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신화나 환상은 그것이 등장한 물질적 환경 제약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도 그것은 짐짓 객관적인 진리인 체하면서, 비참한 상황 속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실현해내는 존재로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신화의 이러한 기만적인 성격으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의 본성을 잘못 해석하고, 세계 안에서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오해하게 된다. 자신과 타인의 힘이 미치는 범위는 물론 자신과 상대방 행위가 가져올 결과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바꾸라고 호소하지 않았다. 마음의 변화란 단지 환상을 다른 환상으로 대체하는 것일 뿐이다.

 

 

마르크스는 누구에게나 불변의 보편적 자연권과 양심의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들을 자기방어적인 자유주의 환상이라는 이유로 단호하게 거부한다. 도덕적, 정치적, 경제적 이론과 이상은 그것들이 출현한 사회 조건이 변하면 함께 변한다. 그중 어느 하나라도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그 요소들이 속해 있는 질서 - 이 경우에는 자본주의 질서 -가 영원하다고 믿는 오류를 낳을 수 있다. 18세기 이래 이상주의적 박애주의들의 윤리적, 심리학적 주장에는 줄곧 이러한 오류가 깔려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자유주의자와 공리주의자 가설을 경멸하고 혐오스러워했다. 자유주의자와 공리주의자는 모든 사람 이해관계가 궁극적으로 동일하고 또한 지금까지 언제나 동일했기에 사람들이 이해와 선의, 박애라는 원칙을 지킨다면 모든 이가 만족스러운 공통의 합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악한 형태의 위선이며 자기기만이다.

 

 

마르크스가 서명한 성명서나 선언문, 행동강령에는 도덕적 진보, 영원한 정의, 인간 평등, 개인이나 민족의 권리, 양심의 자유, 문명을 위한 투쟁 등의 문구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는 이와 같은 문구들이 일고의 가치도 없으며 사고 혼란과 행동의 비효율성을 조장하는 허구라고 보았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박애주의자들은 겉으로는 진지해 보였지만, 감정의 가면 뒤에는 반동과 타협하여 근본적인 욕망을 숨기고 있었다. 또 그들은 혁명으로 인해 자신들 안락함과 특권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판단했다.

 

 

마르크스가 추구한 것은 새로움이 아니라 진리였다. 다른 사람들 저서에서 진리를 발견하면 그는 자신이 새로 종합한 이론 속에 그것을 결합하려고 애썼다. 그의 결과물에서 독창적인 것은 어느 하나의 구성요소가 아니고 중심 가설이다. 중심 가설이 각 구성요소를 나머지 모든 구성요소들과 결합됨으로써, 부분들은 단일한 체계의 전체 안에서 전제와 결론으로 연결되어 서로를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방대한 양의 자료를 면밀히 검토해 그중 옳고 독창적이며 중요해 보이는 것을 전부 추려낸 다음, 그 자료를 근거로 사회를 분석하는 새로운 학설을 만들어 냈다. 그것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한 기본 원리들을 포괄하면서도 상세하고 현실성 있게 결합한 비범함에 있다.

 

 

마르크스는 자신 학설을 통해 인간사유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그의 학설이 출현한 후에는 그 어떤 것도 결코 전과 동일한 기준에 따라 이야기될 수 없다."

 

 

○  헤겔의 절대정신과 포이어바흐의 유물론

 

 

“헤겔은 역사를 과학적 방법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 역사에 과학적 방법을 적용하면 동일한 현상이나 특징들의 동일한 결합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규직적으로 되풀이된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만 성공적으로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각 시대는 이전 시대들로부터 새로운 무엇인가를 물려받는다. 그런 이유로 각 시대는 그 이전 어떤 시대와도 다르다. 역사 발전의 원리는 갈릴레오와 뉴턴 이론의 토대인 규칙적인 원리를 배제한다. 따라서 변화 자체만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특정하고 유일무이한 변화의 형태와 방향까지도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떤 동적 요소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헤겔은 역사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뚜렷이 구분되는 단계를 거치는 이념 혹은 정신이 발전 과정의 동기이자 동적 요소라고 말했다. 한 시대의 문화적 현상이라든가 한 시대를 구성하는 사건의 특정한 원형은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인격의 표현인 것이다. 이렇듯 한 시대의 단일한 특성은 전체적인 시야의 표현이기도 하다. 특수한 것, 구체적인, 분화된 것, 개별적인 것 속에서 보편적인 것의 가장 생생한 표현을 찾으려는 이러한 점이 독일 역사주의의 독특한 유산이다. 헤겔은 하나의 문화적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유와 행위는 그 시기 모든 현상에서 드러나는 동일한 정신, 즉 절대 정신이 그 내부에서 활동함으로써 결정된다고 단언했다.

 


철학사는 이러한 자기의식의 성장 역사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절대 정신은 자신 활동을 의식하게 된다. 인류사 자체는 절대 정신이 자기의식의 성장 과정 속에서 발전하는 이야기다. 모든 역사는 사유의 역사, 즉 철학사다. 철학사는 자기의식에 대한 깨달음을 가리키는 다른 의미일 뿐이다. 절대 정신은 모든 것을 구성하는 실재이므로, 모든 진정한 발전은 절대 정신의 발전이다. 따라서 사회에 호의적인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비판주의다. 진정한 의미의 혁명은 언제나 절대 절신의 영역에서 얻어진다. 프랑스 혁명은 단두대가 사용되기 이전 철학자들이 세계에 대한 인간 의식을 변화시켰을 이미 완성된 셈이다.

 


반면 포이어바흐는 역사 원동력이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 조건의 총합이라고 선언했다. 물질적 조건은 특정 시기에 사람들의 사유와 행위를 특정한 형태로 결정한다. 하지만 사람들을 지상에서 자신 불행한 삶에 대한 보답으로 차후에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그들 나름의 비물질적인 이상 세계 - 무의식적이기는 하지만 허구인 -에서 위안을 구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지상에서는 갖고 있지는 못한 모든 것, 즉 정의와 조화, 질서, 선, 통일, 영원 등은 초월적인 세계의 초월적 속성들로 되어 버리고, 그들은 오직 이 초월적인 세계만 진짜라고 하면서 숭배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환상을 폭로하고자 한다면, 심리적으로 그러한 환상을 만들어 낸 물질적 불균형의 관점에서 분석해야 한다.

 


인류사는 물질적 환경이 사회 내의 인간들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친 역사다. 포이어바흐는 자신의 유물론에서 모든 ‘이데올로기’는 종교적인 것이든 세속적인 것이든 간에 흔히 현실의 불행에 대한 이상적 보상을 제공하려는 시도이고 따라서 불행의 존재를 폭로하기도 하고 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고 정의했다.”

 

 

○  역사의식

 


“마르크스는 프루동 등 프랑스 사회주의 작가들과 애덤 스미스, 리카도 등 영국 경제학자들의 정치적 현실주의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의 문학작품과 경제이론에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역사의식이 결여되었기에 얄팍한 절충주의에 쉽게 빠져 버렸을 뿐 아니라, 아무런 지적 불안감조차 없이 눈에 띄게 무책임한 태도로 자신 사상 체계를 수정하고 내용을 첨가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당시 고전파 경제학들이 주장하듯 정치경제학의 범주들이 모든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유효하다는 가정은 그가 보기에 다른 무엇보다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모든 시대는 자기 고유의 개념과 범주들을 통해서만 분석될 수 있고 자기 고유의 사회경제적 구조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던 데서 비롯된 것이다. 문제는 무엇이 일어나기를 바랄 것인가가 아니라 역사가 무엇이 일어나도록 허용할 것인가, 현재 어떤 경향들이 사멸하고, 어떤 경향들이 역사 발전에 기여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로버트 오언은 타고난 몽상가이며, 프루동은 늑대의 탈을 쓴 양, 즉 변장한 감상적 쁘띠 부르주아 관념론자들 중 어느 하나에 속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들의 이상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달성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적, 자본주의 힘을 근본적으로 잘못 평가하고 있었다. 그들이 고안해낸 점진적이고 비혁명적인 전술은 바로 그들의 이상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였다.

 


프루동이 사회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역사적이 아니라 도덕적이라는 것, 프루동의 창찬과 비난이 자기만의 절대적인 윤리 기준에 직접적인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 프루동이 제도와 체계의 역사적 중요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점을 마르크스는 분명하게 알았다. 마르크스는 프루동을 단지 또 한 명의 속물적인 프랑스 도덕가로, 산업화에 희생된 쁘띠 부르주아의 사회적 이상에 대한 의식적 내지는 무의식적 옹호자로 보았다. 결론적으로 마르크스는 프루동이 정서적으로 체제 자체에 매여 있기에, 체제 자체는 파괴하지 않은 채 현존 체제가 당면한 악습들만 제거하고 싶어 한다고 비난했다.

 


마르크스는 당시 대다수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들과 달리 인간의 생활조건이 더 이상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인간에 의한 자연 정복이라는 관점에서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실제 생산자인 노동자 대중에 대한 착취 증가와 노동자 대중의 몰락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었다.

 


지금까지 역사에서는 대다수 인간의 행복이나 자유가 계속 증가하는 방향으로 꾸준히 움직인 적은 전혀 없었다. 인류가 모든 잠재력을 최종적으로 조화롭게 실현하는 데 이르는 길은 수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소외 증가로 점철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한 인간 진보의 모순적 성격을 뜻한다.”

 

 

○  영구불변의 참된 진리는 존재하는가?

 

 

“마르크스는 헤겔의 절대 정신이 궁극적으로 ‘힘’에 관한 신화를 설명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즉 신화란 인간 내면적 활동의 결과물이며, 외재적인 원인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신화는 인간 노동의 산물인 것을 마치 자립적인 외적 대상이나 힘인 듯이 보이도록 하는 데서 생겨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반면 마르크스는 인간을 역사 발전의 핵심 요소로 보았다. 인간이란 구원 등과 같은 어떤 단일한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성 원리에 따라 인간적 능력 전체의 조화로운 실현이라는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인간은 이러한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변화하며, 그 결과 어떤 집단이나 세대 혹은 문명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결정하고 설명하게 된다. 모든 노동과 창조의 핵심인 이러한 끊임없는 자기 변혁은 시간을 초월해 있는 고정된 원리라는든가 불변의 보편적 목적, 인간의 영원불변의 상태 따위의 개념을 불합리한 것으로 만든다.

 


사람들이 처해 있는 현실적인 사회적 위치가 그들 행위를 결정하는 주원인이다. 일단 이것을 알기만 하면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특수한 개인적 동기와 감정들, 이를테면 그들이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 관대한가 인색한가, 현명한가 어리석은가, 야심적인가 수수한가 따위 연구는 비교적 무관한 것이 된다. 실로 ‘자연적 경향’이나 불변의 ‘인간 본성’ 운운하는 것은 잘못이다. 인간은 행동의 이유나 정당성에 관해 생각해 보기 전에 우선 행동부터 한다. 구성원 대부분은 자신들이 주관적 동기에 따라 행동하는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주관적 동기가 무엇이건 간에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한다.

 


마르크스는 이성과 도덕적 선이 결국 승리하게 된다는 믿음이 합리주의 오류 중에서도 가장 오래 되고, 가장 흔하며, 가장 케케묵은 것이며, 모두 바보 천치 같은 주장 내지는 아무 내용도 없는 공허한 말이라고 보았다. 그는 그런 주장의 논리적 근거 밑바탕에는 자본가를 포함해서 어떤 인간이라도 합리적 주장 앞에서는 기꺼이 무릎을 꿇을 뿐 아니라, 상황만 적적하면 어느 때라도 도덕적 원리를 위해 출신이라든가 부 혹은 능력에 따라 자신이 갖게 된 권력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는 더 정의로운 세계를 만드는 데 동참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고 지루할 정도로 되풀이 해서 지적한다. 이러한 믿음을 설교한다는 것은 마르크스에게는 한없이 얼빠진 것이거나, 겁을 집어먹고 언어 유희로 도피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유토피아적 이론을 펴는 것으로 보였다.

 


마르크스 적들은 모두 인간 행위는 궁극적으로 환경과 상관없이 도덕적 특성에 결정된다는 오류에 물들어 있었다. 마르크스는 인간 행위는 그가 어떤 견해를 갖고 있든지 간에 그의 현실적 이해관계, 그의 물질적 상황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인류 대다수가 갖고 있는 의식적 목적은 때때로 정치적, 도덕적, 미적, 정서적 등등의 형태로 위장한 채 아주 자립적이며 객관적이고 공정한 것인 양 제시되자만, 사실은 그러한 목적을 갖고 있는 계급의 현실적인 이해관계와 대립하지 않는다. 그 결과 그들은 마음을 바꾸기만 하면 생활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아주 진지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현대 사상가들이 저지른 가장 심각한 오류다.

 


이러한 오류는 부분적으로 프로테스탄트적 개인주의의 산물이다. 개인은 누구나 행복을 위한 수단을 자기 손에 쥐고 있기에, 신앙과 정력만 있으면 누구나 행복을 얻을 수 있고, 누구나 정신적 혹은 물질적 행복을 성취할 능력을 갖고 있으며, 누군가가 나약하고 불행하다면 그 책임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믿도록 가르쳤다. 이와 반대로 마르크스는 행동의 자유,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 가능성 범위는 행위자가 사회 속에서 차지하는 정확한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옳고 그름, 정의와 부정, 박애주의와 이기주의 등 온갖 개념은 오로지 정신적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핵심에서 벗어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행위, 즉 한 집단의 구성원들 각자가 갖고 있는 주관적 동기와는 무관한 그 지반의 객관적 행위다. 원리와 명분을 내세워 인간을 이끄는 것은 인간에게 헛바람만 불어넣는 것이고, 스스로 자신들이 처해 있는 실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혼돈과 파괴에 빠져들게 되는 상태로 인간을 몰고 가는 것이다. 인간은 물질적 원인들에 의해 무엇인가가 참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일 뿐 그 무언인가가 진리 자체에 의거해서 참이라는 것을 알 수는 없다.

 


삶을 지배하는 법칙들을 알지 못한다면 인간은 그 법칙들과 충돌해 이해 못할 힘의 희생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점과(헤겔 주장), 인간의 존재와 행위는 전체 법칙에 종속되어 있고 자유는 다만 이 법칙의 필연성에 대한 인식일 뿐이라고 말하는 점, 다시 말해 자유는 인간 개인적 혹은 사회적 선택이 그 선택을 완전히 결정짓는 원인에 종속되어 있는 불변적 과정의 한 요소이자 충분한 지식을 가진 외부 관촬자가 원칙적으로 완전히 예측 가능한 불변적 과정의 한 요소라고 말하는 것(마르크스 주장)은 서로 다른 것이다. 마르크스 자신의 진술들은 이 두 개의 선택 중 어느 쪽을 지지하더라도 모두 인용될 수 있다. 명백히 모순되는 이 두 견해를 더욱 대립시키거나 혹은 화해시키려는 시도들이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계속되면서 많은 문헌을 양산해왔으며 그 양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불변의 참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는 명제를 믿는다는 것은 결국 그 부정의 명제 자체가 참된 진리라고 인정하는 것 아닐까? 이러한 모순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 사상은 ‘역사 과정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관념이다’라는 명제를 논박하기 위해 출발했다. 하지만 마르크스 사상은 인간사에 강력한 영향을 미침으로써 스스로의 테제 힘을 약화시켰다. 마르크스 사상은 개인 환경이나 다른 개인들과 맺는 관계에 대해 그때까지 널리 퍼져 있던 인식 변화를 일으켰고, 또 그러한 관계 자체를 변화시켰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마르크스 사상은 인간 행위 방식과 사유 방식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적 힘들 중에서 여전히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 다른 글과 합하는 과정에서 '좋아요'와 '댓글'이 사라졌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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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1-08 2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변증법적 추론으로 진리에 도달하려 한
선구자가 어떤 이들에게는 상종하지 못할
그런 인물로 각인되어 있다는 게 역사철학
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습니다.

8년 만에 다시 읽은 볼라뇨의 <칠레의 밤>
에 피노체트가 칠레의 적들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알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의 기초
를 공부한다는 가설이 참으로 흥미로웠습
니다...

북다이제스터 2018-11-08 22:36   좋아요 0 | URL
저와 같은 느낌이신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겐 너무 파격적이라서 받아들이기 정말 쉽지 않을 이론입니다. ^^

북프리쿠키 2018-11-08 2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원숭이부터 읽고 따라갈께요 북다이제스트님 ㅎㅎ

북다이제스터 2018-11-09 00:21   좋아요 1 | URL
마르크스 넘 좋죠? ^^

AgalmA 2018-11-10 0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유주의자와 공리주의자가 가정한 ‘만족스러운 공통 합의‘를 오류로 본 마르크스조차 ‘프롤레타리아의 (합의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한 오류가 있지요. 그 부분의 문제의식, 보완책을 느낀 포스트 맑시즘이 정신분석을 한껏 끌어들인 계기가 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8-11-10 10:49   좋아요 0 | URL
잘 지내시죠?^^
오랜만에 운동좀 하려 했는데 미세먼지가 장난 아닌 뿌연 아침입니다. ㅠㅠ

제가 보기엔 마르크스 독특함은 ‘합의’의 유사성이 아니라 ‘자유’ ‘공리’ ‘프롤레타리아’에 방점을 둔 차이같습니다.