부양할 만큼 부유하다는 사실만 진지하게 증명하면 되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사랑이란 단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되었습니다. 사랑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되었으며, 사랑받는 상대가 이상화되고, 누구하고든 사랑에 빠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또한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부추겨져 사랑에 대한 모든 전제 조건이 철폐되었습니다. 이것은 인류의 가장 놀라운 발명 가운데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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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오필리 <성모 마리아>(1996)



오필리는 아프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의 종교 상징물에서 영감을 얻어 성모 마리아를 강렬하고 관능적인 인물로 묘사했습니다. 마리아를 흑인으로 표현했는데, 이는 서양 미술 관습에 대한 도전입니다. 작가는 사회적 규범에 도전하고자, 포르노 잡지에서 오려낸 여성 성기 모양을 아기 천사인양 성모 마리아 주위에 배치함으로써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함께 표현했습니다.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알랭 드 보통(1969~ )은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우리는 틀에 박힌 일상을 보내기에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한다. 예술이 찌르고 치근대고 좋은 의미로 도발할 때까지 내내 겨울잠을 잔다. 이질적인 예술 덕분에 내 안의 종교적 충동, 내 상상력이 허락하는 한에서 내가, 그들이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 재인식할 수 있다.”

















파르미자니노 <목이 긴 성모>(1540)



1520년경 이탈리아 여러 도시에서 르네상스 양식이 유행했습니다. 당시 많은 젊은 미술가는 미켈란젤로의 작품 화풍(manner)만 모방했는데, 후대 비평가들이 이를 비판하면서 이 시기를 매너리즘(Mannerism) 시대라고 불렀습니다. 반면 위대한 거장 작품과 달리 자연스럽지 않은 그림을 그리려는 파르미자니노 같은 예술가가 다수 있었습니다.


파르미자니노는 성모 마리아의 목을 - 현대 미술가 모딜리아니의 인물화처럼 - 길쭉하게 그렸습니다. 화가는 인체 비례를 기묘한 방식으로 길게 늘여놓았습니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을 가진 성모의 손이나 천사의 긴 다리는 마치 볼록 거울에 비친 것처럼 보입니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했던 파르미자니노 같은 당대 화가들은 아마도 최초의 ‘현대적인’ 작가들이었을 것입니다.



















에드가 드가 <에투알>(1878)



‘에투알’은 프랑스어로 ‘스타’나 ‘주연급 발레리나’를 뜻합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오페라극장은 상류계급 남성을 위한 창관(娼館)이었고, 그곳 창녀는 발레리나였습니다. 당시 복사뼈 이상 다리를 보이는 걸 수치로 여기던 시대에 정숙한 여인은 긴 치마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다리를 다 내보이는 건, 현대 감각으로 말하면, 가슴을 드러내는 것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림을 보면, 무대로 뛰쳐나가는 에투알 뒤에 검은 정장을 입은 한 신사 모습이 보입니다.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에투알의 스폰서로 귀족이나 돈 많은 상인일 것입니다. 당시엔 주로 신분상승 욕구가 강한 하층계급의 딸이 발레를 했는데, 돈 많은 아저씨를 애인삼아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했습니다. 

드가는 발레 그림을 1,500여점 남겼지만, 발레리나의 열악한 생존 조건에는 냉담하며, 단지 그림 제재로 발레리나를 볼뿐입니다. 드가는 발레리나의 내면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대상을 화폭에 옮겼습니다.





















테오도로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에서 일어난 식인 장면>(1819)



그림은 낭만주의 화가 제리코가 1824년 발표한 원작 <메두사호의 뗏목>의 습작품입니다. 원작에는 뗏목 위 시체만 널브러져 있지만, 습작에는 식인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원작 내용 일부가 변경되었지만, 우리는 작가가 당초 무엇을 기획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1816년 7월 2일 프랑스 군함 메두사호는 아프리카 세네갈을 식민지로 삼기 위해 항해를 떠났으나 암초에 걸려 난파했습니다. 400여명을 태운 배가 침몰하기 전 구명보트에 타지 못한 149명은 뗏목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보급품이 없는 상황에서 폭풍까지 만난 뗏목은 생지옥이 되었습니다. 기아와 탈수, 질병, 난동, 광기, 살인, 자살, 급기야 식인 행위까지 벌어졌습니다. 13일간 표류 끝에 구조된 생존자는 15명뿐이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담배를 물고 있는 해골>(1885)



고흐는 해바라기나 붓꽃, 별이 빛나는 밤처럼 아름다운 정경도 많이 남겼지만, 시들어 가는 해바라기나 해골과 같은 어두운 소재도 표현했습니다. 그에게 삶이란 기쁨과 환희뿐 아니라 고통과 절망도 함께 어울려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서양 미술사에서 16~17세기 사이 ‘바니타스’(vanitas)라는 정물화가 유행했습니다. 해골이나 시든 꽃이 대표적으로 바니타스를 상징하는 소재였습니다. 인생무상과 삶의 덧없음을 뜻하는 라틴어 바니타스는 삶이 언젠가는 끝나기에 부와 명예, 순간적인 쾌락에 집착하는 일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자코포 틴토렌토 <수태고지>(1587)



중세 봉건시대 영주는 초야권(初夜權)이 있었습니다. 농노가 결혼하면 신부는 영주와 첫날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무서운 그림』의 저자 나카노 교코는 “벌 받을 생각일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그림 <수태고지>는 어딘가 초야권을 닮았다”라고 말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메시지를 전하지만, 그 소식을 들은 마리아에게 몸에 기억도 없는데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말입니다. 혼례를 앞둔 행복한 여인에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합니다.


그림 <수태고지>의 왼편 문밖에서 마리아와 결혼하기로 한 요셉은 목수 일에 여념이 없습니다. 뒷날 예수의 양아버지가 될 사람이지만, 자신과 관련된 일이 벌어지는데도 눈치를 전혀 못 채고 있습니다(그런 의미에서 그는 비극적 인물입니다). “틴토렌토의 <수태고지>는 젊은 여성의 주체적 결정권을 침해하는 운명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리 소로카 <낚시꾼>(1840?)



그림 <낚시꾼>은 평화로운 시골 풍경이지만, 분위기는 얼음처럼 고요합니다. 소로카가 사는 세상은 햇살이 비추나 빛은 일렁이지 않고, 강물은 흐르나 물결이 없습니다. 고요함을 넘어 질식할 것만 같은 적막함이 흐릅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유리처럼 투명하고 단단한 무언가에 갇혀 있는 폐쇄된 공간이 느껴집니다.


러시아인 소로카는 농노였고 그의 주인은 결코 그를 해방시켜 주지 않았습니다. 1864년 소로카는 지역 농민 해방운동에 연루되어 무거운 형벌을 받습니다. 마지막 희망조차 사라지자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림 속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듯한 답답함은 소로카가 농노제라는 비인간적인 제도 속에서 느끼는 절망감의 표현입니다.





그리고리 마소예도프 <수확기>(1887)



19세기 이르자 러시아 농노제는 법적으로 금지되었지만 실질적으로 노예가 해방되진 못했습니다. 토지 가격이 너무 비싸 토지를 매입할 수 없었던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습니다. 지주들은 개혁에 반대하며, 소작농으로부터 높은 소작료와 임대료를 모두 받아 챙겼습니다.


러시아에서 노예가 해방되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서유럽과 달리,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자본주의가 늦게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노예에서 해방되었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밖에 없던 가난한 민중은 일할 곳이 없었습니다.





















미켈란젤로 <아틀라스 노예>(1536)



미켈란젤로의 노예 조각 작품은 미완성이 많습니다.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겨놓는 기법을 ‘논 피니토(non finito)’라고 합니다. 작품의 완성된 부분은 거의 완벽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미완성된 덩어리가 붙어 있어 완성된 부분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완성품을 ‘캐낸다’ ‘끄집어낸다’는 느낌입니다.


미켈란젤로는 “나의 조각 작품은 돌 속에 이미 들어 있는 형상을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살아 있는 대리석 속에서 나오고 싶어 몸부림치는 노예를 발견하고는, 정으로 돌덩이를 떼어내어 노예를 해방시켰습니다.





















케테 콜비츠 <가난>(1901)



사물에 대한 우리 감정은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나 기억을 변화시킵니다. 같은 장소나 사물을 보더라도 기쁠 때와 비교하면 슬플 때는 아주 다르게 보입니다.


표현주의자들은 인간의 고통과 가난, 폭력, 격정을 아주 예민하게 느꼈기에 미술에서 조화나 아름다움만을 고집하는 일은 정직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콜비츠의 <가난> 같은 표현주의 화풍은 사랑이나 존경, 두려움 따위를 표현하기 위해 사물의 외관을 의도적으로 변형시킵니다. 


콜비츠는 가난하고 학대받는 이들에게 깊은 연민을 느끼고 그들 주장을 앞장서서 옹호했습니다. 작품 <가난>은 실업자가 많고 사회 봉기가 잦았던 시기에 방직공들이 당한 비참한 처지를 다룬 희곡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삽화입니다. 노동의 존엄성을 강조했던 밀레의 <이삭줍기>와는 달리, 콜비츠는 혁명만이 우리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알폰스 무하 <욥사의 담배 권련 용지 광고>(1896)



무하가 그린 욥(Job) 회사의 담배용지 광고는 담배에서 피어나오는 연기와 여성의 출렁거리는 머릿결이 서로 어우러져 더욱 매혹적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아름다운 곡선이 사람들 시선을 끕니다. 이렇게 무하 광고 포스터는 담배 연기로 가득한 선술집이나 여인숙에서 대중을 사로잡았습니다.


광고는 광고를 보는 사람이 자기 현재 생활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도록 합니다. 잘 만든 광고일수록 불안과 불만을 증폭시킵니다. 광고에 비교적 영향을 덜 받는 사람은 부자뿐입니다.





















장레옹 제롬 <로마의 노예시장>(1886)



그림은 제국주의 오리엔탈리즘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림 배경은 고대 로마로 설정되어 있지만, 어쩐지 사람들은 그림에서 19세기 말 이스탄불 이미지를 떠올렸습니다. 한때 콘스탄티노플로 불린 이스탄불이야말로 로마 문화의 계승지였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에서 노예로 팔리는 여인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 그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여인의 몸이 더 강조됩니다. ‘저렇게 수줍음을 타는 아름다운 여인이라니! 게다가 노예라니!’ 그림은 단순하게 남성의 욕망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수동적인 여성 이미지가 덧쓰여진 동양에 대한 서구 욕망이기도 했습니다. 강하고 진보한 남성(서양)이 여성(동양)을 길들이고 거듭나게 한다는 허황된 생각 말입니다.




















존 콜리어 <레이디 고다이바>(1898)



전설로 내려오는 그림 속 여인 고다이바(Godiva)는 11세기 영국 코번트리에서 살았던 백작 부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다이바의 남편인 레오프릭 백작은 중세 영주가 가진 권력을 남용해 과도한 세금을 걷었습니다. 


고다이바 부인은 영주의 폭정에 굶주리던 농민들을 동정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무거운 세금을 경감해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레오프릭 백작은 “당신이 정말 농민들을 걱정한다면 시장거리를 알몸으로 말을 타고 지나가시오. 그러면 당신 청을 들어주겠소”라고 제안했습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조건을 제시하면 그녀가 다시는 잔소리를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농민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고다이바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말을 타고 거리에 나섰습니다. 소식을 들은 모든 마을 사람은 고다이바가 말을 타고 지나갈 때 외출도 안하고 창문을 커튼으로 가려 내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고다이바 부인의 사랑과 희생정신에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고다이바는 결국 농민들의 세금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에르네스트 메쏘니에 <모르텔리 거리의 바리케이트, 1848년 6월>(1851)



그림에서 앞에 배를 드러내고 쓰러진 남자의 옷 색깔은 파란색과 하얀색, 빨간색의 프랑스 삼색기를 연상시킵니다. 왼쪽 위에 푸른 셔츠를 입고 쓰러진 사람과 흰 색 가슴 부분에 붉은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도 서로 연결해서 보면 파란색과 하얀색, 빨간색의 삼색입니다. 


1848년 혁명 시기에 역사상 최초로 농민과 노동자가 그 시대의 인간상으로 부각됐습니다. 특히 이 때 새롭게 투표권을 얻은 농민들이 큰 변수로 떠올랐습니다. 작은 땅을 소유했던 농민들은 국가 기간 사업을 국유화하자고 주장하는 급진파 요구에 겁을 집어먹고 매우 보수화되었습니다. 이들은 나폴레옹 황제의 추억을 되살리며 루이 나폴레옹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자코메티 <걸어가는 사람>(1960)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이루는 삶만이 바람직하다고 학습한 우리에게 목표 없이 반복된 일상은 변변치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 뼈만 앙상한 조각상은 우리에게 ‘나 역시 매일 목적 없이 걷고 있어!’라고 말합니다.


어디로 갈지, 어디서 멈출지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 모두 걷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것 자체만으로 소중한 활동입니다. 자코메티는 자신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디뎌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하지만 나는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만 한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계속해서 걸어 나가야 한다.”





자크루이 다비드 <적선을 받는 벨리사리우스>(1781)



그림에서 구걸하는 노인은 벨리사리우스입니다. 그는 6세기경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밑에서 로마제국의 영토를 회복했던 전설적인 장군이었습니다. 젊었을 때 그는 부귀와 영화를 누렸지만, 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눈도 뽑히고 돈을 구걸하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왼쪽 병사는 한때 그의 부하였으나, 지금은 극도로 곤궁하고 굴욕적인 상태에 있는 그의 옛 상관을 우연하게 보고 충격에 빠져있습니다.


이 작품은 일시적이고 세속적인 성공의 덧없음과 인간은 쉽게 나락에 빠질 수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일시적인 물질적 성취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막연하게 낙관하며 인생을 살지만, 이 그림처럼 예술은 우리에게 매사에 경각심을 줍니다.






그뤼네발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1515)



그뤼네발트는 그림에서 르네상스 시대에 만연했던 비율과 원근법의 원칙에서 벗어나서 인물 크기를 의도적으로 변형시켰습니다. 이는 그뤼네발트가 기술적인 완벽함을 거부하고 중세와 원시 시대의 예술 원리로 돌아간 것으로 여겨집니다.


크기와 비율을 의도적으로 조작하는 일은 사실주의의 엄격한 규칙을 고수하기보다 인물의 크기를 중요도나 상징적 의미에 따라 결정했던 중세 예술 전통과 일치합니다. 그뤼네발트가 이러한 기술을 사용하기로 선택한 이유는 단순히 시각적 정확성을 전달하기 보다는 장면의 정서적, 영적 측면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뤼네발트의 접근 방식은 예술적 위대함이 반드시 ‘진보’라는 개념을 고수하거나 새로운 발견을 수용하는 데 있지 않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는 예술적인 표현이 규칙이나 기술에 우선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히에로니무스 보슈 <우석의 제거>(1494)



그림은 르네상스 시대 환자 머릿속에서 ‘바보의 돌’을 제거하여 환자의 광기를 치료하는 장면입니다. 당시 광우라는 증상이 뇌 속에 박혀 있는 ‘바보의 돌’에서 비롯되었다는 신념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 이전 중세인은 광기를 객관적인 세계의 힘으로, 다시 말하면 사탄의 역사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광기를 인간의 주관적 속성으로, 즉 ‘인간이 자신과 맺는 관계’로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광기란 이성과 덕행을 통해 피할 수 있고, 또 피해야만 하는 인간의 악덕일 뿐이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들의 인본주의 특성이 드러납니다.





















윌리엄 터너, <눈보라-항구를 떠나는 증기선>(1842)



미술비평가 존 러스킨은 터너의 그림을 “여태까지 그려진 바다 그림 가운데 바다의 움직임과 엷게 낀 안개, 빛을 가장 장엄하게 표현했다”라고 극찬했습니다. 


터너는 자연의 힘에 깊은 매력을 느꼈고 자연의 극적인 효과를 포착했습니다. 그림은 폭풍과 바다 풍경의 역동적이고 끊임없는 변화를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휘몰아치는 바람과 파도 충격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터너에게 자연은 항상 인간 감정을 반영하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힘에 부딪히면 압도당하며, 자신이 아주 작은 존재임을 느끼게 됩니다.





















피터 파울 루벤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1639)



루벤스는 그림에서 빛과 그림자의 역할을 훌륭하게 포착해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작가는 특유의 역동적인 붓놀림과 풍부한 색채를 사용해 바위와 파도의 질감을 능숙하게 표현하여 장면에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그림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조개껍질을 들고 있는 아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조개껍데기로 바닷물을 퍼내고 있는 어린아이를 향해 아우구스티누스가 쓸데없는 일이라고 지적하자, 어린아이는 아우구스티누스를 향해 “성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려는 당신보다 더 쓸데없는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르네 마그리트 <이미지의 배반>(1929)



파이프 모양이 그려져 있지만 아래에는 'Ceci n'est pas une mem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마그리트는 이미지가 실제 대상 자체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우리 이해가 제한적이며 해석의 대상임을 시사합니다. 작품은 우리 인식이 정말 자유로운 것인지, 아니면 언어나 사회적 구조 등 외부 요인에 의해 영향받는 것이 아닌지 질문합니다.


현실에 대한 우리 인식은 주관적이며, 세상에 대한 우리 이해는 편견과 언어 한계로 제약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식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여러 요인에 영향을 받을 수 있기에 자유의지 개념은 환상일 수 있습니다.





니콜라이 게 <진리란 무엇인가?>(1890)



그림에서 본디오 빌라도는 손짓까지 해가며 예수에게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기름진 풍채의 빌라도는 밝은 빛 속에서 세속 논리를 대변합니다. 반면, 메마른 육체의 예수는 그늘진 어둠속에서 정신적 논리를 주장하는 모습입니다. 빌라도는 비웃는 듯하며, 예수는 심각하거나 어두운 표정입니다.


진리는 현실에서 결코 단선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더욱이 드러나 있는 것만이 진리가 아닐 수 있습니다. 진리에 헌신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기득권 유지와 자기 헌신 사이에 갈등은 당시 모든 지식인의 고민이었습니다. 그들은 진정 알고 싶었습니다. ‘진리란 무엇인가?’





에두아르 마네 <발코니>(1869)



사실 우리는 ‘본 것’이 아닌 ‘알고 있는 것’으로 그림을 봅니다. 실외 밝은 빛 아래에서 사물을 보면 입체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실내보다 햇빛 받은 부분이 훨씬 더 밝게 보이며, 심지어 그림자도 꼭 회색이나 검은색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전 르네상스 시기에는 세계가 어떻게 ‘보여져야’ 하는지 원근법과 인체 해부 등 이론적 지식이 중요했습니다. 따라서 마네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일으킨 채색 혁명은 혁명에 비견할만합니다. 우리가 실외에서 자연을 볼 때 각 대상은 고유 색깔을 가진 개별 대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눈에서(실제로는 우리 마음속에서) 뒤섞여 훨씬 더 밝은 색조의 혼합물로 보입니다. 


마네의 <발코니>에 등장하는 인물들 머리는 평면적입니다. 배경 속 여인은 확실한 코도 없이 그려져 있습니다. 사실 야외의 환한 빛 속에서 둥근 형태는 때때로 단순하게 색칠한 평면으로 보입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인간 눈이 놀라운 도구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눈에 적절한 암시를 주기만 하면 눈은 우리가 거기 있을 거라고 알고 있는 전체 형태들을 짜 맞추어 보여줍니다.




윌리엄 블레이크 <태곳적부터 계신 이>(1794)



작품 속 인물은 정교한 캠버스로 천지를 창조하는 ‘태곳적부터 계신 이’, 즉 신 또는 신성한 존재를 의미합니다. 블레이크는 자신 나름의 독특한 신화를 창조했는데, 작품 속 신을 유리즌(Urizen; 이성을 상징)이라 불렀습니다. 블레이크는 이성을 세계 창조자로 생각했으나, 세계를 악한 것으로 생각했기에 그러한 세계 창조자인 이성도 사악한 혼을 지녔다고 생각했습니다.


블레이크는 이성과 합리성이 개인 상상력과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제한적인 힘이라고 보았습니다. 블레이크는 산업 혁명과 같은 당시의 지배적인 시스템을 억압적이고 비인간적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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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451』(1953)은 미국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1920~2012)가 쓴 SF 디스토피아 소설입니다. 화씨 451도(섭씨 약 233도)는 책이 불타기 시작하는 온도입니다. 20세기 미국 문학 고전으로 인정받는 『화씨 451』은 장편 영화와 연극, 오페라 같은 여러 매체로 제작되었으며, 영화 <데몰리션 맨>과 <이퀄리브리엄>에 영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화씨 451』은 1984년 미국 SF 문학상인 프로메테우스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습니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스페인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스(1881~1958)의 글을 서문 대신 인용하며 소설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그들이 가지런히 줄 처진 종이를 주거든, 줄에 맞추지 말고 다른 방식으로 써라.” 한마디로 주어진 익숙한 길로만 가지 말라는 내용이 『화씨 451』의 주제입니다. 소설은 스스로 선택한 길만이 올바르다고 판단하고, 다르게 생각하거나 다르게 행동하지 않는 사회를 냉소적으로 비판합니다.



소설은 책 읽기가 금지된 25세기 한 사회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곳에서 자신 직업에 점차 의문을 제기하는 방화수(fireman) 가이 몬태그의 일상을 따라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몬태그는 방화서(放火署)에서 일합니다. 그는 숫자 ‘451’이 크게 쓰인 방화수 헬멧을 쓰고 책을 불태우는 자신 직업에 만족하며, 심지어 즐기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에 신비한 분위기의 소녀 클라리세 매클런을 우연히 만납니다. 소녀는 몬태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데, 몬태그가 방화수임을 한눈에 알아봅니다.



사람들은 보통 방화수를 무서워하지만, 소녀는 몬태그에게 친근하게 질문합니다. “그동안 태웠던 책 중에서 읽어보신 것은 없나요?” 몬태그는 웃으며 답합니다. “그건 법을 어기는 거지!” 몬태그는 자랑스럽게 방화수 공식 슬로건도 알려줍니다. “월요일에는 밀레이를, 수요일에는 휘트먼을, 금요일에는 포크너를 재가 될 때까지 불태우자. 그리고 그 재도 다시 태우자.”



소녀는 화제를 바꾸어 몬태그가 틀림없이 모를 법한 사실을 계속해서 질문합니다. “옛날에는 방화수라고 하지 않고 소방수라고 했다는 게 정말인가요? 그리고 그때는 불을 지르는 게 아니라 불을 끄는 게 일이었다면서요?” 몬태그는 확신에 차 반박합니다. “아니에요, 그건 사실이 아니죠. 집들은 전부터 항상 화재 예방시설이 되어 있었기에 불에 탈 수가 없죠. 내 말이 맞아요.” 소녀는 계속해서 질문합니다. 예전에는 밤늦도록 집에 전등을 켜놓고 가족들이 서로 대화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몬태그에게 묻지만, 그에게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소녀는 몬태그와 헤어지며 행복하냐고 묻는데, 이 질문이 그를 밤새 사로잡습니다. 그는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소녀를 회상하며, 그녀를 만난 일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합니다. 그녀 모습은 마치 지혜나 깨달음의 여신인 것만 같았습니다. 몬태그는 이제까지 자신이 살아온 사회의 문제와 자신 직업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자 점차 그는 사실 자신이 행복하지 않으며, 그 이유는 자신 직업과 사회가 추구하는 잘못된 가치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결국 한 번 쓰고 버리는 휴지 같은 시대”에 그는 살고 있으며, 사회가 “사람들 취급하는 게 코를 풀고는 휴지를 뭉쳐서 던져 버리는 식”이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상황도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문화인류학자 김현경은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프로페셔널이라는 이름 아래 노예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길 강요받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그에 따르면, 노동자는 신분적 ‘모욕’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종업원이 쭈그리고 앉아 주문받고, 백화점 영업시간이 시작되는 시간에 직원들이 입구에 늘어서서 ‘어서 오세요, 고객님, 환영합니다’를 30분간 복창하고, 마트에서 장시간 서 있어야 하는 여성 계산원이 성인용 기저귀를 차고 근무한다.” 사회가 개인을 이기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원자론적 인간으로 여기면, 개인은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그저 “휴지처럼 취급되는”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화씨 451』에서 몬태그 아내를 비롯한 대부분 사람은 양 귓구멍에 ‘골무 모양의 조그만 라디오’를 틀어막고 자신만의 세상에 살며, 서로 대화하지 않습니다. 대화하더라도 ‘자동차며 옷들이며 수영장’ 얘기밖엔 안 합니다. ‘그런 것들이 뭐는 얼마나 멋있냐’는 둥 그런 얘기뿐입니다. 사람들 기억력도 감퇴합니다. 같이 사는 남편이나 아내를 언제 어디서 처음 만났는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더욱 심각한 일은 ‘귀마개 라디오’를 듣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여 혼수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집 거실 벽면 사방에 텔레비전을 설치하고 드라마를 항상 보며 세상 현실에 눈감고 있습니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남들에게 관심을 갖고 시간을 내주는 사람이 없으며’, ‘수풀 속을 돌아다니면서 새들을 보거나 나비를 채집’하지 않습니다.



소설 속 사람들은 자신들이 듣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그들 앞에 펼쳐진 인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연속극이 실제라고 믿지는 않더라도,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본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모습은 정확히 그들이 사회화된 방식과 일치합니다. 



우리는 여러 미묘한 방식으로 경험의 범위를 한정 짓는 게 사실입니다. 한 가지 신문만 읽는 사람은 자신이 사는 앎의 영역을 심각하게 제한합니다. 같은 견해를 공유한 이들하고만 정치 토론을 벌이는 사람은 자신 스스로 담을 쌓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려는 시도조차 해본 적이 없다면 스스로 구축한 작고 편안한 세계의 벽 너머는 바라보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몬태그가 소녀를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눕니다. 소녀는 세상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세상이 참 이상하지 않아요? 사람들과 같이 있다는 건 물론 좋지요. 그렇지만 그저 떼거리로 모여 있기만 하면 뭐해요? 아무 말도 나누지 않고 그냥 모여 있기만 해도 사회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아요. 대개는 침묵한 채 고분고분 받아들이기만 해요. 이미 정해진 해답을 따라가기만 할 뿐이죠. 도대체 말도 안 돼요.”



사실 우리는 어떤 현상을 볼 때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에 비추어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이러한 일이 우리 삶에 구석구석 배어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어느 곳이든 현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고 세상의 관점이 들어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아는 것이 우리 자신을 규정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침묵하지 않고 고분고분하지 않고 정해진 해답만 따라가지 않는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핵심이 바뀌고, 우리 자신도 변합니다. 우리 세계관과 그 세계관에 부여한 가치는 우리가 아는 것을 기반으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이 변하면 세상도 변하며, 모든 것이 함께 바뀌게 됩니다.



몬태그는 점차 자신의 방화수 일에 회의를 느끼며, 과거 역사에 대한 궁금증만 커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책을 숨기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됩니다. 몬태그는 동료들과 함께 1,000년은 더 되었을 오래된 집으로 비상 출동합니다. 현관문을 부수고 안으로 뛰어든 그들은 한 늙은 여자를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노파는 도망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락방에서 많은 금서(禁書)를 발견합니다. 책들이 몬태그 어깨 위로, 팔 위로, 얼굴 위로 마구 쏟아졌습니다. 몬태그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손에 떨어진 책 중 한 권을 움켜쥐고 옷 속 겨드랑이 사이에 숨깁니다. 그 와중에 노파는 체포에 저항하며, 책들과 함께 불에 타 자살합니다.



몬태그가 궁금해 하는 역사란 과연 무엇일까요? 역사학자 존 루이스 개디스(1941~ )는 역사란 과거 사실을 단순하게 묘사하거나 현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거울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유용한 역할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역사가 현재와 미래에 짐이 된다면, 역사학자 역할은 분명 이 짐을 덜어내고자 하는 노력일 것이다. (그 방법으로는) 현재 존재하는 것이 과거에도 반드시 그러했던 것이 아니므로 미래에도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역사학자의 몫이다.” 역사는 어떤 새로운 행동에 의미가 부여되고 다수가 그 행동을 반복할 때 비로소 바뀝니다. 역사는 인류가 의미를 찾고, 의미에 살고, 의미 핵심을 후대에 전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파가 숨진 현장에서 집으로 돌아온 몬태그는 다음날 아내에게 어젯밤 일을 이야기합니다. “책 속에는 뭔가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게 들어 있어. 그 여자가 불타는 집 속에서도 빠져나오지 않고 남아 있게 만드는, 분명히 뭐가 있어. 그저 괜히 불타는 집에 남아 있었을 리가 없어.” 하지만 그의 아내 답변은 시큰둥합니다. “노파의 정신이 이상한 거예요.” 몬태그는 전날 밤 일을 평생 잊을 수 없을 지경인데, 아내는 별일 아닌 듯 대답합니다. 몬태그는 아내가 답답합니다. 



사실상 타인에 대한 관심과 공감능력이 부족하면 편견이 커지기 마련입니다. 공감능력은 내가 상대방 감정 안으로 들어가 그가 느끼는 고통을 나도 느끼는 일일 뿐 아니라, 자신 고정관념을 돌아보고 바꿀 계기가 됩니다. 다른 사람 상황을 단순히 그 사람 탓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구조와 연관 지어 더 넓고 더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 생각의 폭이 넓혀져 타인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게 됩니다. 특히 공감능력은 개인적인 능력일 뿐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체가 함께해야 할 중요한 역할입니다. 



노파가 죽은 다음날 몬태그가 오랜 시간 출근하지 않자 방화서 서장이 몬태그 집으로 찾아옵니다. 서장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말합니다. “방화수라면 누구나 한 번씩 겪게 되지. 도대체 이 일을 왜 하는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무척이나 회의가 생기지. 우리 직업의 내력도 궁금해지고. 이제 내가 얘기해 주겠네. 20세기가 막 동틀 무렵이었지. 또 라디오, 텔레비전. 그때부터 모든 것은 엄청나게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네. 그 때문에 모든 것은 갈수록 단순해졌네. 한때는 책이란 것도 이곳저곳 모든 사람에게 대접받았지. 경제적 부담이 적기도 하고. 세상은 아직 여러모로 여유가 많았으니까. 그런데 갈수록 인구가 늘고, 대중 규모도 커지고, 따라서 대중 매체도 변화하기 시작했네. 인구가 두 배, 세 배, 네 배로 계속 늘어났지. 영화와 라디오, 텔레비전, 잡지, 책들이 점점 단순하고 말초적으로 일회용 비슷하게 전락하기 시작했네.”



문화비평가 마셜 매클루언(1911~1989)은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지적하며, 미디어가 이데올로기 장치로 이용되어 가족이나 학교, 교회와 더불어 국가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질서에 복종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이데올로기란 사람들 믿음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사상을 지칭합니다. 권력 집단은 이데올로기를 통해 사회에서 떠도는 지배적인 생각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이데올로기는 지배 집단 이해를 감추거나 정당화하는 데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철도 노사분규 관련 뉴스는 파업하는 노동자들보다는 정부와 기업 편을 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노동자로서 그들을 응원하기보다 내일 아침 출근길의 불편함부터 떠올리게 됩니다. 이렇게 미디어는 개인 생각과 행동을 크게 좌우할 수 있습니다.
















소설 속 방화서 서장은 사회 혼란을 일으키는 일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며 말을 이어갑니다. “어떤 사람이 정치적으로 불행해지는 걸 바라지 않는다면 양면을 가진 질문을 해서 그 사람을 걱정하게 만들지 말고 대답이 하나만 나올 수 있는 질문만 던지라고. 물론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게 제일 낫지.” 서장은 이러한 말들을 남기고 몬태그 집을 떠납니다. 



방화서 서장은 양면을 가진 질문이 사회에 틈과 균열을 만들어 변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습니다. 사회 변혁은 누군가 엄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실천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틈과 균열 속에서 우연히 등장하고, 그 국면을 놓치지 않으면서 치열한 의지로 공감대를 확산하여 사회를 변혁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현실적으로 평소에 필요한 일은 스스로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왜?’라고 질문하고, 당연하게 느끼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어느 순간 가까운 사람들의 생활이 바뀌고, 바로 거기서부터 사회 변혁이 시작됩니다.



다음날 몬태그는 체념한 듯 책 한 권을 들고 방화서로 출근하여 책을 서장에게 넘겨줍니다. 방화서 서장은 책을 받자마자 불태웁니다. 그때 방화서에 경보기가 울립니다. 몬태그와 서장을 포함한 다수 방화수가 차의 사이렌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현장에 도착하는데, 그 집은 바로 몬태그의 집이었습니다. 어제 만난 아내의 동네 친구들이 몬태그의 집을 책 보유 혐의로 신고한 것입니다. 집은 책과 함께 타올랐습니다. 몬태그는 서장과 감정적으로 심하게 충돌하게 되고 서장을 방화기로 살해한 후 도망치는 신세가 됩니다.



이후 소설은 계속 이어지지만, 이제 우리는 작가가 말하고 싶은 뜻을 이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설 속 가상사회뿐 아니라 우리 사회 역시 기술 발전으로 세계 어디에 있는 누군가와 손쉽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침묵하며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지금 이 세상은 모든 사람이 골고루 존중받지도 못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채 주어진 길만이 최선이라 여기거나, 그 길이 어쩔 수 없는 차선책이라 여깁니다. 



누구나 의식적으로 의도하지 않으면, 생각은 패턴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편하게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일이 중요할 때도 많지만, 느끼고 사고하고 상상하는 방식을 바꾸면, 익숙한 일도 낯설게 보이고, 놓치고 있는 더 소중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 세상에 대해 아는 것과 앞으로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우리 기억과 우리가 무엇에 집착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단 기억이 잘못되었다면? 그리고 그 집착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우리 기억은 단편적이기에, 과거도 현재와 비슷했으리라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앞으로의 세상은 단순히 현재의 연장선상이 아니라, 현재와 달랐던 과거를 투영한 새로운 미래일 수 있습니다.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우리 능력은 어떤 전후 맥락에서 그 어려움을 보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는 관점을 바꾸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한때 가장 중요하게 보였던 일이 갑자기 더 이상 주목받지 못할 수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현상에 의미를 부여할 때 암묵적인 가정에 의존하는데, 그 가정은 집단 기억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집단 기억은 우리가 다르게 느끼고 생각하는데 걸림돌이 됩니다. 집단 기억은 주로 과거 믿음을 재확인하고 강화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현상을 다르게 생각하기 위해 집단 기억에 낯선 과거를 추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과거의 낯섦이 부각된다면 현재의 일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천성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우리 그대로의 인간이 될 뿐입니다. 사회학자 윌리엄 아이작 토머스(1863~1947)가 제시한 이른바 ‘토머스 정리’(Thomas theorem)가 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어떤 상황을 현실로 정의한다면, 결과적으로 현실이 된다.” 우리가 믿는다면, 그러한 믿음에 따른 결과만큼은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의식을 넓히고 인식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같은 실수를 반복할 가능성은 상당히 줄어들 것입니다. 우리 미래는 소설 『화씨 451』에 나온 미래와 달라질 수 있으며,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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