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과제는 다양한 가운데 통일을, 물질 속에서는 정신을, 그리고 정신 속에서 물질을 인정하는 것이며, 반대와 모순이 합쳐져 융화와 총합을 발견하여 최고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모두 스피노자 사상의 내부구조를 이루는 부분이다.”

 

 

1. 의지는 자유가 아니라 애초 존재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신체와 정신 차이를 없애려고 시도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의식이 되었건 혹은 무의식이 되었건 감각되지 않는 것은 신체에서 일어날 수 없다. 감정은 신체 전체의 부분이며 순환계통, 호흡계통, 소화계통에 있어서의 전체 변화다. 관념 또한 신체적 변화와 함께 어떤 유기적 과정의 부분을 이루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사물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기 때문에 소유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사물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사물을 원하지 않을 수 없기에 소유하려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로운 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의 욕구가 본능을 규정하고, 본능이 욕망을 규정하며, 욕망이 사고와 행위를 규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데, 자기 의욕이나 욕망을 의식하고 있으나 소망이나 욕망을 이끄는 원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의지는 돌멩이가 공간을 날아갈 때 스스로 궤적을 자유롭게 결정하고, 낙하 장소와 시간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 같다.”

 

 

2. 스피노자는 지금까지 지구상에 살았던 무신론자 중 가장 불경한 자!


우리 인간은 모든 사건이 인간 필요에 도움되도록 기획되어 있다고 상상한다. 하지만 이점은 우리 사고방식 대부분이 그렇듯 인간 중심의 망상이다. 철학에서 최대 오류 근원은 인간다운 목적, 표준, 기호를 객관적 우주 속에 투사하는 데 있다. 여기서 우리 ‘악’의 문제가 생긴다. 신이 우리 선악을 초월하고 있다고 욥에게 준 교훈을 우리는 잊고, 인생의 악을 신의 인자함과 조화시키려고 애쓴다. 선과 악은 인간 혹은 개인적인 취미나 목적에나 관계 있으며 우주에 대해서는 타당성이 없다.

 

 

자연 안에는, 우리에게 우스꽝스럽고 부조리하게 또는 나쁘게 보이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모두 우리가 사물을 단지 부분적으로만 알고 전체로서 자연 질서에 전혀 무지하기 때문이며, 모든 것이 우리 자신 이성 명령에 따라 정돈될 것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이성이 악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자연 질서 및 법칙에 관해서 악이 아니라, 분리된 우리 자신의 본성 법칙에서만 악인 것이다. 선과 악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동일한 사물이 동시에 선도 되고 악도 되며, 선도 악도 아닌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악과 선은 선입견이며, 영원한 실재는 그것을 시인할 수 없는 것이다. 세계는 무한자의 모든 본성을 예증하지, 단순히 인간의 특수한 이상만을 예증하지 않는다.

 

 

인간을 약하게 하는 도덕 체계는 무가치한 것이다. 덕의 기초는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노력이며, 행복은 인간이 자기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데 있다. 오히려 겸손은 야심가의 위선이거나 노예의 비겁이거나 그 어느 쪽이든 결핍을 의미하며, 모든 덕은 능력과 힘의 형태다. 따라서 참회는 덕이라기보다 결함이다. 참회하는 사람은 이중으로 불행하며 이중으로 약하다.”

 

 

스피노자가 죽은 지 200년 후 그의 동상 건립식 기념사 맺은 말은 다음과 같았다. “아마 여기서, 신의 참다운 모습을 가장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3. 상상하라!


“일상 생활에서 모든 일이 공허하고 무익하다는 것을 경험한 후 내가 두려워한 것, 혹은 나를 두렵게 한 모든 것은 결국 감동되지 않는 한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최대의 선한 것은 마음이 자연 전체와 공유하는 통일된 지식이다. 마음은 알면 알수록 자기 힘과 자연 질서를 더욱 잘 이해하고, 더욱 자신을 잘 지도하고 명령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마음은 자연 질서를 이해하면 할수록 더욱 쉽게 자기를 무용한 사물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지식만이 힘이며, 자유다. 지식 추구와 지성의 기쁨만이 영원한 행복이다.

 

 

이해하려는 노력이 덕의 유일한 기초다. 우리는 외부 여러 요인으로 마구 들볶이고 역풍에 교란되는 파도같이 요동하면서도 자신 장래나 운명을 모른다. 우리는 가장 격정적일 때 가장 진정한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가만히 사고할 때 가장 자신답다. 사고란 어떤 중요한 모든 면이 적당한 선천적, 혹은 후천적 반응을 불러일으킬 때까지 기다리는 반응이다. 그래야만 반응은 완전해진다. 격정적일 때 반응은 추진력으로 훌륭하지만 안내인으로서는 위험하다. ‘본능은 개인주의’이기에 전체 행복에는 무관심하며 자신 목적만 성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모든 욕망은 불충분한 관념에서 생기는 경우 격정이며, 충분한 관념에서 생길 때는 덕이다.

 

 

우리는 사고의 도움을 받아 한층 더 넓은 시야를 얻는다. 특히 사고 행위가 결과를 의식에 그리는 상상력의 도움을 받을 때 더욱 그렇다. 먼 앞날 결과의 상상력이 사고력에서 활동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이성적 행동에 상상이라고 부르는 투사된 기억을 방해하는 것은 더 훨씬 생생한 현재의 감각이다. 그렇기에 상상력으로 우리는 경험을 선견(先見)으로 바꾸고 미래의 창조자가 되어 과거의 노예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정서란 정서적으로 유효한 자극에 대한 신체의 움직임과 변화다. '정서'는 타인이 눈치 챌 수 있는 얼굴 표정과 목소리, 특정 행동의 변화 일 수도 있지만, 심장 박동과 호르몬 등 신체 내부의 변화일 수도 있다. 한편 '느낌'은 뇌 속에서 일어나는 사적인 현상이다. 정서는 몸이라는 무대 위에서 연기한다. 한편 느낌의 무대는 마음이다. 긴장된 근육, 심장 박동, 호흡기, 소화기 등 신체 구성 요소의 특정 상태인 감정이 바로 느낌을 구성하는 지각의 내용이다. 우리는 신체 상태를 ‘복합적인’ 형태로 경험한다. 활력, 피로, 불쾌 등의 느낌이다. 분명 우리는 혈중 포도당 농도가 하한선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경험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결과를 빠르게 경험하여, 예를 들면 근육이 말을 잘 듣지 않을 때면 우리는 피로를 느낀다. 느낌을 형성하는 필수 내용은 특정 신체 상태의 지도다. 느낌의 기질은 신체 상태를 지도화하는 한 무리의 신경 패턴이며, 그것을 통한 신체 상태의 심상이다. 느낌의 본질은 신체 내부와 신체 특정 상태에 대한 관념이다."

 

 

"정서 상태가 먼저 오고 느낌이 그 뒤를 따른다는 점은 사람이 행동하기 전 인식하는 것보다 무의식이 먼저 발현된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신경생리학자들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것이 애초 없다고 주장한다. 자유의지뿐 아니라 자아라는 개념도 물리적 뇌 신경의 착각이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행동에 대한 모든 결정을 스스로 내리는 ‘자아’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계속해서 착각한다. 이 믿음은 떨쳐내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하고 압도적인 환상이다.”<스피노자의 뇌>(사이언스북, 2007)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3-15 1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15 1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